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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먹히고 먹여주고
2015-05-14 10:25:00

먹고 먹히고 먹여주고

("식탁에서 평화까지: 식맹(食盲)을 넘어 식안(食眼)을 열다", 『통일과 평화』(제6집 2호, 2014.12)의 일부를 수정한 글입니다.)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평화인문학)

 

 

음식이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약 백조 개 가까운 세포들의 집적체이다. 이 세포들은 끝없이 소멸하고 생성된다. 세포들의 순환에 필수적인 것은 에너지의 공급이다. 물, 산소, 음식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유성과 상징성을 담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밥이 몸으로 들어오면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가 열에너지로 바꾸어 생명을 유지하도록 온몸 곳곳으로 보낸다. 밥이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밥이 인간을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밥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려면 세포들이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 세포들의 요구에 응하면서 들어온 밥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남혁이 서양의 속담(“I am what I eat”)을 인용해 지은 책 제목처럼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이다. 철학자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말처럼, 나는 몸의 선행적 주체가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그 원리에 따라 지각하고 경험하는 몸 안에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이다. 이 몸은 생물학적으로 음식에 의존한다. 나는 이미 몸 안에 있으되, 그 몸을 결정하는 것은 음식이다. 나는 내가 먹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이다.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만의 독창적인 사유나 언어는 아니다. 김지하도 진작에 문학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머니의 젖은 우주의 곡식이요, 곡식은 우주의 젖입니다. 우주의 젖과 우주의 곡식을 먹고 사는 사람은 그래서 곧 우주인 것입니다. 우주를 먹고 사는 우주가 곧 사람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가 먹는 음식물입니다.”

 

인간의 생명 현상에 먹는 행위만큼 근본적인 것은 없다. 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식(食)’은 뚜껑(人)과 그릇(良) 모양이 합쳐진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차 ‘사람(人)을 좋게 함(良)’ 또는 ‘사람(人)이 좋아짐(良)’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밥을 먹는 행위만큼 사람을 좋게 하는 일은 또 없다. 먹음으로써 몸이 좋아지고 몸이 좋아지니 마음이 좋아진다. 이런 식으로 ‘먹는 일’, 즉 ‘식사(食事)’는 나를 나로 살아가게 하는 원초적인 일이다.

 

 

볍씨가 인간을 먹는다

 

인간이 밥을 먹는다는 말은 밥이 인간에 의해 먹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밥은 인간에 의해 먹히기만 하는 것일까. 쌀 한 톨은 인간에 의해 먹히는 수단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관점을 바꾸어 쌀의 입장에서 보면 쌀이 인간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 쌀이 우주를 먹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사람은 죽어 한 줌 흙이 된다. 심장이 멎으면 혈액 순환이 중지되고 산소 공급이 끊어지면서 몸들의 유기적 순환이 느슨해진다. 단단하게 얽혀있던 세포들이 해체되어간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고 분해되어 결국은 땅의 일부가 된다. 분해된 몸의 일부는 민들레 뿌리에 흡수되어 꽃잎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 볍씨와 뿌리 안에 스며들어 낱알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볍씨가 받아들이는 에너지 안에는 인간의 몸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땅이 되고 대기가 되고 물이 된 인간을 쌀이 다시 먹는 셈이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인간이 밥을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쌀의 입장에서 보면 쌀이 인간을 먹고 사는 셈이다. 쌀은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다시 인간을 에너지로 받아들여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해나간다. 인간의 몸이 쌀 한 톨이 되고, 여러 손길을 거쳐 밥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쌀도 인간을 먹는다.

 

어디 쌀뿐이던가. 대지의 일부가 된 몸의 일부는 들풀의 에너지가 되고 벼의 뿌리로 들어가고, 볏짚은 다시 소가 먹는다. 들풀이든 볏짚이든 인간이 만든 사료든, 소도 무언가 먹고 물을 마시고 숨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해나간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밥 한 공기가 그렇듯이, 그 유기적인 관계성에서 보면 소 역시 사람의 몸을 생존의 에너지로 삼는 셈이다. 쌀 한 톨 속에 죽은 조상의 몸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죽어 볍씨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소의 일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먹는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소도 사람을 먹는다. 생명은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엮여 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다 주어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밥은 사람이 만든 것 같다. 과자는 공장에서 만든 것 같기도 하고,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볍씨 없이, 태양 없이, 빗물 없이, 대지 없이 농부가 밥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늘의 태양을 받고 빗물을 머금어 나온 밀 없이 과자가 생겨날 수 있을까.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치즈 없이 맛있는 피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간이 먹는 음식은 모두 ‘주어져 있던 것들’로 만들어졌다. 인간이 편안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모양을 바꾸는 등 가공을 좀 했을 뿐이다. 씨를 많이 심고 잘 가꿔서 좀 더 많이 생산할 수는 있지만, 쌀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쌀 비슷한 인공식품을 만든다 해도, 만들기 위한 재료 자체는 어딘가 어떤 형식으로든 주어져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 음식 재료 자체를 창조해낸 것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라고 얻어진 것을 외형만 살짝 가공했을 뿐이다. 다소 종교적인 용어를 쓰자면, 음식은 모두 주어진 ‘선물’이다.

 

기독교 성서에서는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고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기 2,9)고 한다. 신이 먹기 좋은 열매를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이 만들기도 전에, 먹을 음식이 먼저 주어져 있었다는 경험적 사실에 대한 신화적 혹은 신앙적 상상의 표현이다.

 

어찌 음식만 선물이겠는가. 제 아무리 산해진미가 내 앞에 쌓여있어도 그것을 먹고 소화할 수 있을 능력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음식이라는 것도 내가 먹을 수 있을 때에야 음식이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조차 주어졌다는 뜻이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능력도 인간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내가 위장을 만들고 심장을 뛰게 하고 대장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움직이면서 영양분을 소화 흡수하도록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리 안에 ‘던져진’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인간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 것도 세계 ‘안’에 던져진 인간의 실상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이 때 세계는 인간을 둘러 싼 배경이거나 인간에 의해 관찰되는 한 객체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해주는 근원적 구조이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내존재’(內存在)로 현존한다. 세계는 인간에 선행하며, 이미 그렇게 주어져 있다. 이 ‘내존재성(內存在性)’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인간은 음식 안에 던져졌고, 음식 속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식은 생명의 출발이자 수단이고, 모든 이의 생명의 근원이다.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이 땀을 흘리기는 해도, 음식은 땀 흘리기 이전부터 주어져있던 것들이다. 누군가에 의해 독점될 수 없는 원초적 선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는 음식을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지상 목적처럼 간주하는 자세를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복음 4,4, 누가복음 4,4 신명기 8,3) 이러한 본연의 모습을 통찰하고서 음식의 선행적 원리에 어울리도록 겸손하게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종교적인 언어로 정토(淨土)이고 불국토(佛國土)이며 극락(極樂)이자 신국(神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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