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모심의눈 모심과 살림 읽기

모심과 살림 읽기

게시글 검색
[1호] 문명사적 전환기, 생명운동 30년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2016-06-14 10:53: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문명사적 전환기, 생명운동 30년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특별대담

이상국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박맹수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모심과 살림』 1호를 발행하면서 생명운동과 한살림운동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론과 실천의 현장을 이끌어 오신 두 분을 모시고 대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원주보고서에 '생명운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현재 우리를 평가해보면서 한국의 생명운동, 한살림운동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문명사적 전환기에 어떤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자임하고 갈 것인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990년에 발행된 무크지 『한살림』에 '문명 위기'와 '협동 운동'을 주제로 한 두 개의 좌담이 실린 바 있습니다. 23년이 지난 오늘, 그 두 주제를 아울러 다시 돌아보고 내다보는 자리로 이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상국 > 최근에 ‘문명의 위기’ 혹은 ‘문명사적 전환기’란 말을 많이 합니다만, 25년여 전 한살림모임을 시작할 때 이미 ‘전환기’라는 말을 열쇳말로 삼았었습니다. 전환기란 말의 동학적 표현이 ‘개벽’인데, 생명운동은 그동안 개벽을 화두 삼아 문명전환을 이야기해온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서야 문명사적 전환기가 공론화 된다는 게 오히려 늦었다는 생각입니다.

 

박맹수 >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각성의 구체적인 언표로 수운 최제우 선생이 ‘개벽’이라는 말을 쓰신 19세기 말은 이미 일종의 물질주의랄까, 자연을 개발과 이용의 차원으로만 바라봤던 서구 합리주의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화되는 시기였는데, 더불어 비서구세계에서 다양한 각성이 일어나던 그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말의 한국사회에서 원주보고서1)와 한살림선언2)을 통해 깊은 각성이 표출되었다고 보입니다. 또 다시 30년이 흐른 지금은 세 살짜리 아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위기가 심각해진 상태인데, 바로 이런 시점에 150년 전 수운 선생의 문명사적 전환의 문제제기와 30년 전 원주보고서의 문제제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야 하는지,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운동 30년, 위기와 전환의 숨은 뜻

 

이상국 > 생명, 즉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살기 위해서 행동합니다. 모든 행위가 이른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내가 사는 방향으로 하게 되어 있어요. 죽기 위해서 하는 행위는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진짜로 사는 길을 살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한 번 해봐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숨을 쉬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상대방이 담배를 피우고 폐병에 걸리면 내가 사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은 건강해야 한다는 겁니다. 돈 버는 방법도 마찬가지예요.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돈을 내가 다 벌어서 내가 만든 물건을 더 이상 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마치 더 먹을 게 없어서 결국 같이 죽는 암세포처럼 되잖아요.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에서는 ‘욕심쟁이’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 식량위기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런 문제가 각자의 생명과 무관하다면 관심을 안 가질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보면 겉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몸 자체보다 겉에 입는 옷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몸은 망가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거죠. 생명에 진정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그런 관점으로 우리의 삶과 사회를 되돌아보자고 한 것이 이른바 생명운동이란 이름으로 출발한 배경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맹수 > 공감합니다. 산다는 것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살아가는 것, 거기가 출발점이죠.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답게 제대로 사는 거냐, 쉽게 표현하면 의식주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건강하게, 스트레스 없이,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사는 건데, 실제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오염물질이 먹을거리 속으로 침투해 암을 발생시키고, 경쟁과 효율과 합리성을 중심으로 사회가 만들어져 움직이고 있지요. 최근 남양유업 사태도 이런 데서 발생한 것 아닙니까? 결국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원전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어디 한 군데도 안전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주변의 자연환경과 다른 사람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또는 하늘, 땅과 같은 우주적 관계 속에서 연결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데, 이런 조건들이 다 병들어 있는 상태인 거죠.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 건가, 내 생명을 내 생명답게 제대로 살아보자,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써 생명운동을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상국 > 지금 위기가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1859년에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되면서 석유문명이 시작됐는데, 그때 인구가 10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150여 년 지난 지금 70억 인구가 되었고, 공업적 삶,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양식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등 생명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되고 서로 죽이는 역사를 밟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석유 자체가 정점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단지 석유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현재의 생존 기반 자체가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농업과 관련해서 보더라도 현재와 같이 석유문명에 의존한 화학농법은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석유문명 자체가 대기오염이나 기후변화를 가중시켜서 다른 생명체의 환경을 뒤바꿔놓지 않았습니까? 전남에서 밀 재배가 안 돼서 밀 생산지를 북상시켜야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구 사과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복숭아꽃이 얼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석유에 의존하는 공장식 농업을 지속한다면 인광석과 석유가 바닥을 드러내는 50년 뒤에는 무엇으로 농사짓겠어요?

 

30년 전에 처음 생명위기를 말했지만, 그때만 해도 모두들 ’설마 그렇게 되겠느냐‘라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가 구체적인 모습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도 상대적으로 말은 풍성한 것 같아요. ’지속가능한 개발‘ 같은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여전히 그대로 향유하면서 가려는 것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동안 꾸준하게 문제 제기를 해 생명위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에는 이른 것 같은데, 위기의 속도에 비례해서 실천의 면을 넓히거나 그 농도를 짙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최근에 문명 위기를 상징하는 두 개 단어가 있는데, 9.11과 3.11입니다. 9.11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 왔던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근본적 파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3.11 후쿠시마 사고는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 왔던 문명의 문제, 지구적 위기가 실감나는 사태로 드러난 사건이죠. 그 사이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체계의 파탄이 일어났고, 거기다 더 근본적인 불안을 야기하는 지구적 변동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 왔던 정치·경제·사회, 즉 근대 문명의 한계점들이 비극적 사태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30년 전과 오늘, 무엇이 달라졌나를 생각해 봅니다. 생명운동을 시작했던 우리 안의 문제를 깊이 검증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명운동을 ‘근원적 생명의 본성에 합치·일치하고 돌아가려고 하는 사회적 운동’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왔던 부분적 생명관을 전체적 생명관으로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세계관 변혁운동이 곧 생명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왔던 잘못된 제도와 법과 습관들을 청산하는 운동이 되어야 하고, 이 운동을 하는 주체들에게는 끊임없는 공부와 수행이 필요했었습니다. 정말 초심으로 일관해왔는지 우리 내부에서부터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 위기 현상은 가공할 만한 규모로 확산되고 심화되어버렸는데, 정작 생명운동을 시작했던 우리의 문제의식은 지난 30년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는지, 반성해보자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실제로 세상에서는 위기가 심화되니까 이러저러한 이름의 생명운동이 엄청나게 확산됐습니다. 생명평화, 생명살림, 생명공동체 등 ‘생명’이라는 말이 세계적인 유행어, 한국사회의 대중적 언어가 되다시피 했고, 생명을 붙이지 않으면 먹을거리도 못 파는 시대가 되었는데, 정작 생명운동을 표방했던 우리는 스스로를 생명의 본성에 일치시키기 위해 얼마나 변혁하고 혁신하고 바꾸고자 노력했는지, 그동안의 성찰과 수련은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의 먹을거리와 농업이 생활양식과 생산양식을 바꾼다”

 

이상국 > 우리가 소홀했던 것을 잘 돌아봐야 한다는 데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어떤 얘기든 초기에는 신선함이 있지만, 듣기만 계속 하다 보면 그 말 자체가 매력이 없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천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거죠. 위기를 인식하고 참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느끼고 다짐했다면, 그 도달점, 즉 수행의 마지막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사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농업 위기를 얘기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젊은 농사꾼이 없습니다. 40대 미만이 3% 정도예요. 농사를 짓지 않고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하면 다른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생명운동의 진전된 모습과 그 과정은 기본적으로 먹을거리와 농업의 자급력을 어떻게 넓혔는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실천적 성과와 지표가 있다는 말이죠. 식량자급률이 지금 24퍼센트까지 떨어졌지 않습니까? 전 세계적으로도 야단이지 않습니까? 이른바 생명운동 진영에서 거기에 도달점을 두고 있는지, 이에 대한 자기 실천적 영역을 갖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초기에 한살림운동이 먹을거리와 농업을 통해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추구하고 만들어냈던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기후변화 시대의 먹을거리 문화, 농업 문제 등에 더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맹수 > 조금 전에 생명운동 주체들의 치열함이 부족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럼 30년 동안 생명운동이 실패했느냐,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네 시기로 생각해봤습니다. 1980년대는 생명운동의 태동기이자 계몽기로 원주보고서와 한선림선언을 발표하고 한살림농산을 만들고 공해추방운동을 했다면, 90년대에는 내부적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기본 토대를 만들려고 애써왔고, 2000년대는 여러 사회 이슈가 터지면서 생명운동의 필요성이나 의미가 고조되었던 시기라고 봅니다. 새만금, 핵 폐기장 문제, 최근 4대강, 광우병 소고기 문제라든지, 밖에서 여러 요청들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우리 생명운동의 대응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 30년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재도약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제3자가 볼 때 열심히 달려온 건 사실인데 바깥에서 오는 위기 현상들이 너무 심각하고 규모가 확대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부족과 한계를 절감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국 > 최근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지구상 대기 중 CO₂ 농도가 지구 위기 인내 한계치인 400ppm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명 위기의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협약과 정부 간 회의 등을 통해 CO₂ 감축을 위한 많은 노력과 논의들이 있었지만 하와이에 있는 연구소의 측정결과 지구 역사상 수백만 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인 400ppm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지난 5월 13일자 한 일간지 12면에 난 내용입니다. 중요도로 보면 1면에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이렇게 소홀히 취급되는 걸 보면, 위기 자체도 그렇지만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이 진짜 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충격적인 경고를 던졌던 것 중 하나가 2004년에 발표된 미국 펜타곤 리포트입니다. 대단한 정보력을 가진 미국 국방부가 현재 상태로 계속 가면 향후 20년 안에 데드라인을 넘는 기후변화로 인해서 지구가 파괴될 거라고 경고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상황을 보면 너무도 무관심합니다. 몸으로 비유한다면 이미 말기 암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는데 여전히 무관심, 무감각하다는 것이 정말 문제인 거죠.

 

 

“로컬리스트 공자와 생명운동”

 

박맹수 > 저도 그 기사를 보면서 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내용은 한쪽 구석에 작은 박스기사로 처리되고, 어찌 보면 가십에 지나지 않는 기사가 지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나 생각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배우고 습관화된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리하게 사는 건 결국 지구의 수많은 동물, 식물, 유기물, 무기물을 착취해서 얻은 대가인데, 이러한 착취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결국 우리 사람만이 생명이고 동물, 식물, 유기물, 광물 이런 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착각, 이원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것을 계속 교육시키고 몸에 익히도록 해온 지금까지의 가치관에서 우리가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일 중요한 문제는 생명을 바라보는 눈, 생명이라는 차원에서 자기 삶이라든지 전체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의 위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지구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상태로 가고 있다는 지구적 위기이고, 인류가 만든 문명 자체의 위기이고, 그로 인해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위기입니다. 이것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바라보는 눈, 생명의 세계관이겠죠.

 

생명운동을 시작했을 때 ‘생명문화’를 중요하게 설정했던 문제의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 역시 저 혼자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 농업을 지탱하는 사회문화 전체의 관계 속에서 풀리는 문제입니다. 농업이 생명의 가치를 상징하는 산업이라면, 사회 전반적으로 농업을 지지하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문제, 노동문제에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더불어서 진행되어야 하겠죠. 그 부분을 몇 차례 시도해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동운동과 생명운동이 함께 해보자는 시도도 있었고요. 그런데 잘 되지는 않았죠. 처음 문제의식을 가졌던 생명문화운동의 역량을 더욱 더 키워가는 것이 새로운 준비를 하는 지금 시기에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국 > 일반 기업에서 요즘 대중의 욕구를 창출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게 감성마케팅이라든지, 감동마케팅,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것도 문화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본성적으로 이런 요소를 갖고 있는 생명운동을 하는 우리가 그런 방법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감성과 감동 같은 건 실은 생태적 용어입니다. 돈과 관계없어요. 이야기가 있는 물품도 그런 거죠. 사실 한살림이 그것 가지고 시작한 거거든요. 도시에 사는 자식에게 보내듯이 고추 보내주고 고향 어머니 용돈 보내주듯이 고추 값 보내주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한살림에서의 직거래인 거죠. 그런 점에서 ‘유통단계를 줄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물품 하나도 어떤 마음으로 만든 거다’, ‘그래서 ‘기’가 다르다‘ 그런 것이 이른바 스토리텔링이죠.

 

가치와 사상을 전달하고 뭘 같이 해보자고 할 때는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과정들을 제대로 심화시키고 다양하게 찾는 데 있어서 우리가 자본보다 서투른 부분들이 많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국 삶의 총체를 문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기 때문에 행동하는, 자기 실천의 도달점에 대한 그리움, 다가가려고 하는 자기 노력, 고민하고 시도해보려는 열정, 항심(恒心)을 갖는 사람과 그룹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수행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고 여러 다양한 시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맹수 > 작년에 6개월 정도 동아시아 고전 공부를 하면서 공자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그의 생을 간단히 요약하면 전 인생이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왕따 당하고. 그래서 말년에 모든 꿈을 접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게 교육이었잖아요. 제자를 키우는 것, 말하자면 사상공동체인데 춘추전국시대의 생명운동 공동체가 공자 그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공자가 사실은 요즘 말로 하면 글로벌리스트가 아니고 자기 지역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로컬리스트였다는 거죠. 굉장히 상징적인 이야기인데, 생명운동의 바깥을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의 실체는 글로벌리즘이잖아요.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 신자유주의를 뚫고 문명과 지구, 생명의 앞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이 뭐냐, 바로 지역에서 그 지역에 뿌리내린 작은 생명 하나하나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30년 전에 원주에서 출발시켰던 생명운동이야말로 전 지구적 문명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21세기 새로운 희망의 싹이었죠. 그런 차원에서 우선 내부적으로 생명의 가치를 공유하고, 그를 통해서 보다 더 큰 실천, 그리고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내고, 사회적 반향과 사회적 변화로 이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협동조합을 넘어서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이상국 > 한살림 초기에 장일순 선생님이 많이 쓰셨던 말씀인데, 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우주 안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 작은 구조 하나가 전체 구조다’ 이런 말인데, 요즘 협동조합 얘기를 많이 하지만 사실 이 언어 안에는 협동, 즉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생태적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있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자기 생명처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다른 생명체와 나와의 관계, 진짜 사는 길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게 해주는 화두이기도 하면서, 그를 통해서 인간끼리 모여서 만드는 관계의 도달점까지가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을 넘어서는 이야기인 거죠. 밥상을 차리는 세 끼 만큼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실천적인 삶, 그게 밥상문화 아닙니까.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보편적 생활문화로 할 것인가. 지금 하고 있지 못한 건 왜 그런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이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욕심이 많고 완벽하려고 하다 보니까 잘하는 건 제쳐두고 아쉬운 것만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80년대 초에는 생명운동이란 말을 쓰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오늘 생명이라는 말이 대중화되었고, 더 이상 감동을 주는 시대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안에 콘텐츠가 들어 있어야 하고 실감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담겨야 하는데, 그런 데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내용과 형식도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와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고 있는가도 같이 고민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자기다운 모습으로 사는 게 생명의 본질에 가장 일치하는 운동인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오히려 과부하가 걸려서 지쳐가고, 그 모습이 바깥에 비친다면 운동이 힘을 얻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지쳤을까. 속도, 물량, 효율, 합리화를 강조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반생명적 부작용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경향들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침투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효율이라는 게 도대체 무언가. 효율과 생명 가치와는 어떤 관계인가. 양적 성장이 과연 생명과 합치되는 것인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유기농 ‘상품’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가 되살려져야

 

이상국 > 그동안 잘해온 것도 있다고 봅니다. 과거 다른 사회운동과 다르게 먹고사는 ‘밥’으로부터, 밥을 만드는 ‘농적(農的) 가치’로부터 생명운동을 펼치고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표현해낸 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전에도 유기농이 있었지만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 속에서 먹는 사람이 자기 생명의 문제로, 지속가능한 자기 생명의 생산조건을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있을 때 정말 유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농사 기술로써의 ‘유기농’을 넘어서 그 의미를 확장시키고, 환경농업육성법을 만들고 친환경농업과 같은 정부부처 제도의 토대를 닦은 것도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하 선생이 ‘시장의 성화’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돈 중심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관계가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살림 경우에 대체로 잘 실행되고 있는 것이 파종 전 가격예약제입니다. 이런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 거예요. 쌀의 경우에는 2년 전에 생산 소비 계획을 세우는 거잖아요. 이 급변하는 시대에 말이죠. 세계유기농운동 친구들로부터 “물질적 이해관계의 문제를 철학으로 풀어낸 좋은 롤 모델”이라는 평가도 들었습니다.

 

이게 실제로 분절적·물리적 세계관에서 온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 세계관으로의 전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동물도 우주적 보편적 진리에 맞게 일상의 첫 번째 출발점인 ‘밥’을 챙기는 일부터 시작해 협동의 원리에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의도적 의식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건 굉장히 중요한 성과라고 봅니다. 우리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곡물자급률이 24%에서 내리막길을 가고 있고 농가인구가 급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농업살림’의 화두를 붙들고 30년을 이어와서 틈새를 희망의 장으로 형상화시킨 것은 그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맹수 > 생명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설정하고 사회적 화두로 던져서 30년을 걸어온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고 사회적인 큰 공감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 공감과 지지 속에서 생명운동으로서의 한살림이 양적 성장을 한 것도 크게 평가하는데, 성장하다 보면 항상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습니다. 성장해가는 반면에 낡아가고 굳어져가는 부분이 있단 말이죠. 이게 바로 생명의 원리예요. 한쪽만 있는 건 생명이 아닙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있는 면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질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공감을 일으킬 만한 가치와 운동 슬로건,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성장은 어려운 거거든요. 그렇다면 앞으로 30년 후를 내다볼 때 질적인 면에서 성장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 관점에서 하달 구조가 아니라 상달 구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후천시대 가장 큰 특징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역이라는 거잖아요. 지역 하나하나가 우주를 담보해내는,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잖아요. 그 각각의 지역마다 참고할 수 있는 아이디어나 사례들이 공유되고, 활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색깔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그것이 하나의 화음과 조화를 이루는, 이게 생명의 실상이죠. 똑같은 색깔, 똑같은 가치관이 아니라, 저마다 색깔을 가지면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국 > 제 생각에는 상달이라기보다는 자기 지역,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생명 세계관에 대한 겸손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실천, 이른바 생명문화운동을 하고, 그러면서 같이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걸 상대방은 하고 있다면 벤치마킹이 되잖아요? 그렇게 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고 그렇게 됐을 때 도반이 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실천의 결과물에 대한 교류, 지혜의 배움과 나눔을 통해서 자기 자리에서 꽃을 피워서 다양한 향기가 퍼져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생명운동, 흙탕물에 들어가는 예언자가 되어야”

 

박맹수 > 동학에 그런 사례가 있더라고요. 해월 최시형 선생 시대인데, 동학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30년 동안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다가, 1890년대부터 급격히 커졌어요. 초기 동학을 전파하는 과정을 ‘처남포덕’이라고 하는데, 스승과 선배가 뒤에 들어오는 제자, 후배를 입도시키는 입도식이 있어요. 엄격한 절차를 다 거치죠. 그런데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마당에 다 모여라, 마당에 청수 떠놓고 같이 주문 한 번 외자, 이게 ‘마당포덕’이죠. 그때 나온 게 ‘편의장’(便義長)이라는 제도예요. 광역을 담당해서 돌아다니면서 사고 난 접, 포의 수습을 담당하고 현장 목소리를 듣는 역할이죠. 그 당시까진 아직 동학이 탄압을 받으니까 감옥에 잡혀간 동지들의 가족을 피신시키고 뒷바라지하고 문제가 생긴 곳에 가서 실정을 파악해서 수습하는 일들을 하더라고요. 21세기 새로운 편의장 제도의 부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역과 밀착해서, 동학의 ‘포’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서 생명운동 하는 분들과도 소통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면 아까 말씀드렸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새로운 30년을 준비하고 시작하면서 어떤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질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계속 생명운동을 동어반복으로 얘기하는 건 재미없을 것 같고, 일상적 수행 등 여러 방식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구체적 실천 조직, 사례, 지역을 만들어내는 일이죠. ‘여기를 봐라, 이렇게 사는 게 생명 가치대로 사는 거다’, ‘인간과 우주와 사회와 모든 만물을 한 몸으로 아는 생명의 세계관에 바탕한 삶이라는 게 나처럼, 우리처럼 사는 거다’ 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 모델, 사례를 만들어내고 돕는 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해요.

 

또 하나는 바깥으로, 같은 생명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끼리 일종의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드는 겁니다. 모습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죠. 협동조합 방식, 그물망 네트워크 방식으로 함께 생명 위기를 공유하고 돌파해내고자 하는 공동체운동을 만들어 내면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적극 제안하고 만들어갔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21세기 새로운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이건 농업 영역만으로는 어렵고요, 모두 연관된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이나 부분들과의 협조와 연대 속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게 지구적 위기를 돌파해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이라고 생각해요.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흙탕물에 빠진 친구한테 빠져나오라고 그래선 안 된다. 같이 뛰어들어서 여기가 더러우니까 같이 나가자고 해야 한다고 하셨죠. 진흙탕 바깥에서 제3자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한 위기의 현장, 농업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브나로드 운동을 하자는 겁니다.

 

두 번째로 예언자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너무나 당연하다 보니까 위기가 위기인 줄 모르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 정부, 전문가가 해결해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자기가 해결의 주체잖아요. 사회적 현안, 위기적 현상들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고 실천하는 그런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국 > 이런 고민도 해 봅니다. 신문에서는 뒷면이지만 1면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어떻게 많이 만들 것인가. 낙엽 지는 오동잎 하나에서 겨울이 오는 것을 느끼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감성과 안테나를 때 묻지 않게 유지하고, 시대 현상을 우리의 시대적 과제의 징표로 재해석해 내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안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절실하게 생각하고 삶의 문화로서 일상의 실천 행위를 해 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일을 동시에 잘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박맹수 > 더불어 세대 간 보이지 않는 격차를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생명의 본성 중 하나는 세대 계승입니다. 종자를 만들며 세대를 계승해가는 게 생명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데, 생명운동을 하는 주체 역시 하나의 생명체로서 다음 세대를 담당할 새 세대를 어떻게 키워내고 육성할까, 또는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어떻게 조성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내적, 영적으로 생명가치를 몸소 체험하고 체득하고 그걸 다른 사람한테 확산해줄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노력, 자기성장의 기회와 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미루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천문과 인문이 하나 되는 길”

 

이상국 >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걸 해서 기분이 좋고 존재의 의미를 느낄 때, 그리고 그 바람과 꿈이 절실할 때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세계관이 중요한데, 현상적 감각으로 생명 세계관을 각성하는 데 있어 천문상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우주심(宇宙心)을 갖자는 이야기거든요. 왜냐하면 우리가 별이란 존재에서 출발했고, 단세포 화석으로 확인되고 있는 36억 년 전 공동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분화되어 흘러왔단 거죠. 우리 안의 DNA는 한 조상으로부터 출발해서 개체에 따라서 덧붙여 온 것이라고 한다면, 우주의 존재 원리인 보편성, 평등성, 무위성, 이완성,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이란 동물이 모든 뭇 생명과 사이좋게 지내는 공통분모라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별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화엄경>에도 우주 공간에서 별이 형성되는 건 먼지 때문이라는 내용이 나와요. 양극을 갖고 있는 작은 먼지에서 수소를 결합시켜 내고 융합 속에서 별이 되는 거거든요. 그 별 중의 하나에서 인간이란 동물이 나오는 과정, 우주의 기원과 은하계가 존재하는 원리를 우리 인간의 눈으로 표현한 것이 천문상식인데, 요즘은 사회적 언어로도 익숙하잖아요. 인디언들은 결혼 축사 같은 데서도 ‘오래된 먼 조상으로서 하늘의 별’이라는 말을 씁니다. 먼 조상인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자기 본성을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다른 얘기가 아니라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이 자체, 그러한 관계처럼 살자는 거잖아요, 우리 인간 생활 속에서.

 

박맹수 > 천문상식 얘기가 좀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만물을 세 가지로 대변한다면 천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지인의 하모니, 조화를 이룬 상태가 영성이고, 다른 말로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100년, 200년 전 조상들은 그걸 이상으로 했더라고요. 천지인과 내가 조화를 이루는 것.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중찰인사(中察人事)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하면’ 자기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게 쭉 이어져오다 근대화되고 산업화되면서 잃어버렸는데, 그걸 다시 회복하는 것도 생명운동, 생명가치와 연관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흥미롭게도 동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해월 선생이 별에 대한 제사를 많이 지냈어요. 구성제(九星祭)라고 하죠. 천문과 관련된 이해와 체득은 실은 전통 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게 이루어지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만물과 소통하고 만물을 하늘로 모시는 게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이상국 >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마지막에 나오는 얘기인데, “조용하게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언제나 새롭고 고조되는 감탄과 숭엄한 감정으로 마음을 채우는 게 두 개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 천문과 인문은 구분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윤리는 하늘의 법이며 천륜의 도리임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면 하늘의 별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조화의 섭리를 알아야 우리 인간들은 우주의 섭리에 따라 진화해갈 수 있다. 우주는 나이지만 나는 우주가 아니다. …” 그런데 인간사에서는 내가 현실적으로 굴절된 나를 가지고 하늘을 재단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천문과 인문의 하나 됨, 이것이 생명운동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스트 터닝과 새로운 문명운동

 

박맹수 > 지금 전 문명적 생명 위기 현상 속에서 세계적으로 두드러진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동’(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서구 학자들은 ‘이스트 터닝(east turning)’이라고 했어요. 여러 매스컴과 자료를 통해 ‘서양은 공포만 있고 동양은 희망만 있다’라는 얘기들이 나옵니다. 지리적 의미만은 아니지만, 그 동풍의 가장 주목되는 지리적 공간이 동아시아입니다. 왜 동아시아를 주목하는가. 동아시아가 갖는 고대 전통과 문화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도 그게 가장 생명 가치에 가까웠던 문화죠. 그것의 부활이 가능하다면 인류 문명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동아시아 문화의 핵심 전통이 천문과 인문과 지문의 조화 통일을 추구해 왔다는 거예요. 그게 쭉 19세기까지 내려왔어요. 우리가 잘 아는 퇴계, 율곡, 정다산, 최근에 새롭게 주목받는 실학 사상가들. 이런 분들이 우주심의 회복을 자기 학문의 최고 이상으로 했다는 거예요. 한국의 실학을 실심실학이라고 하는데, 그 실심이 우주심입니다. 이게 동아시아 전통으로 뿌리 깊게 보존되어 왔는데, 최근에 잠시 망각하고 상실했다. 이걸 회복하면 그 속에서 오래된 새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 아닌가 합니다.

 

당부하고 싶은 건 지금의 위기는 남의 위기가 아니고 비유하자면 지금 내 머리에 불이 붙은 만큼 절박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너무도 오래되고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이죠. 그래서 긴 호흡이 필요하다. 빨리 서둘러서 이것을 돌파하려면 반드시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당장 눈앞의 변화에 급급하지 말고 길게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의 도덕률처럼 공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감히 용기를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일시적으로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지만 목적과 동기와 지향성이 올바른 것은 반드시 되살아나고 부활하고 사람들이 지지해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30년 전에 표방했던 생명운동이야말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향해 온 운동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생명 가치에 공감하는 분들도 굉장히 늘어나고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동료와 도반들도 많아졌잖아요. 그런 점에서 확신을 가지고 ‘함께 가자, 이 길을’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1) 원주보고서는 1982년 원주에서 공개된 운동팜플렛의 별칭으로 원래의 제목은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김지하 시인 등 이른바 원주캠프가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한계를 적시하며 생명과 협동을 열쇠말로 하는 사회운동의 전환을 천명했다. 생명운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역사적인 문서이다.

 

2)  「한살림선언」은 도농직거래 생산-소비 협동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된 한살림운동의 지평을 정신문화운동과 사회실천운동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자는 뜻으로 1989년에 발표된 철학적, 사회운동적 선언문이다. 생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할 것을 제안한다. 장일순 선생, 김지하 시인, 박재일 회장, 최혜성 선생 등이 함께 내용을 협의했고 최혜성 선생이 대표로 집필하였다.

 

 

댓글[0]

열기 닫기

사단법인 모심과살림연구소 대표자 : 황도근 사업자 등록번호 : 201-82-08260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운로 19 (서초월드오피스텔) 3층 (06732) 전화번호 : 02-6931-3604 팩스 : 02-6715-0818 이메일 : mosim@hansalim.or.kr

  • 전체 : 378975
  • 오늘 : 14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