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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왜 무위당과 새로운 사회운동인가?
2016-05-25 17:03: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특집] 여는 글 - 무위당과 새로운 사회운동 

왜 무위당과 새로운 사회운동인가?

 

글 편집부 

 

무위당 장일순이 세월호 참사를 접했다면 무슨 말을 전했을까? 아마도 금세 그의 눈이 젖었을 것이다. 아마도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셨을 것이다. 감정이입 때문만은 아니다.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세월호 승객들의 영혼과 무위당의 영혼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올해(2014년)는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이 하늘로 돌아간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세상의 소금이었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1980년대에 들어서는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밑으로 밑으로 기어 평생을 민초들과 함께했다. 무위당은 일가를 이룬 탁월한 서예가이기도 했고, 동학과 서학의 진리를 ‘생명’을 열쇠말로 재해석한 사상가였으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협동운동의 선구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위당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그는 ‘살리는 사람’, 즉 생명운동가였다.

 

유신정권에 저항해 목숨을 건 싸움을 전개하던 1977년 즈음 하나의 깨달음이 그에게 왔다. ‘그대가 나’라는 새롭고도 깊은 마음이 그것이다. 이후 80년대 초까지 수년 동안을 원주의 벗들과 사색하고 토론하면서 ‘삶의 우주적 영역’을 탐색한다.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생명의 역설을 발견한다. 기존의 세계에 대해 ‘아니다’라고 각성하며(覺非), 단호히 ‘엑서더스(대탈출)’를 감행한다. 그리고 1986년 12월, 한살림의 창립과 함께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생명의 길’이 그것이다. 무위당에게 생명운동은 새로운 삶의 다른 이름이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생명운동

“쓰러진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생명운동

“계산하지 마라” 생명운동

“그대가 나” 생명운동

“옆으로 답례” 생명운동

“하나가 되는” 생명운동

“자애와 검약과 겸손”의 생명운동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 생명운동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저절로” 생명운동

 

무위당과 원주에서 씨앗이 뿌려진 모심의 생명운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사회운동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운동의 대전환이었다. 생명이라는 화두를 전 사회에 던지며 새로운 사회운동 이념의 지평을 열었고, 체제변혁 중심이 아닌 생활 중심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사회운동의 변방 원주에서 지역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새로운 차원의 협동운동 모델을 탄생시켰고, 영성에 기초한 사회운동의 싹을 틔웠고, 한국형 생태 환경운동의 탐색에 큰 영감을 주었다.

원주의 생명/협동운동이 무위당 개인만의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른바 진정 원주그룹 전체의 협동적 실천의 산물이다.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 김영주 선생과 박재일을 비롯한 수많은 활동가들이 원주의 생명운동 과 협동운동을 탄생시키고 또 키워냈다.

 

원주보고서를 통해 생명운동이란 말이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32년, 무위당이 생명나라로 돌아간 지 20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환기에 처해 있다.

무위당은 당대에 이미 문명의 전환을 논하였거니와 바야흐로 의식의 전환, 삶의 전환, 사회의 전환은 현실의 과제가 되었다. 이념형 사회운동의 시대가 갔으나 새로운 사회운동의 철학과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또한 한때 유행처럼 지면을 장식했던 시민운동도 급격히 힘을 잃었다. 협동조합 열풍이 불고 있으나 정부의 입법과 제도적 지원 속에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는 현실이다. 요컨대 한국의 사회운동은 정녕 새로운 길을 탐색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다시 무위당과 원주로부터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배운다

 

시인 김지하는 장일순을 일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평소 깊은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 온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그를 두고, “음陰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일순은 스스로 ‘무위당無爲堂’이라 이름 불리기를 바랐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를 빌려 말한다. “나의 길은 무위일 뿐이다(吾道 無爲而化).”

무위당은 “생명은 하나”라는 마음과 “함이 없는” 행함, 즉 자애와 무위는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바로 ‘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에게 무위는 “계산하지 않는 참 마음”이다. 그렇다. 계산이 없으면 “자유로워지고 두려움도 없어지고 걱정도 사라지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싹이 트고 꽃이 열리고 열매를 맺는다.

바로 이것, ‘행함 없는 함’이 무위당의 생명운동이다. ‘수많은 인연 덕분에 이루어지는 생명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작은 나를 촉매로 이루어지는 ‘참나’의 실현이 생명운동이다. ‘덕분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숨겨진 하나됨의 실현이 ‘무위無爲’의 생명운동이다.

 

세월호의 슬픔과 충격을 가눌 수 없는 2014년 6월, 다시 무위당에게 묻는다. 무위당과 원주라는 거울을 통해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가 갈 길을 탐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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