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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혼자라면 외롭고 함께라면 괴롭고
2015-04-23 18:04: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혼자라면 외롭고 함께라면 괴롭고

: 성숙한 개인주의가 만드는 공동체

 

김의욱 (시민교육공동체 에듀플랜 대표)

 

 

공동체에 대한 배움(學)과 익힘(習)

 

마을만들기 교육에서 만나는 수많은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공통적인 이미지는 과거형이다. “마을공동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를 질문하면 대개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알 수 있었던 친숙한 이웃관계와, 농경사회의 생활 습관이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런 마을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정겹고 따스한 공동체로 회귀할 수 있기를 막연하게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즐거운 회상으로 그려지는 마을은 우리의 기억에만 존재하거나, 혹은 그 기억조차도 정체가 불분명하게 편집된 것이어서 과연 그런 마을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머리에 그려지는 그 마을은 유토피아와 같은 색깔과 바람으로 덧입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동체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과거의 경험에 속박되어 있다. 학교에서 공동체를 배울 때 울력, 두레, 품앗이와 같은 농경사회의 협동방식을 공동체의 전형으로 배웠으며, 사회시간에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와 같은 분류법을 통해서 과거의 경험하지 못한 사회와 현재의 경험 사이의 거리를 통해서 공동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동체의 전형은 현재의 모습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여기게끔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만들기 교육 과정에서 자신의 마을에서는 친밀하고 서로 흉허물 없이 지내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주민을 만난 적이 있다. “그렇게 친근한 이웃들은 몇 분이나 되세요?” 잠시 후에 그분이 이렇게 다시 덧붙였다. “사실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살아온 몇몇끼리만 그렇고, 오히려 새로 이사 온 사람들과는 말도 안 붙여요.” 이렇듯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마을공동체(학습된 공동체)와 우리가 살아온 마을의 세월(몸에 익혀진 공동체) 사이에는 큰 간극이 벌어져 있다.

 

분명한 것은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실체를 생각할 때 우리의 기억은 새로운 정보와 현재의 경험과 어떤 가치와 방향에 대한 의미가 결합되면서 새롭게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실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만나게 되는 공동체와 같은 대상은 더욱 더 구성적인 지식과 경험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변하지 않는 어떤 고유한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현재의 생각들이 투영되어 있으며, 시대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원형과 실체를 파악하고 규정하기보다는 공동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바람, 기대,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 ‘도시에서도 공동체가 의미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운 우문이 된다. 오히려 ‘도시화되고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 삶을 구성하는 공통적인 기반은 무엇이 있을까?’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과거의 미분화된 농경사회 패러다임에 두고, 그러한 공동체가 주는 친밀함과 서로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가까운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현대의 공동체주의자들이, 정작 그들 자신은 개체 중심적이고, 경쟁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

 

마을만들기 현장에서 만난 주민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서

마을만들기 활동에서 만나는 많은 주민 지도자들은 현재의 마을을 사랑하고 마을의 이웃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지도자들은 솔선수범과 봉사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들과의 교육에서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솔선수범하지 마세요. 솔선수범은 과거 산업사회가 만든, 새마을 시대가 만든 이데올로기입니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진 않지만, 여전히 나는 마을공동체에서 솔선수범은 필요치 않은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마을공동체는 앞장서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많은 주민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대신해서 일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주민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이런 마을에서는 공동체적 관계가 강해질수록 마을의 색깔은 단순해지며, 창의적인 변화의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대안학교 학부모 회의의 토론과 논쟁 현장에서

많은 대안학교 학부모 회의는 한번 시작하면 끝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전체 학부모가 참여하는 회의의 경우,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경우, 쟁점이 있는 사안일 경우 성공적으로 회의를 마무리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 원인이 각자 자신의 논리와 주장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면 경청과 공감과 같은 의사소통 훈련과 효과적인 갈등관리, 참여형 회의진행의 기법을 적용하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대안학교에서는 학부모 대상으로 민주시민 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긴 회의, 반복되는 논쟁이 쉬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적극적인 참여 정신이 높은 학부모들이 오히려 서로의 작은 차이에 대해 일치점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서로의 다름을 끝까지 인정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같아지는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지역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관계에서

공동체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가지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실천 활동을 시작했다. 서로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기꺼이 내고 자발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런 자발성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각자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공동체를 상대방도 똑같이 그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일을 벌여나가면서 차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선한 의도와 적극성, 주도성이 어느 순간부터 나의 영역과 일거리를 넘나드는 침략으로 여겨지면서 함께 일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는 몇 가지 생각의 고리가 들어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단결하고 힘을 모으는 동질화가 공동체 만들기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렇게 서로가 가진 힘을 보태서 더 큰 힘을 만드는 협력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했던 방식이다. 구성원들의 동질성도 높고, 공유하는 공동수단도 강력할 때 이런 공동체는 강한 결속력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십에 대한 생각도 들어 있다. 묵묵히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활동, 조직을 앞장서서 이끌고 헌신하는 리더의 모습은 그 공동체에 큰 힘이 되는 덕목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동체 패러다임이 투영되는 현실의 마을, 소속된 조직, 활동의 터전에 있는 이들은 그다지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동질성을 찾아내고 집단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오히려 개별자들은 자신의 영역이 침해되거나 자신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 것에 더욱 민감하며, 자신의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을 때 그 모임에 속한 것을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현대의 공동체는 다양성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이제는 식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다양성은 현대의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적인 재료가 된다.

 

그렇다면 다양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다른 사람들은 상대방의 그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understand)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와의 다름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나의 나다움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알아야 타인의 다름을 알 수 있는 준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타인의 색깔을 존중하고자 하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존중과 인정의 핵심은 나의 나다움, 나의 특질이 선명해지는 것에 있다. 내가 선명해질수록 타인의 색깔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타인과 나의 차이를 볼 수 있는 안목도 갖게 된다. 즉 개인성이 강해질수록 다른 개인과의 접점, 다양성의 관계 맺기도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나답게 되기’가 전제되지 않고, 나의 요구와 나의 태도에 대해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게을리 한다면 선의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내걸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례’를 범하기 십상이다. 즉 미분화된 나의 욕구가 우리 모두의 욕구라고 이해하게 될 것이며, 나의 선한 의도와 사고방식이 구성원 모두에게도 동의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어,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가치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심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오버’를 솔선수범, 치열한 토론, 이타적인 봉사활동으로 이름 붙이면서 그 이름 뒤에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의도와 욕망’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토론과 논쟁, 타인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사실 나의 욕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서로 다름과 그 다양성을 이유로 만나는 현대사회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선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잠시 외로운 자신을 못 견뎌서 서둘러 ‘우리 함께’를 외치게 되면 그 말의 참뜻을 오해하거나 타인의 목소리를 곡해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이타주의

 

생명의 진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히기 위한 다윈의 문제의식 중에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생명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기적 속성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와 이타적 속성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유전자를 번식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이타적 유전자는 필요할 경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데, 결과적으로 개체는 죽고 그 이타적 유전자를 번식시킬 기회도 잃게 된다. 반면 비겁한 이기적 유전자는 오래토록 살아남아서 세세토록 번식의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몇 세대가 반복된다면 결국 세상은 이기적 유전자만 남게 되는 것일까?

 

다윈이 이 질문을 통해서 발견한 것은, 이타적 유전자도 확장된 이기주의의 실현이라는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즉 개체를 희생시키는 이타주의는 비슷한 이타적 유전자를 가진 동료를 살리거나 유리한 번식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동질적인 유전자를 번식시키는 성공전략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모든 생명체는 철저하게 이기적일 때 가장 잘 살게 되며, 이타적 행동도 자기실현의 다른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 사회에서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근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러한 이타주의를 공동체의 표상으로 학습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를 관통해온 많은 사회운동, 협동운동에도 이타주의적 패러다임은 권장되고 칭송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도 시민운동과 마을공동체, 협동조합 활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덕목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여전히 이기주의에는 불편한 느낌이 덧입혀져 있으며, 모두를 위한 보편적 이익을 앞에 세우고 나의 요구와 이익은 뒤에 감추는 태도를 덕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우연한 기회에 참여하게 되었던 미국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타주의적 껍데기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신神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비한 빛으로 여기는 퀘이커들은 신앙의 기본 단위를 철저하게 개인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을 토대로, 타인의 신과 만나고 그 신의 소리를 서로 듣는 것을 예배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니 유일한 신, 초월적인 신, 우주에 존재하는 신과 관련한 담론은 그들에게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내 안에 있는 나의 거룩한 신성을 알게 되고, 그 신성한 의미를 내 삶에서 실현하는 것일 뿐, 나와 무관한 초월적인 존재에게 나를 의탁하거나, 그 존재에 나를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신관은 그들이 만드는 공동체적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상대방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존중하고자 노력하며, 서로의 다름이 상대방의 필요를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다양한 퀘이커 유파들이 만들어 내는 분파적 모습들도 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더 완전한 모습에 가까워진다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권력의 정점이 되는 전문 성직자를 세우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규칙이나 교리를 제정하는 것을 거부하며, 다수의 힘으로 결정하는 다수결을 배제하는 것 등은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들이다. 이렇듯 퀘이커의 종교관은 철저하게 개인 중심적이다. 신앙의 주체는 개인이며, 관계는 그 개인성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개인성을 통해서 더 풍부한 신성을 나누는 과정이며, 공동체는 각 개체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의사결정

 

많은 공동체가 의사결정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영국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회의에서는 ‘아니오’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곧바로 반대하거나 부정할 때 상대방은 그 말로 인해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공동체의 치명적인 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

 

반면 기업과 같은 곳에서는 이런 부정과 논쟁의 언어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다. 때로는 이러한 논쟁의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결정과 집행의 중요한 기술이 되기도 한다. 기업에서는 인간관계의 조화나 그 공동체의 성장보다는 기업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것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소속된 공동체의 대화 방식과 의사결정 방식은 어떠한가? 내가 1995년 광명YMCA에 처음 들어와서 질문 받은 것이 바로 회의진행법이었다. 당시 총무를 맡고 있던 고故 황주석 선배는 신출내기 간사에게 회의에서 동의가 영어로 뭐냐고 물으셨다. “Agree입니다.” “그럼 재청은?”이라는 다음 질문에 “글쎄요, re-agree인가요?”라고 답하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배웠던 회의는 대부분 사상논쟁이었고, 결정의 과정은 형식적인 절차로서 찬성과 반대를 표시하는 것으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공동체가 회의를 한다는 것이 서로의 의사를 정확하게 세워나가는 동의動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회의의 꽃은 동의에 있다. 회의를 통해서 나의 입장을 세우는 것, 상대방의 입장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래서 일치의 지점을 찾아낼 수 있는 각자의 입장을 확인해냄으로써 그 지점을 향해서 각자의 자리를 움직여 나가는 것이 회의의 역동인 것이다.

 

이렇듯 회의는 주어진 의제를 선택하거나 효율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행정의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거나, 그 공동체가 성장하고, 구성원 간의 관계가 더 강화되고, 새로운 비전을 생산하는 놀랍고도 신비한 일을 만드는 공동체 만들기 작업이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비즈니스 미팅Business Meeting이 있다. 이 회의는 공동체의 사무를 처리하는 월례회의로 교회의 제직회의와 같은 것인데, 이 모임을 이끄는 사무장은 공동체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담당한다. 한 달 동안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에 적합했는지를 서로 점검하고, 이를 통해서 함께 실천해야 할 과제들을 정리해 낸다. 물론 구체적인 사무행정에 대한 결정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의사결정 과정의 핵심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친구라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의 결속을 높이고 공동의 비전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비즈니스 미팅은 회의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감동하고 결정된 내용들을 내면화 할 수 있도록 하는 세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회의 전에 반드시 예배를 먼저 드리는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참가자들이 마음을 모으고 회의를 시작하도록 한다. 또한 사회자의 자세와 역할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들은 회의 이전에 갖추어야 하는 마음가짐과 회의의 목적을 내면화 하게 한다.

 

비즈니스 미팅에서는 미리 정해져 있는 질문들을 회의를 시작하면서 함께 낭독한다. 이 질문들은 공동체가 정한 목적에 우리의 일상 활동들이 부합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점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 질문들을 사회자가 낭독하고, 참가자들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묵상을 하고 나서 거기서 얻은 감화를 함께 나눈다. 즉 오늘 회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각자 점검하게 함으로써 마음을 모으는 작업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하이오 지역의 퀘이커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질문지들은 연례회의(지역전체 회의)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가 크리스챤의 생활과 행동, 회원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연례회의에서는 정기적인 월례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자기 점검을 하고, 회원들이 매일의 생활에서도 이 기준들을 지키도록 훈련하는 데 힘쓰기를 권고한다.

모든 회의에서는 아래의 질문들에 대해서 차분하게 읽고 숙고하고 거기에 응답하며 함께 나눈 생각들을 요약해서 회의록으로 채택한다.

질문1. 우리는 예배 모임에 제시간에 출석했으며, 잘 참여했는가? 예배에서 우리는 진실했으며, 신과의 교감을 잘 이루었는가? 우리는 친구들을 환영하고 친교를 나누는 데 진심을 다했는가?

질문2. 우리는 용서의 영성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 안에서 걸어가기 위해 힘썼는가? 우리 각자는 다른 이들의 신앙을 위해 배려하고 있는가?

질문3. ....

 

이런 질문들이 10가지 정도 되는데 각 모임의 특성에 따라 읽는 질문지가 다르게 사용된다. 어쨌든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다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모임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공동체들은 이 질문지에 대해서 깊은 성찰과 진솔한 고백들을 하게 된다. 질문지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응답만으로도 이미 회의는 완성되고, 참가자들은 감동과 일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이 고백들을 정리한 회의록은 참가자들의 확인을 거쳐 채택되고 그 공동체가 다음 비즈니스 미팅 때까지 실천해야 하는 지침이 된다.

 

이러한 공동의 성찰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의 영성을 확인한 후 회무처리를 하는데 이 회무처리에서도 기본 원칙은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있지 않다. 오히려 회무처리는 의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공동체가 더욱 성장할 수 있을까에 맞춰진다.

 

퀘이커가 추구하는 진정한 공동체는 성숙한 개인주의의 공동체적 표현이고, 진정한 개인주의는 성숙한 공동체주의를 개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공동으로 집행하는 모든 사무는 개인의 성장과 성숙에서 시작하고 개인의 완성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의 자세와 역할

 

퀘이커 모임을 주재하는 서기의 훈련과정을 통해서 그네들의 회의 진행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많은 퀘이커 모임에서 동성연애에 대해 심각한 토론이 진행 중인데 이 사례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한 모임에서 동성연애자 회원이 있었는데 이 회원이 비회원인 동성연애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기존 회원의 경우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서로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동성애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결혼을 해서 새롭게 동성애자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신앙심이 신실한 두 명의 회원이 성서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내용을 말하면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반면 다수의 회원들은 동성애자의 회원가입을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사무장은 이 안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결론은 이렇다. 회의진행자는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소수자를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이고, 서로 다른 생각을 어떻게 이해(understand)할 것인가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이제 안건의 방향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임으로서 공동체가 더 넓고 포용력 있게 성장하는 것으로 맞춰지게 된다. 그러니 합의안을 마련해서 봉합하거나 절묘한 타협안을 만들거나 다수결로 투표를 하거나 어느 집단이 양보하는 방식은 결과만 그럴듯할 뿐 정작 중요한 공동체 내의 이견은 그대로 남게 되고, 이런 회의는 반복될수록 공동체의 분열만 조장하게 되므로, 바쁘고 심각한 의제일수록 구성원의 일치에서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 안건을 다룬 공동체는 공동체 내의 이견에 시선을 집중했고, 그들은 그 견해의 차이에 집중하는 학습과 토론의 과정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안건이 제기된 것이 2월이었고,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예정은 6월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공동체는 3개월간의 학습을 통해서 이견에 대해 일치(합의가 아니라)를 이뤄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동성애 문제를 통해서 공동체 전체의 품격이 높아진 동시에 모두의 신앙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선물을 받았다. 공동체가 다루는 모든 과제와 도전은 피하거나 넘어가야 할 일감이 아니라 공동체를 성장·성숙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 의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는 것이다.

 

성숙한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만든다

 

현대사회는 전쟁터와 같다. 우리는 수시로 수많은 적과, 검문과 만난다. 자유주의라는 시장과 빠른 변화 속도와 우리의 신념을 위협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는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이렇듯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항상 우리에게 묻고 있다. “손 들어! 너의 정체를 밝혀라.” 이때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면, 우리는 그 전쟁의 상황에 휩쓸리게 된다.

 

진정한 자신의 욕구를 아는 것,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 자신의 경계가 어딘지를 가늠하는 것, 이러한 자기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권리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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