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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우리의 꿈은 평등해지는 것인가, 행복해지는 것인가? (꿈지모)
2014-12-29 11:04: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의 꿈은 평등해지는 것인가, 행복해지는 것인가?

 

글 꿈지모 (이안소영·윤박경·최이윤정)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여성운동을 성찰하며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 본다’라는 취지로 청탁받은 이 원고는 세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과 문제의식으로 출발하려 한다. 개인 적인 서술로 이 원고를 시작하는 이유는 기획의도와는 달리 여성운동 ‘전 체’를 성찰하기에는 우리들의 삶과 앎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 자리에 서서 어떤 문 제의식으로 대안적인 관점을 고민하게 되었는지, 어떤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편이 조금 더 ‘생산적인’ 혹은 ‘자급적인’ 원고가 되 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산’은 교환가치만을 지닌 채 화폐화된(그래서 화석화된) 물건이 아니라, 사용가치 그 자체를 만들어내 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의 필요, 그 자체가 드러나고 만나며 스스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 원고를 공동으로 쓰는 세 명의 공통점은 여성학을 공부했고, 에코페미니즘 공동체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 나이, 결혼과 자녀상황, 직업 등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이 원고가 ‘생산적’이고 ‘자급적’이길 바라며, 각자가 출발하는 삶과 사유 의 지점을 밝힌다.

 

하나.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맞벌이 VS 맞살림

세월이 흐르고 여성운동 황금기의 성과가 정책으로 반영되어도 여성 취업률은 여전히 M자 곡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아이 출산 후는 악착같이 복직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고서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주변에도 많다. 여성단체들은 작년 총선과 대선 때 비정규직 여성의 출산휴가 확대, 육아휴직 보장 및 ‘아버지 영아휴가제’ 도입을 주장했다. 아 이를 낳고 3년 동안 육아휴직을 보장받고, 그 중 1년 혹은 2년을 아빠가 육아휴직을 받고 다시 복직한다면 그들의 삶은 안정적이고 행복할까?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유사부모 노릇을 하던 가족과 친지, 이웃과 마을 등 공동체는 사라진 대신 각종 오염물질이 넘쳐난 작금의 현실. 친환경 먹거리와 생활용품으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라는 지상과제와 무한책임이 오롯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맞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의 비인간성을 절감하게 된다. 다행히 아이를 함께 키우자고 모인 부모들이 자구책으로 만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맡겼다 하더라도 말이다. 출근과 함께 아이를 맡기고 어린이집 교사의 퇴근시간을 넘기지 않게 나의 퇴근시간을 조절하는 것은 매일매일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머피의 법칙처럼 맞벌이 부부의 회의는 왜 매번 겹칠까? 저녁에 열리는 회의는 경중을 떠나 죄다 부담스럽고 아이는 늘 부모와의 시간이 부족하다. 어지간히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 맞벌이 부부라도 시간은 한없이 모자라고 쉬거나 재충전할 시간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나날이 지쳐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식과 가공식품 구입을 늘리고, 아이에게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베이비시터로 선물해야 하는 걸까?

 

부모님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 우리와 함께 살도록 부탁해야 하는 걸까? 격의 없이 드나들며 아이를 돌봐줄 이웃 하나 못 만든 내 낯가림과 부족한 사교성이 문제일까? 어쩌면 부부 모두가 전일제-임금노동을 해야 하는 시스템과 저녁에도 일을 해야 하는 일중독 속도사회가 문제인 건 아 닐까? 나는 평등해지기 위해 자원 활동이 아닌 ‘임금노동’을 하지만, 그 ‘노동’이 나와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임금노동’ 을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돌봄과 육아를 전담했던 여성들의 경험이 경력단절로 낙인찍히는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 그녀들이 다시 돌봄과 육아와 절연한 채 GNP 양을 높이는 일에만 몰두해 온 남성 모델의 ‘생산’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과연!

 

아이를 가진 여성은 NGO 활동을 열심히 하기 어렵다. 시민사회에서도 여성단체를 제외하면 사무처장은 대부분 남자다. 혹은 싱글 여성만이 뛰어나고 헌신적인 활동가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자질 부족인가, 조직문화의 문제인가? 가사와 육아 책임을 맡고 있는 여성 활동가는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남다른 열정과 헌신성’을 구현할 수 있는가? 그 여성이 전 사회적으로 여전한 성별분업 때문에 돌봄노동을 도맡아 하기 때문인가? 부모 모두를 시민단체 활동가로 둔 아이의 삶은 어떤가?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여성(혹은 남성) 활동가는 어떻게 돌봄을 수행하는가? 시민단체 활동가는 누구를 모델로 하는가? 가사와 육아의 책임에서 벗어난 싱글-남성인가,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엄마-여성인가? 한편 시민단체 활동가는 자원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이 이미 일부 자원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너무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나는 활동의 대가를 화폐로 지급받는 일만 하는가? 시민의 자발성을 끌어내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민단체 활동가가 자신의 자발적 참여는 구현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1980년대 중반 독일 녹색당에서는 소위 ‘어머니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있었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어머니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남성이나 소위 ‘커리어우먼’이라 불리는 아이 없는 여성들과 똑같은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녹색당의 일과 조직이 변화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운동은 자신의 목표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돌봄과 살림에서 ‘벗어나’ 임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것으로 삼아왔다.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아이가 현재 남성이 받는 임금을 기준으로 평등한 임금을 받으려면 우리는 성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생태계 파괴와 소비주의 물결, 식민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보다 모든 사회의 기준과 속도를 성인 남성이 아닌 여성과 장애인, 노인과 아이에게 맞추어야 한다. 임금수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서 생태적이고 평화롭게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웃과 교우하고 텃밭과 목공과 손바느질을 통해 삶을 점점 더 많이 자급하는 기쁨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 터이다. 평등의 절대조건처럼 여겨지던 맞벌이 대신 ‘맞살림’과 ‘맞돌봄’이 필요하다.

 

둘, 非婚의 불안? 飛魂의 자유!

그 경계에서 먹고 살고 사랑하고 기도할 수 있을까?!

비혼 여성으로 시민단체의 비상근 연구원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서 있는 나. 지금 나는 결핍과 불안, 그리고 자족이라는 모순의 끊임없는 분열과 물음들 속에서, 흔들리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행자의 심정이다. 삶에 대한 불안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 순간순간에 느껴지는 찰나적이지만 꽤 만족스러운 기쁨. 이런 모순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불확실성, 삶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가 봐야 알 수 있으며, 가다 아니면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살 수밖에 없구나 하는 마음이다.

 

정치학을 전공하던 시절, 머리만 커질 뿐 세상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은 부족한 상태를 못 견뎌 하며 사람들을 가슴으로 만나고 싶어 휴학한 적이 있다. 중증장애인요양시설에 보모로 갔던 20대 초반에 그곳에서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게 되었다. 주류사회에서 장애우는 비정상으로 폭력적이게 소외를 강요당하는 존재들이었다. 보호시설이 갖는 문제점보다 그들을 대하는 내 스스로의 모습에서 내 안의 폭력성과 그들을 함부로 대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에 충격을 받았다. 장애우들과 함께했던 10개월의 삶의 경험, 그로부터 이 사회에서 열등하고 비정상이며 소외된 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으로 여성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타자화되고 소외된 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더불어 자연 역시 인간의 문화와 사회에서 철저히 타자로서 폭력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자각이 에코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다르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함부로 대하는 세상의 통념과 차별(이것이야말로 ‘비정상적’임)에 저항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런 연유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여성학을 통해 열게 되었으며, 인간만이 아닌 생태계의 무수한 생명들과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에코페미니즘을 공부해오고 있다.

 

하지만, 여성학은 타자보다 우선 내 안의 상처와 분노, 아픔, 폭력성과 뒤틀린 욕망을 보게 했다. 이것이 여성학을 공부하는 내내 나를 아프게 했다. 세게 아파야 곪은 것이 터져 새 살이 돋듯이, 여성학은 나 자신을 보게 하는 혹독한 치료과정이었던 듯하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에서 ‘대중운동가들이 그들이 맹신하는 사회적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그 이면에는 좌절된 욕망에 대한 자기투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가슴을 쳤다. 소위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하던 나 역시 사회적 명분이나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망을 투사하고 대리만족을 위해 운동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학을 공부한 선배들 중 일부가 자기수행이나 치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 경험과 에릭 호퍼의 글을 통해 그들이 자기치유, ‘온전한 나로 가는 삶’을 선택했던 맥락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여성학이 급진적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회구조적으로는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하지만, 더 궁극에는 근원적으로 여성인 나,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나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치유와 전환의 삶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와 조우하고 대면해야만 하는 학문이 여성학이었고,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 인간 아닌 생명들, 우주적 에너지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생명의 큰 질서를 보게 하는 것이 에코페미니즘의 세계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로만 있는 것은 자폐적이다.

 

‘나’라는 존재는 무수한 너(타자)와 연결되어 있고 타자들이 보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 그것에 ‘나다움’을 찾아가는 연극적 실천이 쌓여 ‘지금 현 재의 나’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너(타자)없이는(이는 의존의 방식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 바로 에코페미니즘의 관계성이었다.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폭력에 저항하는 한편, 내 안의 욕망을 성찰하고 만나는 과정은 실제 삶으로 배워갈 수밖에 없었다. 지식의 세계에서 살던 나는 몸으로 풀뿌리 현장의 삶을 살아보기도 했다. 어쩌면 단지 맛만 봤다거나 시도만 했다고 볼 수 있다. 7년여 동안 풀뿌리 여성들과 생활운동을 하던 내가 다시 중앙(서울)의 교육연구기관으로 와서 느끼는 것은 전 체적인 시각에서 시민사회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의 흐름, 이슈, 현황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첫 번째 의아함은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은 모두 어디로 가 있는 것일까였다. 대부분의 선배들이 제도권 정치인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고 운동의 현장에서는 세대간 단절과 운동의 침체(?)라 할 정도로 이슈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선배 운동가들의 정치진출을 보며 과연 여성운동, 시민사회 운동이 제도화되어 가는 것이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삶과 지위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비혼의 불안에는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생계(돈) 걱정, 가족(핵가족)이나 호혜의 관계가 희미해져 가는 무연사회의 고독사를 보며 느끼는 홀로 죽을 것 같은 공포 등등이 도사리고 있다. 나 홀로 내 삶을 지탱해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삶, 독립적인 삶, 능력 있는 삶이라는 사회적 풍토에 나 역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고, 이러한 불안을 털어낼 정도로 나라는 존재 가 배짱(용기)과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코 골드미스가 될 수 없는(?) 나의 경제력과 오지랖! 내 능력껏 살아야 한다는 자폐적인 강박에서 내 스스로가 용기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호혜와 협동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자본주의의 대중소비사회 속에서 경쟁과 상품화된 삶, 성과(업적)/일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를 살리고(돌보고) 다른 이를 살림(돌봄)으로써 나, 너, 우리를 위한 행복통장의 잔고를 늘려가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개인들이 느끼는 결핍과 불안, 막연한 미래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자기다운 삶을 자율적으로 살아 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비혼(非婚)의 불안이 비혼(飛魂)의 자유로 전환될 때 자율적으로 먹고 살고 맘껏 사랑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빛을 발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셋. 결혼과 직장, 현실 속에서 여성주의 접점 찾기

1990년대 남녀공학 대학을 다녔던 나에게 여성학은 나의 삶과 주변, 사회에 대해 다르게 보는 눈을 길러주었던 새로운 언어이자 치유의 도구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고,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과 동료가 되고 커뮤니티를 만들게 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결혼해 함께 살고 있는 나 의 남편은 대학에서 여성학, 젠더사회학 등의 교양과목이 생겨나면서 학교 안팎에서 여성학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며 여성학의 대중화 물결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여성학이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한 부분 이라는 사실에도 물론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 안에서까지 여성학적 성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경험하듯,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던 남자들조차 어떤 이슈에 따라서는 ‘페미니즘’이 남성을 가해자로 몰아간다며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결국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남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가해-피해 구도로 설정하는 식의 여성운동은 불편하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가끔 ‘욱’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남편(을 포함한 남자들)에게 서운하고 배신감마저 느낀다.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젠더 관계에 의한 차별을, 권력 관계를 문제제기하는 것인데,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나의 남편조차도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이론이자 사회운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 비단 결혼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직장 생활에서도 처음엔 ‘나도 페미니스트’라며 대화를 시 작하다가 결국은 ‘페미니스트는 그래서 안 된다’는 훈계로 끝나는 남성들과의 대화를 반복하면서, 나는 아직 현실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거나 이해되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왜 그런 것일까.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성운동의 성과로 인해 가족, 노동, 섹슈얼리티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정책이 수립되었으며, 관련 법률이 제정되고 이러한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기구가 만들어지는 등의 제도화를 이루어냈다. 운 좋게도 나는 지난 7년여 동안 여성정책과 관련해 정부 조직에서 일하면서 정부 정책 내에서 여성정책이 어떻게 실행되고 확산되어 왔는지를 직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여성학, 여성운동을 통해 제기되어 온 여성주의 이슈가 정책 의제화 되면서 정치, 학계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졌고 여성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러한 여성운동의 대중화, 제도화는 분명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주의가 이러한 제도화된 법적 언어, 담론 속에서 이해될 때, 여성주의에 내재된 사회변혁적 가치와 맥락은 종종 삭제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마치 여성주의를 현재의 ‘양성평등정책’ 또는 ‘성별영향분석평가’로만 이해할 때,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를 요구, 확보하게 하는 도구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젠더 질서와 성별 관계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본래의 취지 대신 현재 남성과 같은 위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편협하게 받아들인다면, 기존 패러다임에의 변혁(transformation)을 지향하는 여성주의 가치를 이야기할 자리는 없어지게 된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쟁, 성과 사회에서의 제도적, 법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우리의 삶 자체를 성찰하고 관계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여성주의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는 없을까. 내가 만난 여성주의 이론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타자로서, 여성이 ‘자기만의 방’ 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외된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면서 자유, 자율,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치유와 임파워링의 학문이자 실천이다. 이러한 치유와 임파워링은 단지 ‘여성’을 위한 것 이 아니라, 성별 권력관계에서 “powerless” 한 개인, 집단 혹은 사회 전 체에 다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진정 모두에게 희망의 페미니즘, 행복한 페미니즘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치유와 임파워링의 정치학을 고민해야 할까.

 

세 명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다르지만 또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맞살림이 아닌 맞벌이에 나서야 하는 현실에서 혹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찾거나, 비혼 여성으로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호혜와 협동을 꿈꾸거나, 여성주의가 여성‘만’을 위한 정치학이 아니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 우리는 함께 공부하거나 겪어왔던 여성운동의 흐름들 을 돌아보며 새로운 방향과 길에 대해 우리의 바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려 한다.

 

 

여성운동을 돌아보며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이 태동한 시기는 대체로 여성학 교육과 여성주의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형성이 이루어진 1970-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박인혜(2009)는 1980년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여성의 인간화’ 운동 담론과 ‘여성사회교육’이 아카데미의 기독교 지식인 공동체와 서구 페미니즘을 수용한 여성 지식인의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여성주의 지식에 기반한 새로운 여성운동을 태동하게 하였다고 분석한다. 여성주의 담론과 여성사회교육의 체계화된 기제, 그리고 지속적인 모임이 이루어진 물적 토대의 형성을 통해 1977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강좌 개설, 1984 년 한국여성학회 설립, 1985년 여성신문 창간, 1987년 한국여성민우회 창립 등이 있었고, 그로부터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러 여성운동단체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가부 장적 패러다임 안에서 새로운 문제제기와 실천을 이끌어내었다.

 

지난 30여 년을 거슬러 온 한국사회 여성운동은 명명(naming) 정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바라 뒤 부아Barbara Du Bois의 말처럼, “아예 명칭이 없는 것, 그에 대한 용어나 개념이 없는 것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여성운동을 통해 성폭력, 성차별, 여성인권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중심적 경험과 언어 속에 존재했으나 비가시화 되었던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어 문제화하고 해결을 시도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30여 년 여성운동의 주제를 여기에서 모두 다루기는 적절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 여성운동단체들의 활동과 실천의 흐름 속에서, 그 방향과 성과가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성차별, 평등, 권리 담론

노동, 가족, 섹슈얼리티, 미디어,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운동이 이루어지면서,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의미 있는 성과로는 사회적으로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성)평등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히 가족과 노동 분야에서 활발했는데, 1990년대 호주제 폐지운동을 통한 2005년 민법 개정안 통과를 거쳐, 유교 가부장제의 상징적 규범이었던 호주제 삭제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가족 내에 서 법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농협 사내부부해고 사건을 계기로 여성노동 차별 반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간접 차별 반대,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에 따른 차별 반대 등 고용상의 성차별 이슈가 활발히 제기되어, 이 결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과 고용차별 상담 등의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 아울러, 모성보호 강화와 일·가정 양립 지원 조치 확대 등은 여성노동자로서 남성과 다른 신체·사회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을 방지하려는 제도적 조치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여성노동운동의 성과는 그동안 가부장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전제된 기존 노동운동 조직 내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성노동자의 경험을 드러내어 직장 내 성차별 이슈를 제기하고, 이를 통해 남성노동자와 다르지 않은 노동자로서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워주었다. 최근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여성노동자가 점차 하청화, 비정규직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여성고용의 다양한 현실을 드러내고 이들의 노동자로서 경험을 가시화시키려는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여성민우회 등을 비롯한 여성단체의 특수고용직(식당여성노동자, 영양사, 경기도우미, 학습지교사 등) 조직화와 그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싸움 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흐름으로,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드러내고 반성폭력운동을 활발하게 펼쳐가면서 여성으로서의 권리에 주 목하기 시작했다. 섹슈얼리티는 당시 여성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변화된 분야였으나,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를 계기로 성폭력 사안에 대해 중점적으로 활동하고 관련 이슈를 발굴하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0년대 초,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여성단체들이 그 사건들을 지원하면서 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 을 펼쳤다. 또한 1990년대 후반 ‘성폭력100인위’와 같이 대학과 시민사회의 반성폭력 이슈가 활발해지면서 관련 법 제정 운동은 사회 안에서 더 욱 힘을 받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정책이라고 하면 요보호 여성과 모자보건 등 ‘부녀행정’ 위주의 정책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가정 내 여성 지원과 가정에 속하지 못한 여성 보호로 구분하여 접근되었다. 이처럼 여성 개인의 권리와 인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정’의 유지라는 틀 내에서 여성이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지원하거나 보호하는 것 에서 19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을 계기로 여성 개인의 섹슈얼리티,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관점이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폭력특 별법, 1994년)과 가정폭력방지법(1997년) 제정 결과, 기존의 윤락행위등 방지법을 통해 윤락여성 등 요보호 여성에 대한 지원정책에서 성폭력, 가 정폭력 피해자 지원정책으로 정책의 목적과 성격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폭력 운동을 통한 법제화 성과는 2000년대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과 남녀고용평등법에 직장 내 성희롱을 규제하는 법 안 마련으로 이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가족, 직장 등을 비롯한 사회 전체 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성폭력·성매매 근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촉발되고 확산되었다.

 

여성운동의 제도화, 법제화

여성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실천은 가족, 노동, 성 등 관련 법률의 제·개정을 중심으로 제도적 성과를 나타냈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 여성부가 설치되고 여성발전기본법 제정을 통해 여성정책을 수립하였으며, 여성발전기금을 통해 여성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등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짐으로써 여성운동의 대중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빠른 시간 동안 놀라운 수준으로 이루어낸 제도적 개선에 비해, 인식적 차원, 사회문화적인 변화까지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여전히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튀는, 잘난 여자’, ‘꼴페미’, ‘과격 투사’라는 이미지로 표상된다. 온라인상에서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거나 양성평등정책을 남성 역차별 정책으로 반대하고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는 등 여성주의에 대한 백래쉬backlash도 지속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연 1회 이상 의무교육으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성희롱과 성폭력은 오히려 더욱 늘어나고 있고 처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성폭력의 개념 자체를 법적 용어 문제로만 받아들여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 행동’이라는 문장만으로 알고 있거나 규약, 내규의 조항으로 존재할 뿐 일상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여성운동을 통한 문제제기가 조직사회문화 전반의 성찰을 통해 변화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관련 사건과 같이 법 제도에 의한 판결, 징계 등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고하려는 현실은 그동안 법제화 중심의 운동이 가져온 성과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의 법제화라는 가시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과가 아직도 우리 삶과 일상에서의 실질적 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이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성운동이 지향한 운동의 가치와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근대적 자유주의, 개인적 ‘치유’와 ‘자기만의 방’을 넘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근대 자유주의 이론에 기반한 여성운동은 19세기 참정권 요구 등을 통해 남성에 비해 공적인 주체로 인정받지 못해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서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함을 주장 해왔다. 한국사회 여성운동의 많은 이슈들과 법제화의 성과 역시 현재 자유주의 이론에 기반한 법·제도적 현실에서 기존의 남성에 비해 차별적인 관계를 개선하고 남성들과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갖도록 요구해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극적 조치, 할당제 등이 그러한 예다. 남성과 ‘동등해지기’ 전략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유와 해방이란 이름으로, 여성이 그토록 요구했던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자기만의 언어’를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여성운동은 세상에 대한 ‘다른 시선’이 존재함을 알리는 것으로서 차별의 논리를 발전시켜왔다.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여성/남성이라는 피해/가해 구도 속에서 누가 더 피해자인가를 경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별 패러다임의 언어와 논리는 자칫 피해자-가해자의 구도로만 문제를 설정하게 되는 한계를 노정해왔다. 여성 역시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수동적인 피해자이길 원하지 않듯이, 모든 남성 역시 잠재적 가해자로 상정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의 법 담론 안에서는 피 해자-가해자 구도가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가시적·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차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점점 더 미세하고 개별화되는 방식으로, 성, 민족, 지역, 연령 등의 복합적인 기제에 의한 것으로 변모하고 있어 일상에서 이를 문제화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여성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은 근대적 이분법의 차별 패러다임 안에서 전략을 세우려 하다 보니, 명시적인 전략을 내놓기도 어렵고 그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남녀 이분법적인 차별 패러다임으로부터 형성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서 탈피해, 이러한 관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득을 얻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중요해 보인다.

 

20대 80의 경쟁논리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성과를 내야 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동안 여성 운동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남성이 획득해온 결과물을 동일하게 나누거나 자기복제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질문이 필요한 것 같다.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시하 는 생산 중심의 삶과 남성과 동등한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삶으로 인정받는 기본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여성으로서 삶의 다른 경험과 자원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과연 충분했던 것일까. 여성운동은 이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과 ‘자기만의 방’ 으로부터의 성찰과 고통에 대한 개인적 치유를 넘어 사회적 치유와 공동 체적 치유를 통해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우정과 환대의 집짓기를 함께해 야 할 때이다.

 

어떤 ‘자유’와 ‘돌봄’을 원하는가

여성학의 오래된 논쟁 중 하나가 ‘새로운 기술이 여성을 자유롭게 하는 가’이다. 쟁점은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가스오븐 등 가전제품이 오래된 가사노동으로부터 여성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을 더 하게 한다는 문제제기이다. ‘세탁기의 출현’은 더 자주 빨래해서 더 하얗게 된 옷을 입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스팀청소기는 더 자주 물걸레로 집안을 청소하는 것을 현대인의 표준화된 생활양식으로 만들어냈다. 세탁과 청소하는 기계를 남성이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요리하는 기계나 로봇까지 남성이 작동하게 된다면 어떨까?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출현은 그 기술을 운영하기 위한 추가노동을 계속해서 발명해 내고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해야 하며, 남성과 여성이 나누더 라도 전체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근대화된 ‘청결’과 ‘위생’ 관념은 먼지, 벌레들과 공존하지 않는 것이 현대적이며 ‘좋은 삶’이라 규정한다. 이 기 계들을 생산·유통하기 위해, 유지하고 폐기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과 에 너지를 쓰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더 많이 일을 해야 하고 또다시 삶을 누릴 시간은 점점 부족해진다.

 

일회용 기저귀와 생리대는 여성을 자유롭게 했는가? 여성단체 중 천기저 귀와 면생리대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정책화하는 곳은 없다. 이유 는 여성의 가사, 육아노동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회용 생리대 는 온갖 화학물질과 고분자흡수제를 넣어 피부 짓무름뿐 아니라 극심한 생리통과 자궁내막증 등의 원인으로 의심받는다. 일회용 기저귀 또한 신 생아에게 피부알레르기, 아토피 등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일회용 생 리대와 기저귀를 생산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숲이 파괴된다. 우리는 일회 용 생리대와 기저귀를 통해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어떠한 행복으로 나 아가고 있는가? 월경을 하지 않는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생산영역에 동등하게 참가하기 위해 자신과 아이와 지구생태계의 건강을 담보 잡히 는 것이 여성주의가 원하는 자유 혹은 해방일까? 우리는 이제 방향을 새롭게 조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돌봄노동과 돌봄감수성은 사실 다루기 곤란한 문제이다. 인간의 생존에 돌봄은 필수불가결하지만 여성에게 적합하고 여성만의 일로 강요되었으며, 그로 인해 임노동 시장에서도 여성의 일은 가치평가되고 저임금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있어왔다. 그 중 돌봄을 둘러싼 쟁점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 돌봄노동 사회화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둘째,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받을 서비스의 질과 돌봄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근무조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특히 돌봄노동 사회화 방식을 둘러싼 쟁점은 유료화할 것인가, 유료화한 다면 현금과 현물 중 무엇으로 하며, 누구에게 지급할 것인가?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수당을 지급한다면 가족, 친지 등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 등등의 쟁점이 있다. 몇 가지 논란과 쟁점에도 불구하고 여성정책 들은 대부분 돌봄을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유료화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장소를 가정이 아닌 공공시설로 만드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어린아이와 노인, 장애인들을 모두 공공시설로 보내고, 여성들은 일터로 나가는 것이 자유로 나아가는 삶일까? 그 시설이 모두 질 좋은 무상서비스로 제공된다면 좋은 것일까? 지역, 계층, 성, 나이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국민 모두가 제공받아야 하는 공공시설을 무료이면서 질 좋게 유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야 하며, 그 세금을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하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노동해야 하는가? 그것은 국가 차원으로 볼 때 ‘제3세계’라는 식민지와 자연에 대한 착취 없이 가능한 일일까?

 

여성운동은 시대에 부응하는 많은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 방향으로 계속 갈 것인가? 여성운동의 ‘동등화 전략’의 주요 목표가 남성사회 안에서 남성이 자연으로부터 착취한 것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동등한 몫을 요구하는 것인가? 이러한 ‘동등화 전략’은 우리 삶의 온전한 토대로서 지구생태계와 양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평등해져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평등해져야 하는 것인지 고심해야 한다.

 

 

‘생산’ 중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여성운동을 위하여

: 자급적 관점

 

얼마 전에 지율스님이 만든 영화 ‘모래가 흐르는 강’을 봤다. 세 명의 할머니들이 평생을 살아온 마을과 허리반이 꺾이도록 공들여 가꾼 밭고랑과 솔향기가 나서 좋다던 마을 어귀… 그들의 문화와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수만 년 동안 흘러내려와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내성천이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온몸으로 저항하며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오는 걸 막고 계신다. 이렇게 4대강과 주변 마을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이며 그 중 청소년과 노인 자살률이 심각한 나라. 정부도 규제하지 않고 기업도 책임지지지 않는 가습기 살균제와 불산가스로 시민과 노동자 수십 명이 죽어가는 사회. 결혼하지 않을 권리와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육아부담이 크고 미래가 불안해서 OECD 국가 출산율이 꼴찌인 나라는 문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어떤 전망을 내놓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은 ‘젠더’ 문제가 아니므로 여성운동의 과제는 아닌 걸까? 산업사회 이후의 진보적 담론과 사회운동은 생태사회운동을 제외하면 모든 진보적 운동이 ‘생산’을 중심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개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 노동자와 자본가, 지방과 서울,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모두가, 산업화가 가져온 성장의 열매나 하이테크놀로지의 수혜를 얼마나 ‘평등하게’ 혹은 ‘공평하게’ 나누는가를 둘러싼 인권(자유와 평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정책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이런 ‘따라잡기식 개발’이 과연 가능한가? 평등을 가져오고 있는가? 우리가 바라는 평등과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무엇과의 평등 혹은 자유인가? 무엇이 생산적인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가?

 

산업사회와 젠더 부재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분석틀로 산업사회가 필연적으로 볼모 삼고 있는 ‘비가시화된 노동/계산되지 않는 노동’을 드러낸다. 그림자 노동은 상품을 사용가치로 실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이다. 예를 들어, 채소와 달걀, 쌀이라는 상품으로 배고픈 아이의 욕구를 채우고 그 아이에게 충족감을 주기 위해서는 식단 짜기-자동차로 마트가기-장보기- 요리하기-밥상차리기와 설거지 등 일련의 과정이 수행되어야 한다. 비가시적인 노동 대부분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는 텃밭과 닭장에서 채소와 달걀을 가져와서 요리하면 되었으므로 현대의 그녀와는 동일한 결과물을 위해 전혀 다른 노동을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밥상을 차리기 위해 혹은 일하러 가기 위해 자동차를 구입·유지하고 보험료를 내야 하고, 이를 위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고 가족과 마주하는 저녁밥상은 존재하기 어렵다. 일리치가 보기에 자급노동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 맞벌이 부부의 삶은 여성과 남성 모두와, 모든 임금노동자를, 방향상실, 고독감이라는 병으로 이끌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라는 책에서 폐쇄된 공동체 생활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 지역 특유의 젠더-몸짓, 말투, 도구 사용, 심지어 발걸음에까지 배어 있는 여성과 남성의 다름-가 부재한 것이 현대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있었던 여성과 남성 사이의 비대칭적인 상보성이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단일한 성(unisex)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이다. 현대사회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동일한 요구를 가지고 있으며, 동 일한 ‘노동’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전근대와는 달리 필연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경쟁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일한 성의 경제적 평등은 적도 이남과 이북의 GNP수렴이 가져오는 성장 지향의 이상과 동일하게 평등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실현가능하지도 않다 고 한다. 일리치는 젠더가 지배하는 곳에서도 여자는 종속적일 수 있지만 젠더가 부재한 채 경제가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는 제2의 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남성의 노동모델을 기준으로 모두가 똑같이 경쟁하기 때문이다.

 

일리치의 말대로 현대사회는 임금노동에 지배당하고 집착하는 사회가 되었다. 원래는 활동-일-노동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임금노동’과 ‘일’은 동의어다. 그래서 서너 명의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주부조차 ‘일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임금노동은 일상생활, 특히 아이들과 노인에게 직접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여성의 일이 아닌, 산업화 된 남성의 노동모델이다. 따라서 동등한 임금, 동등한 직업, 동등한 승진 과 같이 임금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이란, 결국 남성이 만들어놓은 삶의 방식에 여성이 점차 적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노동조합과 임금 요구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자급 경제를 파괴하는 전쟁이야말로 자본의 진짜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의 자급능력이 완전하게 파괴될 때에만 자본의 힘은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전쟁은 자급 일을 식민화할 뿐 아니라 우리의 언어, 문화, 식량, 교육, 사고, 이미지, 상징을 식민화한다. 단일노동, 단일 언어, 단일 문화, 단일 식량, 단일 사고, 단일 의약, 단일 교육이 우리가 지녀왔던 다양한 방식의 자급을 대체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의 자급적 관점

마리아 미즈는 『에코페미니즘』에서 ‘자유’란 ‘필요의 영역’을 정복하거나 초월함으로써가 아니라 필요의 제약, 즉 자연의 제약 ‘안’에서 자유, 행 복, ‘윤택한 생활’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초점을 맞출 때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보편화될 수 있지만 필요‘로부터’의 자유는 소수에게만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급적 관점은 상품이 아니라 삶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상품이 아니라 직접 해결한다. 먹거리는 마트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텃밭을 통해 가꾸고 얻어내며, 자존감 상실과 애정부족을 쇼핑중독이나 권력중독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신뢰의 회복을 통해 실현한다. 지역공동체에서 만들어낸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며 지역공동체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폐기물은 생산하지 않는다. 전 지구적인 책임감을 느끼지만, 전 지구적인 생산-유통-폐기 시스템에 탑승하지 않는다. 보다 많은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 것이고, 이를 위해 마을공동체의 아이와 어른들이 모여 서로의 재능과 기술을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고) 교환하고 나눌 것이다. 노년의 복지를 사보험과 저축으로 보장받지 않고, 관계와 공동체를 복원하고 이를 신뢰하는 것을 통해 보장받을 것이다. 마리아 미즈가 말하는 자급적 관점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경제활동의 목표는 익명의 시장에 산더미 같은 상품과 화폐(임금 혹은 이윤)를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창조, 혹은 재창조가 된다. 자급자족, 지역성, 국가관료 주의로부터 탈중앙집중화가 원칙이다.

2. 새로운 관계에 근거한다. 자연과의 관계 혹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야 한다. 자급 적 안전욕구는 개인의 은행잔고나 사회적 복지국가에 대한 확신으로 충족되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3. 자급적 관점은 참여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다. 의회뿐 아니라 나날의 삶과 생활양식이 정치의 전장이다.

4. 자급적 관점은 다면적, 혹은 시너지 효과를 낳는 문제해결방식을 요구한다.

5. 과학, 기술, 지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6. 문화와 노동이 재결합하고 부담으로서의 노동과 즐거움으로서의 노동이 재결합한다.

7. 물, 공기, 쓰레기, 토양, 자원 등의 공유재산을 사유화하고 상업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과 제안은 많은 비판에 부딪친다. 자급 접근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돌봄과 살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성친화적이지 않다거나 여성들은 영원히 지구청소부가 될 것이라는 비판들이 있다. 혹은 삶을 자급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 이미 복잡하게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실현가능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안전하고 환경 부담이 적은 친환경물품을 생산하고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도 한다. 물론 변화로 가는 길목의 중간전략으로서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환경친화적인 상품을 만들어내도록 정부정책을 제안하는 것, 남성과 평등하기 위해 먼저 현재 만들어진 사회제도와 권력에 동등하게 참여한 뒤 새로운 사회를 제안하는 것은 진정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일의 개념이 임금 노동으로 축소되듯이 경제의 개념은 이렇게 상품생산으로 축소되었다. 패스트푸드가 제공되고 서비스 상품이 여가를 대체해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주부라는 역할이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생존노동-생계적 노동이 삶을 유지하는 노동이며 이를 중심에 두고 일을 다르게 이해하는 개념이 필요하다. 임금 노동 체계의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것 이 중요하다. 임금노동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임금노동의 지배에 종말이 필요하다. 더 높은 비율로 자급과 임금노동을 병행하고 결합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만이 담당해서는 사회를 바꿔낼 수 없다. 젊은 남성 들이 보수를 받지 않는 살림과 자급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젊은 남성들이 아이와 노인을 돌보고 마을공동체를 돌보고 상품이 아니라 삶을 생산하는 영역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도시를 경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도 함께 시작해야 한다. 도시를 다시 경작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도시를 수동적인 소비만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필수품들을 생산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는 이제 기생적 존재방식에서 벗어나 다시 돌봄과 환대가 일어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서구의 에코페미니스트 이네스트라 킹은 “여성주의 운동의 결과로 이제 겨우 맛보기 시작한 여성들의 파이 한 조각조차도 부패되고 발암성을 유발하고 있다.(중략)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는 체제 내에서 평등하게 참여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고 문제제기 하며 발암물질이 가득한 파이의 공평한 분배를 넘어 파이 자체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정치, 사회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 정치는 우리가 ‘어떤 파이’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공유할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성찰과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 남성, 뭇생명(자연) 모두를 죽이고 있는 이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건강한 파이/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은 모노컬쳐 방식으로 획일화되고 상품화된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삶에는 무수한 존재들의 차이와 다 양성이 폭력적으로 거세되어 반생명적이고 끊임없는 결핍과 불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을 비틀어내기 위해, 혹은 새로운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다음의 물음을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원하는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가? 여성과 남성, 자연과의 조화와 존중 속에서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돈 중심의 물질화된 삶과 경쟁적인 사회, 획일화된 성공신화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삶/생명 밖으로 내몰리게 하는 사회 속에서 무엇을 바 꿔내야 하는 것인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 전쟁과 살육, 공동체와 인간성의 상실, 사회적 관계망의 부재 속에서 함께 공존하며 삶을 이어지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등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시작 하고 그로부터 행복의 미래를 설계해가는 삶의 기획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삶의 기획은 1) 무한한 인간의 욕망이 적정 수준에서 자기절제를 인정하는 것, 2) 삶의 다양성과 차이, 다른 삶의 상상력과 실험들이 마음껏 펼쳐질 수 있는 장(소)을 여는 운동과 정치, 3) 내 안의, 우리 안의 자연을 회복/치유해 가는 것, 4) 삶과 일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삶, 5)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을 넘어 돌봄과 호혜의 삶을 회복하는 것, 6) 여성/ 여성성, 남성/남성성에 대한 조율을 통해 생활의 주체들이 자기로부터의 활력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 7) 기존의 권력 패러다임과 거리를 둠으로써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혹은 힘없는 자들이 스스로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임파워먼트를 강화시켜가는 것, 8) 기존의 권력, 제도, 가치, 획일화된 삶을 거부하며 절제의 미덕과 협력의 진정한 행복을 아는 ‘용기’ 있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9) 혼자가 아닌 개인과 개인 간의 자율적인 연합이 다양한 삶의 연대로 사회적 안전망과 삶의 질을 서로 보장해줄 수 있는 관계망을 넓혀가는 것. 이 속에서 진정한 살림, 행복한 미래가 서서히 오리라 희망해본다.

(후략)

 

* 전문은 『모심과 살림』 1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모심과 살림』은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으로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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