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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생명운동과 종교적 이상주의
2016-05-19 11:00: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생명운동과 종교적 이상주의

 

글 서영표(제주대 교수. 사회학)

 

 

볼 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것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부탁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우선 선생이 남긴 사상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제가 무위당의 사회운동론을 논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망설임의 두 번째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아주 짧은 선생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일상의 삶과 실천에서 벗어나 따르고 기념할 무엇인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께서 씨앗을 뿌리셨던 한살림운동이 성장해가고 있지만 생명을 중시하고 아끼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한살림선언의 주장은 생활협동조합의 실천에서 옅어지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생명과 협동의 정신과는 멀어져 잘 먹고 잘 사는 개인들의 소비행위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기념하고 논의하는 것은 선생님의 실천적 사회운동 정신을 곡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위無爲가 아닌 작위作爲로 치우쳐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저는 한살림운동이 표방한 생명의 원리와 협동의 정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의 말씀에 빗대자면 자연스러움의 원리를 체득하지 못해 여전히 원인을 찾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미욱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깊지는 않지만 선생이 남기신 글과 말씀을 읽고 고민한 지금에도, 선생의 삶과 실천에 깊이 감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위의 사상과 생명의 원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합리주의적으로 교육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보다는 인과적 설명을, 화합과 조화보다는 적대와 투쟁을 마음속에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선생과 이현주 목사님이 노자를 강독하면서 나누신 아름다운 말씀에 매혹당했습니다. 평소 동양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터라 노장의 선禪 사상에서 출발하여 불교, 천도교, 기독교를 넘나들며 평화와 생명의 원리를 설파하시는 사상의 깊이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물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무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道에 도달함으로써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종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이러한 도의 경지일 것이라는 선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가 붙잡혀 있는 ‘자연스럽지 못한’ 속세의 습관과 관습, 삶의 방식으로 돌아오면 선생의 말씀은 너무 높고 아름다워서 우리네 삶에 스며들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선생도 이것을 아시고 생명살림의 실천을 무던히 강조하셨지만 하루하루를 생존의 ‘투쟁’에 내몰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높은 말씀’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감각의 세계에 빠져 느끼고 볼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감각의 세계가 가져오는 물질적인 욕망에 탐닉하는 우리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 도의 원리를 통해 벗어나는 것은 아름다운 윤리적 주체들의 세계입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상가들이 ‘꿈꿨던’ 유토피아의 삶의 원리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언어의 한계를 알지 못한 채, 언어의 형식을 빌려 세상에 대한 완벽한 설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굴레요 딜레마일 것입니다. 선생은 노자, 부처, 예수, 해월의 사상을 통해 이 굴레를 보았고 거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 노력하셨습니다.

 

하지만 언어 안에서 삶의 조건과 대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인간의 삶 아닐까요? 높은 말씀과 ‘도’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그 딜레마와 굴레 자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도를 삶의 좌표, 즉 도덕적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일상의 삶을 그것에 맞추어 영위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선생과 이현주 목사님이 ‘노자이야기’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는 우리의 한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가 바로 우리네 사는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 기준과 일상적 경험 사이의 거리감을 끝없이 자각하고 느끼면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초래하는 우울과 강박, 분열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자본의 논리를 몸에 새기고 실천하고 있지만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연대와 상호부조를 갈망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실증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논리가 산산이 조각내어 버린 자신의 삶의 파편들을 짜 맞추어 일관성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굴레와 딜레마, 분열과 강박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영속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생의 말씀이 큰 울림을 줄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종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종교 지도자들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이유는 종교적 원리들이 ‘지금-여기’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아닌 세상을 넘어선 보편적 원리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무위당 선생과 같이 ‘경지’에 이르신 소수의 분들은 종교가 가르치는 보편적 도덕과 생활윤리를 체화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것을 ‘높은 말씀’으로 받들 뿐 실제 삶에서는 사적인 욕심과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 종교적 가르침은 아직 ‘높은 말씀’을 받아들일 만큼의 수양과 성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혹시 종교적 가르침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기준을 내세우고 그것을 따르지 못한 자들을 종교적으로 단죄하면서 높고 아름다운 도덕과 윤리의 세계로 도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로운 사회운동의 힘은 어디로부터?

 

세상만사,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실증적인(positive) 것으로 설정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탐색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탐색과 설명의 방법은 오로지 인간의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지적 ‘오만함’이 팽배해 있습니다. 무위당 선생께서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무위라는 도의 경지를 주장하신 것은 이렇듯 오만한 과학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감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생의 실증주의(positivism)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증주의 비판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선생과 저 사이에는 간극이 생겨납니다. 그 간극은, 감각의 세계를 비판하고 실증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과학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그 자체로 실천이며 감각의 세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여전히’ 합리주의적인 저의 생각에서 생겨납니다.

 

새로운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서구의 이론 중에 자원동원이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을 철저하게 물질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선택으로 설명합니다. 자원동원이론에 따르면 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임승차자(free rider)’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합리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져 물을 수 있는 행위자들은 운동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운동의 결과만을 향유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회운동의 성패는 운동을 조직하는 운동가가 무임승차자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선택적 유인(selective incentives)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사회운동을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실증주의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볼 수 있는 것’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며 물질적 이해관계에 붙들려 있음을 드러냅니다.

 

자원동원이론이 터하고 있는 이해관계의 세계와 물질적 이해타산을 계산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경쟁, 효율, 발전과 성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한 근대 자본주의문명의 산물입니다. 그것을 산업주의문명이라고 불러도 그 내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근대성 또는 산업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났습니다. 경쟁적인 적자생존의 논리가 아닌 상호협동과 부조의 논리가 인간의 진화적 적응과 생존을 이끌어 낸 근본 원리임을 천명하는 입장, 근대문명 비판을 자연과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영성의 원리로부터 이끌어 내는 종교적 입장,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본성을 근대성의 산물로 인식하고 그것을넘어서는 구조적 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성의 구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비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생각들이 출현했습니다. 각각의 입장은 생태적 위기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제시했고 현행의 사회체계를 전환하는 운동의 원리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앞의 두 가지 입장, 즉 상호부조적인 인간론과 종교적 입장은 자원동원이론과는 반대의 편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으로 계산하는 합리적 주체로 가정하는 것과 상호 부조하는 협동적 존재로 상정하는 것은 모두 사회적 조건과 문화적 맥락을 간과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입니다. 생물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문화적이고, 그래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일관성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임을 보지 못하고 ‘이미 가정된’ 인간 본성의 원리에 근거해 ‘지금-여기’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원동원이론과 상호부조론은 본질주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본질주의는, 생태계와 인간의 공존을 가능하게 할 녹색 사회로의 전환이 딜레마와 굴레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흔적과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하는 ‘갈등하는 주체’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합니다. 본질주의적 비판은 이상과 관념에 치우쳐 현실 속에서 생겨나는 불만과 저항, 그리고 연대에의 열망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호소는 상호부조론의 입장과 많은 것을 공유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닌 영적인 원리 또는 신(들)의 원리에 기대지만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 ‘이상’에 호소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다만 상호부조론이 인간주의적이라면 종교적 입장은 종종 인간을 신 또는 영성 앞의 무수한 존재들과 구별되지 않는, 하지만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의해 질서를 해치는 존재로 파악하는 일종의 인간혐오주의로 기울 위험이 있습니다.

 

무위당 선생은 이 두 가지 입장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은 이상이 아닌 현실의 삶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무위의 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는 자연을 위해 인간을 지구생태계를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고 그 존중의 모시는 마음을 삼라만상 모든 존재로 확대하는 것이 선생이 바라는 무위의 상태, 도의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합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사상은 ‘이상주의’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의 논조는 전근대시대 위정자에게 통치의 방식, 도를 통한 통치의 방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개인적 윤리를 곧바로 이끌어 내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세 번째 입장, 즉 사회적 비판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생겨납니다. 사회적 비판은 그 안에 다시 다양한 입장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에서 사회적 생태페미니즘(social eco-feminism), 그리고 생태마르크스주의와 생태사회주의까지, 생태적 위기를 초월적인 원리 또는 영성에 호소하지 않고 사회적 구조 안의 갈등과 모순으로부터 설명하고 그 조건 아래서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통해 사회 전환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입장들을 사회적 비판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 세세한 내용을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음의 주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들이 초월적 원리와 정신이 아닌 ‘지금-여기’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사회운동의 근거를 이끌어내는 것은 굴레와 딜레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지만 굴레와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는 인간들, ‘지금-여기’에 살아 숨 쉬는 인간들로부터 사회 전환의 힘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사회적 비판은 무위당 선생이 말씀하신 문명의 전환과 협동과 생명의 원리를 실현하는 운동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생명 파괴를 조장하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저항에서도 같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위당 선생이 제시하신 협동과 생명의 논리를 갈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 원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실천의 주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주의적 욕망 추구와 경쟁 원리, 그리고 그것에 터한 무한한 성장에의 믿음을 비판하면서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materialism)가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라면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고려하는 것은 이론적 유물론(materialism)입니다. 헛된 욕망을 부추기는 물질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피와 뼈와 살을 가진, 공통의 문화 속에서 살지만 그 안에서 서로 갈등하고 적대하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유물론적 분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종 무위당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생명운동은 유물론적 분석을 물질주의와 혼동합니다. 그러면서 영성주의로 빠져 버립니다.

 

이러한 유물론을 한살림운동의 창시자들이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유물론의 대표자도 아니며 유물론을 강조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위당 선생이 씨를 뿌린 생명운동이 문명전환을 향한 사회운동의 풀밭으로 번성하기 위해서는 풀이 뿌리내려야 하는 토양의 상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할 따름입니다.

 

 

물질주의 비판과 유물론적 분석

 

사회적 비판의 입장에서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수용한다면 선생이 제시한 무위의 경지를 실천하면서도 굴레와 딜레마에 묶여 있는 인간들에 대한 ‘분석’을 병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물론적 분석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고 결코 삶의 조건과 스스로에 대한 완벽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 속에 살지만 합리적 설명을 추구하는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출발합니다. 우리는 분열적이고 진동하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분석해 왔습니다. 여기서 유물론적 접근은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을 우리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완벽한 지식, 또는 보편적이고 중립적 지식의 축적은 구름 위의 관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생이 말씀하신 ‘상호공존’과 ‘조화의 상태’란 불완전한 분석의 시도들,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로서의 삶의 일관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생각들의 부딪힘과 만남을 통한 삶의 방식의 지속적인 갱신일 것입니다. 이러한 갱신의 과정은 갈등과 적대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적 조건은 관념의 세계에서처럼 조화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무위당 선생이 제시한 협동과 생명의 원리는 물질적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해석이 부딪히면서 성취되어야 할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이 강조하신 ‘무지의 상태’ 또는 ‘무아의 상태’는 물질적 조건 속의 운동을 통해 도달해야 할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덧붙이자면 이 목적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로 지속적인 운동을 촉발하는 좌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서구의 분석적 사고를 비판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분석이라는 도구 자체를 함께 던져 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할 반대극의 편향입니다.

 

어줍지 않게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현실을 주목하지 못하는 ‘관념론’으로 비판하는 것은 저의 의도가 아닙니다. 선생은 선생이 치열한 삶과 투쟁 속에서 체득한 삶의 원리와 방향을 우리에게 던져주셨을 뿐입니다. 제가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선생이 남긴 발자국과 사상의 궤적을 해석하고 또 다른 실천으로 나가야 하는 책무를 짊어진 후학들의 태도입니다. 무위당 선생은 종교적 관점에서 현대문명 비판의 규범적 지표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열린 사고와 실천을 강조하셨지만 선생이 서 있던 종교적 기반은 ‘무위’와 ‘무지’ 상태가 아닌 선지자적 태도로 해석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의 위기에 직면한 선각자로서

한실림운동의 ‘특권적인 위치’가 부각될 위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생의 가르침을 현실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문명전환의 근거를 찾는 길에 필요한 자양분으로 여기기보다는 그것을 마치 또 다른 ‘교조’로 만들어 ‘--주의’를 비난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선생의 치열한 투쟁을 보지 않고 화해와 공존의 방향만을 일면적으로 해석하여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착취, 억압, 낭비의 논리와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선생이 지표로 제시했던 근본 원리를 개인의 결단과 선택의 문제로 끌어내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생명운동의 이상주의적 편향은 1970-9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경직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시도에서 생겨났습니다.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진영 안에서는 이미 195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고 1960-70년대 급진적 사회운동이 가져온 충격을 흡수하면서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경향‘들’이 출현했습니다. 계급적 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모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경제에 의한 일방적 결정이 아닌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심지어 이론적 모순과 투쟁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가 논의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문화, 무의식, 이데올로기를 통해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도 출현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보였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여성해방운동의 비판, 서구중심주의적 운동에 대한 흑인민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비판, 계몽주의적인 성장주의적 환상을 극복하지 못했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생태주의자들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 안의 다양한 수정과 교정을 결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들였던 마르스주의는 이런 흔적이 지워진 편향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불행히도 편향된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역시 편향된 사회운동 이론을 초래했습니다. 무위당 선생은 “전체의 사람 사는 세상의 꼬라지”를 살피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이론적 자원을 폐기처분함으로써 물질적 삶의 구조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고 거대한 문명사적인 전환을 예견하는 선지자적 입장이라는 구름 위에 올라 앉아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 편향은 여전히 사회 비판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교조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마르크스주의가 그 틀에서 풀려나와 현실과의 대화를 통해 전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막아버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무위당 선생조차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선생은 쉽고 간단한 이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좋아하셨습니다. “누룩을 담가 놓으면 술이 되는 식으로 해라 이 말이야, 자연스럽게 해라 이 말이야”라고 말씀하셨을 때 선생이 염두에 두셨던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어느 서구 사상가가 ‘거대서사’라고 불렀던 것에 기댄 운동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 스며든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의 리듬을 따르는 운동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움과 인간다움을 짓누르는 구조의 힘을 과소평가하라는 가르침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선생은 이치를 알고 참여하는 것, 사욕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우주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치를 깨달아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가로막는 구조적 한계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다만 물질적 관계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과학적 분석으로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를 경계하는 데 몰두하셨을 뿐입니다. 이제 선생의 생각을 우리가 대결하고 있는 현 상태를 설명하고 극복하는 운동 자원의 하나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선생의 ‘정세적’ 개입을 우리의 정세적 개입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금-여기’에서의 해석적 독해라고 부르려 합니다.

 

해석적 독해로 나가지 못하고 선생의 이야기 그 자체를 ‘교조적’으로 읽게 되면 선생의 사상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선생의 현대 문명 비판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사상은 현대 문명을 만들고 그것에 기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무위의 도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무위당 선생의 사상을 사회운동의 사표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러한 ‘비관’과 ‘낙관’을 삶이라는 실재 속에서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저항과 열망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운동의 오늘, 그리고 내일

 

지금 생명운동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이런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까요? 무위당 선생을 모셔야 할 또 다른 어짐(賢)으로 받들고(尙)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선생이 강조하신 이치를 얻게 하는 ‘쉽고 간단함’은 종교와 도덕의 세계로의 침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보통사람들의 경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회운동이 종교와 도덕이라는 구름 위의 아름다운 세상으로부터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지상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쉽고 간단함이고 그 곳에서만 이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되돌아온 지상은 구름 위가 아니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시끄럽기 때문에 갈등하고 동요하고 구조의 힘 앞에 무너지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사회적 비판을 포기한 도덕과 종교적 윤리에의 호소는 이러한 되돌아감, 현실 직시를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선생이 말씀하신 “가지려 하지 않는 상태”, “활을 당기고 있는 무심한 상태(利在挽弓之間)”는 도덕적 수양이 아닌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에서의 공동의 경험을 통해 성취되는 구조와 주체의 동시적 변화의 결과입니다. 구조를 변화시키면 주체가 변화된다거나 주체가 대오각성하여 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모두 반쪽짜리 생각인 것입니다. 선생은 반쪽짜리 생각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과감하게 반대쪽으로 막대를 구부렸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사상을 실천의 가르침으로 삼아 미래를 개척해야 할 우리는 두 가지 편향 모두를 경계하고 종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적 비판과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은 서로 공약수가 없는 패러다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집합이 없는 사상적 패러다임을 하나로 만들기보다는 이들 사이의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누르는 것은 무위당 선생이 가장 경계하신 것입니다. 서로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선생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극단적인 빈부 격차와 생태 위기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조건이 종교적-도덕적 비판과 구조적 비판이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21세기 자본주의는 우리의 몸을 지치게 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있으며 사회적 연대의 토대를 허물고 있습니다. 몸과 자연의 외적 한계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기적인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한 우리의 정신조차 경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연대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분노와 종교적 윤리에의 호소가 물질적인 모순과 해우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비판가들은 생명사상을 통해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사상가들은 구조적 관점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이 2014년 한국의 모순적 현실 속에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이 운동과 실천을 통해 마주치고 대화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사상이 또 다른 교조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은 각각의 입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것은 실천 속에서의 대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적 유물론의 교훈입니다. 자연과 사물의 영역까지 인식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간주하며 동시에 자연적 대상을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갖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의 도달은 우리 인식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물질적이고 구조적 조건 속의 실천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유물론의 시각에서 오늘의 생협운동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생협운동은 기술문명과 물질문명 비판에 앞장서고 있을까요? 혹시 구조적 조건에 대한 비판은 말뿐이고 소비주의적 욕망의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생협운동과 생명운동은 자본주의적 모순에 고통스러워하는 비명과 신음에 귀 기울이고 있기는 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비판의 다양한 목소리와 교감하고 연대하려는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걸까요? 무위당 선생이 생전에 생협운동을 향해 던지셨던 경계의 목소리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 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것들은 먹거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알아들어. 이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사회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땐 말이지 얘기가 안 되는 거지. 먹거리를 제대로 해서 우리가 살자고 해서 이 일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일체의 반생명적인 세력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몸을 함께하는 태도가 있어야 된다 이거지. 그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공동체 소비자운동이 전부 이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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