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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하여
2016-06-03 15:15:00

* 『모심과 살림』 0호(2012)에 실린 글입니다.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하여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실장)

 

 

국가와 시장의 실패와 대안의 새길 찾기

 

지금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근대화 과정을 이끌어왔던 ‘고도성장’, ‘지속성장’, ‘동반성장’의 신화가 급속히 무너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최근 들어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공통 현안이 된 양극화 문제는 특히 심각해서, 고용 양극화가 소득, 교육, 의식주, 건강의 양극화로 확대되면서 사람들의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개별화된 경제 주체들 각자가 보낸 가격 신호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조정되고 조율된다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생산과 소비, 자본과 노동을 분리시킨 채, 효율화를 통한 생산성 증대와 경쟁을 통한 이윤 확보의 길을 걸어 온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쟁에 대한 압박감과 낙오와 배제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켜 사람들을 파편화, 무기력화시켜 왔다. 게다가 먹을거리, 환경, 교육, 의료, 보육, 주거, 복지, 노동 등 삶의 기본요소들이 양과 질 모두에서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 가운데, 문제 해결의 역할을 국가의 ‘투박한 손’에 맡길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국가의 보호막이 해체되는 과정과 맞물려서 급속히 진행되어 온 경제의 세계화는 각종 부작용과 모순을 우리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 속에 고스란히 집적시켜 드러내고 있다. 세계 경제의 변동에 따라 지역의 자산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지역 전체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도 하고, 자본의 투자 목적에 따라 지역 자원이 지속불가능한 방식으로 개발되면서 지역 주민들의 삶을 위협하기도 한다.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성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 상호 연결성은 끊어지고 삶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경제와 사회, 공간의 위기가 동시에 맞물려 나타나면서 지속가능한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 낡은 세계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는데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길은 여전히 불투명한 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국가주의 계획경제가 가진 경직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탐욕성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으로 ‘협동’과 ‘공동체’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홀로 살아가기에 벅찬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의 관심과 필요를 나누고 함께 행동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게 하고 있다. 요즘 들어 사회적경제, 공동체경제, 협동경제, 공유경제, 호혜경제, 살림의경제 등 다양한 이름의 대안 경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1844년 영국 로치데일의 공정 선구자조합이 근대적 협동조합의 길을 개척한 지 한 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 새삼스레 협동조합이 주목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실 협동조합은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 대한 창조적 대응의 노력을 통해 등장하고 발전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과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초기의 역할을 넘어서 자본주의 성장체제 자체가 내적 균열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보다 새롭고 확장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로치데일과 몬드라곤 등 자본주의 태동기와 성장기의 협동조합 경험도 여전히 의미 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따른 협동조합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모색이 있어야 한다. 당면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세계적 위기 상황은 정책적 처방의 차원을 넘어서 경제에 대한 기본 인식과 운영의 틀을 완전히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경제의 세계화가 만들어 낸 부정적 상호의존성을 협동조합을 통해 긍정적 상호의존성으로 전환시켜내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 점에서 협동조합은 제도나 조직 형식의 차원을 넘어서 운동과 가치로서 역할과 의미가 충분히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금융 자본주의의 무책임한 탐욕에 따른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공동체적 소유’, ‘민주적 운영’, ‘자립’, ‘지속가능성’ 같은 협동조합의 가치들을 현실 속에서 의미 있게 실현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뒷받침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정의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공동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이다. 즉 정치, 경제, 사회적 약자들이 협동의 원리로 힘을 모아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적 삶의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역할이다.

 

이처럼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통제하는 조직을 통해 구성원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보다 확장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경제 활동체를 통해 스스로의 필요를 해결하고 결과를 함께 나누고 책임지는 ‘협동조합 지역사회’(cooperative community)에 대한 전망을 세워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의 정체성과 정착성을 높이고 사람과 장소가 지속가능하게 발전해나가는 데 있어 공동 소유와 민주적 통제를 통해 지역 주민들의 기본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켜 온 협동조합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협동조합에 기반한 지역사회’와 ‘지역사회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역할 및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협동조합과 지역사회를 선순환적 관계로 결합시켜낼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그림1>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선순환 고리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서로 살림’의 관계

 

지역사회 발전과 협동조합의 역할

오늘날 경제-공간-사회로 이어지는 위기의 증폭 현상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협동조합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살림’(相生)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이 갖는 특성이 지역사회의 발전과 긴밀하게 결합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가 가진 특성이 협동조합의 발전에 중요하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형으로서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의 사회경제적 운명을 지역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조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힘을 길러준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정점에 달한 상태에서 국가의 보호막이 약화되어 지역사회가 시장경제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무기력하게 노출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협동조합의 역할은 중요하다. 조합원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역할은 물론 상호 신뢰와 조직화된 힘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협동조합의 책임 있는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협동조합의 지역사회 기여’에 대한 정의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제적 약자들의 권익 실현’이라는 전통적인 협동조합의 역할 모델을 사회적으로 새롭게 확장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협동조합의 영역도 기존에 담당해 왔던 농림수산업, 상공업, 금융, 공제, 소비생활 등에서 돌봄 노동, 보건 및 의료, 교육 및 문화, 주택, 환경, 일자리 등으로 넓혀가고 있다.

 

이처럼 지역사회 발전에 있어 협동조합은 다목적, 다기능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 자원의 효과적인 결집과 연결

협동조합은 지역에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발굴하고 결집시켜서 지역사회의 종합적인 발전으로 의미 있게 연결시켜 준다. 지역사회의 환경과 거주민들의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자원, 즉 물리적, 인간적, 환경적 자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낼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협동조합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지역의 자립과 주체성 확립

승자독식의 경쟁 시스템으로부터 지치고 소외된 사람들, 상대적 박탈감으로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이 외부로부터의 지원이나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 협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즉 지역의 자기 결정권 확립과 지역사회의 재조직화에 있어 협동조합의 1인 1표 원칙에 따른 민주적 운영 방식과 조합원 자율에 바탕한 공동책임의 원리가 주는 의미는 크다.

 

셋째, 지역 통합성과 공동체성 강화

지역사회는 결코 동질적이거나 조화로운 곳이 아니다. 지역 주민들은 서로 다른, 심지어 상호 대립적인 필요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역적 통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면적이고 종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영역의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여 지역사회 전반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협동조합에 거는 기대가 크다. 지역 발전의 패러다임이 물리적인 공간 개발에서 장소와 사람의 발전으로 크게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은 구성원들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의 질을 높이고 신뢰의 기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지역 정체성과 정착성 강화

협동조합은 투자자의 욕구가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춰 역할을 함으로써 단기적 이윤 추구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공유된 정체성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정부나 민간단체들이 역할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지역주민들의 공동 출자로 질 높은 일자리를 만들고 그 수익을 지역사회에 순환시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터를 떠나지 않고 뿌리내리고 살 수 있도록 해 준다. 특히 기술과 능력이 있음에도 자본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고용창출의 기회를 제공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다섯째, 위기에 대한 대응능력과 문제해결 역량 강화

세계적 경제위기와 장기적인 경기침체, 국가의 재정위기와 예산 삭감 등 급속한 변화들이 지역에 미치는 충격과 영향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협동조합은 새로운 경제적 기회의 창출과 지역사회의 상호부조를 조직하여 안팎의 변화와 충격으로부터 삶을 보호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가는 역량을 높여줄 수 있다. 예를 들어 협동조합은 분배불가능 적립금으로 자본의 안정성을 높여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력을 높일 수 있고, 학습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이 가진 특성을 적극 활용하여 지역발전 과정을 책임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를 양성하여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 역량들을 아래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다.

 

협동조합 발전과 지역사회의 역할

한편, 지역사회 발전에 있어 협동조합이 의미 있는 역할자이지만 동시에 협동조합의 발전에 있어서도 지역사회는 중요한 토대이자 거점이다.

 

사실 그동안의 협동조합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모범적 모델로 평가받는 협동조합은 많지 않다. 지난 과정에서 수많은 협동조합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초창기에 내세웠던 가치와 정체성을 상실한 채 기구와 조직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협동조합은 안팎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과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에 집중한 결과 협동조합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경제적 대안으로서 의미와 특성이 약화되기도 하고, 조합원의 자발성과 참여를 통한 조직 운영보다 생산성 확보와 사업 효율화를 위한 조직 체계를 만드는 데 집중한 결과 사람이 시스템에 묻혀 운동적 활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조직 중심의 상호부조와 내부거래의 틀 속에 갇혀서 지역사회와의 결합력이 약해지고 사회적 역할을 소홀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협동조합은 지속적인 환경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은 물론 존립 자체를 도전 받게 된다. 이 점에서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사회경제적 역할을 확장해가는 협동조합의 ‘지역화’ 전략은 중요하다. 여기에는 지역사회가 심리적 측면에서 삶의 안정과 관계의 신뢰감을 형성하고, 사회적 측면에서 상호부조의 연결망을 만들어내며,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와 생활재를 공동으로 생산해 내고, 정치적 측면에서 자율과 자치의 경험을 축적해 낼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자 활동 무대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의 발전에 있어 지역사회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원의 효과적인 결집과 이용

지역사회는 오랜 시간을 통해 역사와 문화, 생태적 자원을 축적해 온 곳으로, 공간적 근접성을 바탕으로 협동조합의 사업과 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모아내는 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지역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긴밀성과 높은 신뢰는 결집된 자원을 협동조합의 실행 과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비용을 낮춰줄 수 있다.

 

둘째, 조합원 필요의 확인과 확장

지역사회는 경제, 사회, 공간적으로 생활권으로서 동질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조합원들로부터 공통의 필요를 비교적 수월하게 확인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맥락에서 공론화 과정을 통해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욕구들을 보다 공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냄으로써 협동조합이 사회경제적으로 확장된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셋째, 협동조합의 특성과 정체성 확립

협동조합을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한 조직 형식의 측면이나 기능적 효과성 측면에 치우쳐 바라보게 되면 스스로가 극복하고자 했던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논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협동조합의 정체성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점에서 지역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구성원들의 생생한 요구는 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켜나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즉 ‘복지’라는 동일한 주제를 놓고도 협동조합은 참여 주체와 자원 형성 방식, 문제 해결 과정, 성과 평가에 대한 기준 등에서 정부가 하는 복지정책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넷째, 협동조합의 역량과 책임 강화

지역사회는 협동조합 참여 주체들이 학습하고 직접 실천을 통해 경험과 역량을 축적해 가는 중요한 기반이다. 나아가 협동조합 간 협동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곳도 지역사회이며, 협동조합이 지역사회에서 상호 협력의 파트너를 발굴하고 공동의 실천 과제를 통해 지역의 사회경제적 생태계를 풍부하게 재조직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는 협동조합이 펼치는 다양한 사업과 활동에 대해 신속하고 효과적인 피드백을 가능케 함으로써 지역사회 속에서 협동조합이 가진 역할의 책임성도 높여준다.

 

 

지역사회와 협동조합을 둘러싼 현실의 조건과 과제

 

우리나라의 발전 경로와 지역사회의 위기

앞서 이념형으로 살펴본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상호 보완적 관계와 역할을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결합 방식과 의미는 해당 국가나 사회의 맥락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발전 ‘경로’와 ‘속도’, 국가-시장-시민사회와의 ‘관계’는 영미권 선진국가들과 비교해서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소위 영미권 선진국가들은 이른 산업화에 힘입어 시장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하고, 자본축적에 성공한 상공인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의 적절한 운용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이후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등장한 복잡한 사회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관료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우는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형성과 국가 발전의 이중적인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 관료주의가 먼저 구축되고, 그 토대 위에 국가 주도형 산업화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구축되어 왔으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는 가장 늦게 발전되어 왔다.

 

우리가 지난 세기 동안 경험해 온 변화의 폭과 속도도 남다르다. ‘압축적 근대화’로 불리듯이 1960년부터 반세기 동안 GDP는 526배, 1인당 국민소득은 260배 증가해서, 경제규모는 세계 13위, 무역규모 세계 9위, 세계 7대 수출국의 경제 수준을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생산구조도 전통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완전히 탈바꿈하여, 해방 직후 농업인구가 75%였던 것이 작년 말 5.9%로 감소했다. 성장의 빛이 화려한 만큼 그 그늘도 짙을 수밖에 없어, 세계 ‘최장 노동시간’과 ‘최다 자살율’,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또한 먹거리, 환경, 노동, 교육, 건강, 복지 등 삶의 기본 요소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위협받고 있어 사람들의 불안감이 상당한 수준이다.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관계적 특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는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영향력에 비해 시민사회의 자율적 기반은 여전히 미약하며, 시장경제의 사회적 책임성도 낮다. 정치적 민주화가 시민들의 실생활과 연결되지 못한 결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취약한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확대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로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공통된 현안으로 등장했다.

 

결국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조건과 특성을 고려할 때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와 경제민주화 문제는 물론이고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역사회와 협동조합의 상생 발전을 위해서도 사회경제적 체질 자체를 바꿔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장기 저성장 체제로 진입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대외의존형 경제구조에 대한 혁신보다는 FTA 확대 추진으로 경쟁국가 모델을 고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를 해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초대형 개발사업들을 환경영향평가는 물론 경제적 타당성 요건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해 왔다. 지자체들도 예외가 아니다. 각종 이권과 정치논리가 결합된 개발사업들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면서 지방재정을 고갈시키고 그 부담을 지역주민과 미래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각종 비리로 임기 중에 단체장이 구속되고 다시 선거를 치르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당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가 걸어온 국가발전 과정에서 지역의 공간구조와 생산과 소비, 생활양식은 전면적으로 바뀌었고 지역의 지속가능성은 무너져 왔다.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고 이웃 관계는 단절되었으며, 지역의 정체성과 다양성이 사라진 빈자리에는 상대적 박탈감과 사활을 건 경쟁 논리가 채워졌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역들은 스스로의 발전 전망과 전략을 갖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자원을 유치하고 투자자의 손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장소판촉’(place marketing)이라는 말처럼 많은 지역들이 자신들의 생존 전략을 정부나 자본의 지원과 투자에 매력적인 곳으로 변모시키는 데서 찾고 있다. 그 결과 외부와의 관계와 환경 변화에 지역의 운명이 좌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금 지역은 ‘시장주의적 재편’과 ‘공동체적 재구성’이라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투자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지역 자원이 외부로 유출되고, 지역 내 일자리는 감소되고, 생산 과정에서 지역 생태계는 파괴되고, 특히 지역주민들의 정신적 자립과 자치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마침 최근 들어 지역발전 패러다임을 사람 중심, 생활 중심으로 전환하고, 대안적 발전 전략으로 협동조합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는 지역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점은 분명 새롭고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국가의 정책적 대상에서 자본의 투자 대상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지역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지역사회와 결합한 협동조합의 적극적인 역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흐름과 현실적 과제

현재 당면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대안적인 삶의 영역을 직접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협동조합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공동의 목표를 향해 뜻과 힘을 모으고, 상호 신뢰와 협력을 통해 필요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 생활과 밀접한 재화와 서비스를 지속가능하게 생산해내는 데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마침 올해 말 협동조합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있고,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들이 나서서 협동조합의 원리에 따른 경제 영역들을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 중간지원 조직과 조례들을 만들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 행정과 시민사회가 결합해 협동조합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고, 기존에 각자 따로 다루어오던 마을만들기와 복지,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같은 과제들을 경제와 사회, 공간을 결합한 종합적인 계획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가 가진 역동성을 고려할 때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다양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근대화 과정의 낡은 유산들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그만큼 지역사회의 발전 양식과 협동조합의 역할에 있어서도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협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기본 원리와 우리 사회의 현실적 조건들을 정확히 진단하고 접근해야 한다. 현안이 되고 있는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일자리 제공이나 사회서비스의 효과적 공급을 위한 수단 정도로 협동조합을 활용하려는 도구적 접근 태도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의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기에 앞서 우리나라 현실에서 협동조합이 걸어 온 길을 국가와 사회의 상호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가 주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 하에 자립을 통한 독립을 목표로 했던 협동운동은 결국 일제의 탄압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해방 후 국가 주도의 근대화 과정이 본격화 되던 1960년대 이후 민간 자율적인 영역에서 서민들의 생활고 해결과 자립을 돕고자 등장했던 신협이나 소비조합 같은 협동운동도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정체성을 잃은 채 제도에 포섭되거나 지속되지 못했다. 특히 농촌과 광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던 소비조합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과 광산지역 자체가 붕괴되면서 한계를 맞았다. 노동과 여성, 종교운동 영역에서 시도 되었던 협동운동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는데, 도시 저소득층 거주 지역을 대상으로 했던 협동운동은 도시 재개발 바람에 밀려났고, 직장 근로자와 도시 중산층 주부를 대상으로 했던 협동운동들도 주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와는 별도로 1960년대 중반부터 원주 지역에서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이 중심이 된 협동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원주 지역에서는 1960, 70년대에 신협과 소협을 통한 협동운동이 펼쳐졌고, 특히 1972년에 발생한 남한강 대홍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통해 협동운동에 기반한 지역개발사업이 전개되었다. 이런 협동운동의 경험은 1980년대로 이어져 ‘생명’과 ‘협동’을 결합한 새로운 협동운동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국가 권력구조의 재편을 위한 정치민주화운동에 대한 반성적 평가와 함께, 생명의 세계관의 확립을 통한 협동적 생존의 전략으로서 새로운 사회실천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생산과 소비’, ‘농촌과 도시’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선 자립과 공생의 생활협동운동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생협운동의 큰 물줄기를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소비사회의 등장과 함께 중산층의 급성장과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우리나라 생협운동은 개방경제체제 속에서 수입농산물 증가와 먹거리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급속히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생협운동은 생활세계 현장에 뿌리내린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대표적인 대중운동 조직체로, 먹거리와 같은 생활의 기본 소재를 매개로 조합원과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사업과 활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 구조와 신뢰의 기반을 형성해 온 결과 협동운동의 대표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아 왔다.

 

한편,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몬드라곤 같은 협동적 생산조직에 대한 관심들이 높았고 실재로 다양한 형태의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으나 경제조직체로서 생존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IMF 관리체제하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충격을 경험하면서 실업과 양극화, 가족해체와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졌으며, 그 흐름이 이어져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의 위기 상황 속에서 대안적 실천 양식으로 협동운동에 대해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에 대한 열풍의 밑바닥에는 자신들이 직접 다루기에는 부담스러운 주요 과제들을 시민사회 민간 영역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행정의 욕구와, 취약한 자립기반으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하기 어려워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절실했던 민간 주체들의 필요가 서로 만나서 만들어 낸 증폭 효과도 분명히 있다. 결국 핵심은 행정이 요구하는 속도와 제도적 관성에 휘둘리지 않고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사회적 역할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와 역량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금융위기에 따른 시장 실패가 재정위기로 이어져 국가 실패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의 장점을 살려 대안 영역을 만들어가는 힘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제도와 물질적 기반의 조성에 앞서 참여 주체들의 가치를 정립하고 역량을 키워내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바로 이 점에서 앞서 살펴본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경험과 역량은 매우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는 근대 국가의 형성과 국가 주도형 성장체제 속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포섭의 과정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근대화 과정이 압축적이고 단절적으로 진행되었던 만큼 사회 현실의 문제에 대한 협동조합의 창조적 대응 노력이 뿌리내리기 어려웠고, 그만큼 협동조합 스스로의 경험과 역량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오지 못했다. 협동조합으로서 자율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협동하는 사람을 길러내고 지역과 현장에 튼튼히 뿌리내리기 위한 활동 경험도 계속 이어져오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지역사회와 협동조합이 걸어온 과정과 현실적 조건들에 대한 성찰과 진단을 통해서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인 결합을 위한 방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한 방안들

 

협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지금, 이제는 ‘협동조합은 좋은 것이다’라는 말로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협동조합은 이렇게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나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준비와 지원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협동조합과 지역사회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의 역할 확장과 조합원 필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우선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해서는 협동조합 스스로 전통적인 역할의 틀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확장된 대안적 역할 모델을 찾고 만들어야 한다.

 

기존 협동조합이 경제적 약자들(노동자, 소비자 등)의 기본 생존권과 필요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오늘날 협동조합은 지역사회가 당면한 공통의 과제와 생활인들의 보편적 필요를 해결하는 데 있어 분명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조합원 개개인이 가진 필요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조합원들의 자기실현 욕구와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협동조합의 역할을 확장해가야 한다.

 

협동조합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과 비전을 분명히 하고, 조합원 개개인의 필요를 조직화하는 단계에서 생활을 조직하고 지역사회를 재구성하는 단계로 협동조합의 역할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조합원의 필요를 조직하고 해결하는 협동조합의 기본 역할에 있어 ‘조합원의 필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조합원의 필요는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며, 앞선 필요의 해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조응해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보다 편리하게,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려는 것이 보편적인 소비자들의 욕구인데, 조합원들이 ‘최저’가 아닌 ‘적정’ 가격을 채택하고 가치 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경제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한 소비자 필요 충족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협동조합이 ‘필요를 조직한다’는 것은 단순히 흩어져 있던 개별화된 욕망을 결집시키는 단계를 넘어서, 상호 책임의 관계 속에서 필요의 영역을 새로운 단계로 확장, 승화시켜 내는 것으로, 협동조합이 가진 운동성의 기반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협동하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협동조합의 발전 단계

한편, 협동하는 사람이 협동하는 조직을 만들고, 협동하는 조직이 협동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점에서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협동조합운동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협동하는 사람 없이 협동조합의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협동조합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을 필요로 한다. 협동조합의 정신은 단순한 소비자 고객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로서 조합원이 있을 때 건강하게 발산된다. 일본 생활클럽생협이 ‘생각하는 주체’로서 조합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요의 결집을 통한 조합원 출자도 결국 참여 주체들의 마음 모으기를 통해 가능하다.

 

협동의 진정한 가치는 ‘같음’이 아닌 ‘다름’으로부터 나온다. 각자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개성과 차이 속에서 공통의 필요를 발견하는 것,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협동에 따른 이익은 물론 부담과 책임도 함께 나누는 것으로부터 협동조합의 실질적 힘이 나온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의 역할도 다음과 같이 단계화 해 볼 수 있다. 우선 협동의 시작은 지역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사안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가 가진 자원을 계약을 통해 나누는 ‘자원 교환’(resource exchange)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이후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 가진 자원을 합의된 방식으로 공유하고 공동생산의 결과물을 함께 나누는 ‘자원 공유’(resource sharing) 단계를 넘어, 공통의 비전과 목표를 위해 생산, 소비, 분배의 전 영역과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권한 공유’(power sharing), ‘책임 공유’(responsibility sharing)의 단계로 협동의 수준과 질을 높여나갈 필요가 있다.

 

다주체간 협력을 통한 협동조합 지역사회 만들기

협동조합이 뿌리내린 지역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려볼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역 환경과 특성을 고려한 생산기술과 생산기반을 토대로 지역 자립적인 순환경제 체계를 만들어 지역 자산의 역외(域外) 유출을 최소화하고 고용창출 효과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우애와 협동의 원리로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균형 있는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자원과 정보, 권력이 지역에서 공평하게 공유되고 순환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환경적’ 측면에서는 지역 생태계와 생물자원들의 지속가능성을 보호하고 물질과 에너지의 지역 순환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이 실현가능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은 물론 지역사회 다양한 구성원들의 참여와 상호간 협력이 필요하다. 국적 없는 자본들이 만들어내는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선 협동’(cross-sectoral collaboration)을 통해 경제와 사회, 공간의 영역이 서로 긴밀하게 만나고, 사람과 조직,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협동조합 간 협동의 원리를 지역사회 발전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같은 영역에서 활동하는 협동조합 간의 협동은 물론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협동조합 간의 협동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과 그 외 중소 영세기업, 자영업자, 시민사회조직(CSO), 비영리조직(NPO) 같은 지역사회 다양한 주체들 간의 협동도 중요하며, 나아가 행정과 의회 등 제도영역 간 협력 관계도 필요하다. 다만 행정이 가진 제도적 관성이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즉 협동조합과 제도영역 간 협력에 있어서는 협동조합이 가진 자치와 자립의 원칙과 지역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게 존중될 필요가 있다. 마침 최근에 각 지자체별로 협동조합 영역을 육성시켜 지역사회 발전의 주요 파트너로 삼기 위한 제도적 노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변화가 협동조합의 가치와 역할을 지역사회로 확장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아니면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억압한 채 제도 영역으로 포섭해 버리지는 않을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살림의 ‘지역살림운동’으로 본 가능성과 과제

 

대안적 실천 모델로서 생협의 특성과 역할

경쟁과 배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협동의 원리로 가치를 조직하고 관계를 조직하고 생활을 조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뚜렷한 목표와 가치를 가지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협동조합이 상황 논리와 조직 형식에 매여 정체성과 운동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이념형으로서 협동조합이 가진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실천을 통해 보여주는 사례들은 많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 현실에서 사회경제적 운동체로서 협동조합 모델을 가깝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한살림을 비롯한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협이 의미 있는 실천 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한살림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다수 생협들은 소비자로서 조합원의 권익을 실현하는 차원을 넘어 확장된 공공성 개념을 조직의 가치 지향으로 삼아 왔다. 대표적으로 한살림의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에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전제로 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틀을 넘어서 이웃과 미래세대, 뭇 생명과 생태계 전체를 함께 살려내고자 하는 조직의 뜻과 의지가 담겨 있다.

 

둘째, 그동안 생협들은 결사체로서만이 아니라 사업체로서 경제조직을 함께 운영해 옴으로써 조직의 운영과 활동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스스로 마련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공익적 활동을 해 왔던 다수의 시민사회조직(CSO), 비영리조직(NPO)들이 현재 정부나 기업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 모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협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자립기반을 형성해 온 경험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셋째, 우리 현실에서 생협이 가진 중요한 특성이자 장점은 생활세계 현장에 뿌리내린 조합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먹거리와 같은 생활 소재를 매개로 조합원과 조직이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서 생협이 가진 폭넓은 대중 조직적 특성은 큰 장점이다.

 

이처럼 사업과 활동을 함께 운영해 오면서 생협이 축적해 온 가치와 역량, 신뢰의 기반은 오늘날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 속에서 대안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든든한 자산이다. 그만큼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생협이 지역사회에 뿌리 내리고 지역과 함께 공생하고 발전해 나가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재 한살림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지역살림운동은 의미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살림의 지역살림운동이 가진 의미

사실 한살림운동의 역사에서 지역살림은 내용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살림은 처음부터 생명살림의 농법을 토대로 자원과 에너지가 순환하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일과 도시 지역 소비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생활공간과 삶의 터전을 이웃과 함께 살 맛 나는 곳으로 되살려내는 일을 함께 고민해 왔고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넘어 상호 관계와 영역들을 조직하고 실천해 왔다.

 

하지만 한살림이 최근 들어 ‘지역살림’을 주요 운동 과제로 설정하고 지역 조직별로 중장기 목표에 담아 실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데는 우리 사회 안팎을 둘러싼 변화들이 주요하게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먹거리 안전성 문제를 비롯해 출산과 육아, 아토피, 교육 등 생활상의 문제는 물론이고 사회 양극화와 실업, 환경위기 등 사회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져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그만큼 생협이 가지고 있는 협동의 경험과 조직적 기반들을 잘 활용하여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를 보다 지속가능하게 만들어나갈 필요성과 책임성도 커졌다.

 

이런 가운데 한살림은 지역사회를 살림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짜 나가기 위한 지역살림운동을 주요 과제로 설정하게 되었다. 한살림이 생각하는 지역살림운동은 ‘지역에서 만들어가는 살림운동’이자, ‘지역을 살리는 생명운동’이며, ‘살림의 주체들이 지역에서 펼쳐가는 운동’이자, ‘살림의 영역을 사회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운동’이다. 한살림이 지역살림운동의 의미를 “한살림이 그동안 펼쳐 온 (직거래)사업 및 (생활실천)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조합원의 다양한 생활 속 필요와 지역이 당면한 과제들(먹거리, 교육, 복지 등)을, ‘조합원의 참여로, 지역사회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협동의 힘으로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정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살림운동의 방향과 과제

 

지역사회는 살림의 기본 단위이자 협동의 원리를 시․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실천해 나가는 현장이다. 바로 이런 지역사회에서 살림의 그물망을 촘촘하게 짜 나가기 위해서는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와 자원을 발굴하고, 협력 당사자들을 파트너로 조직하고 연대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사회에서는 먹거리는 물론 일자리, 복지, 환경, 교육, 문화, 자치 등 생활과 밀접한 다양한 영역이 있는데, 이들 각각의 영역을 조합원과 지역사회 파트너들이 함께하는 실천 프로그램들을 통해 소통하고 연결시켜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이런 활동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활동 주기를 고려한 세대 간 공동 기획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가족 구성의 특성(비혼 또는 독신, 자녀가 없는 세대 등)과 연령별 세대의 특성(청년, 중장년, 노년 등)을 고려한 다양한 지역살림운동의 영역들을 적극 발굴해 실천 활동으로 연결해내야 할 것이다.

 

<그림2> 협동을 통한 살림의 그물망 만들기

 

 

한편, 지역살림운동이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협동조합의 실천 모델로 의미 있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참여 주체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와 함께 실천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단기간의 투자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협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일 만큼은 참여 주체들의 자발성에 기반한 학습과 경험의 축적 과정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한살림이 그동안 외부 지원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각종 모임과 실천 활동들을 통해 조합원들과 접촉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메시지를 확산하고 수렴해 온 과정들은 의미 있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동안 축적해 온 경험과 자산들을 어떻게 꿰어 지역살림운동으로 효과적으로 연결시켜낼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한살림은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창조적 결합을 위해 가칭 ‘지역살림운동 지원센터’와 ‘지역살림 기금조성’과 같은 지원 체계를 중장기 계획을 통해 단계적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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