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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원주그룹과 사회운동적 전환의 장면들
2016-05-19 09:40: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원주그룹과 사회운동적 전환의 장면들

 

김소남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2011~2012년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 연구지원사업 “원주지역 협동운동과 민주화운동”과 “원주지역의 협동운동과 생명운동(1960~80년대)”을 (사)모심과살림연구소와 (사)무위당사람들과 공동으로 진행하였음.)

 

 

원주의 생명협동운동과 전환점

 

최근 원주지역은 민간이 주도하는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으로 각계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원주지역의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원주지역 협동조합운동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원주그룹이 전개했던 1960~80년대 협동운동과 생명운동에서 크게 기인한다.1)

 

1960~80년대 원주그룹이 전개한 생명협동운동에 있어 세 번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있었는데, 그 시기는 바로 ‘1965년’, ‘1973년’, ‘1982년’이다. 1965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세계교회혁신운동에 따라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지학순 주교가 부임한 해였다. 1973년은 전해 8월 남한강유역의 대홍수를 계기로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창설되고 농촌과 광산지역에서 남한강유역수해복구사업(이하 남한강사업으로 약칭)이 착수되던 해였다. 1982년은 원주그룹이 추진해 왔던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농離農의 급증, 농약·화학비료 등의 남용으로 인한 농촌 생태환경의 위협 등에 따라 새로운 운동의 모색 과정을 거쳐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이 제출된 해였다. 본 글에서는 세 시기를 중심으로 그 운동적 전환의 장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원주교구의 창설과 신협운동

 

원주지역 생명협동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의 하나는 1965년이다. 이 해에 원주교구가 설정되었으며, 45세의 젊은 지학순 신부가 초대 주교로 선임되었다. 원주교구의 설정과 지학순 주교의 부임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역사적 배경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와 세계교회혁신운동이라는 도도한 시대적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공의회 개최를 공식 선언한 것은 1959년 1월이었다. 공의회는 그로부터 3년 9개월 뒤인 1962년 10월 개최되었으며, 1965년 12월 폐막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목헌장에서 “구제해야 할 것은 인간이며, 개혁해야 할 것은 인간사회”라고 밝혔듯이 당시 세계정세에서 핵병기를 보유한 인류 상호간의 영속적인 ‘지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과 빈부의 차가 극심한 국제사회에 정의의 합당한 질서를 실현하는 것, 분열된 교회 내의 일치를 가져오는 것 등 세 가지에 핵심 목적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채택한 혁신적인 헌장과 교령, 그리고 선언은 세계 교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공의회 논의에 참여했던 전 세계 각지의 주교들은 그들 나라의 교구로 돌아가 각 교구 내 평신도운동과 교회일치운동, 그리고 교구가 소재했던 지역과 국가를 둘러싸고 직면했던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세계 천주교회는 공의회 이전의 폐쇄적·권위주의적 교회상에서 벗어나 평신도들이 사제와 함께 교회 혁신과 사회 참여에 적극 나서는 교회상으로 변모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주교들이 앞장선 천주교회의 혁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70년 부조리한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주창한 필리핀 주교회의의 공동성명서, 1971년 세계주교대의원회가 공포한 「세계의 정의」, 1973년 돔 헬더 까라마 대주교가 주도한 브라질 주교단의 인권 선언, 1974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인권과 화해」 등을 통해 전 세계 주교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 혁신과 사회 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주도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한국 천주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1965년 3월 원주교구의 설정과 지학순 주교의 선임으로 나타났다.2) 지학순 주교는 여러 분야에서 낙후되고 지극히 고식·보수적이었던 원주교구 내 천주교회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자체 혁신하면서 새로운 교회상을 만들어가야 할 중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고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되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먼저 자신을 대신해 공의회 정신에 따른 주교의 구상을 추진할 인물과 조직 기반 마련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원주지역 혁신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장일순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를 통해 원주교구가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될 수 있는 조직 기반이 마련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여전히 교회가 성직자들에 의해 존립한다는 전통적 교회관에 젖어 있는 사제와 신자들의 의식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평신도운동’이자 ‘평신도와 성직자의 협력형 신심운동’이었던 꾸르실료운동에 기반한 평신도 교육과 단체 조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7년 8월 지학순 주교는 서울에서 개최된 제2차 꾸르실료에 장일순이 참여토록 했으며, 제3차 꾸르실료에 최창규 원동성당 주임신부를 파견함으로써 평신도에 입각한 교구상 정립을 위한 꾸르실료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꾸르실료교육의 활성화는 그 특성상 사제와 평신도가 차별 없이 사도직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지학순 주교는 부임 초기 원주교구가 관할하고 있었던 농촌과 광산촌, 어촌 지역을 둘러보면서 대부분의 농민과 광부, 서민 등이 열악한 사회경제적·문화적·지리적 조건하에서 곤궁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보았다. 지학순 주교는 전교도 중요하지만 우선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으며, 고리채에 시달리던 지역 주민들을 위한 해결방안을 강구하였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1959년 7월 청주대목구 제임스 파디James V. Pardy 주교의 비서신부와 1962년 4월 부산 초당동성당의 주임신부로 봉직하면서 지켜보았던 부산 지역의 신협운동을 교구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며, 그 결과 1966년 11월 원동성당 내 신협 창립을 필두로 황지신협(1966.11), 문막신협(1966.12), 단구동신협(1968.2), 삼척신협(1969.10)이 설립되도록 추동하였다.3)

 

1969년 1월 원주그룹은 원주지역 신협운동의 발전적 전기를 마련하고자 신협연합회의 지원하에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조합원 강습회와 임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원주그룹은 이를 통해 다른 지역과 달리 강원도만이 강원지구평의회와 주재 지도역이 부재해 신협운동이 발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강원도 지역의 신협운동을 주도할 조직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69년 10월 원주그룹은 원주교구 내 진광학교의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72년 4월 협동교육연구소가 주도한 원주원성지구 신협임원 강습회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72년 6월 12개 단위조합 중심으로 신협 강원지구평의회가 창립되면서 원주그룹은 강원 지역의 신협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 기반을 마련하였다.4)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창설과 협동운동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원주그룹의 신협운동이 그 지역적 범위를 3개 도 13개 시군, 80~90여 개 농촌부락과 10여 개 탄광지부를 대상으로 확대한 역사적 계기는 1972년 8월 남한강유역의 대홍수 발생과 1973년 1월 창설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에 의해 남한강사업이 추진되면서였다. 1972년 8월 남한강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자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관내 농촌과 광산지역의 수해를 입은 농민과 광부들을 구호하고자 자체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는 한편, 세계 각국의 천주교 외원기관에 구호를 위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1972년 9월 서독의 가톨릭 외원기관이었던 미제레오가 원주교구의 구호 요청에 화답하면서 관계자 3명이 원주를 방문해 수해 지역의 비참한 참상을 둘러볼 수 있었으며, 자금 지원을 협의한 결과 당시 단양군 1년 예산에 해당되는 240만 마르크(약 3억6천만 원)를 지원키로 결정되었다.

 

1972년 말 지학순 주교는 서독의 대규모 외원 자금에 기반해 농민과 광부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추진하되, 소위 ‘거지 근성’을 기르는 등 기존에 교회의 무상 구호를 통해 나타난 폐해를 지양하면서 수해민이 ‘자조’, ‘자립’, ‘자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건국대 부설 농업문제연구소와 고려대 부설 노동문제연구소, 한국가톨릭농민회 등 제 전문기관에 요청하였다. 이들 전문기관은 논의 끝에 먼저 천주교의 범위를 벗어나 정부기관 및 사회기관의 대표들도 참여하도록 하는 제3의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제안하였다. 또한 수해를 입은 농민과 광부들이 부락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적·협동적 사업을 구상하고 협동조직체를 결성할 때 초청 교육 이수를 전제로 그 협동체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하며, 그 지원 자금은 무이자로 1년 거치 4년 분할상환토록 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1973년 1월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원주그룹은 남한강사업을 추진할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원주교구 소속으로 하되 독립적인 기구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1973년 초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부락개발사업과 광산지역 장기구호사업 방안 마련을 위해 농업문제연구소와 노동문제연구소에 농촌과 광산지역에 대한 실태 조사를 요청하였으며, 이들 기관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남한강사업의 사업 원칙과 자금 지원 원칙이 결정되었다. 또한 남한강사업 중 세부 사업인 농촌지역의 전답복구사업과 부락개발사업, 광산지역의 장기구호사업 등에 이들 전문가들의 제안이 원용되어 적용되면서 농민과 광부 주도의 협동운동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원주그룹은 한우지원사업과 원주원성 수해복구사업, 광산소비조합 육성사업과 농촌소비조합육성사업 등의 제반 사업을 추진하면서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특히, 원주그룹은 남한강사업 초기부터 농촌 지도자 교육과 광산 지도자 교육, 회계 실무자 교육, 부락 대표자 교육, 부녀자 교육 등의 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원주그룹은 교육운동을 통해 농민과 광부들을 해당 지역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대신해 지역 자립과 지역공동체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주도층으로 형성시키고자 하였고, 활발한 현장교육을 통해 협동운동의 참여층이 폭넓게 형성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원주그룹은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흐름 속 관제 협동조합운동과 새마을운동이 추진되는 기반 위에서 농촌과 광산지역에 새로이 형성된 농민·광산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지역민의 참여하에 민간 주도의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해 나갔다.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1980년대 초 원주그룹은 내부적으로 1970년대 부락개발운동에 기반해 펼쳐온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평가와 향후 대책을 모색하는 일련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1982년에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을 내놓았다. 이 문건은 1970년대 후반 원주지역의 반독재투쟁과 협동운동을 추진한 속에서 부딪쳤던 제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모색을 거쳐 형성된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이 문건은 출옥 직후인 1980년 12월부터 원주교구 기획위원 신분이었던 김지하가 장일순의 권유에 따라 사회개발위원회의 주요 평가회의에 참여하면서 1981년 9월경 초안이 작성되었고, 장일순과 사회개발위원회의 상담원들이 이를 검토·수정하여 1982년 초 완성·제출하였다.5)

 

1970년대 원주지역에서는 농촌과 광산지역을 무대로 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 이창복이 주도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김지하를 중심으로 한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원주문화방송 부정부패반대운동 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에 따른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김지하의 체포, 1976년 1월 원주선언과 3월 명동선언으로 인한 신현봉 신부의 구속 등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원주교구 신부들을 포함해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당시 원주그룹은 한편으로는 구속된 인사들의 석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자칫 소모적일 수 있는 끝없는 정치투쟁으로부터 장기적인 싸움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상황이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농촌지역에서 추동하였던 협동조직체인 작목반의 구성과 부락총회의 활동, 그리고 농촌신협에 기반한 협동조합운동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에 따라 급증하던 이농 현상 탓에 발전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농업 또한 오로지 생산성 증대라는 한 가지 목표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도록 강제된 결과 거의 모든 농토가 엄청난 양의 화학비료와 농약 살포로 생명력을 잃어갔으며, 농약으로 희생되는 농민이 급증하고 생태계 교란이 극심해지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1972년에 경제성장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과잉 인구와 식량 부족,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등의 문제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음을 경고한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되고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현대 산업문명의 위기를 경고한 유엔인간환경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f the Human Environment)가 개최되는 등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유와 인식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원주그룹을 이끌었던 장일순은 1940년대 중반 포교소를 운영했던 원주읍의 오창세를 통해 동학사상을 접한 후 이를 내면화하고, 1970년대 후반 해월 사상을 주목하고 재해석하면서 맑스의 계급사상에 기반한 운동론과 무한 생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자연의 한계에 대한 성찰,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 등 자연의 위격을 높여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발전시켜 ‘생명의 세계관’을 마련해 나갔다. 원주그룹에서 1970년대 후반 개시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 과정 중 ‘10·26’에 의한 유신체제 붕괴와 신군부에 의한 5공화국 성립, 그 과정에서 발생한 ‘5·18’로 인한 충격과 성찰은 내·외부에서 운동 노선을 둘러싼 격심한 논쟁을 전개시켰으나 결과적으로 그 변화의 속도와 폭을 크게 만드는 작용을 하였다.6) 1980년대 초 김지하는 장일순의 권유에 따라 박재일과 함께 ‘생명사상세미나’를 기획하였고, 여기에 개신교 계열에서 황인성과 나상기, 가톨릭 계열에서 정호경 신부와 제정구 등이 참여하면서 생명운동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 나갔다.7) 더 나아가 김지하가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의 초안을 쓰고 이것이 원주그룹 내에서 널리 윤독되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형성된 원주그룹 내에서 정서적·문화적으로 공유하되 모호하게 공존했던 인식론과 운동론의 차이가 이 시기에 와 생명운동으로 체계화되며 하나로 근접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원주그룹에 의해 체계화되어 나타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은 1980년대 전반 모색 기간을 거쳐 1985년 6월 원주소비조합과 1986년 12월 한살림농산 출범, 1988년 4월 한살림소비조합 창립 등 생명운동에 기반을 둔 도농직거래운동에 기초한 소비조합운동으로 나타났으며, 1989년 11월 한살림모임이 발표한 「한살림선언」으로 이어져 한살림운동의 주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8) 요컨대 1980년대 초 발표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과 1980년대 중후반 전개된 생명운동은 1960~70년대 원주그룹의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전개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배태된 집단적 운동의 결과이자 원주그룹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주>

1) 1960년대 중반~1970년대 반박정희정권운동을 전개하면서 형성된 원주지역의 사회활동가들을 1980년대 전반 외부에서 이른바 ‘원주캠프’라고 불렀다. 본 글에서 ‘원주그룹’이라고 함은 1972년 8월 남한강유역 대홍수를 계기로 1973년 1월 재해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부락개발운동을 기반으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에 한정해서 지칭하고자 한다. 한편, 본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으므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근거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김소남, 2014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 연구 : 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최와 세계교회혁신운동이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은 먼저 1962년 3월 교황 요한23세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가 자립교회로 성장하였다는 인식하에 한국교회에 교계제도를 수립한다는 교서의 반포로 나타났다. 그 결과 서울, 대구, 광주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원교구와 원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제주교구 등이 연이어 창설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뿐만 아니라 수원교구의 윤공희 주교, 마산교구의 김수환 주교, 안동교구의 드봉 주교 등과 같이 이들 교구의 창설과 주교 선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63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수원교구가 창설되면서 초대 주교로 윤공희 신부가 선임되었으며, 1966년 5월 마산교구의 초대 주교에 김수환 신부가 임명되었다. 1969년 5월 대구교구에서 분리된 안동교구의 초대 주교에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이자 대전교구 상서국장이었던 드봉 레나드(Rene Dupont)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 시기 이들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한국사회와 각 교구 내에서 실현시켜 나가면서 가톨릭 내 혁신세력을 형성시켜 나가고 있었다.

 

3) 원주그룹의 신협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962년 8월 강원도지역에서 당시 춘천교구 소속의 장성성당 이영섭 신부의 주도하에 태백신협(이사장 조성두, 창립조합원 33명), 철암 요셉신협(최명섭, 40명), 황지신협(19명) 등 3개 신협이 설립·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이영섭 신부는 사목현장에서 광산지역의 비참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목도하면서 가난 추방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신협운동에 주목하였고, 협동조합교도봉사회의 지원을 받아 3개 신협을 설립하였다. 당시 이들 신협들은 장성본당을 중심으로 광산공소였던 철암과 황지공소의 신자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던 이영섭 신부는 원주교구 설정 후 지학순 주교와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담은 교회혁신운동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 활동하였다.

 

4) 이 시기 신협운동의 사상적, 이론적 기반은 안티고니쉬운동의 지역사회개발운동이었다. 안티고니쉬는 캐나다의 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 반도 내의 소도시이다. 1919년 대공황 이후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안티고니쉬 지역주민들이 비참한 생활상태에 빠지자 그 지역의 세인트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St.Francis Xavier University)의 톰킨스(James Thomkins)와 코디(M. Coady)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농어촌의 사회구조적 제반 문제를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21년 민중학교를 개설하면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협동조합을 통한 지역자립 기반 마련과 지역공동체운동을 전개하면서 안티고니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M. Coady, 유영 역, 1968 『안티고니쉬운동』). 1950년대 말~1960년대 초기 신협운동을 이끌었던 장대익 신부와 가브리엘라 수녀는 모두 세비어 대학에서 안티고니쉬운동을 직접 배우고 귀국한 후 이에 기반해서 신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시기 신협운동의 사상적·교육적·이론적 기반이었다.

 

5) 1973년 1월 창설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1979년 9월 사회개발위원회로 개편되었으며, 1983년 11월 사회사업국 사회개발부로 개편되었다.

 

6) 당시 광주항쟁이 재야·학생운동세력·소장학계 등에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주면서 1980년대 전반 반미사상과 (반)식민지론, 계급혁명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스탈린주의, 그리고 주체사상 등이 급격하게 도입되었으며, 운동선상에서 극단적 무장투쟁론과 전위당론, 수령론 등이 급격하게 분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5공화국시대 극한적 투쟁론은 원주지역의 민주화투쟁세력 내에 형성된 생명운동의 흐름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1980년대 초 원주그룹 내에서도 ‘개량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나타나고 있었다(2011년 10월 1일, 김상범 (주)살림농산 대표 구술(원주 밝음신협 4층 무위당기념관)). 그러나 원주그룹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으로 자신들의 향후 운동방향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반 원주소비조합과 한살림농산의 창설, 한살림모임의 구성과 한살림선언을 주도하면서 생명운동에 입각한 ‘생활협동운동’과 ‘생명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7) 김지하, 『흰 그늘의 길 3』, 학고재, 44~45쪽, 51~54쪽, 2003.

 

8) 한살림모임, 『한살림선언-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1989; 한살림모임, 『문명의 위기에서 생명의 질서로』, 『더불어 사는 한살림』, 1990, 45~66쪽; 모심과살림연구소,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한살림선언 다시 읽기』, 도서출판 한살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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