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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협동조합
2013-07-25 16:15:00

 

자본주의와 협동조합

 

주요섭(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실패’는 공공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유럽의 경제성장율 추락이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장기침체 때문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속가능성 자체에 의문부호가 제기되고 있다. 한 마디로 ‘시장포화’ 때문이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편입된 이후, 역설적으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서유럽의 성장을 뒷받침했던 ‘신용’이라는 이름의 ‘부채경제’로도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즉, ‘팔기 위한 생산·소비 시스템’이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더욱 치명적인 것은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존재 이유인 인간사회와 자연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매우 위태롭다는 점이다. 가히 ‘삶·생명의 위기’라 할만하다. 물질적 풍요의 대가는 피폐한 삶과 영혼의 부재로 귀결되었다.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성취했던 한국사회는 그 증거 중 하나이다. 세계최고의 노동시간에 세계최고의 자살률, 거꾸로 세계최저의 출산률은 삶·생명의 위기를 극적으로 증거 한다. 기후붕괴와 해양산성화의 원인이 되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최근 400ppm을 넘어서고, 인류는 지구생태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최후의 경고치를 이미 넘어버렸다.

 

그리고 2013년,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실패의 보완재를 찾기 시작했고 협동조합이 유력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지지자들의 기대대로 저성장시대로 들어간 경제를 살려낼 수 있을까? 실패한 자본주의의 체제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협동조합과 ‘비(非)자본주의의 길’

 

협동조합은 태동에서부터 ‘비(非)자본주의’의 길이었다. 로버트 오언의 협동촌은 물론이거니와 최초의 근대적 협동조합이라고 불리는 로치데일 선구자 협동조합도 종국적인 목표는 자본의 지배로 벗어나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사회혁명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레닌도 몇 가지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협동조합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협동조합은 분명 ‘비자본주의 길’을 가고자했다(‘(反)반자본주의’가 아니다.). ‘팔기 위한 생산·교환·소비’라는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과는 다른 ‘필요의 충족’을 위한 경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로치데일의 식료품점은 팔기 위해서 아니라 “식료품, 의료 등을 분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상품을 취급하기 했으나 물건을 팔아 이윤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물자를 공동으로 구입하고 나누는 것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요컨대 자본주의가 ‘돈벌이 경제’라면, 로치데일의 경제는 ‘살림살이 경제’인 셈이다. 사고파는 ‘상품경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은 나누는 ‘호혜경제’였던 것이다. 자본가들이 ‘돈의 길(money based path)’을 욕망했다면, 협동조합은 ‘삶의 길(life based path)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공동구입과 분배는 자급자족의 생산-소비 협동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ICA의 협동조합의 정의가 이야기하는 “조합원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s)의 충족”이란 바로 그것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것이다. 당장의 경제적 필요의 충족도 중요하나,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구조와 문화로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삶, 온전한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체제 전환: 고립과 체제내화를 넘어서

 

로치데일 선구자 협동조합은 성장을 거듭했다. 1844년 28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한 선구자 협동조합은 10년 동안 조합원은 50배, 출자금 총액은 약 400배, 공급액은 약 63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발전을 거듭하던 선구자 협동조합도 야심찬 목표였던 생산협동조합이 실패로 끝나면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비자본주의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먼 훗날 일본의 협동조합 이론가 이와미 다카시는 이를 공리주의적 협동조합운동이라고 평가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서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경제생활의 일부를 분야별, 기능별로 조합화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의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하위시스템으로써 체제 내화되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시스템이란 역학적·기계적 시스템이 아니라 생물학적 시스템이다. ‘살아있는 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새롭게 부활한 협동조합 열풍은 체제적 대안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 조건은 무엇일까? 협동촌과 로치데일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이러하다. ‘고립’의 한계와 ‘일부’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기, 즉 ‘새로운 생태계 만들기’이다. 그것이 체제적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일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다른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오언의 협동촌처럼 세상과 고립되어 딴 세상을 살아서는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소나무 숲에서 떡갈나무 숲으로, 새로운 생태계 만들기는 이를테면 ‘숲의 천이(遷移)’와 같다.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하여 소나무와 공존하되, 어느 날 아침 문득 숲의 주인공이 된 떡갈나무 숲을 발견하는.

 

서유럽의 대안운동가들은 이런 방식의 체제 전환 과정을 ‘진화적 재구성(evolutionary re-structuring)’이라고 말한다. 주식회사와 돈벌이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편입되지 않고, 공존하되 협동조합과 호혜시장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새로운 시스템이 형성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경제의 위기, 삶의 위기는 엄밀하게 말해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하나가 아니다. 시장경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보편적인 경제형태 중 하나였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근대 유럽에서 나타난 특수한 현상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시장은 생산과 소비가 만나는 장이다. 그런데 자본은 그들 사이에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약탈적으로 이익을 취한다. 이때 거대자본이 행사하는 경제적 힘의 원천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끼어들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끼어들어 양쪽의 관계를 끊는 동시에 양자의 사정을 파악해 양쪽 모두로부터 이익을 챙긴다. 두 번째는 ‘자금력’, 엄청난 현금과 신용을 동원해서 생산자를 제압한다. 이렇게 해서 자본은 결국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끊고 각개 격파함으로써 사람과 자연을 지배하고 경제적 부를 독점적으로 축적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체제전환이란 교환의 마당으로써 시장경제를 인정하되 시장의 목적과 작동원리와 핵심 주체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로치데일 선구자 협동조합이 실패했던 생산협동조합을 되살리고, ‘생산-소비 협동시스템’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완결적인 시스템 혹은 하나의 생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보다 거시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과 호혜적 시장경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호혜적 시장경제’. 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주식회사,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업집단 혹은 재벌들이 배타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시장의 ‘통수권자’들이 있다.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당 혹은 국가가 그들이다. 공산당 혹은 국가가 시장의 규칙을 만들고 독점적 심판권을 행사한다. 중국이 표방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필요의 경제가 아니라 돈벌이 경제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경제규모를 키우고 돈을 벌어서 사회적 필요를 시킨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이 주인공이 되는 시장경제는 무엇일까? 돈벌이 보다는 필요와 열망의 충족과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시장은 불가능할까? 로치데일의 그것처럼 생활물자를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장터를 설계하고 그것을 운영할 여러 주체들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 존재한다면 그것을 일러 ‘협동적 시장경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 폴라니와 가라타니 고진을 빌어 말하면 ‘호혜적 시장경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혜는 주고받기, 증여와 답례다. 협동조합의 상호부조, 상부상조가 곧 호혜다. 영어로 공동체를 의미하는 community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선물’을 뜻하는 munus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공동체의 원리가 곧 ‘(선물)주고받기’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주고받기 과정에서 마음과 인격이 함께 오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혜시장이란 호혜의 원리로 운영되는 시장을 의미할 것이고 그 주체는 ‘상부상조 하는 사람들’, ‘주고받는 사람들’이 된다. 겉은 돈이 오가는 사고파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내놓고 또 다른 물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 생협에서 생산자들의 수고에 감사하며 농산물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호혜적 시장경제의 주인공들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주식회사가 주인공이고, 중국 같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는 공기업이 대장이라면, ‘호혜적 시장경제’의 꽃은 바로 협동조합인 것이다.

 

호혜시장은 이미 우리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전국의 경향각지에 개설된 수많은 생협 매장들과 새롭게 떠오르는 로컬푸드와 농민장터들, 그리고 녹색가게들이 그것이다. 온라인에서 이용자들이 직접 만나 물품거래나 금융거래를 하는 p2p장터나 p2p렌딩(lending)이나 렛츠시스템이나 지역화폐가 곧 호혜시장인 것이다.

 

호혜시장, 아직은 막 자리기 시작한 떡갈나무 군집처럼 미미하다. 그러나 이내 여기저기 마을과 지역에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기업들과 공동체들과 사회복지시설과 비영리사업체들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호혜의 네트워크 혹은 플랫폼(마당)이 형성되고 있다. 천이과정의 나무들처럼 자본주의 시장과 구별되나 함께 공존하고 동시에 경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 협동조합의 집합으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소생태계로써 그러하다. 그리고 때가 되고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다른 세계가 열린다.

 

물론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나아가 주식회사 보다 더욱 경쟁력 있는 경제조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체제 전환의 비전과 함께 가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주식회사가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호혜적 시장경제에서 협동조합이 해주어야 한다. 시장을 바꾸는 협동조합 말이다. 그러므로 크고 강한 협동조합도 필요하지만, 살림살이경제와 호혜시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작지만 서로 긴밀히 연결된 수많은 풀뿌리 협동조합들이 더욱 절실하다.

 

협동조합 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자활사업과 사회적 기업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협동조합은 이들과 다르다. 로치데일 이후 170여년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간단치 않은 역사가 있다. 1920년대에 일제강점기에 시작되고 1960년대 이후 원주, 부산, 홍성 등지에서 부활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협동조합 열풍이 한 번의 바람이 아니라, 도도한 물결이 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본래 정신과 열망, 그리고 비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어지는 오늘, 한국의 협동조합 담론과 실천은 사업적 성공 못지않게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 모색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2013년 6월, 한국의 협동조합 신드롬은 경제 활성화 이상의 사회경제적 대전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월간 아젠다 2013년 7월호(통권2호)에 실린 글을 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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