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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교황 프란치스코와 자본주의 넘기 (주요섭)
2014-11-07 14:53: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자본주의 넘기

 

글 주요섭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교황 프란치스코가 ‘화제’다. 아니 ‘화두’다. 가톨릭 역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이기도 하고,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3년 올해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다.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 때문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규제가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다”, “경제불평등은 살인자와 같다”며 자본주의의 폐해를 매섭게 질타한다. 첫 해외 방문지 브라질에서 교황은 100만 인파를 향해 “불평등과 부정부패를 일상화하고 있는 야만적 자본주의와 가진 자의 횡포에 맞서 싸우라”고 호소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어록은 최근 한국 신문에서도 단골 소재가 되었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이 교황의 권고문서 「복음의 기쁨」을 주제로 칼럼을 쓰고, 한겨레신문에 소개된 “보이지 않는 현현”이란 제목의 기자 칼럼이 눈에 들어온다. 철도 파업 등 한국의 현실과 결부되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교황의 말씀이 실감나게 인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교황 프란치스코의 자본주의 비판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물론 마르크시즘이나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반反자본주의’나 ‘비非자본주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미국의 석학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론’과도 다르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똑같지만, 라이시는 시민의 눈으로 말하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본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인간 안에 심어진 신적인 어떤 씨앗”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 즉 인간의 존엄과 신성이 무너지고 있는 ‘사태’를 아프게 바라보고 있는 예수회 수사의 단호한 신앙고백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자본주의 비판의 정체는 ‘초월적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니다. 돈도 물질도 삶의 일부다. 문제는 자본이 왕이 되고 신이 되어 삶과 영혼과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넘기’는 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과 자본 중심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시스템과 문명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안의 자본주의 넘기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이루어지는 전 사회적 자본주의 넘기다. ‘내재적 초월’이라고 말하는 그것, 인간 안에 내재한 신성神性, 즉 하느님 마음의 사회적 실현이다.

 

 

성인 프란치스코의 물질주의 넘기

 

가톨릭 역사상 교황의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붙인 것은 2013년 3월에 선출된 현 교황이 처음이다. 물론 이때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성인’이며, ‘생태주의 성인’으로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년~1226년 10월 3일)’를 말한다. 1,200여 년 전 프란치스코의 삶과 정신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메시지를 통해 되살아난다. 자본주의 넘기의 원형은 이미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탈리아 출신의 이 수도사는 13세기 초에 작은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해 세속화된 로마 교회의 개혁을 이끈 교회 개혁가였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넘어서고자 하는 “돈이 왕 행세를 하는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을 삶으로 극복한 교회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 무모할 정도로 쾌락을 쫓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투옥된다. 석방된 후 그는 오랜 동안 중병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딴 사람이 되어갔다. 삶의 전환이다. 예수를 따라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비웠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를 말에서 뛰어내려 끌어안을 정도로 변화되었다. 그후 그는 평생을 복음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포목상이었던 부친의 유산을 포기하며 오로지 하느님 사람으로써의 삶에 전념한다. 어느 날 그는 황폐한 성당에서 계시를 듣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이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사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는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고 “가난과 결혼”함을 선언한다. 아들에 분노한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자, 사람들 앞에서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짐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미사에 참례하던 어느 날 하늘로부터 마태복음의 말씀이 들린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 프란치스코가 열한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청빈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가 첫 발을 내딛게 되었고, 그 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작은형제회”였다.

 

성인 프란치스코의 삶은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었다. 그리고 예수로 사는 이들의 수도공동체가 작은형제회였다. 이 명칭이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y)’과 ‘형제애(fraternity)’가 그것이다.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노동이 생계 유지의 일차적인 수단이 되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들의 맏형인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속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또한 형제애는 공동체를 넘어서, 신분과 계급과 남녀노소를 넘어서 모든 이에게로,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기독교인이든 이교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원수나 강도, 동성애자마저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과의 하나됨으로 깊고 넓어진다. 바로 이 우주적인 형제애, 즉 하느님의 세계에서 만인萬人/만물萬物이 모두 한 가족이라는 깨달음이 성인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형제애의 본질이다.

 

그렇다. 성인 프란치스코의 초超물질주의, 즉 ‘물질주의 넘기’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던 것이다. 초물질주의가 행위의 윤리적 동기가 되어 ‘빈자의 공동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형제애의 결과가 물질주의를 넘어서게 했던 것이다. 만인/만물과의 하나됨이 나병 환자와 이교도와 동성애자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와 나는 둘이 아니다.”라는 각성, 즉 ‘숨겨진 하나됨(전일성/wholeness)’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숨겨진 하나됨과 열망의 공동체

 

ICA(국제협동조합연맹)가 규정한 협동조합의 정의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s)의 충족을 사명으로 한다. ‘필요의 충족’이 말 그대로 필요조건이라면, ‘열망의 충족(정확히 말하면 열망의 실현)’은 협동조합의 충분조건이다. 협동조합 구성원의 꿈과 숨은 바람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적 이익공동체에 불과하다. 그 열망熱望은 뜨거운 바람이기도 하지만, 열망(aspiration)은 영어 표현대로 영혼(spirit)의 간절한 염원이다. 애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생명공동체로의 돌아감, 즉 숨겨진 하나됨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협동촌을 꿈꾸었던 로버트 오언의 열망도 하나됨이었다. 종국적으로 생산자-소비자 코뮌을 목표로 했던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열망도 이를테면 하나됨이었다.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과 부자와 빈자가 서로 돕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생활공동체도 그랬고, 일제 시대 협동운동인 이상촌운동도 그러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원주의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역시 도시와 농촌, 소비자와 생산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이 하나되는 생명공동체를 꿈꾸었다.

 

하나됨의 형제자매애는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을 외면하고 정신만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이 진실의 일부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상대가 없으면 내가 없다. 너와 내가 둘로 나뉘지 않는다. 거룩한 영으로 하나된 마가의 다락방 사람들은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물질을 나눈다. 하나됨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내’ 삶의 전환이 ‘우리’ 삶의 전환으로 확장된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사도행전 2:44-45)

 

 

자매애 혹은 형제애는 윤리가 아니다. 윤리 이전 생명의 원초적 열망이다. 내 안에 있는 ‘숨겨진 하나됨’이 드러난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고백처럼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세계 안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를 묶은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이라는 책 제목이 말하려 하는 것처럼, ‘숨겨진 하나됨’에 대한 깨달음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면, 나의 재산과 소유 역시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너의 것이 된다. 주고받기, 즉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하나됨이란 ‘나’ 없는 전체가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숨겨진 하나됨은 ‘서로살림’으로 구체화된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회개 후 첫 번째 한 일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하나됨에의 열망과 상생相生의 정신을 증거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행전 20:35)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복음 25:40)

 

그렇다. 교황 프란치스코를 인용해 쓴 한겨레신문 국제부 기자의 칼럼 제목처럼 “보이지 않는 것의 현현”이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다. 작은형제회와 수많은 열망의 공동체들은 땅위에 세워진 천국이다. 굶고 있던 형제와 밥을 나눌 때 그곳은 이미 하늘나라가 된다. 일주일에 단 하루 실현되던 하나됨이 일주일 내내 이루어질 때, 그곳은 이미 지상천국이 된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그렇다면, 어떻게 ‘숨겨진 하나됨’을 실현할 것인가? 가능한 일인가? 현실은 하나됨의 실현은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다. ‘단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단절되고, 승자와 패자가 단절되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단절되고, 하늘과 땅이 단절되고,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인간과 자연이 단절된다. 이웃을 외면하고, 길고양이를 외면하고, 요양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외면한다. 1%와 99%로 갈라지고, 20%의 세계와 80%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 자본이 분할 통치를 한다. 자본이 왕이 되는 시스템 아래서 돈이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자본은 씨앗과 지구 식량시스템을 지배하고, 병원과 환자를 지배한다. 자본은 입맛을 지배하고, 시선을 지배하고, 감정을 지배하고, 안방을 지배하고, 감각을 지배한다. 문화재와 휴양림을 지배하고, 웰빙과 힐링을 지배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사고판다는 것, 삶을 지배하고 생명을 지배하고 영혼을 지배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지난 11월 「복음의 기쁨」이란 이름의 권고문을 통해 자본주의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 자본주의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교황은 ‘배제의 경제’, ‘돈의 맹목성’, ‘금융체제의 지배’, ‘폭력을 부르는 불평등’ 등 자본주의 폐해들을 오늘날 세계가 맞닥뜨린 ‘도전 과제’로 꼽았다. 교황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조항을 들면서 이제는 사람을 해치는 경제체제는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암시한다. 양극화와 빈부 격차를 지적하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기만의 법과 규칙을 강제하는 독재체제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우상으로 숭배했던 고대의 ‘황금 송아지’가 오늘의 돈”이라며 자본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통탄해 한다. 교황은 “늙은 노숙자가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건 뉴스가 안 되지만, 주식 시장이 단 2포인트라도 떨어지면 뉴스가 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묻는다. 교황은 탄식한다. “배제된 이들은 우리 사회의 밑바닥도 변방도 소외된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일부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착취를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쫓겼다. 버려져야 할 찌꺼기 취급을 받고 있다”고.

 

요컨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초월적 존엄은 고사하고 삶의 기초적 조건마저도 내팽개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라는 원초적 불공정 시스템과 돈을 신으로 섬기는 물신주의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 용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분명 하늘의 법을 거스르는 죽임의 시스템인 셈이다.

가톨릭의 자본주의 비판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일찍이 120여 년 전인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흔히 ‘노동헌장’이라 불린다.)라는 문서를 통해 산업혁명기 자본가의 탐욕과 빈곤의 참상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한참 세를 넓혀가던 사회주의에 대해서 자연법적 재산권과 무신론의 무지를 근거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약탈적 자본주의의 위세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말 ‘자본가의 탐욕’과 ‘처참한 가난’이라는 「새로운 사태」에서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1991년 바티칸은 「새로운 사태 100주년 기념 회칙」을 발표하고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 처음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공산주의의 몰락 후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사회체제인가, 또 자본주의를 경제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이것이 실제 경제적 정치적 발전의 길을 찾고 있는 제3세계의 국가들에게 제안되어야 할 모형인가?”(100주년 회칙 42절)

 

 

교회의 대답은 복합적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고양하는 한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경제 영역의 자유를 인간과 사회 전체로 일반화하려는 체제라면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의 씨앗을 부정하고 영혼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똑같은 기준으로 현실자본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내재적 초월이다. 밖에서의 초월적 관여가 아니라, 내 안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을 살려야 한다. 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그렇거니와 사회경제적 대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회적 의미의 ‘내재적 초월’, 시민 사회 안에 숨겨진 원초적 연대성을 부활시켜야 한다. 상품시장 아래 보이지 않는 호혜시장을 되살려야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회적 열망의 실현이며, 영성의 인간학적 표현인 우애에 기반한 경제사회질서다.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을 빌려 말하면, ‘자유의 정치경제학’과 ‘평등의 정치경제학’을 넘어 ‘박애의 정치경제학’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장의 성화

 

“교회는 제시할 모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티칸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판적인 입장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1991년 「새로운 사태 100주년 기념 회칙」을 통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야 하지만, 대안적 시스템을 만들고 발전시켜야 할 몫은 교회 밖에 있다.

 

대한민국 변방 어딘가에서 대안적 모형의 싹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장이라는 바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시장을 지배하고 왜곡하고 약탈하는 자본주의, 그렇다면 어떤 시장이냐가 중요하다. 로마 가톨릭은 「100주년 회칙」을 통해 ‘시장경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별 국가들에게 있어서 자유 시장은 재원을 배치하고 다행하게도 욕구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지불 능력이 있는”, 구매력을 가진 욕구에 대해서만 그리고 “시장에 판매될 수 있는”,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재원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러나 시장으로 충족되지 않는 인간 욕구들이 있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고 그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랑과 정의의 엄격한 의무이다.”

 

『화폐 없는 세계는 가능하다』1)라는 책에서는 ‘시장 없는 사회주의’를 대안적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빗대어 말하면 이제 ‘시장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어야 할 듯하다.

 

시장은 장場(field)이다. 바다와 같다. 바닷물 없이 배가 뜰 수가 없다. 해적선이든 유람선이든 말이다. ‘시장 없는 유토피아’란 물 없는 바다와 같다. 상어들이 바다 생태계를 장악하고 약탈과 착취를 구조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다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대양에서, 시끌벅적한 저자거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창조된다. 3퍼밀(0.03%)의 ‘숨겨진 하나됨’이라는 염분이 있다면, 시장은 폭풍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바다가 될 수도 있다. 자본의 독재로부터 시장을 되찾아 와야 한다.

 

시장은 출렁이는 물질생활의 인드라망이다. 주고받기의 광장이다. 시장 어느 구석 좌판 잠깐의 눈속임은 용인될 수 있으나, 구조화된 속임수와 약탈적 독점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시장 인식은 새로운 시장, 거룩한 시장을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장의 성화聖化’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장 안에 내재한 숨겨진 하나됨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개벽 세상은 장바닥에 비단이 깔릴 때 온다”라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예언을 빌려 ‘시장의 성화’라는 말을 했는데, ‘시장 있는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윤리적 시장, 따뜻한 시장, 인간적인 시장 등 다양한 시장론이 나오고 있지만, 근본은 시장 안에 숨겨진 형제애를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시장의 문제가 파우스트의 그것처럼 물신주의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데 있다면, ‘영혼 있는 시장’이 시장의 성화다. 한자로 시장의 장場은 원래 신을 모시는 곳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제 시장 안에서 거룩함을 되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물품 안에 들어 있는 신령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인격적 관계와 생명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북한식 사회주의는 논외다. 정치적으로는 왕조나 무신정권에 가깝거니와 영혼은 고사하고 인간의 기본적 존엄조차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인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장마당경제의 부활 속에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음陰의 시장’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양陽의 시장’ 아래 숨죽이고 있는 음의 시장, 즉 호혜시장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시장의 재발견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현현”이다.

 

음의 시장의 부활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호혜주의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돈벌이 시장에서 살림살이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약탈적 시장에서 주고받기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제로섬의 상극적 시장에서 윈윈의 상생적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적대적 교환에서 호혜적 교환으로의 전환이다. 받고주는 시장에서 주고받는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은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는 시스템적 한계를 노정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폐해와 정신문화적 폐해는 두말할 것이 없거니와. 전 지구적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위기는 더 이상 용인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에 경고등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로 인해 역설적으로 상품시장의 확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선진국의 소비 정점(peak consumption)과 개발국의 수요 정체로 인해 더 이상 물건을 팔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숙주인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독점적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시장의 기본 기능인 ‘필요의 교환’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애의 경제학, 사랑의 경제학이다. 숨겨진 하나됨이 자기실현하는 일이다. 숨겨진 하나됨의 다른 이름인 형제애, 박애, 우애, 사랑, 자비, 인仁이 중심가치가 되는 경제시스템을 탐색해야 한다. 선물 주고받기, 필요 주고받기, 호혜경제다. 최근 한국의 협동조합 신드롬은 그 드러난 모습 중 하나이다. 『초생명공동체』.2)의 저자 린 맥타가트는 이렇게 말한다. “협력은 자연에 내재된 고유한 충동이며 생명 자체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뛰고 있는 맥박임에 틀림없다. 주고받기는 협력의 열쇠이며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접착제일 뿐 아니라 진화적으로 가장 안정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가톨릭에서 형제애의 경제학은 연대성의 원리로 구체화된다. 이때 연대성의 원리란 “모든 사람은 서로 연대되어 있고 서로에게 책임지는 것”을 말한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연대성 원리의 핵심은 바로 ‘주고받는 관계’다. 주고받는 관계의 회복, 즉 호혜시스템의 복원과 확장은 시장의 공정성 확보와 더불어 자본주의 극복의 핵심 과제가 된다.

 

그것을 일러 ‘호혜주의 시장경제’라고 이름 붙여본다. 시장을 인정하되, 자본의 지배가 아닌 숨겨진 하나됨이 드러나는 시스템, 그것이 호혜경제다. 시장 안에서 화폐와 상품으로 환원되어 몰개성화된 인격과 개체생명이 봄꽃 피듯이 되살아나는 시장경제, 그리고 주고받는 생명세계의 기본원리가 경제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새로운 시장생태계로의 진화와 재구성이 요구된다.(참고로 호혜주의 시장경제의 몇 가지 원칙을 상기해보면 이렇다. 생산-소비 약정에 의한 거래,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주고받기, 화폐로 환원되지 않는 인격적 거래관계, 사람에 따라 물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일물다가一物多價, 생장소멸이 있는 돈 에이징 머니(aging money) 등이 그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문명전환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 안팎의 세속주의와 싸우고 있다. 물론 교황은 반자본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성인 프란치스코의 ‘물질주의 넘기’처럼 일종의 ‘자본주의 넘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형상이 사라진 인간을 통탄해 하고 있다. 물질과 화폐/자본에 영혼을 팔아버린 삶과 시스템, 그리고 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쩌면 교황 프란치스코의 출현 자체가 문명전환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시스템과 문명의 위기 시대에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인 프란치스코의 영성으로 새로운 삶과 사회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음陰개벽’을 떠올리게 한다. 21세기의 프란치스코는 생태주의의 성인으로 생태 시대를, 하나됨의 영성으로 사랑과 자비의 시대를, 어머니 같은 교황으로 여성성의 시대를 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물질문명을 넘어 의식의 진화에 기반한 정신문명으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것처럼 교회와 세상은 둘이 아니다. 성과 속은 둘이 아니다.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다. 하나됨의 영성은 상생의 문화와 생태공동체와 호혜경제로 드러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기 안의 신성과 단절된 문명에 대해 단호하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 한다. 호세마리아 신부가 몬드라곤에서 그런 것처럼,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고베에서 그런 것처럼,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이 원주에서 그런 것처럼, 교황 프란치스코는 고국 아르헨티나에서 그러했고, 이제 하나뿐인 행성 지구에서 하나됨의 열망을 이루려고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약자들의 빛과 소금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과 사회,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빛과 소금이 될 수도 있다. 의식의 전환과 생활의 전환, 그리고 문명의 전환. 시스템을 바꾸고 가치의 중심이 이동한다. 나아가 전환의 방식, 사회운동의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도 소금과 같은 영감을 준다. “옆으로, 아래로, 섬세하게, 보이지 않게….”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은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이 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온유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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