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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경계를 흐리는 음악, 문화, 삶 - 삶과 음악, 지역과 세계를 넘나드는 음악가 김반장에게 듣다
2016-06-02 09:15:00

*  『모심과 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경계를 흐리는 음악, 문화, 삶

- 삶과 음악, 지역과 세계를 넘나드는 음악가 김반장에게 듣다

 

정리 편집부

 

 

음악은 삶이고 관계다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직업 음악인으로서, 삶과 음악 사이 경계 혹은 균형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사실 원래는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했던 것들이 분화되어서 지금 시대에 음악가, 예술가라는 직업이 생긴 거잖아요. 그런 한 사람으로서 음악 행위를 하는데, 또한 그건 자기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삶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죠. 그런데 지금 사회에서는 음악 자체가 대중들이 좋아할 코드나 미디어들이 만들어내고 마케팅이 이루어낸 어떤 것에 자기를 맞춰가는 형국이기 때문에 음악이라는 것,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다시 필요한 것 같아요. 삶과 철학, 말하자면 자기의 세계관을 내놓는 음악보다는 히트나 차트 순위를 목표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때로는 음악이라는 것에서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제 삶에 스며들고 삶으로부터 배어나오는 음악을 하고자 해요. 음악 행위에 음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데, 생각하는 데 있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음악화 하는 작업이 진정 음악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직업적으로 보다 ‘프로페셔널한’ 음악보다는 제 삶이나 내면으로부터 나와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풀어내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음악을 하려고 합니다.

 

삶으로부터 음악이 나오지만 그 음악은 또한 소통을 위한 것이기도 할 텐데요.

그렇죠. 음악이라는 건 무형의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고, 그 피드백은 그것에 동의하고 즐기는 관객들로부터 오니까요. 제가 어떤 음악을 내놓았을 때 이 음악에 대해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 반응하고 에너지를 주는 거잖아요. 또한 거꾸로 그 에너지를 제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이 고민하게 되고 그 에너지를 좀 더 잘 승화시켜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요. 서로 교감하는 통로로서 음악이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음악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어떤 퀄리티로 표현할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죠.

 

농부에 비유하자면, 생명을 키우는 사람이면서 한편으로는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딜레마가 있는데, 음악가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부분은 분명히 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희가 집 마당에서 연습하고 있으면 동네 꼬마 친구들이 가끔 와서 보고 같이 얘기 나눌 때가 있어요. 그 친구들이 핸드폰으로 듣는 음악들을 같이 듣고 있으면 그게 그 친구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이거든요. 그러다보면 내가 만드는 음악이 밖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정서와 어떻게 교감하는지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는 무게감이랄까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음악은 일종의 소울 푸드 같은 거잖아요. 단지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유기농 농사를 짓듯이 하나의 좋은 먹거리가 될 음악을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3~4개월 만에 반짝 하고 사라지는 음악들도 많지만, 계속해서 제가 만든 이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할 테니까요.

 

 

음악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

 

그처럼 음악이 갖는 여러 속성, 특히 치유와 위로, 화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단지 즐기고 노는 행위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식되고 소비되는 경향 또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음악페스티벌들이 연이 어 취소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고요.

우선은 음악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음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한 책임도 있는 거겠죠. 음악이 음악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나, 산업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음악의 표피적인 면은 다양해지고 풍부해졌지만 내적으로 받쳐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현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자기 삶과 음 악을 어떻게 연결하고 그 음악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갈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지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마음을 내고 소통하는 데 있어서도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잖아요. 실제 음악의 역사를 봐도 노동요부터 시작해서 서로를 위안하고 같이 노래 부르면서 울고 웃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는데 상품화되면서 그런 측면이 쏙 빠지고 물질적인 부분만 남은 거죠. 지금 한국 음악시장은 모더니즘 시기예요. 그런데 이를테면 레게음악 같은 경우 일정 부분 모더니즘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고 있거든요. 저는 우리 굿에도 관심이 많은데요, 거기에도 정신문화가 넘어가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한 바퀴 돌았으니 원래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예전에 4대강 공사현장에 가서 뮤직비디오도 찍으시고 ‘하러 가세’ 같은 투표 독려 노래도 하셨는데, 그런 ‘사회참여’라는 측면도 음악의 한 속성이겠죠.

지금 보이는 것, 실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눈감고 애인과 헤어진 얘기만 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요. 그건 하나의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음악이라고 봐야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하는 음악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근간이 되는 영감이라는 게 있는데, 저는 그걸 ‘관계’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옆에 있는 이웃과 친구가 힘들어하거나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일들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음악이 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의문스러울 때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음악은 훨씬 더 쌍방향적이에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예술이라는 게 자기를 뽐내거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음악의 의미가 보다 확장되어야 하고 한 단계 내려와서 깊게 움직이는 음악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맥락에서 집회나 사회단체 행사에도 많이 참여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는 사회주의 동아리에 있으면서 집회나 시위에 나가고 연주도 했었어요. 그런데 갈수록, 그게 틀린 건 아닌데 사회적으로 편을 가르고 있단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실 옳다 그르다 사이에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어디로부터 음악이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어떤 한쪽 편에 서야 하는 게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어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서 많은 주장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람의 양심이라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어떤 체제든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물질로만 사람을 대하면 결국 똑같이 착취구조로 가잖아요. 그런 것을 좀 나와서 보게 되면서, 제가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같지만 정치적인 견해나 이익집단끼리의 대립 사이에서는 별로 편을 들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사회 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니고 결국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그 마음을 보게 되는 거죠.

 

 

‘비빔’의 미학: 같음과 다름 사이, 지역과 세계의 경계에서

 

장르적으로는 주로 레게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계신데요, 한 인터뷰에서 ‘개발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멀리하고 자연과 생명을 섬기는 정신과 가치가 레게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그런 부분이 음악뿐 아니라 삶 전반에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아요.

제가 영향 받은 음악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같이 더불어 살자’는 것이지 경쟁하면서 나 혼자 잘살자는 게 아니었거든요. 국적을 막론하고 그런 메시지들이 강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그루브’가 있는데, 돋보이게 춤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춤을 추게 하는 음악들이 있잖아요. 그 음악들이 저에게 얘기해준 것은, ‘너는 너 자신으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누구처럼 하려고 할 필요 없다’ 이런 거였어요. 저 역시 음악은 그런 각자의 독특한 독자성을 키우는 것이고, 경쟁하거나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상황을 얘기하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레게음악이 상당히 강한 울림을 저에게 줬어요. 이를테면 물질이나 욕심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허영심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가난이란, 진짜 부(wealth)란 무엇인가 하는, 고전적으로 내려오는 그런 노랫말들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영어를 잘하진 않지만, 듣다 보면 이 가수가 어떻게 힘주어 목청껏 외치고 있는지 알겠거든요. ‘그 길은 아니야’, ‘네가 느낀 슬픔이라는 게 뭔데’, ‘밖에서 부는 바람과 이 태양에 대해서 왜 감사하지 않지?’ 이런 메시지들이 제 안에 들어왔을 때 감각이 새로워지면서 일깨워지는 부분들이 있죠. 슬픔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굉장히 다양해요. 우리 대중가요는 대체로 남녀 간의 슬픔에 대해서만 울고 있지만, 그건 사람을 한쪽 채널로만 보는 거예요. 정말 많은 채널이 있는데도요.

 

한편으로 토속적인 느낌도 강한 것 같은데요.

제가 레게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자메이카 음악에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음악 같기 때문이에요. 한국 장단이 거기에 있어요. 심지어 지금 한국의 국악보다 레게가 훨씬 저에게는 한국 음악처럼 들려요. 마치 우리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의 리듬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저건 우리 동네에 있던 건데, 쟤들이 어떻게 알지?” 이런 느낌인 거죠.

 

한 지역에서 시작됐지만 다른 지역의 고유한 것과 만나서 접목되거나 새롭게 형성될 수 있는 ‘유연함’이 있는 거네요.

그게 레게음악이 가진 힘인 것 같아요. 호주의 애버리진 원주민,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레게음악을 사용해서 자기를 표현하고 있어요.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레게는 굉장히 심플해요. 그런 가운데 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고요. 채우지 않고 빼는 것, 여백을 주는 게 중요해요. 그런 부분은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느끼죠.

저는 기본적으로 레게라는 음악적 문법과 철학적인 바탕에 영향을 받았지만 평생 레게 뮤지션으로 불리고 싶진 않고 제 기준을 만들고 싶어요. 한국 사회가 항상 기준을 밖에서 가져오잖아요. 그런데 진짜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저는 특히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들이 지금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는 음악들과 ‘비벼졌을’ 때 어떻게 들릴지에 대한 실험도 해보고 싶어요. 레게든 아크로비트든 라틴이든 기본적으로 다 맞아떨어지는 리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리듬을 가지고 저의 정서와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좀 더 확립되는 음악을 하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사회적으로 굿이나 토속문화 같은 게 근대로 오면서 거세된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고유의 문화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굿을 보면 거꾸로 마치 아프리카 음악을 듣는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에서 오는 감동과 반가움도 있고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굿과 우리 전통문화라는 게 훼손되고 심지어 비하되는 지경까지 왔잖아요.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의 소리가 있고 영국에 가면 영국의 소리가 있고,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소리가 강하고, 그렇다면 한국의 소리가 뭔지에 대해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바이올린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가야금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가야금 자체의 아름답고 독특한 소리가 있는데. 다만 그것이 정말 괜찮은 문화가 되려면 ‘온고지신’ 하는 게 중요하겠죠. 인류 공통의 뿌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 전통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는 거죠. 결국 모든 것들이 맞닿아 있기 때문에, 국경을 넘고 인종을 넘어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각각의 고유한 것들을 만나도록 하는 작업이 더 많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죠. 저는 퓨전국악보다 오히려 레게음악이 더 우리의 전통과 인류의 전통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통기타 하나를 치더라도 자기의 메시지를 갖는 게 전통이라고 보고요. 전 세계에서 월드뮤직 페스티벌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팝이나 기존 음악의 대안으로서 전통을 중요시하는 움직임들이 이미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 것과 다른 것을 접목시킨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한편으로는 해외 공연도 많이 하시면서 또 마을 음악가이시기도 하잖아요. 요즘 언어로 ‘글로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나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이뤄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한국 밴드들이 외국에 굉장히 많이 나가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지 외국의 페스티벌이 원하는 콘텐츠만 제공 하는 입장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앞서 말 한 것처럼 우리 정체성에 기반해서 스스로 기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벽을 깨고 경계를 허무는 문화

 

멋있고 세련된 것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 다를 수 있는데, 현재는 음악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획일적인 기준이 마치 정답처럼 존재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 경우엔 텔레비전에 나오는 잘생기고 예쁜 가수들의 무대보다 뒷산에서 할아버지가 등산하면서 부르시는 노래가 진짜 멋있다, 진짜 음악이다 싶을 때가 있어요. 각자 개개인의 존엄이나 독자성을 되살려내는 데 역할 해야 하는 게 미래의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감성, 소울이 얼마만큼 당당하게 발현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제 경험으로도 사춘기 때 들었던 음악들이 저에게 준 것은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것,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의 특별함이 있다고 일깨워주고 가르쳐준 것이었거든요.

다양한 욕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음악을 초등학생부터 성인들까지 듣고 있다는 것은 좀 ‘빈한’ 느낌을 주죠. 동시에 한국 교육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자기의 정신적 소산이나 철학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이 밖에 있는 반짝거리는 것만을 보고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는 어떤 문화를 향유하고 그 문화를 얼마만큼 자기 걸로 체득하느냐로 ‘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다양함’은 한편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 다양한 선호와 취향을 가진 소비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 경우에는 다행히 한국에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힘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음악이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구분 자체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말할 수 있으면 다 노래할 수 있고, 몸이 있으면 춤출 수 있잖아요. 어떤 가수처럼 노래하고 싶다는 게 음악 하는 데 자양분이 될 순 있지만 그게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난 내가 될 거다, 그것이 음악이 주는 메시 지여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 생산자-소비자라는 말이 지금은 통용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촌스러운 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 한알학교 (2014 느티나무음악회)

 

좋은 공연 역시 무대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 궁극적으로는 경계가 없어지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대에 서는 입장에서는 어떤지요?

우선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자 시도하는 게 무대에 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닌데요, 기본적으로 무대에 선 사람 마음이 충만하고 평온해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게 음악을 하는 사람의 ‘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대에 올라갔을 때 그동안의 생활에서의 모습이 저한테서 드러나기 때문에 무대에서 제 모습을 볼 때 제가 일상을 어떻게 살았는지 스스로 모니터가 아주 잘 되죠. 부끄러울 때도 많고 공부가 많이 됩니다.

이따금 마을 잔치나 시골 동네에서, 어르신들 앞에서 공연할 때가 있는데 반응이 뜨거워요.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더 훌륭한 관객들 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누군 줄 알고 보시는 게 아니라 그냥 공감되는 게 있으니까 앉아계시는 거겠죠. 그게 진짜 ‘스코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부분에서 같이 어우러지면 저만 공연하는 게 아니라 저도 공연을 보고 있는 셈이 돼요. 살아있는 관계죠. 그런 게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 ‘흥’과 ‘신명’을 공유한다는 게 음악이 갖는 가장 큰 힘이자 매력이겠죠.

저는 모두가 손을 잡고 동글동글 도는 그 순간이 굉장히 많은 신명을 내 는 것 같아요. 때를 한 번 벗겨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록페스티벌에 모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각자 따로 살다가 그 순간만큼은 연결되고 싶은 욕구라고 생각해요.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동질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 생명문화라는 기치가 있다면, 사람들 사이 거리감을 좁히고 보이지 않는 벽과 경계를 허무는 문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문화가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이 어우러지고, 고정관념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요.

저도 고립돼 있다거나 쓸쓸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음악은 그걸 풀어내려고 하는 일종의 한풀이거든요. 그게 개인적인 한풀이가 아니라 모 두의 한풀이로 모여진다면 얼마나 깨끗해지겠어요. 가장 멋있는 일인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고요.

사진: 한알학교 (2014 느티나무음악회)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생명평화

 

정릉 생명평화마을에 살고 계시잖아요, 마을살이의 특별함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희 동네는 서울이지만 아직까지 시골 같은 정서가 있고 이웃과의 관계도 남아 있어요. ‘생명평화’라는 게 어떤 커다란 가치인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생명평화는 아랫집 아줌마랑 얘기하고 가끔 맛있는 거 나눠 먹고 그런 거 아닐까 싶거든요. 마당에서 연습할 때 문을 열어놓으면 이웃집 아저씨도 와서 들으시고, 북 들고 나가면 여기서 한 번 쳐 봐라 하시고요. 정이 있고 사는 재미가 있죠.

요즘엔 원룸이나 고시원도 많고 독거청년이란 말도 있잖아요. 몸이 아픈데 옆방 친구들이 알지 못하고, 외로움과 두려움도 있고, 그래서 커뮤니티도 만들려고 하고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경쟁 중심이고 남들보다 더 큰 아파트 같은 것들이 가치로 인식되는데, 한편에선 그런 단단한 벽에 조그만 구멍을 계속 내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앞으로 바뀌어갈 거라는 희망은 있어요.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떤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획일 적이고 갇혀 있잖아요. 세계관의 변화랄지 다른 감각을 깨우는 계기 같은 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곳에서도 사람이 10~20년 안 살면 풀이 올라오잖아요. 그런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있는데, 자연스럽게 흐르는 방향을 막고 자꾸 다른 방향으로 끌어가는 게 뭔지 생각해보면 답이 있지 않을까요? 자기 생각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들어온 생각에 따라 살고 있다거나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이 왜곡되어 있어서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고 남들 보기 괜찮은 집에 살아야 자기표현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방식에 치우쳐 있고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분명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이죠.

저도 음악 하는 부분에만 에너지를 많이 써왔는데, 작게는 집에서 청소를 한다든지 스스로 음식을 해먹는 일,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서 느끼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집에서의 삶, 살림이라는 게 없다면 좋은 아파트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돈을 버느라 밖에서 조미료 잔뜩 들어 간 음식을 계속 먹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요즘 힐링이라든지 자유의 길을 묻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문학 강의도 많은데, 그런 걸 보면 포화상태라는 얘기거든요. 지금은 어떤 게 더 좋은 삶이냐에 대한 고민을 모두가 할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십니다’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앨범 제목이기도 한데, 어떤 의미를 담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만신 김매물 선생님의 황해도 굿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지금처럼 서로 내가 잘났다고 하는 자기PR 시대에 ‘모신다’는 말이 저에게는 자극적으로 들렸어요. 멘탈을 건드리는 얘기잖아요.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도 배우는 자세와 모시는 자세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이 시간에 이렇게 만나는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해 석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감사하게 모셔야겠다는 마음이 들죠. 우리가 다 지구에서 같이 살고 있고 같이 할 일이 있는 거잖아요. 이유 없이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세계관도 같이 담고 있는 표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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