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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새로운 사회운동, 생활공동체로부터
2016-05-19 10:21: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새로운 사회운동, 생활공동체로부터

 

이경란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사무총장)

 

 

생명과 생활에 관한 오래된 새로운 언어들

 

요즘 많이 듣는 말들이 있다. 일상, 생활(세계, 생활권, 정치), 여성, 사회적 주부, 이웃, 주민, 주민자치, 마을(학교, 문화, 경제, 복지, 안전망, 미디어, 계획, 활동가), 로컬/글로컬, 풀뿌리운동,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커뮤니티(디자인, 비즈니스), 도시농업, 공동체, 네트워크, 퍼실리테이터(촉진자), 생명, 돌봄, 주체, 관계, 소통, 공유, 공익성, 통합, 통섭, 융합, 지속가능성, 건강, 힐링, 참여, 평등, 자유, 자 립, 협동, 연대, 호혜, 평화, 공정, 사랑, 정직, 존중, 지금 여기, 어우러지는, 즐거운, 행복한, 작은, 평범한, 따뜻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예쁜, 활기찬, 고운, 부드러운, 다정한, 함께, 두루, ‘한 사람’…… 많이 익숙해진 말들이다. 또한 이 말들이 사람들 속에서 실현해가야 할 가치와 방향 이라고 이야기기하는 데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말들처럼 사는 세상을 떠올리면 웃음을 짓게 된다. 서로를 믿고-그 전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정직하며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 내가 사는 마을 안에 착하고 안정된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고,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호혜적인 관계망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면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떨까? 집 한 채를 위해 평생을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 교육을 위해서 평생 노예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뛰어놀며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한다면, 어린 아이들과 몸이 불편한 노인들도 이웃들의 협동적 돌봄관계망 속에서 보살핌을 받는다면? 이런 상상, 재미있다. 또한 지금 우리는 이런 상상이 실현 가능하리라는 기대에 설레어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이 말들을 이렇게 당연하게 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이 말들이 거리낌 없이 편하게 쓸 수 있는 말일까? 약 2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이 언어들은 거대담론의 하위담론이거나 그것을 보완하는 용어, 또는 강력한 지배질서에서 살아가기 위한 자구적 노력,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유토피아 혹은 영적 세계를 만날 때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말들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은 피를 흘렸다. 마을공동체운동이나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 경제, 돌봄이 실현되는 사회, 자유로운 교육 등의 말은 소수의 대안을 꿈꾸는 이들의 세계에서 정책 언어 또는 사회운동의 언어로 사용되었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생활세계라는 밑바닥에서부터 세계를 변화시키는 말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세상의 대안을 나타내는 언어가 되었을까?

 

세월호의 참극을 보면서 아직 이 언어들이 세상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으며, 여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겹게 싸우고 있음을 확인한다. 생명과 윤리, 돈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정치와 경제를 이루기 위해서, 또한 삶의 구석구석과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 일상적인 의사결정의 순간순간마다 자연스럽게 생명 가치가 녹아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된다.

 

아직은 멀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간의 노력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근현대 150년의 시간 동안, 짧게는 한국전쟁 이후 죽음과 폐허에서 삶을 복구시켜왔던 시간들, 더 짧게는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서 새롭게 사람과 생명과 민주주의를 일깨워 왔던 선배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기계와 돈과 폭력의 정치경제에 대한 투쟁, 그것을 기억하고 계속 이어왔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여기에 올 수 있었다. 최소한 사회운동 진영을 비롯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생명 가치가 사회의 윤리와 세상의 기초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평화로운 생활공동체를 만들어가려는 운동으로 수렴된다는 관점과 감각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본다. 세월호 참사를 겪는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갖는 이유이다.

 

그 전환의 과정을 이끌어 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무위당을 비롯한 원주 활동가들의 제안과 실천은 두드러진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세상에 알리려 애쓰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잇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의 재발견

 

‘생명 가치’가 모든 판단과 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명운동은 언제부터 사회적으로 발언되기 시작했을까? 그 답으로 30여 년 전 1980년대 전반기의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주목한다. 하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분기점이던 ‘서울의 봄’과 ‘광주’, 또 하나는 ‘생명’의 화두가 시작되었던 ‘원주보고서’의 제안이다.

 

광주항쟁 이후 사회운동은 이념과 계급주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고, 사회운동 세력들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사회 모순을 파헤치는 ‘사회구성체논쟁’에 몰입했다. 그 결과 군부 독재와 독점 자본, 미국(외세)의 문제가 분단체제와 깊게 얽혀 있는 사회구조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체제 의 전복과 ‘권력’ 장악을 위해서 계급운동으로서의 민중운동에 기반한 투쟁적·혁명적 운동이 필요함이 제안되었다. 이 방향에서 각 분야의 사회운동 세력들이 조직되고 재편되어 갔으며, 사회운동은 정치투쟁을 중심으로 급진화되어갔다.

 

지배적 사회운동의 논쟁 구도와 달리,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 던 원주캠프는 다른 방향으로 사회운동을 전환하기를 제안하였다. 1982년에 발표한, 일명 ‘원주보고서’라 불리는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1)은 ‘생명’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회운동도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제안을 간단히 살펴보자. 원주보고서는 현대세계를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로 규정하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자들로 “독점자본주의자들, 제국주의자들, 사회제국주의자들, 신식민주의자들, 사회주의 파시스트들, 무기상인들, 관료주의자들, 정상배들, 매판자본가들, 극좌, 극우 모험주의자들, 기회주의자들, 독재자들, 왕조 공산주의자들, 국수주의자들, 분파주의자들, 부정과 악덕에 눈감는 종교인들, 도구화된 이성을 섬기는 지식인들”을 지목했다.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폭탄과 무기를 만들어야 하고,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아비가 불의와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고, 쓸모없는 새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요긴한 옛것을 파괴해야 하고, 원조와 자선을 베풀기 위해 먼저 착취해야 하고, 더 튼튼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오염된 음식을 먹고 마셔야 하고, 불확실한 미래의 복지와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확실한 현재의 복지와 건강과 안전을 포기해야 하고 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더 기계화된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모순된 방법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일반화된 생명 경시와 반생명 현상 위에 분단 상황까지 결합되어 생명 파괴가 가장 적나라하게 일어나는 현장이나, 그것을 척결하려는 많은 운동들이 서구의 진보주의 세계관과 운동관 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생명 파괴 현상이 더 심화되었다고 사회운동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런 사회를 바꾸는 운동은 “주체들 사이에 자유, 평등, 우애, 관용과 관심을 갖는 대화를 통해 공동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협동적 삶”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귀중한 생명이 가난과 억눌림, 무관심에서 벗어나며, 유기적 생명체인 민족이 분단된 채로 싸우지 않으며, 민족들 사이에서 일체의 멸시와 차별, 불신, 증오와 착취, 억압, 세뇌, 병탄, 학살, 보복, 전쟁이 악순환 되지 않으며, 수많은 생명체들이 약탈, 파괴, 멸종되지 않으며, 인류와 모든 중생의 삶의 터전이자 어머니인 물과 토지와 공기, 대기 전체와 태양과 달과 별들과 우주전체의 파멸되지 않”는 세상이 되리라 여겼다. 이들은 인간과 모든 존재들이 생명 그 자체로서 살며 갈등과 대립과 투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희망하였다.

 

1980년대 사회운동 세력들 속에서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주 항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날선 분위기 속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급 투쟁과 체제 전복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에 이런 견해는 개량주의적인 방법으로 보였고 원주캠프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원주캠프는 생명운동을 제3세계 민중운동으로 위치 지으면서 기존의 냉전 체제 논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의 반생명적인 방향을 비판하였다. 그 대신 무언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숨은 채 드러나는 생명의 씨앗을 현실적으로 꽃피우는 일이 생명운동이라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이 일체의 생명 파괴에 저항하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건설함으로써 모든 적대적인 또는 다양한 기존의 이데올로기와 물신의 지배 아래 있는 생명이 있는 그대로의 체제 속에서 창조하고 해방하고 반생명에 저항하다 죽고 다시 부활하여 스스로 확장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체제 자체의 역사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철저히 소멸시킬 전면적인 부활과 해방과 개벽을 가져오는 변혁운동이며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생명운동의 구체적인 실현방법으로 삶의 현장에 있는 민중, 즉 농민, 어민, 노동자, 도시빈민, 여성, 대학생, 지식인, 문화 관계 종사자, 종교인 일반의 현실과 변화 방향, 다각적인 실천 방안과 통일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을 제안하였다.

 

이런 내용을 담은 ‘원주보고서’는 무위장 장일순을 중심으로 한 원주캠프가 1960년대 중반부터 해왔던 지역개발사업과 민중생존권운동, 그리고 70년대 유신정권에 대항하는 반독재투쟁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새롭게 자 신들의 사상과 운동론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원주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가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지원을 받아 무위당 장일순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신용협동조합 설립과 협동조합 교육, 학교소비조합 설립 등 협동조합 활성화를 꾀했다. 또한 1972년 남한강 대홍수 피해 농민들을 돕기 위해 조직 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와 이후 그것을 개편한 사회개발위원회를 통해 지역사회개발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들은 외국에서 지원금으로 들여온 막대한 금액을 농민들에게 자립의 기초를 만들어주기 위한 농민 교육과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신협 – 소비자협동조합(구판장) – 생산 자협동조합(작목반)’을 기반으로 하는 유기적 지역순환 경제구조 만들기와 생활공동체운동에 집중 투여하였다.

 

원주캠프는 민중생존권운동과 농민생존권운동을 위해 조직된 가톨릭노동청년회(1964), 가톨릭농촌청년회(1966), 가톨릭농민회(1972) 등 가톨릭농민 운동에 깊게 간여했다. 이들은 1970년 ‘삥땅사건’과 전태일 분신 등을 계기로 드러난 민중의 기본생존권 문제,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 등으로 드러난 도시빈민의 생존권 문제, 사북지역 탄광노동자들의 처지 등을 검토 하고 대응해 가면서 이것이 단순한 자유권과 민중 생존권을 넘어 ‘생명’의 존엄성에 관련된 문제임을 인식해 갔다.

 

또한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부정부패반대운동과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사회참여 활동, 1971년 원주문화방송 부정부패반대운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김지하의 체포, 1976년 1월 원주선언과 3월 명동선언 등, 원주캠프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핵심주체 중 하나였다.

 

1980년대 초, 원주캠프는 그간의 경험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였다. 그 시기를 거치며 원주캠프는 민중의 생존권 문제 속에 깔려 있는 반생명적 사회 구조와 환경·생태계 위기를 검토하면서 현대 산업문명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최시형의 동학사상에 대한 재해석을 거치면서 ‘사람’에서 ‘자연’과 ‘사물’의 영역으로 인식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 따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맑시즘적 패러다임에 기반한 반독재운동의 악순환 구조를 발견하였고, 근대협동조합운동의 논리로 진행한 지역 사회개발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되돌아보면서 탈근대적 인식의 생명운동과 생활공동체운동으로 사회운동이 전환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제안한 것이다. 이런 제안은 사회운동 세력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원주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쳐 나갔다.

 

 

생활공동체운동의 확장과 전망

 

원주보고서가 발표된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20년은 ‘대안’의 실현을 통해 사회운동이 전환되어 갔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흐름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하나로 1980년대 후반부터 민중운동과 환경운동 그룹들이 점차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여러 분야에 서 생명담론이 구체화되어 그것을 실현하는 조직들도 만들어졌다. 생명운동의 흐름을 보여주는 여러 단체들이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1990년 가톨릭농민회는 제20차 대의원대회 선언문을 통해 운동의 방향을 전환했다. 1991년 유기농 자재회사인 흙살림과 생명운동 담론지 『녹색평론』의 등장, 1993년 환경윤리종교인 선언 등에 이어 1994년에는 녹색연합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가 창립되었다. 1994년에 열린 ‘생명가치를 찾는 민초들의 모임(생명민회)’이 이런 움직임을 더욱 촉발시켰다. 이 모임에서는 생명운동 관심자와 관계 단체들, 연구자들이 생명운동과 사회운동을 논의했다. 그 후 1996년 전국귀농운동본부 창립, 1998년 대안교육잡지 『민들레』 창간, 1999년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창립, 2000년 기독교 환경선언 발표, 2001년 불교환경연대 창립 등 생명운동은 다방면으로 확산되었다. 2003년 새만금 갯벌을 지키려는 새만금 삼보일배는 생명을 살리는 비폭력 사회운동의 전형을 만들었다. 또한 그해 열린 세계생명문화포럼은 생명운동과 생명문화운동이 세계 공통의 움직임이며 생명 가치가 한국 사회운동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리고 2004년부터 5년에 걸쳐 진행된 생명평화결사의 생명평화탁발순례는 전국의 사회 운동과 생활운동 세력들을 생명과 평화라는 화두로 연결시켰다.

 

한편 이러한 담론과 운동 세력의 성장은 밑바탕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생활공동체 대안운동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표적으로 소비자생활 협동조합, 공동육아협동조합, 의료생활협동조합, 대안학교 등을 들 수 있다.

 

1983년 76개의 소비조합이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를 창립함으로써 생활 밀착형 협동조합운동이 등장하였다. 한국의 소협운동은 유기농운동과 결합하여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농약 중독에 시달리던 농민들, 화학비료로 인한 흙과 농산물 오염이 현실 문제가 되면서 1980년대 초반부터 정농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그룹 가운데 유기농업을 선택하는 농민들이 늘어갔다. 유기농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소비자들도 환경과 생명 파괴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서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살리기 위해 1986년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만드는 유기농직거래사업체 한살림이 설립되었다. 생명 위기 시대의 소비자협동조합, 농업 위기 시대의 소비자협동조합의 새로운 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1987년 이후 여성단체와 종교단체, 시민운동 단체들이 유기농산물 직거래 협동조합을 속속 설립했고 소비자협동조합 중앙회 회원조합들도 유기농업 직거래에 참여하는 등 생협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생협운동의 성장은 생명운동의 외연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2000년대 들어 생협은 연평균 2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며 2012년 말 기준 전국 생협(126개 단위생협)의 조합원은 67만 세대, 공급액은 7,107억 원에 달하는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지역의 여성 조합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생협의 조합원 조직화는 사회운동 진영이 봉착해 있던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서, ‘사회적 주부’들이 만들어 가는 지역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생협운동과 더불어 마을공동체운동의 토대가 된 것이 공동육아협동조합이었다. 1994년에 처음 설립된 공동육아협동조합은 지역 단위로 부모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조직이다. 1980년대 초반의 야학운동과 저소득층어린이 보육운동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보육운동’, ‘공동육아 제도화’ 운동의 실천방식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이는 조합원들이 대면할 수 있는 협동조합 속에서 생태적 보육과 양성평등, 부모와 교사가 아이를 함께 키우기, 민주적인 협동조합 운영이라는 협동조합 공동체의 모델을 실현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상당기간 경험하고 어린이집을 졸업한 부모들은 지역에서 방과후교실, 대안학교, 마을학교 등을 만들거나 생협운동에 참여하는 등 마을공동체운동의 주체로 성장했다.

 

또한 지역주민들의 ‘상호돌봄’이 지역공동체의 기초임을 일깨운 것이 의료생협(현재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었다. 안성의 농민병원에서 출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의료생협은 환자와 의사가 의료활동에 주체적으로 협력하여 주민 건강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료생협은 생명을 영리화하는 병원 시스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주민들의 생명을 돌보는 병원을 만들어간다는 원칙하에 지역단위 조직으로서 해당 지역의 노인들을 위한 방문요양 사업과 질병예방 활동, 주치의 제도를 실현하고 있다. 이런 운동들과 더불어 일상화되어 당연하게 여겨 왔던 강제적 의무교육의 경쟁중심적 교육 현실을 일깨우고 대안적 교육의 틀을 만들어 간 대안 교육운동이나 귀농운동과 도시농업, 자발적이며 주체가 되는 노동에 기반한 새로운 기업활동 등 새로운 삶에 기반한 운동이 생활 각 분야로 퍼져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여러 활동들이 제도화되는 단계에 들어섰다. 1998년 생협법, 2005년 부모협동어린이집의 제도화, 2010년대 사회적기업 지원 정책,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2014년 사회적경제기본법 논의 등이다. 또한 이러한 운동들은 지역사회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지역운동, 마을만들기 활동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현재 원주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영역이 활성화된 대표지역이다. 준비하고 있던 힘들은 2003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전기를 맞았다. 협의회는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새롭게 발생한 실업, 빈곤, 양극화, 복지 등 삶의 문제를 ‘지역’의 민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과 그 연대를 통해 해결하고자 다양한 분야의 협동조합들을 만들었다. 유기농 생산의 본거지인 원주이니만큼 농업 생산과 농산 가공, 농산물 유통과 서비스, 친환경급식 영역이 주요한 협동조합이나 협동 사업으로 자리 잡아갔고, 돌봄복지교육 영역에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지역아동센터, 공동육아협동조합과 대안학교들이 활동하며 문화생협과 노인생협, 자활조직 등이 주민 생활을 지원한다. 생활공동체로서 메워져야 할 틈은 많지만 원주는 ‘대안 사회’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창립선언문 가운데 아래의 한 구절에서 30년 에 걸친 생명운동의 역사가 보인다.

 

“대안 사회의 실현은 지금 이곳에서 실현해야 할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상호간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거대 자본에 대항하여 주민 참여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입니다. 또한 생명의 도시에 걸맞은 산업시스템을 갖추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협동경제의 이윤은 지역복지의 개선을 위해 환원되어 진정한 지역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원주를 필두로 몇몇 지역에서 새로운 삶의 지역 모델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시작일 뿐이다. 아직 ‘대안’에서 조금 나간 수준이다. 2010년대 들어 한국은 GDP(국내총생산) 기준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선진국으로서는 처참할 만큼 삶의 질이 낮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GDP 수준도 생명의 가치를 눌러오면서 이룩된 것이었음이 ‘세월호 참사’로 여지없이 폭로되고 있다. 동시에 대다수 사람들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이 살 수 없다는 위기감과 근원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대안’으로 사회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생명운동과 생활공동체운동이 사회 제도와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현실은 환영할 일이다.

 

이것은 사회운동 세력들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이 운동을 사회 전체로 확산할 만큼 주체 세력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찌하겠는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30년 전 원주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모든 일을 생명 가치로 판단하고 주위에 차근차근 제안하면서, 자신의 지역과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만 이 토대에서부터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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