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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영성과 협동조합
2016-06-03 15:27:00

* 『모심과 살림』 0호(2012)에 실린 글입니다.

영성과 협동조합

-영혼이 있는 협동조합, 변혁적 협동운동을 위하여

 

주요섭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왜 ‘영성’과 협동조합인가?

 

‘몬드라곤’과 ‘코프고베’와 ‘한살림’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일까? 물론 답은 ‘협동조합’이다. 몬드라곤은 두말할 것 없는 세계적인 협동조합 복합체이고, 코프고베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생활협동조합이며, 한살림은 유기농산물의 직거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생활협동조합 중 하나이다. 그렇다, 공통점은 협동조합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 셋은 모두 성공적인 협동조합 모델임과 동시에, 영혼이 살아있는 지도자와 사회화된 영성을 지니고 있다. 몬드라곤의 돈 호세 마리아 신부와 가톨릭 영성, 일본협동조합운동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기독교 영성, 그리고 한살림과 원주협동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무위당(無爲堂) 장일순의 모심(侍)의 생명사상이 그것이다.

 

협동조합을 이야기하는데 왜 영성(spirituality)일까? 바로 여기에 그 답이 숨겨져 있다. 협동운동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사업의 규모나 경영적 효율성보다 정신, 영혼, 혹은 영성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있는 것 아닐까?

 

2012년 오늘 한국의 협동조합 붐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 핵심적인 동인은 무엇일까?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이후 대안적 경제시스템과 새로운 문명의 기초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수도 있다. 협동조합운동 혹은 협동운동의 본령은 무엇일까?

 

‘탈근대’와 ‘자본주의 이후’ 나아가 ‘문명사적 전환기’가 공론이 되고, 학교, 정당, 대의민주주의, 주식회사, 노동조합 등 근대적 건축물이 낡고 늙은 것이 되거나 괴물이 되어가는 오늘, 1844년 로치데일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대략 170여 년이 지난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되살아난 협동조합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낡은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몬드라곤 협동조합 지도자의 말대로 협동조합이 단순한 법적 구조가 아니라 경제사회철학이라면, 그 철학, 즉 협동조합의 본질은 무엇일까? 협동조합의 영혼(spirit)은 무엇일까? 마치 ‘만유인력(萬有引力)’처럼 우리를 끌어당기는 협동조합의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협동조합과 영성: 몬드라곤과 코프고베의 경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보이는 힘’은 탐욕의 신(神), 화폐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시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협동조합도 결국 사업규모에 의해 존재감이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는 진정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힘’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사람들의 결사체인 협동조합의 성패는 결국 ‘사람들’에 달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자발성과 그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고 있는 몬드라곤과 일본생협운동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영적인 에너지, 혹은 아우라가 같은 게 느껴진다. 협동조합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로버트 오언의 박애주의와 ‘새로운 사회(New Society)’에 대한 열망, 덴마크 협동공동체운동과 독일 라이파이젠 협동조합에서의 기독교, 이탈리아와 캐나다의 협동조합운동과 가톨릭의 역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으로 건너온 협동조합운동도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도저한 기독교 영성에 의해 태어나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은 정신성과 종교적 영성은 협동조합운동에 있어서 보편적인 현상 아니었을까?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사를 일별해보면 그 아우라가 더욱 확실해진다. 일제하 천도교(동학) 계열의 농민협동조합인 공생조합운동, 덴마크에 지도자를 파견하며 배워온 YMCA(기독교청년회)의 소협운동과 농민조합운동, 원불교의 간척사업과 협동공동체 등은 놓치지 않아야 할 한국 협동운동의 뿌리이다. 또한 현대 한국의 생협운동 및 신협운동에서도 종교적 배경이 탄생과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멀리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홍성의 풀무학교와 협동공동체들, 1970년대와 80년대 가톨릭의 지원 속에서 성장한 원주와 강원도의 협동운동,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듯 1960년대 초 가톨릭 수녀님과 신부님에 의해 시작된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역사가 그것을 웅변한다. 또한 1980년대와 90년대 개신교의 민중교회운동이 시도한 노동자협동조합의 실험도 잊지 않아야 할 한국협동조합운동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요컨대 국내외 협동조합운동의 태동과 성공의 이면에는 종교적 영성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강력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몬드라곤과 일본의 생협운동이다.

 

몬드라곤과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가톨릭 영성

 

2010년 현재 총자산 331억 유로, 총매출 140억 유로, 수출액 36억 유로. 노동자 83,859명이 종사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협동조합복합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위기 극복의 세계적인 롤 모델로 떠올랐으며 명실상부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보통명사가 된 몬드라곤 이야기다. 1956년 5명의 초급기술자들이 모여 만든 조그만 곤로공장에서 시작해 수많은 협동조합 기업군(群)과 영국, 아르헨티나, 중국 등 15개 이상의 국가에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몬드라곤은 이미 하나의 경제공화국이다.

 

이와 같은 유례가 없는 전 세계적인 신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스크 민족주의와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혹은 사회주의 혹은 공동체주의의 역사, 순준높은 교육기관과 인민금고의 역할, 탁월한 경영전략 등 여러 요인들이 오늘의 몬드라곤을 가능케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은 돈 호세 마리아 아리즈멘디아리에타(1915~1976)라는 긴 이름을 가진 가톨릭 신부의 존재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와 관련하여 평생 아무런 직책을 갖지 않았으나, 그는 몬드라곤의 그루(스승)이었고 도덕적 사업적 조직적 멘토였다.

 

캐나다의 저명한 몬드라곤 연구자인 그레그 맥레오드는 몬드라곤의 사상적 원천을 네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 교회의 전통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배척했으며, 경제를 매우 심오한 인류의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둘째는 바스크 사회의 전통인 단결과 근로정신, 셋째는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의 통제도 거부한다. 넷째로 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 대안으로써 ‘인격주의(personalism)’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원칙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몬드라곤의 사상적 핵심요소는 유대-기독교 가치라는 것이다. 몬드라곤이 이타적인 공동체이자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협동조합복합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인간, 전인격적 인간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인격이란 ‘하느님의 마음을 지닌 인격’을 말한다.

 

돈 호세 신부에게 유일한 ‘주의(ism)’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원리가 실현된 삶과 사회. 신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심지어는 협동조합주의마저도 거부했다. 모든 이념적 실천 속에서 지혜를 깨우쳤고, 동시에 모든 이념을 넘어섰다. 이념은 교과서가 될 수 없었다. 신부는 이념이 아니라 다른 ‘삶의 양식(way of life)’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몬드라곤 시스템의 진수는 소비자나 생산자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를 하나의 복합체 조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립자들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권리, 양측의 경제적 균형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고안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동은 필요의 충족이기도 했으나 이타적 마음, 곧 사랑이라는 종교적 영성이 없다면 불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나 지혜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생명의 존재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몬드라곤은 국가와 자본을 넘어 경제과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사회적 경제’ 모델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돈 호세 마리아 신부는 궁극적으로 사회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과 온전한 인격,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으로 드러난 신격에 천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거룩한 인간주의’인 것이다.

 

돈 호세 마리아 신부는 말년에 학교 교정의 탑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신부는 탑 위에서 땅 위에 실현된 사랑의 공화국을 지긋이 내려보곤 했을 것이다. 몬드라곤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 것이다.

 

일본의 생협운동과 가가와 도요히코의 기독교 영성

돈 호세 마리아 신부가 태어날 즈음 가가와 도요히코는 고베의 빈민촌에서 전도와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노동, 농민, 협동조합 등 일본의 거의 모든 사회운동의 아버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가 오늘날 140만 세대의 조합원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지역생협인 ‘코프고베’를 설립한 때는 1921년이었다. 세계 3대 협동조합사상가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 그는 실로 동아시아의 간디라 할 만하다. 간디가 그러했듯이 그는 사회운동가이면서 정치가이면서, 또 수행자였다. 미국에서 정통신학을 공부한 목사였고 수행자로서나 봉사자로서나 평생 예수처럼 살기를 원했으며 또 그렇게 살아왔다. 그는 협동조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운동은 사랑과 형제애라는 기독교의 이상과 합치한다. 우리들이 구하는 것은 우애의식의 부활, 기독교적 형제애의 부활이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협동조합을 정신적인 운동이라고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은 인간의 각성된 종교의식에 뿌리박은 새로운 종교적 경제관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일본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대부였던 가가와 목사에게 형제애와 우애의 부활은 곧 길이요 생명이다. 인민들과 사회와 국가의 길이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형제애의 행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협동조합 국가를 모색하고, 나아가 세계평화를 꿈꾸었다.

 

코프고베의 모토는 ‘생활과 협동’이 아니라, ‘사랑과 협동’이다. 협동의 기초는 사랑이며 사랑 없는 협동은 팥소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랑과 협동’의 정신은 코프고베의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소비자와 생산자는 각자의 이익을 좇을 일이 아니다. “만일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력정신으로 하나가 되면 사회에 조화가 태어나리라. 이것을 우리는 사회단위(social unit)라 부른다. 그렇게 되면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가 생산자가 된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소비자협동조합과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생산-소비 협동을 기대했다. 돈 호세 마리아 신부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이렇게 둘이 아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우애의 경제학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까지 발달하지 못한 본능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아왔던 경제활동의 모두를 속죄애의 의식적 행위로 정화하고 합리화할 것을 하나님-의식은 촉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상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만일 경제활동을 현상 그대로 방치하면 세계평화는 결코 확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는 1936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던 시대였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본능 영역에 속해 탐욕의 포로가 된 경제를 ‘사랑의 선물’로 재(再)정의 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가 없다. 말씀이 있어야 한다. 경제의 이면, 보이지 않는 신의 사랑과 이 땅에서의 실현. 가가와 도요히코는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사랑의 선물을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협동조합과 경제의 전체성과 음양론

 

그렇다. 몬드라곤과 일본생협의 비결은 반딧불이처럼 투명한 두 영혼이었다. 경제적 편익만을 쫓지 않고 사랑의 공동체를 열망했다. 밥과 동시에 신기(神氣)를 구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전면적인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새로운 협동조직의 모델을 만들었다. 하지만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이 경제적 성공의 떡고물을 나누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주식회사의 압도적인 시장지배력에 밀려서 로치데일 방식의 협동조합은 20세기 초 중반 그 의미와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새로운 차원의 협동운동의 지평을 연 일본의 협동운동과 몬드라곤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힘이 바로 가톨릭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사회화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돈 호세 신부의 영성적 지도력이 없었다면 그 조직들은 지속가능하지 못했거나 또 하나의 경제주의적 협동조합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몬드라곤과 일본생협의 규모와 경영기법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정신, 영혼, 영성이다. 협동조합의 전모, 그 안에 내재해 있는 그 무엇, 사람들(association)과 그 사람들의 열망(aspiration)을 통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경제 안에 숨겨진 삶의 전체성을 추적해야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필요와 열망의 전체성과 음양론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발상 자체가 그렇거니와 이후의 협동조합 역시 경제적 필요를 협동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삶의 질 향상을 꾀했고 이는 일정하게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필요의 충족’, 즉 공동의 경제적 편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는 아닐지라도 대안적 생활공동체로써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협에서 목격하고 있듯이 협동조합은 대개 자본주의적 소비과정을 대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협동조합 운동가들은 오웬을 비롯한 1세대 협동운동의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심의 결과가 담긴 것이 바로 ICA의 협동조합의 정의 아닐까? 그리고 협동조합의 정의에 언급된 ‘열망’의 배경이 아닐까?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enterprise)를 통해, 그들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s)을 충족하고자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association)이다.”

 

널리 알려진 ICA의 1995년판 협동조합의 정의이다. ‘사업체’와 ‘결사체’에 대해서는 많은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논의가 있었고 특히 김기섭의 논의는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결사체와 사업체보다 ‘필요’와 ‘열망’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바로 여기 ‘열망’ 속에 협동조합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열망의 재발견, 아니 필요와 열망의 역동적 음양론에 더 가깝다. 사업체와 결사체의 역동적 음양론이면서 동시에 필요와 열망의 음양론이다.(변증법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음개벽, 이면에 숨겨진 열망과 열망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되살려야 한다. 협동조합의 전체성은 열망의 실현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사업체는 필요에 대응하고 결사체는 열망과 짝을 이룬다. 그러므로 필요-사업체와 열망-결사체의 역동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때만이 협동조합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서 흔적만 남은 협동조합의 반쪽, 아니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깊은 열망을 되살려야만 21세기 새로운 차원의 협동조합 시대를 열 수 있다는 말이다. 오웬이 평생을 염원하고 수많은 대안공동체들의 실천해왔던 그 ‘더불어 삶’의 열망이 없이는 협동조합은 새로운 사회의 지렛대가 아니라 그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받침대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과 주식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의 결합이냐 사람의 결합이냐에 있다. 주식회사는 이윤을 추구하고 협동조합은 필요의 충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도 차이는 있다. 그런데 협동조합과 주식회사는 공히 사업체로서 공동(조합원)의 필요 혹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주식회사와 협동조합의 결정적인 차이는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열망의 현현(顯現)’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본래적으로 주식회사의 열망은 이윤, 즉 자본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열망은 더불어 숲이다. 박애에 기초한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 나아가 모든 생명이 어울려 함께 사는 생명의 숲이다.

 

숲 가꾸기로 유명한 한 기업체의 광고가 떠오른다. “사람들이 창가에 화분을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도 맞다. 기분이 좋아지니까도 맞다. 꽃이 예뻐서도 맞고, 건조 방지를 위해서도 맞다. 하지만 그 광고의 답은 다르다. “내 마음 안에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열망이다. 더불어 살고자 하는 열망, 나누고자 하는 열망, 이것은 윤리 이상이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열망, 생명세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자비와 사랑과 인(仁)의 그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우주론적 생태신학자 토마스베리 신부는 우주의 비밀을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객체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의 영적 친교(communion)이다.”

 

더욱이 문명사적 전환기, 21세기 협동운동이 나아갈 바는 필요의 충족에 기반하면서도 동시에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 영적 성숙을 지향하는 영성사회, 모두가 자기실현하는 창조사회의 길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정의 속에 있는 ‘열망’의 숨은 뜻 아닐까?

 

일본생협운동에서도 가가와 도요히코의 정신과 열망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오늘 쿠프고베의 소개문은 열망의 의미, 협동조합의 보이지 않은 깊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합원의 생활을 지원하고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도 모두의 힘을 모아 각자의 소원과 꿈을 현실로 만듭니다. 코프고베는 ‘사랑과 협동’의 정신을 출발점으로 앞으로도 우리의 길을 갈 것입니다.”

 

필요(생활지원 풍요)와 열망(소원과 꿈을 현실로)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코프고베는 더 많은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경영적인 안정을 위해, 생협의 기본적인 사명인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원이나 꿈을 현실로 만드는” 열망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바로 그것 ‘사랑’이다. 사람들의 마음 한켠 오롯이 남아있는 더불어 삶의 꿈, 나아가 자기실현과 우주와의 합일을 꿈꾸는 깊은 내면의 열망 말이다. 협동조합 안에서 개인의 꿈과 소원을 모두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물품과 활동 안에서 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조합원들의 따듯한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생협 매장은 고속도로 휴게소의 편의점이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협동조합의 영혼은 ‘더불어 삶’의 열망이다.

 

경제, 교환과 호혜의 전체성과 음양론

협동조합은 필요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경제조직이다. 예컨대 생활협동조합에서의 경제행위는 주로 물품의 공급과 구매를 통해 이루어진다. 매장 안에서 생협물품은 화폐를 통해 상품처럼 판매된다. 매장이 작은 상품시장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분명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물품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수요공급의 논리가 아닌 협의를 통해 가격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비껴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협의시스템만으로 상품시장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필자의 결론은 “아니다”이다.)? 그럼 전통시장의 가격 흥정도 협의가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결론은 “그렇다”이다.)

 

협동조합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 머물 것인가? 밖을 향할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가 가능하다. 그 중 하나는 어차피 시장경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경쟁력을 높여 주식회사를 이기는 길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시장 밖에서 비시장적으로 협동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것이 1세대 협동운동이나 70년대부터 시작된 급진적 생태공동운동의 선택지였다. 그런데 두 번 째 선택은 블랙홀과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초강력 중력장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제 3의 선택은 가능할까? 무엇일까?

 

그 해답은 필요와 열망의 음양론에서 이미 암시되었듯이 경제관계의 보이지 않는 면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교환과 호혜의 음양론이 그것이다.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교환과 증여의 복(復)논리’라고 말했고, 한국의 시인 김지하는 ‘호혜와 교환의 융합’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아래서 잃어버린 호혜의 마음, 즉 증여-답례의 마음을 되살리는 데 있다는 말이다. 상품 안에 내재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에 머물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경제적 합리성에 의한 분석이라면, 거기서 더욱 파고 들어가 생명세계의 증여-답례의 마음, 필요의 교환 안에 숨겨진 호혜의 열망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에 대한 ‘전일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경제현상이 교환의 원리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증여와 순수증여라는 다른 두 원리와 단단히 묶여 있는 전체성을 가진 운동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에 따르면 경제인류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이전까지 모든 경제관계는 한마디로 교환/증여의 이중적 관계였다고 한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품을 교환할 때에도 물품과 더불어 호혜의 마음과 인격, 나아가 물품에 묻어있던 영혼까지도 함께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시장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지만, 시장교환과 화폐거래 의 이면에 마음과 인격이 함께 오고 갔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과 일본의 일부 생협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그러하듯이, 전통시장의 에누리와 흥정과 외상 안에 인정이 묻어있듯이 말이다.(경제적 합리성이 최고의 수준인 마트와 백화점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왜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인가? 농업(노동)의 성격 변화를 통해서 명백히 확인된다. 자본주의 이전 농민들에게 한 알의 씨앗에서 생산되는 풍성한 농작물은 땅의 선물이고 하늘의 축복이었다. 작은 수고로도 온 가족과 공동체를 먹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자연이 주는 선물 즉 증여의 결과였다. 우주의 거룩한 힘이었다. 당연히 농민의 땀과 노동은 아름답고 신성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의 농업(노동)은 달랐다. 비료와 농약, 농기계가 동원되고, 따라서 농작물의 수확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노동 및 자본 투입의 결과물이었고 더 이상 자연은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과 개발(약탈)의 대상일 뿐이다. 공업생산물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하늘에 감사할 일이 아니라 자본을 숭배하며 자신의 투자 및 경영능력을 믿을 뿐이다. 노동력과 함께 인격마저도 사고팔리니 그 땀과 노동은 고통일 뿐이며, 오로지 화폐가치로만 평가된다. 시장(교환과정)에서 인격과 영혼과 감사의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숲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일이 되었다.

 

협동조합 경제는 잃어버린 증여-답례의 주고받기, 즉 호혜의 마음을 되살려야 한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보이지 않는 힘이며, 협동조합의 영성이 아닐까? 그 때문에 돈 호세 마리아 신부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소비자와 생산자의 협동을 강조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경제적 합리성으로 포장된 몰인격과 몰영성적 화폐관계, 상품관계로부터 벗어나 경제의 전체성, 교환/호혜의 복논리를 회복하는 게 협동운동의 진정한 과제 아닐까?

 

예수의 포도원에서는 노동의 법이 다르다. 아침에 온 일꾼에게나 오후에 온 일꾼에게나 같은 액수의 보상을 한다. 그것은 경제적 합리성을 넘어선 자연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다. 생명의 무게를 측정할 수 없듯이 생명활동으로써 노동은 그 하나하나가 양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생명의 인드라망을 출렁이게 하는 우주적 사건이다.

 

또한 호혜는 받고주기가 아니라 주고받기이다. 신약성서는 대접받기 위해서는 먼저 대접하라고 강조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동아시아식으로 말하면 천지부모의 은혜가 생명공동체의 전제조건이다. 자연은 증여 없는 제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웃사랑은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생명의 존재양식이며 인간 내면 깊은 곳 존재론적 열망인 것이다. 그래서 호혜는 ‘받고주기’가 아니라 ‘주고받기’인 것이다.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지속가능 원리이기도 하다. 신뢰에 기반해 주고받기의 호혜적 순환적 고리를 이어감으로써 공동체의 생명력은 유지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교환과 호혜의 음양론이다. 호혜의 열망은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교환을 통해서 실현된다. 김지하 시인이 불교에서 발견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그것이다. 나의 이익이 곧 너의 이익이 되는 관계. 예컨대 밥/쌀을 매개로 연결되는 도시소비자와 농촌생산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 곧 소비자에게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 농민과 농업을 살리는 일이 되고, 생산자에게는 유기농업을 하는 것이 소비자의 밥상을 살리는 일이 된다. 호혜적 교환이다.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은 둘이 아니다. 이제 ‘자리이타’는 ‘이타자리(利他自利)’로 깊어진다.

 

또한 <화엄경>에 나오는 ‘동진불염(同塵不染) 이생상도(利生常道)’의 경지다. “장바닥의 먼지는 함께 뒤집어쓰되 탐욕에는 결코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이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하는 항상된 진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장바닥에서 먼지를 함께 뒤집어씀’은 교환을 의미하고, ‘탐욕에는 결코 물들지 않음’은 호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 교환 안에 내재된 호혜의 마음인 것이다.

 

요컨대 열망은 욕망의 지극한 상태이며 욕망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돈을 주고 산 크리스마스 선물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의 밤은 교환의 원리와 증여의 원리가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증여와 교환은 “살을 맞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호혜의 마음이 세상을 움직인다

호혜와 교환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의 깊은 바닥엔 ‘신령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거꾸로 호혜의 마음이 사라지면 오늘날 마트와 백화점에서 보는 탈인격화된, 영혼 없는 공리주의적 경제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혹 협동조합의 매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열망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협동조합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기업일 뿐, 협동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유심론이나 관념론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전체성의 회복이다. 영(靈)과 육(肉)을 분리시키지 않는 전체로써의 영성이다. ‘경제인간’을 넘어서 전인격적 인간의 귀환이다.

 

“사람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무한한 가치를 가진 개인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그들이 모두 평등한 이들이라는 것도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인류 형제애의 교리는 인격적 개성이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공동체의 실체는 바로 개성적 인격체들의 관계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폴라니에게 (자본주의의 극단인) 파시즘의 본질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써의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본질은 독점이나 불평등에 있지 않다. 여기서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인격주의와 가가와도요히코 목사의 형제애와 폴라니의 영혼이 있는 인간이 만난다. 그러므로 뼛속까지 상품화된 자본주의시대, 영혼이 있는 협동조합, 영성적 협동운동이 혁명이다. 물품 안에서, 심지어는 돈(화폐) 안에서 신령한 마음을 보는 것이 새로운 비전이다. 바로 이것, ‘직관(intuition)’이다.

 

협동조합에서의 영성,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물품 안에 녹아든 농민들의 땀을 느끼고 정성을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떤 협동조합이든 그 크기가 작건 크건 간에 우리는 삶을 나누고 있고 마음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언젠가는 밥 한 그릇으로부터 생명세계를 깨닫고 우주의식과의 소통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숲이 있음을, 숲이 곧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가가와 목사와 호세 신부의 하느님 나라 아닐까? 이때 협동은 생존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근원적 존재양식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영성의 출발이다. 축산농민과 채식을 명상할 때,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느낄 때, 협동조합은 생명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 경제적 합리성과 윤리의 무게를 넘어서 농민과 여성의 마음 깊은 곳 생명감각과 연민이 일어나고 깊은 명상을 통해 “내가 곧 너”임을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동서양 수행공동체의 오랜 경구처럼, “내가 바뀌면 우리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영성적 협동사회의 구상

 

경제의 전체성과 영성에 대한 통찰은 더 이상 담론으로 머물지 않는다. 이미 많은 대안적 사회운동과 협동운동이 협동공동체와 영성공동체의 통합을 꾀하고 있다. 인도의 사회적 수행공동체 아난다마르가의 프라우트이론이 정교하게 그 대안을 제시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일찍이 30년전 원주에서 전통적 사회운동으로부터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생명사상에 기반한 협동운동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영성적 전체성(spiritual wholeness)과 협동적 삶(cooperative life)은 새로운 삶과 사회를 향한 두 개의 열쇠말이다. 밥상공동체와 영성공동체의 음양론, 혹은 협동적 삶과 영성적 삶의 통합이다. 필요의 충족에 기초하는 영성의 실현, 생태적 삶의 바탕 위에 영적인 삶과 공동체적 삶을 꿈꾼다.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지금 여기서 실현한다.

 

사카르의 영성적 협동사회

사카르(1921~1990)는 인도의 수행자이자 영성적 사회혁명가였다. 탄트라 수행법을 바탕으로 ‘지복(至福)의 길’이란 뜻을 가진 사회적 영성공동체인 아난다마르가를 창립하고 평생을 이끌어왔다. 1971년 투옥되어 6년 동안 투옥생활을 했는데 수년 간 하루에 물을 섞은 요구르트 두 잔만을 마시며 단식으로 저항과 수행을 병행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1959년에 사회적 대안이론으로 제시한 것이 ‘프라우트(PROUT)’였다. 프라우트는 ‘진보적 활용론’으로 번역되는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라는 영어 머리글자들을 엮어 만든 말이다. 1990년대 초부터 경제적 공황과 자연환경의 급변에 대비하여 마스터 유닛(Master Unit)이라고 하는, 자급자족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삶의 공동체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오늘날 아난다마르가는 인도를 비롯해 베네수엘라와 호주, 아프리카 등 지구 곳곳에서 ‘명상’과 ‘협동조합’을 무기(?)로 새로운 사회와 문명을 창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카르는 사회진보를 “모든 존재들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그 기본조건이 육체적, 정신적 필요의 충족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필요조건일 뿐이다. 존재의 또 다른 영역이 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오는 것이다.

 

사카르의 사회적 비전은 한마디로 자본주의 너머 “영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체제”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 기초가 바로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경제생활의 기초가 되고 경제시스템의 핵심적 토대가 된다. 프라우트 경제시스템은 피라미드형 구조로써 즉 피라미드의 맨 아래 부분은 공공경제, 중간 중소규모의 경제단위는 협동경제(사회적 경제), 맨 위의 소규모영역은 시장경제로 구성된 산업구조이다. 이를테면 시장경제와 공공경제와 협동조합경제의 공존이다.

 

사카르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기업과도 다르고 강제적인 집단화로 만들어진 사회주의체제의 그것도 구별된다.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시스템은 ‘종속적 협동(subordinated cooperation)’을 통해 운영되고 관리자가 노동자를 감독하고 명령을 내린다. 이와 달리 프라우트의 협동조합은 ‘대등한 협동(coordinated cooperation)’에 기초해 경제적인 목표와 사회적인 목표를 결합시켜 부와 권한을 조합의 각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산시킨다.

 

삶의 전체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는 지속해서도 안 되고 지속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인간사회 전체 및 개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카르의 사회적 비전은 자본주의 너머에 있다. 물론 사회주의도 넘어서고 있다. 그 출발점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사상이다. 이제 인류는 개인의 물질적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되, 경제적·물질적 성장욕망에서 벗어나 오히려 정신적·영적인 면에서 무한성장을 향해 가야 한다. “균형을 회복한 물질적·정신적·영적인 차원들이 상호 결합되어 건전하고도 전일적인(holistic) 사회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모심의 생명사상과 한살림 협동운동

“전 인류와 전 생명계에 찬란한 부활을 가져다 줄 세계사적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걸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존엄한 생명의 존중과 사랑’이라는 보편 진리를 생활적으로 구체화시키고 새롭고도 폭 넓은 세계관을 창출해내야 하며 영성적(靈性的)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새로운 생존양식을 창조해내야 합니다. 인간과 자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결정적인 친교와 평화를 성취시킬 생명의 세계관, 생명의 존재양식을 출현시켜야 합니다.”

 

벌써 30년 전의 글이다. 1982년 김지하 시인이 초안을 작성하고 지학순 주교(1921~1993)와 장일순 선생(1928~1994) 비롯한 이른바 ‘원주 캠프’가 검토하여 세상에 내놓은 운동 팜플렛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란 문건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일명 ‘원주보고서’라고 알려진 이 글에서 그 당시 원주의 사회운동가들은 사회운동의 전환을 천명한다. ‘생명운동’이란 말이 세상에 처음 나온 문건이기도 하다.

 

원주보고서는 기존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영성을 지닌 살아있는 ‘한’ 생명임을 천명한다. 장일순이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빌려 말했듯이 “천지만물 가운데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天地萬物莫非侍天主).”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거룩한 한 우주인 것이다. 서울역의 노숙자도, 매일 마주 하는 밥 한 그릇도, 심지어 돌멩이와 풀 한 포기마저도 우주생명을 모시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과 철학이 곧 ‘모심(侍)’의 생명사상이다.

 

원주 캠프의 사상적 ‘대전환’은 새로운 차원의 협동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알려져 있듯 1985년 원주소협을 창립하고 1986년 서울 한살림농산을 설립하면서 생명사상에 기반한 협동운동을 시작하기 전, 이미 1970년대 강원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협동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원주 캠프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좌장인 장일순과 원주 캠프의 실무기획 및 프로그램을 총괄한 김영주, 오랫동안 협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펼쳐왔으며 나중에 한살림을 창립한 박재일 등 원주의 사회운동가들은 광산지역과 농촌지역에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이용협동, 생산협동, 구매협동 등 여러 가지 협동사업을 실험했다. 그런데 결국 신용협동조합을 빼놓고는 실패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요 원인은 탄광산업의 쇠퇴, 이농현상, 정치적 탄압 등이었지만, 경제적 편익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협동운동의 한계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새로운 탐색의 결과로 나온 문건이 ‘원주보고서’였던 것이다.

 

이제 원주 캠프는 새로운 협동운동, 영성적 협동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하나로 연결된 생명세계’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협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생산·소비 공동협동이 모색되고, 생산-소비 협동의 매개인 먹거리도 농약과 화학비료에 오염된 쌀/밥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먹거리로 바뀌게 된다. 물론 농업도 화학농업에서 생명농업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도농직거래를 비용절감과 가격인하라는 경제적 편익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품시장의 논리를 넘어서는 호혜적 관계의 복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교환 속의 호혜혁명이다.

 

그리고 “생산자 코뮌과 소비자 코뮌의 협동”이라는 세계 협동운동의 오랜 이상(理想)이 한살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산·소비 공동참여형 협동조직모델로 탄생하게 된다. 농민은 농민끼리 광부는 광부끼리, 소비자운동 따로 생산자운동 따로, 각 협동조합의 경제적 편익을 위해 경쟁하는 협동운동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차원의 협동운동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영성적 협동공동체의 의미는 ‘한살림’이라는 말 안에 함축되어 있다. 한살림이란 말 그대로 ‘함께 살기’, 협동적 삶을 뜻한다. 하지만 한살림의 ‘한’은 전체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 하나하나의 개체성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개체성은 전체성을 담고 있는 개체, 즉 무위당 장일순의 또 다른 호인 일속자(一粟子)의 그것처럼,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인 것이다. 합일(合一), 즉 우주 영성적인 ‘하나됨’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변혁적 협동운동을 위하여

 

영성은 추상적이지 않다. 영성은 시대적이다. 몬드라곤은 파시즘에 대한 바스크공동체의 저항이었으며 일본 협동조합운동의 출발점은 일본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또한 모심의 생명사상은 탈빈곤의 생존권적 생명권과 반독재의 자유권적 생명권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 바탕엔 사랑의 영성이 있었고, 그 드러난 모습이 협동조합이었던 것이다. 사카르의 영성적 협동사회와 한살림의 생명공동체운동은 자본주의의 파괴성이 복합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전위적 시대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영성은 래디컬(radical)이다. 공동체의 눈물이 ‘나’의 슬픔이요, 생태계 파괴가 곧 ‘나’의 아픔이다. ‘나’의 영혼을 부정하고 삶의 전체성을 해체하는 자본의 논리를 용납할 수가 없다. 생명과 영성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업보로 인해 이미 이 세계는 종말을 치닫고 있다. 세계화의 역설로 인해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없는 시장포화시대,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지속불가능’하다. 기후붕괴와 핵기술은 지구생명공동체의 절멸을 재촉하고 있다.

 

원주 캠프의 대전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전환’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지속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희망은 오로지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전환이 희망이다. 영성적 삶, 생태적 삶, 그리고 공동체적이며 협동적인 삶으로의 전환 말이다.

 

그렇다면 협동운동 역시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사회적 전환운동에 함께 나서야 할 일이다. 잘 먹고 잘사는 협동조합을 넘어서 삶과 사회를 바꾸는 협동운동으로 가야 한다. 요컨대 ‘변혁적 협동운동’이다.

 

협동조합은 어떻게 삶과 사회를 바꿀 것인가? 변혁적 협동운동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경영 능력과 사업 규모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20세기 사회변화의 동력이 생산력과 계급투쟁이었다면, 21세기 협동운동의 새로운 비결은 영성이다. 1세대 협동조합운동의 전체성을 되살리면서, 2세대의 경제적 합리주의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3세대의 그것은 영성에 기반한 협동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혼이 있는 협동운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영성이란 ‘더불어 숲’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다. 공동체성 따로 생태적 감수성 따로, 영성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공동체성, 내 안에 있는 자연, 내 안에 있는 우주생명을 깨달음으로써 전일적 삶의 열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빵과 말씀은 둘이 아니다. 먹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러나 항상 들어가 있는 찐빵 안의 팥소처럼 빵 안에 말씀을 담아야 한다. 거꾸로 밥 한 그릇 안에 담겨진 생명세계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의 종말이 운위되는 문명사적 전환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협동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를 예비하는 협동운동으로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영성, 모심의 영성을 기반으로 체제 유지의 협동운동이 아니라 체제변혁의 협동운동으로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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