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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생명의 시선과 탈근대적 노동 (류하)
2014-11-07 15:01: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생명의 시선과 탈근대적 노동

글 류하 (원주)

 

 

 

근대문명과 노동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

 

인간과 인류사회의 진화는 노동을 기초로 이루어져 왔다. 대륙을 이동하면서 수렵과 채취로 종을 이어가던 인류는 수렵과 채취의 한계, 도구 사용과 초기 노동에 따른 진화로 점차 정착 사회를 이루었다. 애초에 노동은 생존과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잉여의 발생으로 통치자와 제사장이 있는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일하지 않고 먹는 계급이 생겼다. 인류 역사에서 일하지 않고 소득을 얻거나 직접노동의 비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소득을 얻는 노동의 발생은 오늘날 우리가 염원해 마지않는(?) ‘욕망의 노동’의 원천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생계를 위한 노동’과 ‘욕망을 위한 노동’이 변주를 이루는 사회이다. 일부 구성원들은 여전히 생존의 필요, 즉 needs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욕망, 즉 wants를 위한 노동과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근대문명은 무제한 성장의 패러다임 속에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약탈적 성장경제를 구축해 왔다. 사실 근대문명의 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시작된 유럽세계의 비유럽세계 침략과 약탈에 기초한 것이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한 것이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과 성장경제를 누리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며, 언제까지나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도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주류의 인식과 정책들은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와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성장경제가 지속될 것이란 믿음 하에, 상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조건과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자본의 경우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있어 노동의 조건과 체계를 고민했다면,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의 사회성과 해방을 중심으로’ 노동의 조건과 체계를 고민했다. 당연히 노동자가 미래 세상의 주인공이고 이들이 주동이 된 혁명과 국가에 의한 사회 통제가 공산사회에 이르도록 해준다는 사고가 근대의 한 축을 지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은 자본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높지도 않았고 인간 자율성을 증대시키지도 못한 채 실패로 끝나 대부분 국가자본주의로 회귀하였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도 노동가치 이론에 근거한 노동운동과 노동 정치운동은 계속되고 있지만, 달라진 점은 노동계급이 변혁의 주도세력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이 아니라 점차 이익집단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도 더 이상 혁명이나 사회주의 또는 노동계급 독재를 이야기하지 않고 대부분 사민주의적 진보담론으로 전환했으며, 여전히 성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최근 나타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근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진보적 노동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역시 대부분 해당 조직의 지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한 노동복지 운동의 하나로 제한되고 있다. 몬드라곤이나 볼로냐, 퀘벡 지역의 사례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의 틀을 가지고 사적 소유에 근거한 자본과 경쟁하면서 ‘협동촌 운동’과 ‘협동조합의 확산’이라는 협동운동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근대문명의 위기를 넘어 ‘성장의 멈춤’이라는 탈근대의 측면, 즉 자연과 인간의 공생, 인간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가치, 그리고 인간의 성숙과 사회적 공동체성의 진화 측면에서 노동 문제에 접근한 모델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근대문명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노동의 성격’을 다루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한다면, 근대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성장경제의 허상과 ‘진보’의 한계를 면밀히 보아야 한다. 근대경제의 근간이 되는 주체철학과 근대문명의 가치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진화적 성숙과 인류문화의 공동체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인간 내면의 욕망과 절제, 인간의 신령스러움(영성)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욕망의 노동’이라는 점이다. 경제성장 신화에 기초한 노동은 생산된 물품이나 가치의 분배에 대한 문제의식만을 증대시킬 뿐 노예노동을 벗어난 노동해방운동의 방향, 또는 ‘노동의 진화’ 방향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는 모든 노동에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터무니없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일 수 있다. 나아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특정 노동과 산업은 정당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군수산업이나 핵 관련 산업 같은 것은 그 자체로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망의 노동에 있어서는 그 욕망에 따른 편리와 복리의 증진이 누군가의 노동에 근거한 것이거나 자연에 대한 약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에 둘 때 비로소 생명협동운동 및 지역 공동체운동에서 노동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원칙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협동운동은 대체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과 근대문명의 욕망과 편리를 전제한 가운데 노동이 갖는 사회·윤리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 왔지만, 공동체운동에서의 노동 문제는 자연과 관계 맺는 노동의 진화적 성격과 공동체적 성격의 규명, 이에 따른 노동 윤리의 규명과 제정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생명운동 관점에서 노동 문제를 짚어보고 생명협동운동과 지역 공동체운동에서 노동 문제에 접근하는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근대문명의 성찰과 ‘성장의 한계’

 

근대문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최근에 신시아 브라운Cynthia Stokes Brown이 쓴 『빅 히스토리』와 김종철 선생의 “성장시대의 종언”이라는 글에서 많은 영감과 시사를 받았다. 이 두 자료는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온 지 40주년을 기념해 2012년 3월 스미소니언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그림1>을 공통으로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은 호주 물리학자 그레엄 토너가 「성장의 한계」 보고서에 있던 시뮬레이션 예측 도표에 2000년 시점의 현실 데이터를 입력해 실제와 예측이 어느 정도 맞았는가를 검토한 결과를 담고 있다. 해당 도표는 모두 여섯 항목-세계 인구, 비재생 가용자원, 1인당 산업생산물, 1인당 서비스, 1인당 식량, 환경오염-에 대해 2100년까지 어떻게 증감할 것인지 예측한 것인데, 여기에다 19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제 추이를 연결시켜 본 결과(진한 고딕선) 1972년의 예측(점선)과 놀랄 만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그림이 전하는 핵심이다.

 

<그림1> 로마클럽의 예측과 30년 후 현실 비교

 

<그림1>에 표현된 1970년에서 2000년까지의 예측과 실제 추이, 그리고 2030년이라는 기준선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자연 파괴적인 성장경제 체제는 2030년을 전후로 붕괴할 것이다. 또한 2030년 이전에 1인당 식량 생산이나 서비스 생산, 산업 생산 등은 정점을 찍을 것이다.

둘째, 2030년을 기점으로 세계 인구 증가도 정점을 찍을 것이며 그 이후로는 계속 감소할 것이다.

셋째, 환경오염 역시 2040년경을 고비로 점차 완화될 것이다.

넷째, 2100년이 되면 세계의 산업생산을 비롯한 모든 지표가 1900년 수준으로 퇴보할 것이다. 자원의 경우는 1900년의 1/4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며 지구에 어떤 파국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진단에는 단서가 붙어있다. 인구 증가 억제, 산업 성장의 제한, 적정기술의 개발 및 보급, 국제적 협력 등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라는 것이다. 「성장의 한계」 저자들은 인류가 적절한 실천 지점을 20년 정도 놓쳤다고 보았다. 만일 20년 전에 인류 전체가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적절한 실천을 했다면 60억 정도의 인구로 지구가 안정을 이루었을 거라는 뜻이다. 이들은 또한 현재 지점에서 인류가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약 80억 수준의 인구가 현재 유럽의 저소득국가와 비슷한 생활수준에 만족한다는 가정 아래 파국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근대문명은 자본과 노동가치 중심 사회이다. 그 안에서 노동은 자본에 고용된 노예노동이며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만이 창출한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된 사회주의는 가치 창출의 주체인 노동자가 단결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평등한 분배경제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이 역시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근대문명의 핵심 키워드다.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물질량의 감소를 의미하며, 이것은 곧 노동력과 노동량의 감소를 의미한다. 물론 자본주의 내적으로도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기계화나 자동화, 첨단화를 통해 고용노동의 양과 질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낮아진다. 이것은 역으로 노동의 입장에서 볼 때, 근대문명이 사적 소유와 자본 축적을 통해 성장해왔고 ‘필요 노동’에서 ‘욕망의 노동’으로의 변화를 끊임없이 강요해 왔지만, 종국에는 가차 없이 노동을 버리거나 천시할 것임을 입증한다.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막혀 있을 때 노예적 고용노동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마음과 삶의 자세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이 멈추어 가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계급 갈등, 인종, 민족, 국가 간 갈등 속에서 예측하기 힘든 파국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클럽 보고서의 예측과 현실 진단은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와 같은 경제성장과 근대문명의 번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인 만큼 지극히 ‘비정상적인 시기’가 끝난 이후 인류의 삶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적 협동운동의 소유와 노동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당시는 사회 전체적으로 모순과 고통이 극심한 상태였다. 노동 시간, 노동 조건, 평균 수명, 아동 근로, 주거 환경, 교육, 보건 등 모든 분야에서 참혹했던 당시 현실은 생산력 증대와 사회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단면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복지사회, 또는 보다 합리적인 자본주의 등 다양한 대안적 논의와 실천이 나타났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쟁을 동반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대체로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당시의 문제를 ‘생산 수단의 소유권’이 지닌 사적 성격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로버트 오언, 윌리엄 킹, 윌리엄 톰프슨, 푸리에와 생시몽 같은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상가들이 그러하고, 맑스나 엥겔스 등과 같은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산업자본주의 문제의 핵심을 노동 결과물의 전유와 분배의 불평등, 즉 ‘노동의 소외’로 보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소유 형태에 있어 ‘사회적 소유’를 핵심으로 주창했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적 소유’거나 ‘집단 소유’였다. 국가권력에 의해 모든 경제 행위가 중앙 통제되는 국가계획경제, 시장교환이 아닌 강제 배분 경제 속에서 모든 인민은 완전 고용되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와 노동의 동기는 없다. 이렇듯 노동의 사회화를 기계적 평등주의로 받아들인 결과, 현장에서의 노동은 창의적이거나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자율성의 신장과 성숙을 신뢰하지 않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근대 산업사회에 내재된 기계적 세계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협동조합 선구자들의 경우 대체로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했지만 해결 방안은 달랐다. 대표적 협동조합 이론가인 윌리엄 킹은 당시 산업자본주의 문제를 노동의 결과물이 노동자들에게 모두 돌아가야 한다는 ‘전노동수익권’ 개념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자본’보다는 ‘누가 소유하느냐’가 더 큰 문제라고 보았던 그는,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하기만 한다면 노동과 자본이 결합할 수 있고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어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킹은 ‘산업자본주의적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협동조합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바꿈으로써 ‘전노동수익권’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노동자들이 소비조합을 만들고 이윤을 낸다면 ‘출자금과 이윤’이라는 두 가지 자본 축적의 원천을 갖게 되고 이를 이용해 생산자협동조합을 만드는, 즉 ‘협동조합 조합원이 노동 생산물 전체를 소유’하는 협동조합 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다.

 

로버트 오언과 윌리엄 톰프슨은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구체적인 공동체를 구상하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자본의 원천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공히 공동체 내에 농업과 제조업, 소비조합, 학교, 주택 등을 갖춘 이상촌을 구상하였다. 톰프슨은, 조합원이 농업과 제조업에 교대로 근무하며 자발적 노동을 통해 구성원 전체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투자를 위한 잉여의 발생을 염두에 두었다.

 

이렇듯 초기 협동조합운동가들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이들은 자연파괴적인 성장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는 문제, 즉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포괄적인 탈자본주의화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공동 소유를 통해 ‘노동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사회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몬드라곤은 초기 협동조합 사상가들의 자본과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한 실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몬드라곤은 1956년 설립 이래 노동자 소유 기업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성장을 함께해 왔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초반의 세계 불황기를 내부적 진통과 함께 겪었으며, 2008년 이후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제조업 그룹의 매출 감소와 고용 감소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최근 몬드라곤의 소비조합 에로스키의 경우 지속적인 인수합병 과정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늘어나고 있으며 성장을 위해 해외 법인을 확대하고 있고, 해외 법인 노동자와 스페인 내 노동자의 대우가 다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성장추구적인 세계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중심성과 노동자 공동체성을 추구하며, 초기 협동운동가들이 가졌던 노동의 사회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몬드라곤 모델은 분명 수많은 상찬에도 불구하고 근대 패러다임 하에서의 제한된 모델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몬드라곤을 포함한 협동조합에서의 노동이 탈근대 문명의 보편 노동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이 갖는 성장의 속성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기초한 자족의 추구와 이에 기반한 지역공동체적 자립 지향 모델로 거듭나야 한다.

 

 

노동에 대한 근대적 시선과 생명운동의 탈근대적 시선

 

초기 산업자본주의에서 현대자본주의로의 흐름 속에 노동의 성격은 많이 변화해 왔다. 근대문명의 극점에 이른 현실에서, 노동은 (소유권 의식의 변화와 생명의 존재 양식에 기초하여 볼 때)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 노동 양식’으로부터 ‘공동체적 소유’와 ‘자율노동’에 입각한 ‘공동체적 자기고용 양식’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 문제는 자본에 고용된 노동의 문제이며, 총자본 대 총노동의 문제로 파악한다. 이는 자연과 관계 맺는 양식으로, 또는 생명존재와 공동체의 지속성에 필요한 자립 및 자급 방안으로 노동을 바라보는 생명협동운동의 시선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생명운동 역시 근대문명 안에서 발생하는 노동 착취와 약탈 구조에 문제의식을 갖지만, 보다 큰 차원에서 근대적 자본과 노동체계 일반이 생명 생태계를 파괴하고 생명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명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회적 기업 등은 그 자체로 개인의 소유나 국가의 소유가 아닐 뿐더러 그 지향도 자본주의 일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있다. 소유권 문제를 공동체적 소유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노동 착취를 최소화하고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연에 대한 약탈적 착취를 통한 욕망의 추구와 자기 파괴적 성장을 멈추지는 못했다. 또한 보편교육은 인간의 합리적 의식은 높였지만 편리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이에 비추어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비재생적 자원을 이용해 성장과 욕망을 추구하는 경제를 줄이는 대신, 재생적 자원을 이용하는 경제를 통해 생명의 터전인 지구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실현하고 자연과 인간이 공생, 상생하는 공동체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급에 기초한 자립경제를 지향하며, 노동 문제에 있어 외부의 기제에 의해 움직이는 노예노동이나 타율노동, 욕망의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서 ‘자율노동’에 기초한 자기고용(self-employment) 노동을 지향한다. 본래 자기고용은 자영업자들의 노동을 의미하지만, 공동체에서의 노동을 진화된 사회적 고용 형태로써 ‘공동체 자기고용(communal self-employment)’ 개념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필자는 탈근대적 노동운동의 방향으로 ‘자율노동’과 ‘공동체 자기고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율노동이란 인간의 존재적 각성에 의한 자발성과 열망에 기초한 노동이다. 이는 우주적 존재로서 존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 그리고 공동체 및 이웃(사회)을 위한 효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두 가지는 현상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자율노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의 내적 성숙을 위한 수행 과정과 연동되며 또한 공동체의 성숙 및 사회화와도 연동된다. 그것은 외부의 규율이나 지시, 대가보다도 내면의 깨우침과 성숙,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다른 구성원에게 떠맡기는 노동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한몸임을 각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노동이다. 노동의 결과물 역시 존재 가치에 따른 기본 배분을 원칙으로 형평성과 민주성, 공동체성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물론 효용 가치에 따른 노동을 ‘성과’에 따라 배분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제한된 범위여야 하며 공동체 성숙 과정의 하나로써만 기능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공동체 자기고용’이란 공동체의 지향과 삶에 동의하고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공동체 구성원이 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필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며 그것은 온전히 자율노동에 기초한다.

 

협동조합은 결사체로서의 성격과 사업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기에 노동 역시 결사체로서의 노동과 사업체로서의 노동이 존재한다. 전자가 존재 가치로서 사회적 지향에 대한 노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효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예를 들어 한살림의 경우 실무자(직원)와 활동가가 존재하는데 둘 다 ‘한살림의 지향과 삶’이라는 생명 가치에 근거하지만 실무자의 경우 훨씬 사업체적 성격의 노동에 가까이 가 있는 반면 활동가는 결사체로서의 자율노동에 가깝다. 한살림의 활동가들은 내로 한 발짝 더 접근하는 길이다. 노동해방을 향하는 노동 과정, 노동조직의 표현이며 미래의 유력한 노동조직 형태이다.”(김영곤.『한국의 공동체 자기고용』. 선인. 2009.)적 성숙을 통해 한살림 가치를 삶에서 실현하는 삶의 지도자로서 길을 모색하고, 그렇게 되도록 내부에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활동가들은 한살림 활동을 통해 조합원 전체가 성숙하고 삶의 지도자로 성장해 나가도록 도모해야 한다. 물론 이 경우에 실무자의 영역과 겹치는 활동가의 노동 영역은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실무자는 자신의 노동 중심이 효용 가치의 노동에 주어지지만 ‘공동체 자기고용’의 정신에 따른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각성과 성숙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공동체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공동체의 자율노동과 자기고용은 존재 가치의 노동과 효용 가치의 노동으로 구분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외형상으로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양자는 통합적으로 공동체 내의 노동으로 존재하며 공동체의 존재성과 효용성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양자의 노동은 둘 다 모두 존재 가치로서의 존엄성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는 내재적 성숙과 외재적 효용 생산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이 모든 가치를 생산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생명사상의 근본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신령스러움에 있으며 그에 따라 사람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임을 늘 강조한다. 그것은 노동이 모든 가치를 생산하고 규정한다는 근대적 시선을 벗어나는 것이며 우주 만물에 의지해 진화하는 존재로서 ‘일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생명 가치 중심의 노동과 자기고용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노동, 행복한 노동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은 채 자본과 국가에 고용되기 위해 공부하고 기술을 익혀 왔다. 더러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士, 師)’ 자 돌림의 자격증을 가지고 자본에 고용되지 않은 채 사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먹고사는 문제이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지향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문명은 지속가능한가? 내 삶은 지속가능한 삶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노동하는가? 내 삶의 행복을 위한 노동은 무엇인가? 나의 노동은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노동인가? 노동은 반드시 대가를 전제로 하는가? 나의 노동이 나를 존재적 성숙과 깨달음으로 안내하고 있는가?

 

생명협동의 가치에 기반한 조합은 조합원이 공동 소유하며 자연과 이웃의 조화로운 생산을 함께 나누고 잉여가 생기면 공동체운동의 목적에 따라 균등하게 나눈다. 생명협동운동은 생명의 본질적 속성인 상호 의존적 존재들 사이 공생의 원리에 기초해 있으며, 공동체적 생산과 노동, 소유, 호혜적 거래의 끊임없는 확장이자 이를 통해 자기 존재와 사회를 성숙시키는 진화운동이다. 이는 곧 생산 방식에서부터 운송과 배송,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생명 가치에 입각해 물품과 노동을 바라보고 생명 가치의 확장과 생명공동체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맞추어 적절한 배분을 합의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생명협동운동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과정에서 생명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 그리고 생명운동의 확장적 가치들을 중심에 놓고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더불어 그러한 기초 위에서 성숙을 지향하는 진화적 관점으로 노동과 분배를 바라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분배’는 단순히 소비자 조합원이 지불하는 화폐 가치의 분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물품이건 가치는 가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물질은 우주적 역사성과 현존의 가치를 가질 뿐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사용 가치나 교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즉 각각의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자연과 인간의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에 분배에 있어서도 공동체적 삶을 위한 각자의 역할에 대한 배려와 형평에 따른 고려가 있을 뿐이다. 즉, 생활에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나눈다고 할 때, 각각의 노동은 가격이나 가치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존재 가치)에 더하여 물품을 생산하고 운송하는 역할에 따른 노동 비중(효용 가치)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물론 쉽사리 헤아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논의는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자든, 실무자나 활동가, 소비자 조합원이든 생명협동운동의 가치에 대한 형식적 동의를 넘어 삶의 가치로서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지향에 대한 합의와 내적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 전제 위에서 실무자나 활동가는 자본에 고용된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와 노동이 일치하는 ‘자기고용'의 자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전제 위에서만이 생산자와 소비자 조합원을 매개하는 의미 있는 노동 및 활동의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생산자와 소비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과 사회적 구심력 때문에 실무자와 활동가들이 자신의 노동을 생각하는 관점과 생명협동운동이 제시하는 노동의 방향이 늘상 일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이러한 근대체제와 사회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율노동의 힘은 생명협동운동을 확장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생명협동운동의 경제활동과 노동이 인간의 진화와 성숙에 기여하는 조건을 만들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이 자신이 일하고 활동하는 공동체의 지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생명협동운동이 시장에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려 든다면 자연히 성장을 목표로 해야 하고 실무자나 활동가들에게 존재적 각성에 의한 노동보다는 효용 가치에 입각한 노동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일 협동기업의 시장 독점을 지향하는 근대적 협동운동과 다를 바 없으며, 결국은 일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자율노동에 대해 회의하게 될 것이고 근대 노동체계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명협동운동은 생명 가치에 기반한 다양한 협동운동으로의 확장과 연대에 기초해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노동시장을 호혜적 노동선택으로 대체해 나가는 것과 함께, 공동체 내의 모든 노동이 ‘자율노동에 입각한 자기고용’으로 존중될 수 있도록 정책·환경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노동’ 개념의 변화를 모색하며

 

우리는 두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근대문명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파국의 위기를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이라는 틀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며 인간과 사회의 성숙과 진화를 슬기롭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각자의 역할 - 생산자로서, 실무자와 활동가, 소비자 회원으로서 - 안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가치를 배우고 삶에서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명사상은 근대문명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한편으로 근대성의 유제들 중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부응하는 진보적 요소들을 안고 넘어가기 때문에 근대문명과 직선적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포월抱越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하고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은 근대적 시선을 포괄하되 이것을 넘어선 자율과 자립, 자치에 기반한 생명 가치와 공동체적 시선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제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뿐 아니라 성찰과 수행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누구든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은 노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율적인 존재로서 삶의 일부인 노동을 즐기고 결과를 나눌 수 있는 상황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정한 노동해방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노동으로 존재적 성숙을 도모하고, 사회적으로는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자족하고 즐기는 노동을 하는 데 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동의 결과를 빼앗기는 노동도 아니지만, 그 결과물을 혼자만의 풍요를 위해 소유하거나 누리는 노동도 아니다. 자연을 착취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연과 상생하는 노동이며, 외재적 지시나 강제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내적 성숙에서 우러나는 자율노동이다. 또한 결과물을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노동해방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개념에서 ‘노동’은 자본에 고용된 노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기 위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족 혹은 존재 가치 실현을 위한 일이나 작업, 확대해서 공동체의 존재 가치 실현이나 공동체 구성원의 효용을 위한 노동과는 개념상 많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사회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동(labor)’이나 ‘노동자(laborer)’라는 개념과 우리가 지향하는 ‘일과 활동’, ‘일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생명공동체운동이나 한살림운동에서의 노동은 ‘살림의 노동’이자 자기고용, 자율노동으로써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에 근대문명의 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언어를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언어가 존재의 삶과 의식을 규정하는 경우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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