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모심의눈 모심과 살림 읽기

모심과 살림 읽기

게시글 검색
[0호] 생명운동과 탈근대 협동운동
2016-06-03 15:00:00

* 『모심과 살림』 0호(2012)에 실린 글입니다.

생명의 눈으로 본 협동조합운동

 

김용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지역농업위원장)

 

 

협동조합 열풍과 시선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한국사회는 협동조합으로 열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협동조합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고 정부도 협동조합을 육성하겠다(?)고 연일 행사계획과 보도자료를 내놓는다. 7월7일 ‘협동조합의 날’ 행사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을 협동조합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선언도 있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가 협동조합을 대안경제의 핵심으로 파악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은 지금부터 1844년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조합’이 처음으로 성공한 이후 17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경제제도인데 왜 하필 이제 와서 각광을 받고 있고, 또 그렇게 각광받을 만한 것인가? 모든 협동조합이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다.

 

초기 협동조합은 산업자본주의 횡포에 맞선 반독점운동이자 노동자들의 자립적 운동이었다. 당시 자본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의 경우는 소농과 수공업자, 소상공인들의 영농 및 운영자본 조달을 위해 신협운동이 싹텄다. 당시 금융자본은 농민이나 노동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방식은 저항적 방식으로서의 ‘노동조합’과 창조적 방식으로의 ‘협동조합’이라는 근대대항 무기(?)를 발견한다. 특히 협동조합은 인류의 오랜 이상적 공동체건설에 대한 상상과 실험 속에서 싹텄고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 경제를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사회주의 사상을 싹트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초기 협동조합은 독점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적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고 도시에서는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 농촌에.서는 수공업자와 농민들, 즉 약자들의 조합으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약 1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탈 근대적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것도 있지만 크게 다른 점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또한 그 안에서 독점자본과 경쟁하면서 생존과 확장을 동시에 꾀해온 측면이 있다. 협동조합이 탈근대적인 측면에서 또는 자본주의 폐해를 넘어설 대안으로 조망받을 때 우리는 ‘어떤 정신(사상)의 협동조합과 어떻게 운영되는 협동조합이 그러한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특히 협동조합이 정형화된 틀이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시대상황과 현실을 받아들여 진화해온 개방적인 운동이고 본질적으로 인류의 오랜 열망인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생명운동의 시선에서 협동운동은 재해석되고 발전되어야 한다.협동조합운동은 인류의 다양한 협동운동의 형식과 제도 중에서 체계적으로 정리․정착되고 세계화된 제도의 하나이다. 한살림으로 대표되는 생명운동은 협동운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식과 제도 중에서 현재까지의 협동조합이 가지는 장점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에서 새로운 운동지평을 열었다. 이것은 서구의 오랜 전통의 협동조합운동과는 다른 생각과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즉 한국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새로운 시도는 한국협동조합운동의 자산이고 훌륭한 씨앗이다. 협동조합의 역사와 한국에서의 새로운 사상과 시도에 대한 폭넓은 조망과 성찰, 평가없이 조성되는 협동조합운동의 붐은 실속이 빈약할 것이다. 협동조합기본법의 제정과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적 배려 등에 기대 협동조합에 고무되고 있는 시민사회 역시, 다음과 같은 조건들로 인해 협동조합운동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로는 협동조합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운영경험을 가진 활동가(지도자) 층이 빈곤하다. 협동조합은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한데 한국사회는 협동조합에 대한 이론학습과 고민을 거친 지도자가 길러지기 전에 협동조합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어 실제 협동조합이 조직화가 진행될 때 성공과 안착에 희망을 갖기 힘들다.

 

둘째로, 협동운동의 기본은 민의 자발적인 결사체로서 자율적인 조직인데 현재의 흐름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결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영역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협동조합 정신에도 어긋날 뿐더러 관 주도의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생명력과 자립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는 최근 빈번하게 소개되고 있긴 하지만 협동조합 이론과 경영서들이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협동조합의 170년에 가까운 오랜 경험 속에는 수많은 실패와 성공이 함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협동운동은 아직 서구 협동운동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실패와 성공의 다양한 사례들을 풍부히 알고 있는 개인과 기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것 역시 자칫하면 비싼 대가를 치를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시민사회의 협동조합에 대한 미성숙성이다. 유사의료생협과 유사대안교육과 같은 천박성이 횡행하는 것은 사실 한국사회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과 한국시민사회의 미성숙성과 관련되어 있다. 시민사회의 미성숙성들은 협동조합법과 정부의 협동조합 장려정책이 자칫 유사협동조합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이는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신뢰의 싹을 잘라버릴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들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한국 상황에 맞는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훈련체계를 우선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현재 한국에서 협동조합운동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서구와 다른 조건과 인식은 무엇인지 등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 제기된 생명사상과 생명협동운동의 성과-이것은 단순히 한살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주의 지역협동운동 사례나 실상사가 있는 산내의 공동체운동 성과, 대안교육을 중심으로 한 성과, 귀농운동본부, 녹색평론의 성과 등을 포괄한다 -와 의미를 자기 자산으로 할 때 희망이 구체화됨을 의미한다.

 

 

근대 협동조합의 형성과 분위기

 

서구에서 태동된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근대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산업혁명과 함께 형성된 근대민주주의와 근대국가, 시장경제체제, 자유·평등·우애로 대변되는 이념적 가치 세 영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근대국가체제를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체제를 넘어서려고 근대가치를 넘어서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협동조합은 근대국가체제 안에서 근대민주주의 원칙 아래 운영하고, 근대시장체계 안에서 협동조합적 방식으로 협동조합을 경영하려고 하며,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은 ‘자유·평등·우애’의 가치에 충실하다. 어찌보면 협동조합이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자본과 국가의 다양한 폭력과 욕망을 넘어서 자구적으로 근대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협동조합의 이러한 특성은 근대의 폭력과 수탈에 시달린 사람들 입장에서도 그렇고 자본주의와 근대를 초극하려는 다양한 운동진영에서 보면 매력적인 희망을 준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이러한 근대성 때문에 근대를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을 때, 또는 협동조합을 끌고 갈 희망을 갖지 못할 때 협동조합은 시장과 국가에 의해 굴절될 가능성을 이미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이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해 왔는지를 아는 것은 탈근대적 생명협동운동이 협동조합운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진화한 오늘의 현실에서 생명운동이 만나고 바라보는 협동조합운동이 만개하고 확장할 것이다.

 

먼저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이 설립될 즈음(1840년대)의 영국에서의 사회현실과 대다수 도시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은 어떠했는지 엥겔스의 시각을 빌려 보자.

 

노동자가 구입하는 감자는 열등한 것이며 채소도 시들은 것이며 치즈는 오래되고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이고 돼지고기는 고약한 냄새가 나며 소고기는 볼품없고 질기며 늙고 병들어 자연사한 소의 고기여서 처음부터 신선하지 않고 때로는 반쯤 부패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판매하는 자들은 대개 열등한 상품을 구입하여 싸게 파는 행상인들이다. 가장 열악한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은 그들의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필요한 양식을 구입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3쪽

 

노동자계급은 중간계급의 돈 욕심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희생당한다. 제조업자와 상인은 소비자의 건강은 조금치도 생각하지 않고 극히 유해한 방식으로 모든 종류의 식료품의 품질을 저하시킨다. 104쪽

 

소매상들은 일반적으로 가짜저울이나 가짜 자를 사용한다. 경찰보고서에서 보면 이러한 범죄 행위가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형태의 속임수가 얼마나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맨체스터 가디언> 지에서 발췌한 다음기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 1844년 6월 16일 롯치데일 지방재판소 : 4명의 소매상이 가벼운 저울을 사용한 혐의로 5~10실링의 벌금형을 받았다.

- 스톡포트 지방재판소 : 두 소매상인이 1실링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한명은 가벼운 저울 7개와 가짜저울눈 1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두 명 다 경고를 받았다.

- 6월19일, 로치데일 지방재판소 : 소매상인 한 명이 5실링의 벌금을 받았다.

- 6월22일, 맨체스터 치안재판소 : 19명의 소매상인들이 2실링 6펜스에서 2파운드까지 벌금형을 받았다.

- 7월13일 맨체스터...., 7월24일 롯치데일...., 7월27일 볼튼...., 8월3일 볼튼....., 107쪽

 

대부분의 노동자는 아무런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임금에 의존해서 그날 벌어 그날 쓰는 식으로 살아간다. 여러 집단이 모여 사는 사회는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돌볼 수 있는 수단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가장 여건이 좋은 노동자들조차 실직과 기아의 위기에 항상적으로 직면해 있으며 많은 노동자들이 이 때문에 죽는다. 108쪽 “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노동자들은 아주 오래된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과 이상촌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로버트 오웬과 윌리엄 킹의 뉴라나크 실험과 초기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실패 경험은 영국에서 제일 먼저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로치데일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성공적인 협동조합의 원칙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협동조합의 시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44년 영국의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조합을 창립한 사람들은 그 이전해에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다 해고된 28명의 노동자들이었다. 처음 해고된 사람들은 1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의하였지만 최종적으로 협동조합을 창립할 때는 28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운영원칙에는 ‘정량·정품을 제 가격에’라는 원칙이 있다. 이것은 초기협동조합이 반독점운동이기도 하지만 소비자 주권운동이며 약자로서의 생활방위적인 측면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모습

1814년 빈회의를 통해 느슨한 독일연방으로 출범한 독일에서는 왕정복고를 놓고 메테르니히는 통합과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였다. 독일의 관세동맹은 독일의 경제통합을 가속화시켰다. 한편으로 독일의 서부와 중부지방에서는 농노제가 소멸되어 농지를 할양 받은 소농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영농자금이 없어 고리대금업자들에서 돈을 빌려 농자재나 새끼돼지를 사서 수확 사육 출하 뒤에 돈을 갚았는데, 워낙 고리의채였기 때문에 농민들의 빚은 늘어나고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0년대 감자의 흉작이 찾아왔고 1845-1847년의 곡물흉작은 소농의 생존위기를 불러왔다.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났고 메테르니히는 실각했다. 그러나 빌헬름4세 황제와 자유주의세력 간의 갈등 속에 혼란기간이 지속되고 소농들은 시장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862년 비스마르크 수상이 앉을 때까지 계속된다. 라이파이젠은 1845년 마을의 촌장에 취임한 이후 1848년 빚의 지옥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경제대출조합과 빵 조합을 만들었다.

 

초기 라이파이젠 조합은 라이파이젠 자신이 기독교신자였기에 기독교에 바탕을 둔 박애주의 정신에 뿌리박은 자선적 성격의 조합이었다. 즉 돈 있는 사람들이 출연하고 이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베푸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1864년경에 이르면 돈을 빌린 사람도 출자하고 조합원이 되어 조합원끼리 서로 돕는 상호부조와 자력갱생의 신용대출조합으로 거듭나게 된다. ‘1인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1인을 위해’라는 슬로건은 이즈음부터 사용되었다. 비슷한 시기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는 독일수공업자들이 길드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서서히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있었다. 길드 제도 아래서의 도제공과 하청업체들은 이후 독일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직공과 수공업체제로 변환되는데 작센 주의 델리체 읍장이었던 슐체는 읍주민의 고통스러운 삶 이면에 있는 것은 자본의 부족으로 보았으며 이를 위해 1849년 공제조합(질병과 사망)과 구두제조직공을 위한 원료구매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그는 1850년에는 직공들을 중심으로 대부조합을 만들었다. 라이파이젠과 슐체에 의해 독일의 협동조합전통이 세워졌다.

 

프랑스의 모습

샤를 푸리에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계급대립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상업과 산업자본의 횡포를 ‘최대의 악’으로 보았다. 그는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노동의 정의와 사회화가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는 땅과 건물(생산수단)이 공동으로 소유되는 팔랑쥬에서 공동으로 노동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생산하고 이를 소비조합 같은 협동조합을 통해서 구매토록 하는 유토피아를 생각하였다. 특히 푸리에는 과잉생산이 노동자들을 빈곤하게 만든다고 보고 생산과정을 통제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 노동자의 욕망은 선하게 보았다. 푸리에의 생각은 미국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옮겨지기도 했는데 실패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사람은 생시몽이었는데 생시몽 또한 소유권에 있어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결국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보았다. 그 또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공동체적인 협동조합의 소유로 하고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시몽과 푸리에의 생각은 노동자협동조합의 현실화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생시몽과 푸리에는 협동조합을 직접 조직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노동자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기 협동조합 태동기의 상황을 보면 협동조합은 산업혁명으로 급속히 팽창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Association)로 출발했지만 산업자본주의체제와 근대가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시선과 과학주의에 기초한 성장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폭력적인 산업자본주의 횡포와 근대국가초기의 혼란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구적이고 자립적인 운동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며 이후 전개된 상황에서도 확인되지만 산업 및 유통자본과 경쟁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며 이것이 산업공황을 만났을 때 다른 자본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 역시 곤란에 봉착하기도 한다. 영국의 소비조합이나 독일의 신협이나 농협, 프랑스의 노동자 협동조합은 산업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강렬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했는데 산업자본에 대해 저항한 자립경제와 공동체에 대한 열망에 기초하고 있다.

 

초기협동조합은 사회의 절대다수자인 노동자와 농민 등 경제적 약자들이 우애의 협동조합으로 결집하고 구매와 이용을 집중함으로써 협동조합을 성공시킨다.

 

그런데 서구의 협동조합운동이 성장해온 과정은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하며 부침을 거듭해 온다. 즉 협동조합 역시 자본기업과 경쟁하면서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자본기업을 꺾기도 하며 때로는 침몰하기도 해온 역사이다. 소비조합만을 놓고 본다면 경쟁에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주목해서 보아야 할 지점은 협동조합이 어떤 대안사회로의 전망을 가지고 운동해 왔다기보다는 반독점운동으로서 자본기업과의 경쟁에 치중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협동조합을 통해서 국가를 변혁하거나 대안사회로 나가는 문제가 아니라 협동조합적 자본주의로의 대체를 꿈꿔왔지만 그것도 험난한 경쟁을 통해서 현재의 지점에 와 있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을 둘러싼 협동조합적 자본주의 노선과 협동조합을 사회주의 이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보는 과정론은 둘 다 근대성의 한계에 갇혀 있다.

 

 

한국에서의 협동운동과 생명운동의 등장

 

한국사회에 전근대적인 협동운동인 계나 두레가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된 지점은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대체적으로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사회에 협동조합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YMCA, 천도교 등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운동과 재일유학생들의 환국과 신간회등의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농촌소비조합운동이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때의 협동조합은 소비조합과 공제조합이 중심이었으며 농촌조합의 경우 농자재를 공동구매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100여 개가 넘던 자주적인 협동조합은 1938년 일제의 해산령으로 모두 사라지고 만다.

 

민간협동조합운동은 해방 후 몽양 여운형의 인민위원회를 따라 전국에 다시 등장하였지만 1948년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불법화와 함께 협동조합도 사라지게 된다. 공교로운 것은 이때까지 협동조합이 민족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과제 앞에서 전개된 운동이었기에 좌익으로 몰려 해산당했다는 사실이다. 일제와 미군정의 이러한 시선(視線)은 주민의 자발적 결사체가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좌익적 경향으로 흐르는 것에 대해 제국주의 국가권력이 부담스러워 했으며 적극적으로 해산하고 협동조합운동가들을 사회주의자로 몰아 탄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런 시선은 극심한 좌우대립의 최정점인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에서 민간협동조합이 발흥하기 쉽지 않은 사회적 조건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민간 협동조합은 외국인이자 성직자인 메리가별 수녀에 의해 1959년에야 다시 시작되며 가톨릭이라는 조직을 배경으로 신용협동운동으로 출발하게 된다. 한편 1960년 상업은행에 세워진 소비조합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총의 소비조합운동도 있다. 이 운동은 이승만 정부아래서 어용노총으로 세워진 한국노총을 체제 내화하기 위한 당근(carrot)으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 권력과 한국노총지도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과 부산의 항운노조와 광산노조의 경우는 노동자들의 생활편의를 위한 긍정적인 노력들이 있었다. 항운노조의 경우는 협동조합을 통해 의료기관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광산노조 소비조합은 70년대 원주교구의 활동과 맞물려 생필품을 공동구매함으로서 소비조합 본연의 반독점 운동을 전개한 성과들이 있다.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가톨릭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은 그 자체로 한국협동조합운동사에 남는 장면이다. 원주를 중심으로 한 협동운동은 신용협동조합운동과 소비조합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사회는 1961년 박정희가 군사구테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농업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품종개량, 화학비료와 화학농약의 보급, 농기계의 보급사업 등을 새마을운동과 함께 시작한다. 한편으로 박정희권력은 수출을 통한 산업증대전략으로 저임금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정책을 집행한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적으로 농촌에서는 화학비료와 화학농약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와 농약중독으로 인한 농민의 죽음을 불러왔으며, 도시에서는 무분별한 산업전략으로 인해 도심하천의 극심한 오염과 대기오염 및 도시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였다. 또한 이 정책은 농업인구의 급감과 도시인구의 급증을 불러왔는데, 1975년을 기점으로 농업인구가 48%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빠른 속도로 농촌공동체의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원주의 운동가들은 농촌과 광산 및 어촌지역의 협동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성찰적인 시대 인식을 하게 되었다. 자연과 인간을 파괴와 죽음으로 내몰 뿐만 아니라 인간을 개인주의화 하고 극심한 경쟁속에서 생명본연의 인식을 가로막는 산업문명과 기계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가기 위한 운동을 모색한 것이다. 장일순 선생과 박재일 선생을 필두로 1977년 경부터 시작된 고민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보다 구체화된다. 그리하여 폭력적으로 자연을 침탈하고 인간과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현대 산업문명과 근대국가체제를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화와 사회로의 진화를 위한 생명사상과 운동을 제창하게 된다.

 

“한살림 운동은 몇 십년 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고, 또 하나는 70년대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또 반독재 운동을 계속하다보니까 종전의 맑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악순환이 계속 되겠더란 말입니다. 농약과 비료를 마구 뿌리고 도시 산업화를 꾀하는 걸 보니 이 강토 전체가 황폐화 되겠더라구요. 환경도 살고, 우리도 살자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6.3사태 이후에 원주에서 농촌운동을 하려고 한 박재일씨와 77년부터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공동체 내지는 농토를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야기 했어요.”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그리고 전 사회적 규모에서 생명의 회복과 생명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 요청되고 있으며 생명을 일체의 가치관, 인생관, 사회관, 역사관, 세계관, 우주관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존의 모든 과학기술의 성과들을 창조적으로 통합할 것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에 의한 개인 및 사회적 생명의 진정한 부활, 해방이 요구되고 있다. 한 포기의 배추에 있어서의 참된 생명력의 문제로부터 이론 물리학의 “장”의 원리나 철학에서의 범주론과 언표방식에 있어서의 생물학적 전환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그에 입각한 일체 인간과 자연생명계까지를 포함하는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 기대되고 있다.“

 

우리는 200여 년의 자본주의 역사를 알고 있다. 소농과 농촌공동체의 몰락과 농업자본의 독점화와 산업자본의 성장과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지구를 과소비하는 도시와 도시문명의 자본주의 역사이자 생명의 파괴와 죽임의 역사이다. 또한 우리는 근대의 또 다른 얼굴인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을 기억한다. 국유화와 협동농장을 통해 인간의 자율을 억압한 사회, 자본 대신 국가독점과 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사회를 통해 역시 인류의 진화를 막아버린 체제이다. 그것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기초해 있으며 기계론적 과학주의와 성장론에 기초한 산업문명이다.

 

현대 자본주의 동력이었던 화석연료는 종언을 고하고 있고 아직 새로운 에너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에서 보듯 핵 발전과 핵무기는 지구적 차원의 행성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세계인구는 70억을 넘어섰는데 기아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식량생산과 분배는 위협받고 있다. 세계의 밀림은 이제 지구표면적의 5%도 남아 있지 않으며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정신분열적 증상과 범죄현상은 인류사회가 생긴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보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의 위기가 도래해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집권화 된 근대 국가권력이 통치하는 세계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국가권력이 생명을 지키지 않음은 역사가 반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제기가 30여 년 전의 초기문서에 의해 이루어졌고 보다 대중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1985년 원주소비조합의 태동과 1986년 한살림농산의 설립 그리고, 1989년의 『한살림 선언』이다. 그런데 초기문서에서 확인되듯 생명운동은 기본적으로 현대 산업문명과 이를 이끌어 온 이원론적인 근대서구철학을 넘어서는 것이자,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개인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 개인과 사회, 나와 너를 나누어 사고하는 이원론이자 주체철학의 폐해를 넘어서자는 이야기이다. 이 이원론이 끌고 온 사회의 모습이 곧 생명파괴와 위기의 사회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뿌리 뽑힌 민중적 삶, 인간성의 상실, 폭력숭배, 소비숭배, 가학, 피학증세의 보편화, 인간 및 범생명의 물질화, 테러리즘, 복수의 악순환, 이러한 집단적 정신 분열의 현상은 죽음의 옆얼굴이다. 이렇듯, 빈부의 격차에서부터 생태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조리한 현상의 내부를 꿰뚫어 흐르고 있는 것은 생명경시, 생명파괴, 반생명의 악마적 경향이다. 이에 대응하여 역시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그리고 전 사회적 규모에서 생명회복과 생명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청되고 있으며, 생명을 일체의 가치관, 인생관, 사회관, 역사관, 세계관, 우주관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존의 모든 문화, 과학, 기술의 성과들을 창조적으로 통합할 것과 협동적 삶의 확장에 의한 개인 및 사회적 생명의 진정한 부활, 해방이 요구되고 있다.” -초기문서의 개요

 

또한 한살림선언은 산업문명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진단하고 있다.

 

첫째 핵위협과 공포이다.

둘째 자연환경의 파괴이다.

셋째 자원고갈과 인구폭발이다.

넷째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이다.

다섯째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이다.

여섯째 중앙집권화 된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이다.

일곱째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이다.

 

생명사상과 운동의 이러한 현실진단은 모든 운동에서 협동적 생존과 연대의 확장을 기초로 다양한 계층과 계급, 다양한 분양의 운동과 연대함으로서 인간 개인의 진화와 사회의 진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로 나갈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과 입장은 전통적인 서구합리주의와 근대 사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탈근대적 입장은 협동운동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독점자본에 반대하는 소비조합을 넘어서 생명본래의 기반인 농업과 농촌을 중시하고 생명본래의 특질인 상호의존성에 기초한 유기농업과 직거래를 강조하는 ‘생활협동조합’으로의 진화를 이루어냈다. 결국 생명운동은 협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운동은 다양한 협동운동의 제도화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운동이자 한 형태이다. 다만 생명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협동운동은 근대적 시선의 반독점운동이나 이원론적인 근대사상의 시선과, 자본주의 시선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산업자본이나 유통자본과의 경쟁을 통한 성장이나 소비자의 편익과 복리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같은 층위에서 같은 기원을 가진 절대 의존적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며 그중에서 인간은 신령스러운 존재로 진화해왔고 진화해 나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협동운동은 협동운동의 주체인 인간의 생명활동 범주 내에서의 자연과 협동, 이웃과의 협동을 기본으로 하는 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지역공동체운동을 바탕으로 전국을 접속하고 세계를 접속하는 협동운동이다. 결국 생명운동의 가장 큰 본질 중 하나는 협동운동이자 공동체운동이다.

 

그것은 소유영역에서의 협동(호혜적 소유)뿐만 아니라 생산과 노동영역에서의 협동(호혜적 노동과 생산), 교환과 거래영역에서 역시 협동(호혜적 거래)을 기본으로 하는 협동운동을 상정한다.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협동의 방향은 서구 근대성 아래 진화해온 대다수 협동조합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호혜란 자연과 인간 사이의 호혜이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호혜이다. 자연과 인간을 상호의존적인 생명관계로 인식한다면 생산에 있어서도 유기농업과 같이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이로운 생산을 지향해야 하고, 노동 역시 끝없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족과 자급 그리고 생명활동이 풍요로운 노동을 지향한다. 거래관계 역시 자본주의 시장처럼 욕망의 실현을 위한 욕망의 거래가 아니라 자족과 검약을 바탕으로 한 최소관리비용을 포함한 직거래, 그리고 필요한 사람 또는 공동체와의 나눔, 지역화폐와 같은 공동체적 거래를 호혜적 거래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서구협동조합은 한국의 생명협동운동이 지향하는 이러한 호혜성의 원칙에서 보면 한계와 결함이 많은 사례이다. 이를테면 몬드라곤복합체의 경우 생태적 관점의 결여, 성장주의적 관점과 시장에서의 경쟁, 조합 내 노동과 조합 외 노동의 차별 등은 몬드라곤의 수많은 성과와 진화에도 불구하고 생명운동진영에서 보면 결핍과 아쉬움일 수밖에 없다. 특히 몬드라곤 노동자들의 복지가 어딘가에서의 이윤실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내 어디일 것이다. 소비조합 분야의 최대성공자로 종종 인용되는 스웨덴 소비조합 총연맹이 까르프를 인수했다는 점은 시장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점이지 이것이 곧 협동운동의 미래와 일치되는 것도 아니고 생명협동운동진영에 희망을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트렌토나 볼로냐의 사례가 독점자본주의를 넘어서 민의 자립경제의 가능성을 점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전반적인 세계시장의 동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와 생태공동체에 대한 접근철학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풀어가는 운동의 현실이 한국사회의 현장에 위치해 있으며 탈 근대적 생명사상에 기초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근대 협동조합이 사회적 소유 이론에 근거한 것은 틀림이 없고 이것은 자본주의 사적소유 이론이나 사회주의의 국가적 소유 이론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호혜적인 생산과 노동, 호혜적인 거래로까지 나아갔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협동조합은 성장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근대협동조합이 소유뿐만 아니라 노동과 생산, 그리고 거래에 이르기까지의 호혜적 협동운동으로의 진화는 일본과 한국의 협동운동에 의해 이루어졌고 현재도 진화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협동조합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현실에 서있지만 서 유럽의 많은 협동조합들이 생산력 진보에 기초한 성장주의, 자본과의 경쟁 끝에 위기를 맞았듯이 한계를 보이고 있다.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태내에 존재함으로서 자본주의 원심력에 끌려가는 경향이 있는 것이며 사상적 비젼을 갖지 못함으로써 협동조합 운동은 전술적 자립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유럽 협동조합운동의 퇴조에 대한 일본 협동조합 이론가인 후루사와 고유(古澤廣祐)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눈여겨 볼만하다.

 

『현대사회속에서 협동조합은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발전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구미 선진국가들에서는 현상적으로 볼때 협동조합, 특히 생협활동이 크든 작든 곤란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무엇보다 기존의 사회경제체제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에 대하여 대항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우선 말해 두고 싶다.

 

대항적이라고 할 경우에, 거기에는 크게 두가지 측면이 있다. 즉, 생활방위적인 측면과 생활창조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종래의 협동조합운동, 예를 들면 생협운동은 무엇보다 생활방위적인 면을 강하게 가지고 성립하였다. 가격의 안정이나 공정성, 품질보증, 안전성 등을 기반으로 하여 폭넓은 지지를 얻어 온 것이다. 그래서 시장시스템이 그런 대로 유효하게 기능하고, 거기에다 경쟁원리나 규모의 경제원리가 강하게 작용하면, 협동조합의 경제활동으로의 경쟁력은 자본력에 있어서 망가질 수밖에 없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구미사회의 생협이 쇠퇴한 요인이었다.

 

단지 경제력에 있어서의 대항력을 발휘하려고 할 때 협동조합은 상사(商社)에 대항하여 상사가 되고 슈퍼마켓에 대항하여 스스로 슈퍼마켓이 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기존의 시장시스템과 같은 평가기준을 가지고 승부를 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좌표축을 상정하여 독자적인 평가기준이나 가치나 의미를 가진 운동으로 전개해 나가든지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즉 서구협동조합운동이 경제적인 운동이나 사회적노동을 실현하는 운동으로만 바라보게 될 때 협동조합 필연적으로 시장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때 자본주의 시장체계의 상태에 따라 협동조합의 존립과 성공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맞물려 UN과 각국정부가 협동조합을 장려하고 특히 사회적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사유와 분석이 필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실의 위기를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근대체제 전반의 위기로 볼 것인가?, 새로운 자본주의(협동조합적 자본주의(?)또는 사회적 자본주의로의 대체인가 아니면 자연과 인간의 공생, 인간 간의 공생에 기초한 인간의 진화와 사회적 진화의 전환점으로 볼 것인가? 협동조합운동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류와 우주에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생명사상과 결합해 새롭게 진화해야 할 것이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을...

 

그렇다면 생명운동과 현대 협동조합운동은 대립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조응관계에 있고 한국사회의 최근 경험 이외에는 큰 접점이 없었다. 이에 따라 향후 협동운동과 생명운동은 서로 장단점을 흡수하며 함께 창조적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생명운동의 입장에서 협동운동은 포괄적이고 진화적 관계의 연장에 있다. 생명운동진영은 서구근대협동조합의 다양한 성과와 진화과정을 배우고 학습해야 한다. 즉, 서구 근대협동조합을 따라가거나 사고를 퇴행시킬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간 협동조합운동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명운동의 경험에 비추어 짚어보고 대안으로서 협동운동이 되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생명운동은 기계적 세계관을 넘어 유기적 전체로서의 생명을 인식하며, 생명은 유연하며,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또한 생명은 순환적인 되먹임체제에 의해 활동하며 생명의 본질이 현상의 물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신임을 확인한다. 이에 따라 모든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유기적 연관성 속에 존재하며 생명의 유지 역시 전체로서의 생명질서에 의존해 가능하기에 생명의 존재적 본질을 협동(공동체)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생명운동은 협동운동이지만 일원론적 인식에 기초한 협동운동이고 자족과 자립의 협동운동을 지향한다. 그것은 직선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이론과 배치된다.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생태주의와 대립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영혼 없는 기계모형으로 보는 행동과학이나 정신분석이론을 넘어 우주적 존재이자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해 낸다.

 

현대 협동조합은 사적소유를 넘어서 공동체적 소유와 공동체적 삶에 대한 명확한 진전을 이루어 냈다는 점에 대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 협동조합운동은 또한 근대성의 한계에 갇혀 있음도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사에서 수많은 협동조합의 실패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시장에서 사기업과 경쟁이나 자본주의 기업을 흉내내다 이루어진 일임을 협동조합운동사는 보여주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대 서구협동조합운동의 경우 태동 시기의 폭력적인 산업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자구책으로서의 자립과 공동체적 열망이 근대협동조합운동의 문을 열었다면, 생명공동체운동은 21세기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끝 지점에서 서구근대문명의 반생명성과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탈 근대적 문제제기와 실천의 차별성이 있다. 물론 19세기와 21세기 사이에 협동조합운동 또한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생명운동과 창조적으로 만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사회에 무비판적, 무성찰적으로 번지는 협동조합운동은 자칫 서구의 근대협동조합운동이 걸어온 간난의 길을 상당시간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며 생명운동의 시선으로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래 유럽으로부터 온 소비조합이나 신용조합, 생산조합이란 압정에 시달림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산업혁명 이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만, 지금은 대기업의 하청업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구가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신용’도 ‘협동’도 다른 개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이냐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무엇이나 그 답이 나와 있는 듯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만, 그것은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창조적 진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이 운동성과 정신을 놓치면 쉽게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경제적 동기만 남아 경영주의로 흐르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무수한 단위농협들과 신협을 보면 그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으며 생활협동조합의 일부도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이 있다. ICA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제정하고 개정하는 협동조합의 정의, 가치, 원칙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협동조합이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장치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정의와 가치 원칙 또한 1995년 ICA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오랜 논의 끝에 개정된 것이다. 협동조합들이 ICA가 정한 정의와 가치, 원칙만 충실히 준수해도 협동조합은 상당한 진화를 이룩하고 사회진보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많은 협동조합들이 부침을 거듭한 것은 개개 협동조합이 현실의 시장과 권력에 늘상 노출되어 있고 현실의 철학적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공한 협동조합 그룹(지역이든 부문이든)의 공통점은 그들만의 창립자 정신과 시대정신을 반영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주요한 임직원들은 ICA가 선언한 가치나 원칙들도 준수하지만 더욱 중요하게 창립자 정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로치데일 선구자조합은 창립정신을 8원칙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몬드라곤은 호세신부의 정신을 그들의 10원칙에 담아 지켜내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가 만드는 협동조합이 포괄적인 정신이 있을 뿐 구체적 현실에서는 협동조합을 창립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정신에 따라 협동조합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결국 한국사회에서 협동운동 또한 다양한 설립주체들과 설립주체들의 세계관과 정신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고 그것은 상당한 실패를 포함해서 진행될 것이다.

 

한편 한국사회 민간 협동운동의 중요한 한 주류는 생명사상에 기반한 ‘생명협동운동’이다. 한살림을 기점으로 시작된 생활협동운동과 지역공동체운동, 원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협동공동체운동 등은 생명협동운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협동운동은 대체적으로 기존의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을 존중하되 다음과 같은 공통된 고유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인간과 자연의 신령스러움을 존중한다.

둘째, 운동의 현장을 지역으로 파악하고 지역에 다양한 생명협동 공동체경제를 만들고 확산한다.

셋째, 자율적인 사람, 자립적인 경제, 자치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넷째, 물질적 성장만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진화를 도모한다.

다섯째, 생명공동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항과 생명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창조활동을 함께 지향한다.

 

이상의 가치들은 한국의 생명운동이 협동운동을 통해 경제적 목적과 생활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권력을 통한 급격한 변혁운동이 아니라 개인의 변화를 필두로 한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민(民)의 생활운동이며 그 중심에 협동운동이 있는 것으로 적극적인 자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확장과 연대의 생명공동체운동

 

생명운동은 반독점운동과 어떠한 관계여야 할까? 저항적 실천의 반독점 협동운동과 탈근대와 창조적 실천의 생명협동운동은 함께 가야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아직 현실의 환경상 진화하지 못한 영역과 현실의 문제를 넘고자 하는 적극적 진화의지의 차이 정도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반독점운동으로서의 협동운동도 아직은 필요하고 반 기계 문명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도 필요하다. 협동운동에 있어서의 일종의 ‘기우뚱한 균형’이다. 그것은 생명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확장과 연대운동의 한 영역이 될 것이다.

 

확장 운동은 주체를 중심으로 주체의 주변을 동화시킴으로서 넓혀나가는 운동이다. 연대운동은 옆으로 손을 잡는 운동이다. 생명운동진영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생명운동을 창조적으로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 농산물 생산의 마을공동체운동, 가공의 생산협동조합운동, 생활상의 다양한 생필품의 자급 협동운동, 문화적으로는 도서관, 어린이집, 대안교육, 문화센터등도 협동조합으로 모색할 수 있다.

 

연대운동은 생명협동운동이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반독점 협동운동과 연대해 나가는 것이다. 공동체운동 일반을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국가와 자본에 대응하여 저항하는 운동에 생명운동이 함께해야 하고, 시선은 다르더라도 지역공동체운동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협동운동에 연대해야 한다. 또한 이미 생필품이 되어버린 설탕이나, 우리나라에서 전혀 수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옷감에 대해 반독점운동의 일환으로 공정무역과 해외의 협동공동체지원 운동을 함께할 수 있다. 특히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농지 문제와 영농주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농촌 인구는 줄고 고령화되어 가고 있으며 농지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땅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 대상으로 되어 농지 값이 급등한 현실은 영농후계도 어렵게 하고 귀농을 어렵게 함으로서, 생명협동운동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농지의 민공유(民共有) 운동으로 농지신탁협동조합운동을 해야 한다. 한살림을 비롯한 귀농운동본부등 생명협동운동진영이 농지신탁협동조합을 만들고 영농후계자를 육성하거나 귀농인을 육성하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서 국가소유와 사적소유를 넘어서 생명협동운동의 신기원을 열어갈 필요가 있다. 농지신탁협동운동은 그 자체로 생명운동진영의 확장운동영역이자 반독점 협동운동진영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과 연대해야 풍성해지고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확장과 연대의 협동운동을 통해 생명운동은 다음 세상으로 질적으로 비약·포월(抱越)하는 운동이 될 수 있음을 초기부터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민중운동 특히 생명과 협동을 가치와 실천의 핵심으로 하는 민중운동은 마땅히 총체적인 연대운동이어야 한다. 따라서 농민회, 노조, 신협, 소협, 노청, 사선 등은 전체적인 운동과정에서 협력과 연대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야 한다. 유관단체들과 긴밀한 정보 교환 및 프로젝트 내용의 동일성과 호흡의 일치를 협의해야 하며 동일한 운동을 동시에 집행토록 제도적 보장과 자금 지원 등 여러 문제들의 해결점을 협의하여 찾아야 한다. 생명운동은 또한 사회운동이며 동시에 영성운동이다. 따라서 여러 종교단체와 신구기독교회 및 수도단체나 수양단체들과 협력, 연대가 강화되어야 하고 다른 행동단체나 일반사회단체 및 기구와 연대를 강화하고 이것을 지식인, 청소년, 직업여성, 주부, 소시민, 상인, 군인, 학생, 언론인, 연예인, 실업인, 공무원, 문인, 예술가들 속으로 지속적, 적극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나아가 외국의 민중운동 및 교회운동, 생명보호운동, 평화운동 등과의 연대강화는 당연한 일이며 생명과 협동의 확장적 총체성이 그대로 요구하는 바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조건은 가장 먼저 스스로 우리 자신들의 영성적 차원의 변화, 영적 능력의 증대, 즉 생명에의 귀의, 의식화가 얼마만큼 빛나게 이루어지느냐에 있다.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