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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무위당과 모심의 지역운동
2016-05-19 11:11: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무위당과 모심의 지역운동

 

글 이영우 (나주공부모임)

 

 

돌아보기 - 동지는 간데없고 찢어져 힘없이 날리는 깃발이여!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70~80년대는 ‘자유’와 ‘민주’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민주화운동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탄압받고 희생당했으며,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고 함께했다. 그 정점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87년 6월 항쟁이었고, 이후 6.29선언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쳐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분배의 정의, 통일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부문별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으며,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역운동 또한 꿈틀대기 시작했다. 변화된 상황 속에서 새로운 과제를 발굴하고 운동 전개 방식도 다양화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다. 그렇지만, 몸집이 커지고 갈래가 많아진 반면 깃발과 대오는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IMF 사태를 거치면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그 정도는 심각해졌다.

 

그 이유는 첫째, 진정성의 실종이다. 욕망과 안일에 빠져 본래의 초심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과실 따먹기이다. 일부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운동의 성과로 얻어진 기회를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개인의 출세와 돈으로 바꿔버리는 일들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 대오의 약화와 도덕성의 상실을 자초하였다. 세 번째, 앞의 이유들의 바탕은 운동 진영의 허약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혼을 울리는 사상, 넓고 깊고 긴 시선, 늘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기풍, 선공후사先公後私의 헌신성 등, 지금에 와 그 어느 한 가지를 생각해보아도 시원한 대목이 없다.

 

이제 더 이상 남을 탓하지 말자. 우리 운동은 진정성과 도덕성을 상실하고, 내공이 허약하고 편협하고 나태하고 헌신성마저 사라졌다. 주장과 외침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되었다. 기득권 세력에게 운동 진영은 더 이상 무서운 집단이 아니라 관리대상으로 전락해버렸고, 저토록 희망을 찾아 들썩이는 역동적인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해버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타깝고 답답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태어나 첫 걸음을 내딛는 아이처럼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다.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만난 무위당

 

2007년부터 농업·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찾고자 지역의 농민들과 공무원, 조합 직원들이 함께 2년여 동안 공부했다. 그 결론이 협동조합이었다. 그렇게 함께 공부한 이들과 협동조합을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뿌리를 놓아둔 채 가지만 잡고 씨름했었다. 전체를 모른 채 부분이 전체인 줄 알았다. 본질을 소홀히 하고 현상에만 매달렸다. 근원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하거나 미뤄두고 욕망과 거짓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바르지 않은 내 모습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향해간다는 것 자체가 어릿광대짓이었다. 실패는 당연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러웠다. 패배감과 분노감 또한 상당했다. 꽤 힘겨운 시절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2011년 어느 날 한 선배님의 안내로 부안에서 ‘무위당사람들’을 만났다. 원주의 ‘무위당사람들’과 호남의 ‘무위당만인회’ 분들의 정기적인 교류의 장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원주를 방문하기도 하고 책과 서화집을 보기도 하면서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광주에 있는 인문학 학당 ‘무등공부방’을 만났고, 동학을 접하고, 화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자취를 더듬기도 했다. 2012년 여름부터 나주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인문학 공부를 위한 ‘나주공부모임’을 시작했다. 마음의 스승이신 ‘자연의 농사꾼’ 한원식 선생의 삶과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지금 나는 학생이다. 나이를 되돌릴 수 없어 주어지는 이런저런 일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화두를 푸는 것이 나날의 중심 과제이니 분명코 학생이다. 모든 것이 뿌연 안개 속에 휩싸여 있고, 더러 작게 반짝거리는 빛을 보기도 한다. 이런 내가 주제를 정하여 논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지만, 어설프고 부족한 대로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말하고자 한다.

 

 

나락 한 알과 지역

 

나락 한 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내가 이 이치를 모두 이해하고 체득한다면 또 다른 무위당이 되어 천지간을 흘러가겠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나락 한 알은 그 자체가 생명일 것이다. 싹이 터 자라고 꽃피어 맺힌 열매이자 새싹을 간직하고 있으니 생명이다. 천지자연의 큰 생명의 한 발현이다. 솥에서 밥이 되거나 썩어서 밥이 되어 다른 생명을 살게 하니 생명이다. 나락 한 알은 수천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온 농사의 세월과 농경생활을 영위해 온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고 자연환경의 변화 또한 품고 있을 것이니 인류와 자연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나락 한 알은 햇빛과 비와 바람과 달과 별, 대지와 초목과 사람의 피와 땀, 지렁이와 땅강아지, 춤추는 벌 나비와 지나치던 작은 짐승 등 하늘땅의 수많은 존재들이 어우러진 소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락 한 알은 어느 지역, 어느 대지에서 그곳만의 기후와 토질과 농사법과 관계되어 있고,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을 것이니, 분명 지역성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구체적 개체로서의 나락 한 알은 지역을 통해 실현된다. 지역마다 품종이 다르고 맛과 품질도 다르다. 심지어 수입 개방을 둘러싼 찬반 시비마저도 ‘나락 한 알과 지역’의 문제일 수 있다.

 

지역운동은 우리 운동의 전체 흐름과 대체적으로 그 길을 같이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 운동의 한계와 과제는 지역운동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운동은 문제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누가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인식과 실천이다. 현재의 지역운동은 자기 지역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자치, 교육, 복지, 문화, 환경 등의 분야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정보와 사례를 감각적으로 풀어내어 어설프게 움직이고 있다. 이 지경이다 보니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고 당연히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도 없다. ‘지역이 위기’라고 한다. 지방자치는 토호자치가 되어버렸고, 지역의 문화는 천박하고, 지역사회는 갈가리 찢겨 대립과 갈등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돈과 자신(과 가족)’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사소하고 하찮게 여긴다. 가치 실종의 시절이다. 입만 벌리면 ‘탓’하기에 급급하다. 가슴 속에서는 욕망과 분노가 들끓을 뿐, 자성하고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

 

지역의 위기는 지역운동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제 변해야 할 때다. ‘나락 한 알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하신 무위당 선생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으로 지역운동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존엄하다’와 ‘모심(侍)’

 

우리가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고 보고 들어 아는 것들 대부분은 서구적 가치와 사상이었다. 그 가치와 사상의 핵심은 ‘인간은 존엄하다’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구절이 아닐까? 지구상에 사람이 홀로 우뚝한 존재라는 이 오만한 사상이 물질문명을 정당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자연 파괴, 동류인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 전쟁, 그리고 결국은 지구 생명의 공멸이라는 위기를 향한 폭주로 이어지고 있음은 이제 상식이다.

 

참으로 위험하고 잘못된 사상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바탕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을 죽이고, 인간을 죽이고, 지구까지도 파괴하고 있다. 나라가 서양에 속해 있지 않고, 내가 사는 곳이 서울이 아니라 해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각자, 그리고 모두 함께 소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물질문명의 폐해를 말하지만 정작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해월 선생은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 말씀하셨다. 무위당 선생이 해설하길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1)고 했다. 모두 한울님을 모셨으니 모두가 한울님인 것이다. 어떤 존재는 존엄하고 어떤 존재는 비천하다는 식의 차별이 없다. 무등無等이다. 모두가 신령한 한울님을 모시는 것,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것이 시侍(모심)라는 것이다.

 

지구가 어렵고, 나라가 어렵고, 지역이 어렵다. 무엇이 원인이고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러한 일대 위기상황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근원이 무엇일까? 생명이요 한울님이다. 모든 생명 즉 모든 한울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모든 생명(한울님)과 동고동락하는 데 위기 해결의 큰 길이 있다는 무위당 선생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역운동과 지역의 ‘어른’

 

원주의 ‘생명과 협동의 공동체’에서 길을 찾기 위해 매년 전국에서 수천수만 명이 원주를 찾는다고 한다. 왜 원주에 사람들이 몰려드는가? 다른 지역에서도 원주에서처럼 신협운동, 카톨릭농민회 운동, 민주화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원주에는 무위당 선생과 지학순 주교라는 큰 어른이 계셨기에, 그들과 함께했던 후학들이 지금도 그 뜻을 이어 지역의 어른으로 또 일꾼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다른 지역과 달리 원주에 생명·협동의 공동체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운동을 진지하게 하는 이들 대다수가 지역사회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계시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어른을 모시고 지역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지 않고, 지역운동에서 어른이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지역도 많지 않다. 지역사회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을 찾고 모시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없는 것이 아닐까? 어른들의 경륜과 지혜야말로 우리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앞선 이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노고 덕분이기에, 우리는 어른을 모시고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지극히 계산적으로 판단하더라도 어른들은 매우 중요한 집단이다. 노령화 사회에서, 특히 그

정도가 심한 농촌 사회에서 어른들이야말로 지역운동의 잠재적 중추세력이다.

 

세태는 바야흐로 SNS 시대를 맞아 갈수록 빠른 것을 선호하고, 경쟁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면서, 어른들을 불편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연에서는 노거수老巨樹와 작은 풀들과 어린 새싹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앞 물결과 뒤 물결이 이어져 유장하게 흐른다. 어른의 지혜와 장년층의 원숙함, 청년들의 활기와 아이들의 생동하는 기운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지역공동체는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아가리라 믿는다.

 

 

지역운동과 ‘소박한 삶’

 

우리 사회가 가진 큰 문제의 하나는 지역 간 불균형 발전과 지역감정이다. 그 출발은 산업화 과정에서 일부 세력의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렸고 쉽게 해결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소외된 지역에서는 균형발전과 배려를 요구하고, 앞서가는 지역에서는 효율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현상은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점점 더 고착화되는 것 같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고루 잘 살 수 있어야 하고, 상호 존중하며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물질적 차원에서의 격차나 푸대접, 기회의 불균등 등의 해소를 물질문명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를 과거의 연장선상에서만 설정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물질문명의 한계를 넘어, 지속가능하고,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존중되고, 생명과 자립과 협동, 평화가 넘치는 지역의 미래를 즐겁게 상상하자. 이를 위해 욕망의 절제를 전제로 하는 ‘소박한 삶’2)을 주민들의 자발적 합의를 통해 지역 차원에서 선택하는 용기 있는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또한, 더 이상 사람과 자연과 역사문화 등을 ‘자원’으로 접근하지 말고, 고귀한 생명으로, 신성한 가치로 존중하자.

 

 

지역운동과 ‘인문학적 결사’

 

비상한 시절이다. 일락서산에 해는 지는데 길은 첩첩산중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의견과 궁리는 천만 가지인데, 그 무엇 하나 명쾌하게 ‘이것이다’ 하고 주어진 답은 없다. 다행히 무위당 선생처럼 시대의 큰 스승이 계시고, 동서고금의 많은 스승들이 계시기에 그분들의 삶과 사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또한 생명과 협동과 평화의 공동체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된다.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자각과 위기의식의 공감대가 점증하고 있다.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문명사적 대전환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감당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의 하나는 급하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 길을 가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잘 모르니, 함께 길을 찾고, 함께 준비하고, 손잡고 갈 사람들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를 위해 인문학적 결사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전국의 여러 곳에 다양한 인문학 공부모임이 있다고 한다. 지역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무등공부방’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광주의 인문학학당 ‘무등공부방’에는 거꾸로 된 동아시아 지도가 걸려 있다. 보통의 지도에서는 남도가 반도의 끝에 옹색하게 위치해 있지만, 이 거꾸로 된 동아시아 지도에서 남도는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로 열려 있고 육지로 대륙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중심’이다. 2010년에 시작하여 매주 이어온 강좌가 200회를 넘어섰고, 탐방과 교류행사 50여 회, 지역과 함께하는 행사 30여 회, 국제교류 10여 회 등이 진행되었다. 산하에 재단법인이 설립되고, 분야별 연구소와 사업들이 해를 더할수록 늘어가고 있다. 기본에 충실한 학습, 지역에 대한 철저한 연구, 열심히 살아가는 국내외 지역을 배우고 그들과 교류하고 협력함으로써 여러 분야를 통섭하고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여 학습이 담론이 되고 담론이 정책으로 발전하고 실천 과제를 수행하는 집단지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무등공부방은 자신들의 작은 시작이 계기가 되어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어울려 남도의 미래를 개척하여 르네상스를 구가함으로써 지역의 자존을 스스로 드높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나주에는 ‘나주공부모임’이 2012년에 시작해 2년여 동안 격주로 강좌를 열고 있으며, 무등공부방 등과 교류하고 연례 행사도 개최하면서 의미 있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작은 농촌지역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면서 지역의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 ‘나주공부모임’은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지만, 잔잔한 파장을 일으켜 다른 공부모임을 촉발하기도 하고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전국 각지에서의 노력과 대오가 모두 똑같을 수 없고 똑같아서도 안 된다. 지역별로 그 지역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서두르되 서두르지 않고 나아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큰 흐름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이 산줄기 저 골짜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이고 섞여서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에서 만나 하나 되듯이….

 

 

지역이 희망이다

 

어느 한 시절 편안한 적 있었던가? 자연이 늘 평화롭기만 하던가?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속에서 새싹이 솟아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번창하지 않던가?

 

어느 산야에 피어난 풀꽃 한 송이를 보고 생명의 축제에 초대받아 감동하거나, 세파에 찌들어 자기 안의 욕망과 분노와 근심걱정에 사로잡히고 답답한 일상으로 허우적대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똥통에 머리를 처박고 허우적대면서 살아가든, 늘 고마워하며 이웃들과 함께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가든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초록빛 지구별에 초대받은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까?

 

크고 거창한 생각과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위당 선생께서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하셨지 않은가? 내가 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이 자리에서, 이웃들과 함께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제대로 살아보자는 것이 지역운동의 출발이자 끝이 아니겠는가? 지역의 뭇 생명이 조화롭게 살아가고, 지역이 ‘유무상자有無相資’3)의 정신으로 자립과 협동의 공동체가 되고, 지역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 세계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자.

 

지역은 우리 각자의 삶의 구체적인 터전이기에 우리에게 지역운동은 직접적이다. 지역은 내 삶의 장이자 영역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고 이웃이 함께하는 가운데 지역에 희망을 수놓을 수 있다.

 

내가 희망이고 지역이 희망이다.

 

 

1)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1997, 49쪽.

 

2) 피에르 라비, 『자발적 소박함』, 예담, 2013. 참조

 

3) 동학의 사상. 지식이든 정보든 돈이든 시간이든 육신의 힘이든 남는 것은 부족한 이들과 서로 나누고 돕자는 의미로, 구한말 동학 포교의 큰 동력이 되었으며, 5.18 광주의 ‘대동세상’과도 유사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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