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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인간과 문명, 그리고…
2016-06-14 11:11: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인간과 문명, 그리고…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남곡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

 

오늘의 세계는 지구적, 인류적 범위에서 미증유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제 세계자본주의는 그 비인간적인 양극화의 모순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그나마 지속가능한 체제인지에 대한 본질적 의문 앞에 점점 더 직면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전쟁에의 끌림은 그 가공할 파괴력(핵무기와 운반수단) 때문에, 그리고 생태계와 지구환경의 파멸적 악화 역시 지극히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제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고귀한 품성과 능력을 지닌 인류라는 종(種)은 자신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한 채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위기를 강조하거나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현실을 실사구시하여 인류가 그토록 염원해 온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실사구시는 인류 역사에 대한 대긍정을 바탕으로 현대 세계의 모순과 그 해결 방법을 탐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대긍정이란 인류의 자유를 위한 대장정을 그 숱한 모순과 실패의 경험까지를 포함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비현실적인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내용으로 하는 문명전환기에 서 있다. 대증적, 국부적 해결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통섭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구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제반 사회적 모순들도, 예를 들면 민족 문제나 계급 문제 같은 것도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망 속에서 올바른 해결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모순이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문명이 싹틀 수 있는 소지가 역설적으로 크다고 본다. 요즘 협동조합이나 마을운동이 큰 바람으로 일어나는 것을 일시적 현상이나 거품으로 보지 않고, 또 그렇게 흘러가게 만들지 않고, 문명전환을 위한 하나의 표징으로 보고 또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은 비단 필자만의 희망이 아니라고 본다.

 

이를 위해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평소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모순의 다층 구조와 중심모순의 변화

- 중심모순의 변화가 세계 진화의 과정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인간은 높은 자유 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다. 이 두 가지의 결합과 모순이 역사를 움직여 온 동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인류가 처음 당면해야 했던 자유의 과제는 자연과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불과 도구의 사용에서부터 시작된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 즉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이 모순의 해결 방법이었다.

 

그 점에서 인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마침내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인류적 범위에서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이 사실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물신(物神)의 지배, 생태계의 파괴, 심각한 양극화, 가공할 무기(武器)체계 등 새로운 모순들에 가려져 빛이 흐려졌다.

이러한 생산력은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자유 욕구와 맞물린 자본주의에 의해 달성되었는데, 점차 중심모순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을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모순을 야기했다고 해서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그 주된 원인으로 보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고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자유욕구는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제도를 변혁하기 위한 부문, 즉 신분적·계급적·민족적(국가간)·가부장제적(성적 차별포함) 모순을 해결하는 데서 특히 근대 이후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을 세계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근대의 주도 세력이 된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적 이상을 목표로 한 노동계급-실제로는 사회주의자(공산주의 포함)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전자는 정치적 민주주의(자유)에, 후자는 경제적 민주주의(평등)에 주력하였다. 부르주아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회주의는 실패하였다(물론 자본주의에 큰 변화를 준 것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실패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특히 부르주아가 주도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한때 사회주의 등 소위 진보 세력에게 ‘위장된 부르주아 독재’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은 인류가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는 데서 달성한 큰 성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한 수준으로 민주주의가 제도화했음에도 한편으로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회로 변하고 있어서 진정으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원인을 근원에서 살펴보면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과 사실은 그 뿌리에 있어 동질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의식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 이후 이루어낸 높은 과학기술과 생산력,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세계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그 존속 자체가 위협 받을 정도의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을 야기한 현대의 중심모순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그다지 변치 않은 자기중심적 가치체계 사이의 모순’이라는 저명한 물리학자 장회익 선생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것은 근대적 모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자유를 획득했음에도 성격이 다른 모순들을 잉태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동해 왔다. 그렇다고 과거에 달성한 성과들이 ‘없었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기중심성’을 당연한 속성으로 갖는다. 그런데 왜 인간만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갖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는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인간의 지적능력에 속하지만, 자신의 내면의식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구별되는 외부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말함) 때문에,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그대로 유지하면 핵전쟁, 생태계 교란, 극심한 양극화 등에 의해 마치 ‘암세포’처럼 결국 세계와 자신을 파멸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의 높은 자유 욕구가 그것(자기중심성의 지양(止揚))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물질계로부터 생존의 자유를 얻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인간의 자유 욕구는 그치지 않는다. 결국 관념계의 자유로까지 나아간다. 관념계 안에 갇혀 있는 자아를 해방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선다고 하면 마치 자아를 부정당하는 듯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 오해다. 자아를 부정하고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확장하는 것이다. 아집(我執)에 갇혀 있는 자아를 해방하는 것이다. 아집의 집(執)이야말로 자아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이 두 가지가 혼재한다. 나는 후자가 본질적이며, 전자는 그 본질을 더 잘 나타나게 하는 조건이나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자유와 행복을 위해, 즉 우주생명계와의 진정한 합일을 위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다(이것이 바뀌면 ‘새로운 독재’, 예컨대 생태독재나 전체주의로의 회귀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일찍이 인류의 선구자들은 이것을 자각하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보통 인간의 보편적 욕구로 되기 위해서는 2500년의 세월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존을 위한 물질계로부터의 자유와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사회적 자유는 관념계의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인류사를 자유 확대의 역사로 보는 이유이다. 즉 중심모순의 변화가 어쩌면 인류의 진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위기와 함께….

 

 

토대와 상부구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꿈꾸고 그를 위해 세상을 변혁하려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이른바 과학적 세계관이었다. 확실히 일면적인 진실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고정불변한 진리로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공자에게서 그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상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2500여 년의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는 ‘보편적 의식’이 있고, 그것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산양식이라는 토대를 바꾸면 의식과 문화를 비롯한 상부구조가 바뀌리라는 전망(물론 마르크스도 그 역방향의 영향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성급한 사람들이나 권력지향적인 사람들, 또 집단은 이런 전망을 강하게 믿고 싶어했다)은 20세기 세계적 범위의 실험을 통해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적 소유를 폐기해도, 이윤 동기를 대체하는 의식이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주의 초기의 높은 생산성은 ‘일시적 혁명적 열기’에 의한 것이었을 뿐 사회주의를 운영할 새로운 인간을 보편적으로 탄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은 자본주의 태내에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갈 물적 토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식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부 이상주의자들에 의한 근대의 공동체 실험들도 그 실패들을 통해 무엇이 토대인지에 대한 견해들을 검토하게 한다. 그렇다고 의식과 문화가 시스템이나 제도보다 더 우선한다고 단정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 그 사회의 발전 수준이나 지향하는 세상의 성격에 따라 어느 것에 상대적으로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옳은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근래 ‘꿈(?)을 잃은 진보주의자’들을 보면서, 고정된 사고가 가져오는 폐단을 실감할 때가 많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제도를 만들려면 ‘자기중심성을 넘어 확장된 자아로 진화한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시대의 요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다른 동물과 달리 고도로 관념화되어 더욱 강화된다. 그것이 ‘소유관념’과 ‘아집관념’이다.

 

이제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이런 관념들이 우주 자연의 리(理)와 맞지 않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고 있다. 이런 관념이 모든 갈등과 대립의 근원임을, 부자유의 원천임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집관념과 소유관념에서 벗어나 일체(一體)를 자각한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부르고, 이런 사람들에 의한 혁명을 지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고 있다. 그동안 혁명이라고 불렸던 것은 사실 진정한 혁명을 위한 예고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혁명들도 대긍정되는 것이다. 폭력혁명이나 계급혁명 등은 낡은 것이며, 따라서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나 계급, 민중, 국가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먼저 전술(前述)한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이 운동을 나는 ‘인문운동’이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기쁘게 하고 있다.

 

 

남북(南北) 그리고 민족, 국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민족주의’는 나에게는 진보, 정의 그리고 꿈의 출발점이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소민족의 비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해방마저 2차대전의 결과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이어지고, 동서냉전이 끝내 동족상잔으로까지 연결된 비참한 현실 앞에서,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국가 건설 과정 등이 피 끓는 많은 청년들을 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나로써는 집단적 자주가 집단 구성원의 자유의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자주적인 강성한 통일민족국가의 꿈, 비통한 약소국의 지정학적 서러움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이 땅에 출현해 대륙과 해양으로 뻗어나가는 지정학적 위치의 혁명적 역발상 등이 젊은 청년의 심장을 뛰게 했었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렀다. 어떤 꿈(새로운 문명의 창조)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어떤 꿈들은 현실성을 상실하였거나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 되었다.

 

이제 ‘단일혈통의 민족국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화’와 ‘지방화’, 그에 따른 ‘국민국가의 쇠퇴’가 세계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현실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국가의 위상이 달라졌다.

물론 주변 강대국의 국가주의가 여전한 것도, 힘이 지배하는 국제질서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행태, 한중일 간 영토분쟁, 중국의 동북공정 등 열거하려면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칼리제이션’(세계화와 지방화의 합성어)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 진화의 추세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류의 이상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분단 후 70여 년, 정전(停戰) 후 60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 민족, 국가의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을 주소만 입력하면 그 집 앞까지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의 위력(?)에 지금도 경탄한다. 지난 전쟁 때 미국의 엄청난 폭격을 경험한 북한이 최첨단의 유도무기와 가공할 화력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에 대해, 그래서 사활을 건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다만 이른바 미제(美帝)의 침략에 대한 공포나 자주에 대한 열망이 지금과 같은 사회주의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군국(軍國)왕조(王朝)국가를 건설하게 했을까에 대해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실사구시해 보고 싶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강력한 우방을 가진 북한이 왜 ‘자주’라는 방패를 들고 고립된 군국왕조를 선택해야 했을까? 과연그런 선택은 외부 조건이 주원인이었던, 자주를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이제 시대는 많이 변했다. 민주화되고 인민의 복지가 잘 실현된 사회주의 조선을 침략할 나라는 없다. 핵무기가 없고, 재래식 무기마저 감축하더라도 그런 평화애호국가를 침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집단(민족이나 국가)의 자주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구성원의 자유를 전제로 할 때 정당성을 갖는다.

청년 시절 남북을 바라보던 나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북한의 모습은 너무나 안타깝다. 북한이 진정으로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한다면 ‘강성대국’을 국가 정체성으로 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북한 지도부가 ‘강성대국’, ‘선군주의’ 같은 것으로부터 ‘밝고 따뜻한 아름다운 사회주의국가’로 국가정체성을 바꿀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제 어설프게 남북문제를 ‘민족 내부 문제’로 보려고 한다거나 상대를 통일의 대상으로 보려는 태도, ‘통일지상주의’ 같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안전을 국제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정전협정은 당연히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남북관계는 민족 내부 문제가 아니라 선린(善隣)국가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화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민주화된 사회주의 조선이 지구상에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같은 말을 하고 또 오랜 역사를 공유한 남북은 통일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글로칼리제이션(세계화와 지방화가 결합된)의 세계 조류에 맞게, 어떤 점에서는 세계 연방의 새로운 모델로 우뚝 설 수도 있을 것이다.

 

 

협동운동의 시대적 위상, 그리고 현실적 테마들

 

요즘 우리 사회에 마을운동, 협동조합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오랫동안 협동운동을 생각해 온 필자에게는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내적 준비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시적 거품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력이나마 도울 일을 찾고 있다.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여러 동기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 사회가 문명전환기에 반응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남과 북의 상이한 경제시스템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존경하는 벗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그 현실적 테마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

 

 

K형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제 이곳 산골도 봄이 완연합니다. 장독대에 반짝이는 봄햇살 하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곧 터질 것 같은 새잎들, 농사 준비하는 농부들의 바빠진 움직임들이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평생을 농촌과 협동을 위해 살아오신 K형께서 지난 편지에 쓰셨듯 요즘처럼 협동조합 바람(?)이 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감탄만 할 수 없는 형의 심경에 저도 동감합니다.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내부 역량과 때맞추어 어미닭의 쪼아줌이라는 외부 조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확실히 지금은 줄()보다는 탁(啄)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을 해오신 분들은 이것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부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는 바람이 혹시 일시적인 거품으로 끝나, 오히려 진정한 협동조합의 발전에 장애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자활이나 사회적기업과 같이 관이 지원하는 ‘협동조합과는 무관한 이상한 형태’로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줄()과 탁(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지금 협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 단체, 정부관료, 지방자치단체들이 많이 견학을 가는 유럽 등 협동조합 선진국들은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전된 시스템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문화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외형적인 시스템이나 규약, 원칙 등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의식, 문화, 생활 등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머리로 이해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이 눈에 보이는 부분을 있게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역사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상당히 우수하고 정교한 시스템인 두레나 계(契)와 같은 민중에 의한 자발적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협동을 잘하지 못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결국 나라를 군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로 강점당했던 역사와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좌우대립이 지배하면서 이런 전통들이 발전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단절의 역사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 가까우니까요. 그것을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DNA 속에서 꺼내 현재에 살린다는 것이 결코 녹록한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원래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에는 안 맞아’ 하는 부정적이고 비관적 관념이 근거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국내외 정세, 특히 남북관계를 보면서 그 질기게 변치 않는 대립적 사고의 완고함에 많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요즘의 협동조합 바람을 (북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쪽에서만이라도 그 완고한 사고방식들이 근저(根底)에서 변화하는 신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간의 완고하고 교조적인 이념대립은 모든 창조성들이 싹을 트지 못하게 한 주된 원인의 하나였지요. 협동조합을 보더라도, 이익에 눈먼 사람들이나 문화 속에서는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되어버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량주의, 즉 근본적인 변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노정되는 지금, 양극화, 저성장, 고용 없는 성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양심적인 우파에게도 협동조합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주듯 제도를 변혁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반대만 할 뿐 결국은 낡은 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합리적인 좌파들에게도 협동조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저는 좌우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적당한 말도 없고, 지금도 그런 말로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위해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있어서 이 말을 쓰고 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대단한 정치적 이슈는 아니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우리의 경직된 사고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정한 좌우 소통과 창조의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의 편지에서 얼핏 스치듯 말씀하신 가운데, 협동조합운동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의 기미가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관점이 다른 면은 있겠지요. 또 하루아침에 생각의 틀이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요. 또 지금의 협동조합 바람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밝은 것만도 아니고요. 또 협동조합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해결책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요.

다만 우파에게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격을 높이는 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좌파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성되고 여러 가지 현실적 시스템들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데서 저는 대립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좌우가 협력할 수 있다면, 비록 전체적으로는 미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대단히 뜻 깊은 창조의 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단 벌어져 있는 줄()과 탁(啄)의 갭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좋아진 외부 여건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빨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체 빠른 국민이니까요.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것, 즉 협동조합의 원칙과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빨리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하거나 왜곡되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겠지요. 그 과정에서 좋은 모델들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가 실패하더라도 제대로 된 하나의 모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넓어져 가는 것이지요.

 

저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소라도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안 보이는 영역, 그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힘을 보탤까 합니다. 협동운동과 인문운동의 접합점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은 ‘협동조합을 위한 맞춤형 인문(연찬)프로그램’입니다.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다듬어가면서 협동조합 안에 내장(內藏)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나이가 만만치 않지만, 특히 저보다 연상이신 형께서 아직도 정열이 젊은이 못지않은 것을 뵈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노욕(老慾)으로 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는 있습니다.

무필(毋必)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꿈결 같이 지나는 인생이라지만, 이 기적같이 만나는 순간들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늘 건강하소서!

 

2013. 3. 12

 

南谷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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