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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이 시대 청년으로 일한다는 것
2015-07-22 14:22:00

* 『모심과 살림』 5호(2015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이 시대 청년으로 일한다는 것

글 기은환(틈)

 

 

대학교를 수료할 즈음 나의 진로는 백수白手였다. 당시의 나는 백수야말로 빛나는 가능성의 총체라 믿었다. “속절없는 무능은 오히려 타락한 세속의 속살에 파고들어 깊은 균열을 안길 수 있다”는 내 스승님 말씀에 한껏 동의했으므로 나에게 백수라는 진로보다 더 나은 직업은 당장 없어보였다. 나는 완전히 무능했고 빈손이었으며 자유로운 이십대 중반이었기에 백수의 조건으로는 완벽한 듯 보였다.

 

다만 작은 가게를 운영하시며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이어가는 부모님과 사남매 중에 맏이라는 자리의 무게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나의 진지한 진로는 대개 철딱서니 없음으로 또는 현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다가 아예 도피한 것쯤으로 치부되었다. 가슴 아프게도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지 못했고 언니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했으며 지 혼자만 생각하는 ‘이기적 존재’로 전락했다. 가족을 충분히 설득할 만큼의 언어와 생활이 내게 부족했던 것이다.

 

예상했던 가족의 저항만큼이나 어려웠던 또 하나의 문제는 ‘먹고사니즘’이었다. 나는 금수저 아닌 밥수저만 물고 태어난 평범한 사람인데다 부모님께 빈손을 벌린다는 것은 세 명의 동생이 있는 나에겐 양심이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기술도 특출난 재능도 없는 내가 당장 가진 것이라고는 학비 전액의 학자금 대출뿐,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시절 늘 그랬던 것처럼 바쁜 꿀벌 같은 아르바이트생은 가능해도 시간이 많은 백수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때 마침 한 시민단체 대표님께 상근을 제안받았다. 가진 것 없던 내가 호기롭게 백수를 지향하는 모습을 도리어 인상적으로 보셨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기를 청소년단체와 함께했고 대학 시절 인권단체 인턴을 했던 터라 시민단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준비 없이 ‘운동’의 세계에 발 들인다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백수 못지않게 활동가 또한 세상과 사회를 배우며 공동의 것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백수 지망생 신분은 잠시 내려놓고 나의 첫 번째 일-노동이 시작되었다.

 

 

긴 듯 아닌 듯, 고용노동의 시작

 

단체는 대표님 두 분과 상근자인 나까지 총 세 명이었다. 조직 규모는 작았지만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신 두 대표님과 플랫폼 성격의 조직 특성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 내 시민사회의 많은 분들을 만나며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배움의 순간이자 만나는 모든 이가 배움의 존재라는 말처럼 사회 초년생인 내게 매 순간 성장의 기회들이 축복처럼 펼쳐진 듯 보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은 별개의 문제였다. 대표님이 바빠지실수록 업무는 점차 늘어나고 다양해졌다. 상근자가 나뿐이었기에 업무를 물어볼 사수가 없었고 일을 분담하고 비전을 공유할 동료가 없었다. 자연스레 업무시간이 길어졌고 초보인 나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일하는 구조 속으로 스스로를 들이밀었다. 축복처럼 펼쳐져 있던 내 일이 양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노동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낮은 활동비도 고민의 한 축이었다. 이미 짐작했고 각오한 바였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학자금, 통신비, 교통비, 보험비, 각종 CMS출금과 경조사비까지 하면 월급은 금세 로그아웃, 식비와 생활비도 부족한데 저축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마치 시지프스 신화처럼 매달 0에서 새로 시작하는 통장을 볼 때마다 내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나 개인이 삶을 생애사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하기란 이 상태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좋은 일, 다른 삶을 살고자 활동가가 되었지만 정작 내 현실에서 좋은 삶은 점점 아득해졌고, 자본주의적 자가 착취로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웃음이 사라졌고 눈은 탁해졌으며 정신은 둔해졌다. 몸과 마음이 소진된 자리에는 우울이 들어섰고 냉소가 나를 지배하게 두었다. 방어 기제와 억울함이 깊어짐과 동시에 결국 모든 문제는 나의 부족으로 돌아와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노동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하여 죽어간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계속 곱씹게 되었다.

 

그때 마침 사건 하나가 생겼다. 일 시작 후 1년 반, 여전히 어려움을 붙안고 있던 시기였다. 학교로부터 통지서 한 통이 날아들었는데, 이번 학기에도 졸업하지 않으면 재입학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문이었다. 나에게 졸업이란 ‘언젠간 해야지’ 정도의 막연한 것이었기에 졸업요건으로 제시된 사항 중 갖춰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졸업 준비를 더는 미뤄선 안 될 것 같아 부랴부랴 사직서를 썼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학부생을 마감, 마침내 진짜 백수가 되었다.

 

 

이 시대 [청년백수 1]의 자화상

 

아, 내가 (드디어) 백수라니..!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쉼이었지만, 사실 절실히 바랐던 여유이기도 했다. 이번에야말로 백수의 잉여로움에서 잉태되는 다양한 가능성을 수렴하여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지속가능한 창의백수”라는 부제도 붙였다.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임금노동을 해야했지만 기왕이면 나의 일을 자율 노동, 주체 노동으로 꾸려보자 생각했다. 주어진 밥상에 숟가락 얹으며 사는 삶보다는 건강한 식탁을 차리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나의 첫 자율·주체 노동은 ‘농農’으로부터 시작했다.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 많던 나와 내 친구들은 2012년부터 한 달에 한 번 충남 홍성군 홍동 지역에 내려가 농을 만났다. 도시에선 찾기 어려운 생명과 생태, 공동체적 가치가 넘실대는 그곳에서 우리는 청년 삶의 진로-농 진로, 농 창업, 농적인 삶을 모색해왔다. 그러나 주머니가 얇은 친구들은 서울과 홍성을 오가는 비용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는데, 백수가 되니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기꺼이 청년 도농교류 지원 프로그램에 쏟을 수 있었고 우리는 반년 동안 금전적 어려움 없이 도농을 오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자율, 주체 노동의 주제는 ‘사회적경제’였다. ‘다른경제 학습 동아리’라는 학습 조직에서 사회적경제의 역사와 사상, 실천 등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학습 도반들은 사회적경제를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애쓰시는 분들이었다. 학습이 진행되면서 선생님과 도반들은 서로의 삶을 함께 성찰하며 상호의존적 존재로 공생의 감각을 조금씩 습득해나갔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롭던 나는 조교로 학습 진행을 도울 수 있었고 학습 동아리 지원 사업에 담당자로 참여하여 학습의 여유와 깊이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이렇듯 나의 노동은 공동체와 연동되어 쓰일 때 빛이 났다. 때로 노동의 고된 순간들도 찾아왔지만 자기 노동의 주체로 공동체를 위해 즐거운 만큼만 일한 것이었기에 금전적 대가는 없어도 열정페이와는 전혀 다른 노동이 되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한 노동. 일할수록 관계부자, 마음부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러나 이전의 백수 지망생 시절과 달라진 점은 나의 살림살이를 함께 고민해주는 분들이 생긴 것이었다. 시민사회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스스로 노동을 조직하며 살고 싶다는 내 생각을 지지해주셨고, 다양한 형태의 일거리를 연결해주셨다. 이러한 일들 중 대개의 것들-시민사회 영역 행사 보조, 사회적경제 설문조사 진행, 서울시 청년허브 청년학교 조교 등-은 그 노동이 곧 진로와 맞닿은 공부가 되었다. 또한 이 덕분에 생계를 꾸리면서도 앞서 자율·주체 노동의 경험처럼 공동체를 위한 노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노동은 반대로 자존감을 앗아가기도 했다. 대개 나의 노동이 열정, 자원봉사, ‘좋은 경험한 셈’으로 둔갑되었을 때였다. 미리 약속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금액을 지급 날짜로부터 한참을 지나 받기도 했고, 활동비를 준다고 해서 한 달 넘게 일했는데 나중에서야 활동비 받는 게 필요하냐고 서로 알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자며 무급으로 수렴될 때도 있었다. 특히 좋은 일 하자고 모인 곳에서 내 노동이 쉽게 여겨질 때, 그런 취급을 받고도 싫은 소리 못하는 내 모습이 진짜 무능하게만 보였다.

 

꼭 필요한 생활비만 벌면서 시간이 많은 사람이고 싶었던 나.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매달 지출하는 고정비용이 높으니 이런 형태의 노동으로는 오랜 시간 일해야만 했다. 애초의 바람이었던 식탁을 차리는 삶은 저 멀리 떠나가고 맨밥에 물 말아먹는 처지쯤으로 느껴졌다. 우울과 부정적 생각이 가득한 내선순환 열차를 타고 나는 선로만 빙빙 돌았다.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시간대비 고소득’ 할 재주가 없다면 내가 사는 대한민국 자본주의 땅에서 백수의 지속은 욕심이었다.

 

 

청년의 마음 구조 살피기

 

지금까지의 기록은 [청년백수 1]로서 내 노동의 역사다. 당연하게도 나는 전체 청년의 표준이 아니며 다수를 대표할 수 없다. 이미 청년세대 내에서도 나이, 거주지, 학력, 빈부, 성별, 성적 취향, 혼인 여부 등에 따라 가지고 있는 고민과 이슈, 노동의 형태가 굉장히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나열했던 시민단체, 백수 지향, 농農적인 삶, 사회적경제 모두 일반 청년의 키워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사례를 들어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글 속의 고민과 어려운 감정들이 우리 세대와 함께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청년들의 지배적인 감정구조는 무기력과 불안, 소진이 아닐까. 각자도생 위험사회에서 다수 청년들에게 노동의 현장이란 자아실현의 장이 아닌 비정규직, 계약직,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열정의 수탈과 소외, 노동착취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무한경쟁을 강요받으며 자라왔기에 ‘함께’가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외로워도 슬퍼도 연대하지 못하며 결국 익숙하게 혼자 섬이 된다. 삶의 전망보다는 살아남기가 시급하기에 모래밭 위에 성을 짓듯 불안 위에 생존의 탑을 쌓는다. 속이 텅 빈 공갈빵 같은 기분을 상시적으로 느끼며 외로움과 슬픔 모두를 1인칭으로 수렴시킨다.

 

이런 우리를 두고 청년세대 담론이 무성하다. 88만원 세대(우석훈)부터 출발하여 3포(연애, 결혼, 출산), 5포(인간관계, 내 집 마련), 7포(희망 직업, 꿈)세대를 지나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버렸다는 다포기 세대, 그리고 이제 포기를 넘어서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는 달관세대까지 등장했다. 이에 더해 청년세대를 생존, 독존, 공존, 탈존(김홍중)이라는 네 가지 존재형식으로 분류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청년세대만큼이나 빈번하게 호출되는 세대담론이 또 있을까. 이미 산업화된 ‘청년을 위한 시장’은 지속적으로 청년, 청춘이라는 단어를 대중에게 노출시키며 그들을 위한다는 책, 영화, 여행, 힐링 프로그램을 쉴 새 없이 찍어내고 있다. 여타의 상품들처럼 이 시장에서 청년 역시 팔릴 만한 가치재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소비된다. 청년 시장은 청년의 불안을 타고 그 규모를 키워 가는데, 이상하게도 불안은 가시질 않는다. 이는 마치 전염병을 잡는다고 떠들지만 실상은 불안만 자극하고 증대시키는 시대의 형국과 닮은 듯하다.

그런데 다양한 담론과 상품 속에서 담아내는 청년세대의 모습은 설령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일지라도 불편하고 거북한 데가 있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주로 수혜의 대상이나 미완한 인간, 불쌍한 존재쯤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또한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청년들의 마음 구조는 잘 살피지 않으면서 얄팍한 심리와 의식의 일부만 읽고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느낌이 든다. 이들이 피상적 진단만 반복하고 대안을 만드는 데 게으른 사이, 청년들은 소모되어 지쳐가고 임시·과도기적 청년 시기를 지나 대책 없이 다음 세대로 밀려나 버린다.

 

나는 청년들이 여전히 자아실현을 욕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를 다포기 세대, 달관 세대로 만드는 사회 구조에서 욕망의 실행은 곧 빚이 되며, 그것을 바라봤자 성취의 가능성이 미미하기에 ‘이번 생은 글렀어요.’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라며 포기한 듯 달관한 척 사는 것이다. ‘포기하다’와 ‘달관하다’는 청춘의 동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세대가 두 동사로 주어를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사회가 청년들의 열정 열매만 따 먹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탓은 아닐까.

 

 

각자도생에서 공생의 삶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청년은 이미 소수자다. 단지 ‘사회적 약자’일 뿐 아니라 실제로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15~29세의 청년 인구가 65만 명가량 줄어들었다.2) 이는 서울시 4개 구를 합친 인구수와 맞먹는다. 이 추세대로라면 한국은 2018년 인구절벽이 도래하고 2033년 국가 파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청년의 실종은 곧 우리 사회의 성장이 멈춘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저성장이 빚은 고실업 문제와 그에 따른 승자독식을 부추겨왔다. 또한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령화 문제와 세월호 사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위기 상황에서 작동하기를 거부하는, 위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문제는 더 이상 ‘청년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닌 ‘청년이 그만큼 고통 받고 있다’로 읽혀야 맞다. 또한 청년의 고통은 곧 세대와 무관하게 확장될 것임을 알고 청년 문제의 해법들을 세대를 아울러 모색할 필요가 있다.

 

청년 문제의 해결은 청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 교정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우선, 결코 동질화될 수 없는 청년세대를 간편하게 규정짓고 단정하는 습관을 버렸으면 좋겠다. 대신 청년들 스스로 그들의 문제에 가닿을 수 있게,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호명할 수 있게,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지 않을 흙바닥을 신명나게 깔아주었으면 한다. 시대의 문제를 첨예하게 고민하고 공감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을 구체적인 정책으로써 응원하고 지지해주기를 바란다.

 

이미 과성숙한 자본주의는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이제는 청년 노동을 희생시키며 성장 위주 사회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저성장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청년을 비롯한 모든 세대에게 적용될 수 있는 시민수당, 기본소득, 주거 복지 등의 두터운 안전망을 구축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독일은 1970년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에 못 미쳤을 때 청년 복지 제도를 시작했다고 하니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육박하는 한국이 못 해낼 이유가 전혀 없다.

 

아마 다들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곧 우리 삶에 파국이 닥치리라는 것을. 이제 다른 삶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상황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각자도생의 삶에서 공생의 삶으로의 시대 전환을 일궈내야 한다. 생명의 가치 및 공동체적 가치의 성찰을 가능케 하는 호혜와 환대의 장을 사회의 기본 작동 원리로 삼고, 신뢰와 친근감을 바탕으로 새롭게 우리의 관계를 뜨개질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평민, 그 무능의 급진성을 과감하게 믿고 인간과 자연은 동무로 만나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만 우리의 노동은 자율적으로 구성되고 각자의 자아실현과 맞닿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스물아홉, 이십 대 끝자락이다. 그리고 백수의 시절을 지나 올 3월부터는 ‘OO은대학’의 술래로, ‘서울시 사회적경제 청년혁신활동가’ 매니저로 새 노동을 시작했다. 물론 역시나 느끼는 것은 노동은 늘 새롭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간 시도했던 노동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대안적 주체 노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과정이라 믿는다. 달빛에 옥수수가 익는 것처럼 우리의 노동 또한 오늘보다 내일이 더 성숙하게 익어갈 것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며 내 노동의 주체로 설 때까지 우리 존재 모두 힘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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