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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넘어서
2015-01-08 09:21:00

 

* 『모심과 살림』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넘어서

 

글 정수복 (사회학자, 작가)

 

 

불의한 세상과 검질기게 맞서면서도

내면이 황폐해지지 않는

새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 김기석, “느른해진 영혼” 중에서

 

 

 

한국 사회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세월호 사건 발생 이후 진행된 극한 대립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과 국민들의 목소리가 지속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좌파 단체’, ‘정부 전복 기도’, ‘종북’, ‘선동꾼’ 등의 이념적 갈등을 조장하는 용어들이 다시 등장했다. 정당한 문제 제기를 ‘종북 세력’, ‘불순세력’으로 몰아세워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정치적 여론 조작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그런 이념 공세 앞에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가는 방식 이외에 다른 대응은 불가능한 것일까? 합리적 토론을 통한 납득할 만한 문제 해결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이런 문제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 한다.

 

모든 문제에는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에도 뿌리가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갈등 구조는 6.25전쟁이라는 열전을 거쳐 동서 냉전이라는 큰 틀 안에 위치하였다. 그것은 한반도에 강고한 분단 체제를 형성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미소 양극 냉전 체제는 종식되었지만 한반도의 분단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냉전 체제 이후 시장이 개방되고 경제가 세계화되면서 중국은 이제 미국과 더불어 G2가 되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을 비롯한 교류가 증가하면서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반도 평화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남북 분단 체제는 남북한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의 어려운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해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남북 냉전 체제가 지속되는 한 남한 주민의 삶도 결코 편안할 수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북한을 염두에 둔 남한 내부의 이념 논쟁은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형성되어 해방 이후 분출한 좌파 세력은 한국 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서 궤멸되었지만 1960년 4.19 이후 다시 형성된 남한의 비판 세력은 해방 이후 5공에 이르는 시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현대사를 둘러싼 해석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진보정당의 후보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전력을 공개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공간, 제주 4.3항쟁과 여순반란, 그리고 6.25전쟁 당시 벌어진 온갖 억울한 죽음과 누명은 그 자손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 일어난 억울한 죽음은 겉으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개인사와 가족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응어리진 문제로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친일을 하고 해방 이후 친미 세력이 되어 독재정권을 지지하며 지배층·부유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담론은 오늘날까지 서민층과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 일부에도 호소력을 가진다. 과거 그런 비판 담론은 쉽게 친북의 입장으로 선회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세습독재정권이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남한 내부의 비판 담론이 친북이나 종북의 입장으로 선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은 남한 사회 내부의 비판 담론을 종북이니 친북이니 하는 방식으로 매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은 현대사 해석상의 이견을 쉽사리 이단으로 정죄하여 척결과 박멸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렇게 될수록 진보를 자처하는 비판 세력은 자신들의 비판적 현대사 해석을 더욱 강하게 지키려고 할 것이다. 서로를 빨갱이와 친일파라고 단죄하는 사람들 사이에 합리적 대화나 공적 토론이 가능할 수 없다. 친일, 친미, 수구라는 딱지와 종북, 친북, 좌빨이라는 딱지를 상대방의 등 뒤에 붙이려는 상황에서 대화와 합리적 토론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런 이념 갈등은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공식적인 담론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그런 비판적 역사 해석은 정권의 정통성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뿌리를 부정하는 ‘자학사관’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무릇 세상에 돌아다니는 담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지금 이대로 가면 큰 문제가 없다는 담론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면, 지금 이대로 가면 희망이 없기 때문에 대안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론을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보수 담론과 진보 담론을 각각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기득권 세력의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담론이고 유토피아는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대안적 질서를 내세우는 대항 세력의 자기 정당화 담론이다. 각각의 세력은 자기 세력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며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유포시킨다. 어느 사회에나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입장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는 입장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대립과 갈등을 상호 합리적 소통을 통해 극복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립하는 두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 부정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양측 모두 의식의 한 부분은 언제나 불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 어디에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갈등을 완화하고 해소하고 나아가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방안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파괴적이고 에너지 낭비적인 갈등을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때 사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서로 대립적인 생각을 그보다 더 나은 제3의

생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포용하면서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회야말로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갈등 처리 방식에서 얼마나 성숙을 경험했는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보와 보수, 극우와 극좌, 친일과 친북, ‘좌빨’과 수구,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친재벌과 반재벌, 신자유주의와 복지국가론 등으로 서로 쌍을 이루는 이념 갈등은 때로 잠잠하다가도 무슨 일이 터지면 다시 출몰하여 우리 모두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서로 지지 않으려는 서슬 퍼런 맞대결, 혐오와 증오의 관계, 이기느냐 지느냐, 밀어제치느냐 밀리느냐 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대결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금지될수록 언어적 폭력은 난무한다. 막말의 홍수가 범람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런 현실에 질리고 막말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가격하고 타격하는 비방 담론이 지속될수록 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무관심과 판단 중지의 상태로 들어간다. 아무려면 어떠냐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럴수록 정치는 정치인들 사이의 부질없고 속절없고 쓸모없는 말싸움으로 전락하고 타락하고 몰락한다.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한반도 주민의 역사적 체험

 

일국 중심의 민족주의 사관을 벗어나는 초국적 역사(transnational history)가 등장하고, 한중일을 포괄하는 동아시아가 역사 분석의 단위로 떠오르고, 세계 전체의 역사를 다루는 ‘지구사(global history)’를 넘어 우주의 발생에서 오늘 인류에 이르는 존재와 생명의 모든 역사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가 이야기되고 있지만 한반도의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둘러싼 해석상의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한국 근현대사 해석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조선 말기 개화파와 전통주의자의 대립, 식민지 시기 친일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의 분할, 해방 이후 미군정기의 단정노선과 통일노선의 대립, 한국전쟁과 양민 학살, 냉전 시기의 반공이데올로기, 5.16쿠데타 이후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대립, 1980년대 자본주의 비판과 노동운동, 통일운동과 시민운동, 도시화와 산업화, 지역 갈등과 빈부 격차,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정권교체와 이념 갈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경험 세계는 한반도 주민들의 역사적 경험을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할 수 없도록 만든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은 남고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서로 다른 해석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어느 하나의 입장이 다른 편의 입장을 소멸시킬 수 없다. 이견을 이단으로 몰아 그 뿌리를 뽑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쉽게 청산되지 않는다. 두고두고 새롭게 재해석 될 뿐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특정 집단의 이익에 맞추어 독점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감추어진 역사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며 왜곡된 역사 해석은 언젠가 새로운 해석에 의해 도전받기 마련이다.

 

 

제3의 시선으로서의 초超중도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나 가정과 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일정한 정치적 의견을 갖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정치적 입장은 한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서 갖는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정치적 갈등이 전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이 되면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개인들 사이에 상호 불통을 넘어 혐오와 증오를 확대재생산한다.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우정도 갈라놓는다.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애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안정된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특히 1980년대가 그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들은 각자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거나 대선 등 정권교체의 시기가 오면 다시 어느 한쪽 진영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다. 우리 편과 상대편, 아군과 적군의 선명한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적대적 관계를 대화와 토론, 소통과 타협을 통해 상호 인정하는 관계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우선 누구나 지켜야 할 공동의 규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상호비방 중지는 그 첫걸음이다. 그 다음으로 고집불통에서 열린 소통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첨예한 대립 상황이 되면 그런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최소한 삼분법적 사고의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하는 제3의 입장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제3의 입장을 ‘사쿠라’라고 비난하고 박쥐에 비유하거나 양비론 혹은 기회주의라고 매도하지 말고, 제3의 의견이 양 극단을 조정하고 종합하여 더 나은 의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 입장을 흔히 ‘중도’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것을 ‘초超중도’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단순중도’가 극좌와 극우의 양 극단과 같은 평면의 정중앙에 위치한다면 ‘초중도’는 좌우의 평면 스펙트럼보다 다소 높은 지점에 위치하며 상황에 따라 이동한다. 그러면서 양 극단을 넘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안을 모색한다. ‘초중도’를 ‘사이(between)’에서 ‘너머(beyond)’를 모색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다소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양 극단을 이동하며 전체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판단하고 개입하는 세력이 초중도다. 초중도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라는 양 극단이 내세우는 명분 뒤에 감추어진 실리를 드러낸다. 초중도라는 위치는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위치할 수 있는 지점이다.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사고하는 사람은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 편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초중도의 입장을 가질 때 기존의 질서에 스며들어 있는 기득권과 그에 대항하는 비판 세력의 욕심과 한계를 모두 꿰뚫어볼 수 있다. 그런 초중도 세력이 존재할 때 소모적 이념 대립을 완화시키고 전체를 위한 제3의 시선 모색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 갖기

 

초중도의 입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건반사, 비성찰성, 즉흥성, 난폭성을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관점으로 왜곡된 현실을 온전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무지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분을 보고 전체를 보았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겸허한 자기성찰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고 있는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먼저 지식사회학적 관점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는 그 사람의 가족 배경, 출신 지역, 직업, 교육수준, 종교, 계급, 소득과 재산 정도가 작용한다. 지식사회학은 자신의 입장이 그런 요소들에 의해 어떻게 영향 받는가를 생각해보고 그런 개별적 입장을 떠나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을 키워준다. 지식사회학의 관점을 가질 때 자신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헤아리게 되고 자신의 입장을 상대화시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상대방을 바라본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바라본다. 각자가 자신이 속한 가족을 비롯한 사회적 집단과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을 ‘사회적 성찰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식사회학은 그런 능력의 배양에 기여할 수 있다. 누구라도 ‘사회적 성찰성’을 가질 때 이전투구하는 상황을 벗어나 인간적 품격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내뱉는 막말을 거두고 품위 있는 언어,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 자신의 관점이 갖는 부분성을 인식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경청의 능력을 키워나갈 것이다. 너와 나의 부분적·제한적 진실을 넘어서는 더 큰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상대방을 포용包容하면서 자신의 좁은 관점을 초월超越하는 포월包越의 논리가 생긴다. 그것이 ‘초중도’의 논리다.

 

 

‘사회적 영성’ 높이기

 

초중도의 입장을 갖기 위해서는 지식사회학적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영성’의 고양이 필요하다. 세상의 여러 문제는 현실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합리적 분석 너머 초월적 세계와 이어질 때 해결이 가능해지는 문제도 있다. 모든 종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기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물고 뜯는 속된 세계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의 존재를 각성시킨다. 초월적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벌이는 권력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위한 다툼은 부질없고 유치한 싸움이 된다. 종교는 미움과 질투가 아니라 사랑과 협력을 가르친다. 속된 세계의 다툼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넘어서는 거룩한 세계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런 초월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갈등을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기 안에 의미 있고 숭고한 삶을 위해 자신의 존재 상태를 초월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 이 열망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정화하며 넘어서려고 노력한다. 숭고한 삶을 위한 이런 초월의 열망이 ‘영성(spirituality)’이다. 영성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면서 더 넓은 존재론적 맥락 속에 자아를 위치시키려고 시도할 때 발견된다. 영성을 통해 인간은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상대화할 수 있다. 고귀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영성 없이 소유와 소비와 쾌락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정신적으로 덧없고 공허하게 되어 쇠퇴하고 만다. 자신의 이익, 권력, 명예, 쾌락 추구에서 빠져 나와 타인과 함께 나누는 마음,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타인을 섬기고 모시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영성을 높여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을 넘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마저도 포용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사회적 영성’이라고 한다면 그런 능력의 배양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근본적 힘이 될 것이다.

 

 

불의에 저항할 때는 용감하게 해주시고

그러면서도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성찰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 김기석, “불의에 저항 할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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