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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문명재와 새로운 상상력
2016-06-03 09:49:00

* 『모심과 살림』 0호(2012)에 실린 글입니다.

문명재(文明災)와 새로운 상상력

- 일본에서 바라본 생명의 위기

 

박맹수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새로운 발걸음을 위하여

 

나는 1979년 2월말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마음씨 좋은 종교 교역자(敎役者)가 되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4년 간의 생활무대는 오로지 종교적 수련을 겸한 기숙사와 강의실 도서관뿐이었고, 격변하고 있던 70년대 후반의 사회 현실에 대해서는 언론보도 내용이 진실 그 자체라고 믿어버리는 순진(?)하기 짝이 없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입대한 군대 안에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5월 광주’는 평범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1980년 ‘5월 광주’ 당시, 나는 육군 제 37사단 연락장교의 직책으로 고급 군사기밀을 취급했다. 또한 매일 새벽 6시 정각에 지하벙커로 출근하는 사단장에게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건’ 전말을 브리핑하는 일을 했다. 당시는 계엄령 아래 언론보도가 극도로 통제되고 있었고, 더욱이 군 조직의 특성상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의문은 있었으나 그 어떤 문제제기나 행동도 하지 못한 채로 ‘5월 광주’를 맞이하고 보냈다.

 

81년 6월말 제대한 뒤에 접하게 된 ‘5월 광주’의 진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무고한 시민학살에 가담한 가해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는 것,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군대가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음에도 ‘5월 광주’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5월 광주’의 비극이 한국 근현대사의 파행적 전개에서 기인한 문제점과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음에도 그 같은 문제점과 모순을 제대로 파악할 만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에 대한 통절한 자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5월 광주’의 비극을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의 파행적 전개에서 유래한 제반 문제점과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된 나는 80년대를 내내 ‘뜨겁게’ 보냈다. 밑바닥 민초들과 아픔을 나누고자 야학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변혁을 위한 각종 투쟁에 꾸준히 참여했을 뿐 아니라, 변혁운동을 위한 절마탁마(切磋琢磨)의 일환으로 대학원에도 들어갔다. 대학원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여 어용교수 반대 데모, 노동조합 결성, 북한바로알기 운동 등의 ‘주동자’가 되었다. 덕분에 10년 간 학위논문 제출도 취직도 불가능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5월 광주’를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사회가 지닌 구조적 모순에 눈을 뜬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 뒤에 뛰어든 사회변혁 운동 과정에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맛보았다. 깊은 좌절감 때문에 몸과 마음 모두가 피폐해 갈 무렵,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비롯하여 천도교의 삼암 표영삼 선생님, 시인 김지하 님, 인농 박재일 님 등을 만나 생명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무위당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나는 노동조합 결성 및 어용교수 반대 데모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불합격시킨 모 연구기관을 상대로 ‘불합격 취소소송’을 했다가 패소해 크게 낙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 무위당 선생님은 나를 불러 ‘내유천지 외무소구(內有天地 外無所求; 내 안에 천지 같은 큰 마음만 있으면 밖에서 구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라는 화제를 쓴 난 한 점을 주시며 큰 격려를 해주셨다. 고립무원과 절체절명의 실존적 위기 상황에서 선진들의 힘을 빌려 재기의 토대를 삼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무위당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스승과 선배님들의 무한한 격려와 사랑 덕분에 지난 30년 간 이 땅의 자생적 생명사상의 효시인 동학 및 그 실천으로 나타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나의 동학 연구의 출발점은 ‘5월 광주’이며, 동학에 주목한 것은 한국근현대사의 파행적 전개에서 기인하는 ‘5월 광주’의 비극을 한국근대 최초의 자생적 생명사상인 동학에 대하여 시간축을 중심으로 하는 탐구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문제의식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주지하듯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무거운 가르침인 것이다. 시간축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현재의 모순 해결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나의 동학 연구가 어느덧 30년을 맞이했다. 30년 간의 연구 성과는 「해월 최시형 연구」(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1996), 『동경대전』(한글판, 지만지, 2009),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모시는 사람들, 2009),『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동학농민혁명과 제국일본-』(모시는 사람들, 2011) 등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3.11’과 나의 새로운 과제

 

30여 년에 걸친 동학연구를 일단 마무리하면서 나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것은 시간축을 중심으로 동학의 생명사상을 해명하고자 한 지금까지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보다 열린 관점이 필요하다는 자각에서 온 것이었다. 시간축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연구 방법과는 다른 관점이란 바로 ‘공간축’을 중심으로 동학의 생명사상을 새롭게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세기 중엽 한국에서 동학이 자생적 생명사상으로 성립될 무렵,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 속에서는 과연 어떤 사상적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는지, 생명사상으로서의 동학의 실천운동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실천운동들이 동시대 동아시아와 세계사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성립되고 전개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서 21세기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할 때 동시대 동아시아와 세계사 속에서도 그 같은 과업이 가능한지 등등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민을 할 무렵, 근무하고 있는 대학 측으로부터 1년 간의 연구년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일치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연구년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20여 년 전부터 일본에서 공공철학(公共哲學) 운동을 펼치고 계시는 ‘교토포럼 공공철학공동연구소’의 김태창 소장님 소개로 교토대학에서 초청장을 보내주기로 했다. 2010년 9월에 일본행이 결정되었고, 연구 기간은 2011년 3월부터 1년 간이었는데 학내 사정으로 2011년 8월부터 1년 간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일본행 준비를 하는 도중에 가공할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앞바다에서 거대지진이 일어나 수십 미터에 달하는 쓰나미가 해안 도시를 휩쓸어 2만여 명의 희생자가 나오고,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제 1원전의 냉각장치가 마비되어 원전이 폭발하는 사태가 일어나 일본 전역뿐 아니라 전 지구적 규모로 방사능 물질에 오염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2011년 일본에서 일어난 ‘3. 11’의 비극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사태였다. 거대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의 위력도 위력이려니와 후쿠시마 원전폭발사고 또한 전대미문의 대재앙이었다. 주변에서 모두들 일본행을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3.11’의 비극을 맞은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예정대로 2011년 8월 중순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정을 변경하여 처음 1개월 동안은 도쿄에서 생활했다. 도쿄에서도 가장 방사능 오염이 심한 카츠시카 구에서 지내면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상과 사고로 인한 피해 상황 파악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행 전에 생각하고 있던 연구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동학사상에 대한 공간축 중심의 연구 주제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중심으로 한 문명의 문제에 대한 검토로 서둘러 바꾸었다. 그 후 나의 연구는 좁은 강의실을 벗어나 활짝 열린 현장으로 향했다. 내가 주로 택한 ‘현장’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테마로 한 각종 토론회와 심포지엄이 열리는 회의장, 사고의 진상과 피해상황 등을 증언하는 모임, 원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사고 수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 등이었다. 물론 원전사고를 계기로 고조된 반원전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방송과 신문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원전사고에 관한 보도내용을 모니터링하는 일과 함께, 원전사고 이후 속속 간행되는 원전 관련 서적에 대한 검색 작업을 계속했다. 이 같은 일은 귀국 직전까지 1년 내내 계속되었다.

 

천재가 아닌 인재이자 문명재(文明災)

 

귀국 1개월 전인 2012년 7월초에 일본 국회의 진상조사위원회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최종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발표 내용의 핵심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것이었다. 이 발표에 대해 대다수 일본인들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지극히 늦게 발표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진상조사 발표와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천재 아닌 인재’인 이유도 속속 드러났는데 그 주요 내용을 열거하면, 첫째로 20여 년 전부터 이미 지진연구자 및 원전 전문가들은 거대 지진 및 거대 쓰나미로 인한 원전의 냉각장치 마비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 1원전을 관리하는 동경전력 측은 그들의 문제 제기를 묵살해 버리고 아무런 안전 대책도 취하지 않았다. 둘째, 반원전 운동가들은 후쿠시마 제 1원전을 포함하여 건설된 지 40년이 넘은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끊임없이 폐로를 요구했다. 하지만 동경전력과 일본정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연장 운전을 계속함으로써 마침내 사고를 초래하고 말았다. 셋째, 후쿠시마 제 1원전 폭발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폭발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사고가 빈발하였다. 그렇지만 동경전력 측은 근본적인 안전 대책을 취하는 노력보다는 사고 은폐에만 급급함으로써 결국 폭발이라는 대사고를 불러오고 말았다. 넷째, 원전의 안전 대책 수립에 만전을 기해야 할 일본 정부 차원의 각종 위원회는 동경전력 측의 자금 제공 등 회유책에 휘말려 안전성 검증보다는 동경전력 측의 의견에 찬성표를 던지는 거수기 노릇만 함으로써 사고를 방조했다. 다섯째, 매스컴 역시 원전의 사고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보도보다는 원전의 폐로 또는 근본적인 안전 대책을 요구하는 반원전 운동가들에게 과학적 근거를 대라는 식의 보도로 일관함으로써 사실상 원전 추진파 입장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노릇을 해 왔다는 것 등이다.

 

위와 같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을 현대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각종 시스템상의 문제에서 찾기보다는 근대 일본이 쌓아온 역사의 구조적 모순의 집약적 표출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견해도 나왔다.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교수의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동일본 지역은 일찍이 메이지유신 정부에 맞서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본 지역으로, 1945년까지 오랜 기간 소외되어 오다가 도쿄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 지역의 전력 공급이라는 명목상 1950년대 말부터 원전 건설이 급격히 추진된 곳이었다고 한다. 메이지 일본정부가 주도했던 ‘문명개화’ 정책은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약자의 배제와 희생 위에 성립된 것인데, 국내의 경우는 동일본을 비롯하여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국외의 경우는 조선과 타이완을 비롯하여 만주, 동남아시아 등이 희생양이 되었다. 나카츠카 교수는 2차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이 과거에 자행했던 약자의 배제와 희생이라는 과오의 전면적 인정과 사죄, 배상을 비롯한 근본적 청산을 요구받았지만 끝내 그것을 무시한 채 오늘에 이름으로써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비극을 맞이했다고 진단한다. 동일본 지역이 지닌 역사적 특수성과 근대일본의 역사의 총괄이라는 측면에서 사고 원인을 찾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일본의 구조적 모순에서만 사고 원인을 진단하는 일반적 흐름에 일침을 가하는 통찰이라 하겠다.

 

여기에 더하여, 환경 파괴와 생명 말살로 이어지는 부(負)의 그늘을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근대과학기술이 지닌 문제점, 다시 말해 우리 시대 ‘문명’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이야말로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사고 당초부터 있어 왔다.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우메하라 다케시 선생이 사고 직후 후쿠시마의 비극은 단순한 인재의 차원을 초월한 ‘문명재’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명재’적 관점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바라보는 견해는 현대일본을 대표하는 시론지의 하나인 계간지『환(環)』의 필자들에게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있다.

 

일상화되고 있는 문명재의 비극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웃나라 한국이 아닌 일본과 아주 멀리 떨어진 독일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독일에서는 시민들의 반원전 의식이 고양되어 종래의 원전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메르켈 총리는 2022년 말까지 모든 원전을 폐기하기로 내각회의에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보다 독일인들이 더 크게 놀라 신속하게 대응한 이유는 세계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기술선진국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다. 기술 선진국 일본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으니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원전 사고의 가능성과 그 치명적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을 독일인들이 앞장서서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고가 일어난 일본과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 정부가 취한 원전 정책은 한국형 원전의 해외 수출이라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정책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즈음하여 독일과 한국이 취한 원전 정책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40여 년 전에 이미『공업문명의 붕괴』라는 책을 통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치명적 문명재를 예견했던 쓰치다 다카시 선생은 원전 사고 소식을 전국 유기농대회가 열리고 있던 후쿠이현에서 들으셨다고 한다. 쓰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과『공생공빈(共生共貧)』의 저자로 유명하신 분인데,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40여 년 전부터 반원전(反原電, 또는 脫原電)의 길을 묵묵히 실천해 오신 운동가의 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40여 년의 온갖 수고와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치명적 사고의 위험성을 끈질기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고가 일어나고야 만 현실 앞에서 쓰치다 선생님은 망연자실하여 잠시 동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못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내가 만난 많은 일본인 가운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가장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바로 쓰치다 선생님과 같이 오랜 기간 반원전 운동을 해 오신 분들이었다.

 

7월 중순 교토대학의 ‘마음의 미래 연구센터’ 주최로 <동일본대진재와 후쿠시마원전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과 이재민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의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후쿠시마 시에서 오신 겐유 스님이 보고하기를, 사고가 일어난 지 1년도 훨씬 더 지난 7월초 기점으로 연간 피폭 허용량의 국제기준인 1미리시버트 이상을 초과하는 지역이 11개 현(여기에는 도쿄도 포함된다)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후쿠시마현의 경우는 아직도 1백만 명 이상이 기준치를 초과하는 피폭을 일상적으로 당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여전히 현재진형행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2011년 12월 중순에 서둘러 사고가 수습되었다고 선언했다. 참으로 기막힌 사기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21세기 들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문명재’가 점차 일상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정부의 어처구니없는 대응에서 확인되는 사기극마저도 일상적으로 연출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문명재’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이 글 앞부분에서 ‘3.11’의 비극적 현장인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영상으로 ‘3.11’을 접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 앞에 통곡하는 일본인들 옆에 그저 ‘그냥’ 함께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2011년 8월 중순부터 2012년 8월 중순까지 나는 내내 일본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숱한 생명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명재’가 가져온 비극 앞에서 절규하는 그들과 함께 절규할 수 있었고, 한 오라기의 희망이라도 건져 올리기 위해 광막한 폐허더미 위에서 통곡하며 기도하는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과 눈물과 아픔을 함께하는 동안 내 안에서 가만히 솟아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한대로 이어지는 생명의 세계와 더불어 영원불멸하는 생명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었다.

 

나를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외국인초빙학자로 초청해준 일본의 ‘한국학의 대가’ 오구라 기조 교수는 바로 ‘3.11’의 현장인 동일본, 즉 동북지방 출신의 학자다. 그는 나에게 동북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쓰나미를 당하면서도 결코 내륙이나 고지대로 거처를 옮기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동북지방의 문화와 전통은 우주 대자연의 자연스런 현상인 지진이나 쓰나미 앞에서 때로는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는 희생을 치르면서도 언제나 그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영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우주 대자연의 자연스런 운행을 거스르는 인위적 ‘문명’ 때문에 오히려 동북 일본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동북 일본인들의 희생은 더욱 더 막심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 극명한 증거가 ‘3.11’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것이다. 방사능 피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는 한 국제기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앞으로 10년 안에 수십만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모니터링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바로 이것이 오구라 교수가 지적한 ‘문명재’가 가져온 치명적 결과이다.

 

‘문명재’ 극복의 길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 우주 대자연의 자연스런 운행을 끊임없이 거스르는 인위적 ‘문명’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우주 대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그 간단명료한 길을 일본의 쓰치다 선생님과 한국의 김종철 선생님은 ‘공생공빈’으로 제시하고 계시다. 두 분의 혜안에 깊이 공감하면서 나도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 공생공빈의 길로 함께 가자. 가다 못가면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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