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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 사태로 본 국민국가 체제
2015-09-24 16:59:00

 

시리아 난민 사태로 본 국민국가 체제

 

엄한진 (한림대 사회학과)

 

최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시리아 난민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는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 문제이며 대량으로 받아들일 경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난민 수용에 부정적인 진영에서는 일자리 경쟁으로 인한 자국민의 피해나 테러 위험 증대, 재정부담 등을 거론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무슬림 유입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난민 수용의 당위성을 논하는 쪽에서는 인권 보장의 책무, 난민 노동력 활용이 경제에 기여하는 측면 등을 논거로 내세우며, 난민의 배경이 된 중동정세에 유럽과 미국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점도 거론한다.

 

이러한 찬반 입장과 함께 난민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안으로 난민이 발생하는 지역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번 사태의 주된 배경은 IS의 등장으로 시리아 및 이라크의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종식과 정치적 안정이 난민 발생을 막는 방법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는 한번 발생한 지역분쟁이나 정치적 불안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의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팔레스타인 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1978년 내전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분쟁도 북부동맹, 탈레반, 알카에다, 파키스탄, 미국 등 전쟁 세력에 의해 장기화되었다. 시리아 인접국가들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아왔다. 1975년 내전으로 시작된 레바논 분쟁 역시 10여 년의 동족상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정치군사적 개입, 그리고 다시 2006년 이스라엘이 야기한 제2차 레바논 전쟁으로 이어졌다. 탈냉전 시대 초강대국 미국의 헤게모니를 과시했던 1991년 걸프전 이후 경제봉쇄조치로 질식되고, 이후 2003년 미국의 침공과 점령을 계기로 10여 년간 내전 상태에 있는 이라크 역시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이나 정치적 불안정을 낳는다는 점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시리아 난민 사태는 국가 간 경계가 엄격한 현재의 국민국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함축하고 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원했을 뿐.” 이는 터키 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 살짜리 소년 쿠르디의 고모가 난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원망하며 한 말이다. 그러나 이 호소가 무력하고 순진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국가 간 장벽과 이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다. “공짜로 뭐 해달라는 게 아냐. 그저 안전하게 머물렀으면.” 한국 거주 시리아 난민이 이번 사태와 관련된 집회에서 한 이 말이 현실성이 떨어지게 들리는 것도 특히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국가’라는 틀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북한의 경우도 중국이나 남한과의 국경이 지금처럼 견고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큰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브롤터 해협, 지중해, 아드리아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등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와 북미에 위치한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선에서는 지금도 일상적으로 난민 또는 난민이 아닌 일반적인 이주민들의 불법 이주가 시도되고 있다. 일부는 진입에 성공하고 일부는 목숨을 잃는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현 세계의 과도한 불평등 구조와 함께 국민국가 체제가 지닌 불합리성을 매일 증언해주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현대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초국적 자본에게 국경은 무력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자국 산업의 보호, 자국 주권의 보호, 자국민의 보호 등 최소한의 국가의 역할마저 자유시장 경제를 침해한다며 공격당하고 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생존을 다투는 사람들의 이주의 자유는 극도로 미약한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러한 불합리한 장벽이 무력화된 사례는 많이 있다. 여러 차례의 이민의 물결로 형성된 미국뿐 아니라 유럽 역시 난민 등 국제이주민 수용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인도차이나반도 국가들의 공산화 직후 12만 명의 난민을 받았고, 알제리의 독립 이후 1백만 명이 넘는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이 귀환했다. 스페인 내전에 패배한 수십만의 공화파 난민,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동유럽으로부터 수많은 이주민을 받았으며, 2차 대전 직전에는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인 바 있다. 독일 역시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매년 수십 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다. 그 이전에도 2차 대전 종전 이후 수백만의 ‘손님노동자들’(guestworkers)이 독일 경제 재건에 기여한 바가 있다. 이 수백만 명의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사회에 통합되었고 유럽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지금도 유럽 국가들은 매년 시리아가 속해 있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등지로부터 수십만 명의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비하면, 그리고 400만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의 수를 생각하면 최근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가 받기로 한 12만 명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다.

 

심지어 레바논이나 터키 등 현재 시리아 난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국가의 경우 한국에 비해 경제수준이나 정치수준은 떨어져도 자국민이 아닌 이들 난민들에게 자국민에 버금가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시리아 난민에 가장 관대한 나라는 인접국인 터키, 레바논, 요르단 세 나라이다. 이들 국가가 수용한 시리아 난민의 수가 370만 명에 이른다. 200만 명을 수용한 터키의 경우, 이미 시리아 내전 발발 초기부터 시리아 쪽 국경을 개방했다. 물론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난민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체류만 허용된 것이지만 터키인들과 유사하게 의료, 교육 서비스가 제공된다. 수조 원의 경비를 들여 25개의 난민촌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예상할 수 있듯이 난민의 대량 유입은 터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거주하는 레바논 역시 난민들에게 레바논 국민에 버금가는 사회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시리아 난민 사태는 한국의 이주민 문제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은 난민이나 국제이주민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기보다는 독일처럼 외국 사람이 와서 살기에 좋은 매력적인 사회가 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한국 국민조차 인간을 소진시키는 버거운 한국사회를 등지려 한다. 공정무역이 자선이 아니라 선진국 국민들이 부당한 혜택을 받고 있는 불공정한 무역질서를 시정하려는 것이어야 하듯이, 난민의 수용 역시 관용이 아니라 대부분 강대국의 개입에 의해 야기된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으로 난민 지위에 대한 요구는 구걸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의 행사이다. 한국 역시 유럽, 미국 정도는 아니지만 현 세계경제에서 부당한 혜택을 받고 있는 측면이 있고, 다른 지역의 전쟁에 개입해 결과적으로 난민을 야기하는데 관여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그들을 돕는 측면보다는 그들이 한국의 결혼시장 문제, 노동시장 문제를 해결해주는 측면이 강하다. 이 지점에서 난민 수용은 우리에게 배부른 선택이 아니라 책무로 다가온다. 정작 경계해야 할 대상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이지 장기적으로 한 사회를 풍요롭게 해주는 이주민들이 아니다. 난민, 이주노동자, 유학생 등 이주민이 한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과거 미국이, 그리고 이제는 유럽 최고의 외국인 비율을 자랑하는 독일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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