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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생명운동의 전승과 새로운 주체
2016-06-14 11:40: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생명운동의 전승과 새로운 주체

 

김단 (해남 미세마을)

 

 

원주보고서를 기억하며

 

내가 배운 ‘생명’은 ‘고립’이다. 외부세계로부터의 철저한 고립. 내가 믿고 신뢰하던 ‘나’ 스스로부터의 배반. 그리고 자각. 저 깊은 심연에서 실낱같은 빛을 찾아 끊임없이 내 존재를 되새김질하며 ‘너’와 관계를 맺어가는 행위. 그것을 나는 ‘생명운동’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생명운동이 1980년부터 혹은 86년 민주화 운동의 끝자락에서 태동된 운동이 아니라, 혼돈과 질서 속에서 불현듯 진화해 가던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처음으로 허공에 뱉어낸 저 옛날. 그때부터 줄곧, 그리고 밤과 낮의 전쟁이 끝날 그때까지 멈추지 않을 자기 성찰적 관계 맺음 ‘운동’이라고 알고 있다.

 

원주보고서1)에서는 생명운동을 ‘어떤 것, 어떤 사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모든 사람 속에 활동하는 반생명적 경향을 반대하고 모든 것, 모든 사람 속에 숨은 채 드러나는 생명의 씨앗을 현실적으로 꽃피우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30년, 인류가 맞이한 최대의 위기 혹은 문명의 전환기에 살아간다는 우리가 고작 한 세대의 쳇기가 가시지도 않을 30년이란 시간 만에 ‘전승’과 ‘세대교체’를 입에 담는 것은 생명운동의 지난한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성급’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 시대가 ‘청년’을 운운하고 있고, 사회운동 내부에서 운동을 전승할 ‘후배’들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원주보고서 이후 지난 30년간 노력해 온 생명운동 진영 ‘선배’들의 손짓에 나는 그만 얼치기 세대교체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나의 마음은 심연 속의 혼란기를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생명운동의 설익은 동행자로서 생명운동의 ‘후배’가 되는 것을 조심스레 맞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불어 ‘생명’에 대한 물음을 놓지 않고 살아가려는 나약한 한 인간의 고독감으로, ‘나’와 ‘너’의 뜨거운 연대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생명운동의 전승과 세대교체, 새로운 주체’라는 주제에 정성을 다해 응답을 해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작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선배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불완전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환을 준비하며 나아가기 위한 우리 삶의 본질적 물음은 원주보고서에서도 직시했듯이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중요한 문제는 끝없이 지속 변화하며 자신을 확장시키는 이 생명을 어떻게 볼 것이냐’이다. 원주보고서의 물음을 화두로 나는 생명운동의 전승 과정이라고 보이는 새로운 세대들의 몇 가지 활동과 현상을 ‘새로운 주체’, ‘상상력’, ‘시간’, ‘불완전한 실험’들이라는 몇 가지 물음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생명운동을 전승할 새로운 주체는 있는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선배’라는 단어의 대상자들은 지난 한국 사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어느 정도 뚜렷해 보인다. 민주화운동과 이념 중심의 고전적 운동의 끝자락에서 밀려온 허탈감. 상황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맞이한 불편한 민주주의는 자기 성찰과 극복 의지로 승화되었고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내재되어 있던 모순들, 빈곤, 평화, 여성, 인권, 환경, 생활협동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안 중심의 조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30년은 소위 386세대로 일컬어지는 선배들이 각자의 조직을 성실히 만들어 왔고 그들이 끌어냈던 구체적인 문제 제기와 정책적 대안들이 사회 곳곳에서 내실 있는 열매를 맺어 왔던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선배들은 왜 ‘우리의 운동을 전승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자기 성찰에서부터 시작한 생명운동의 원형적 자각에 기초한 조직화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성찰보다는 조직의 형태를 강화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계몽적 운동의 관성을 되풀이했다. 또한 조직에 대한 책임감. 효율적 조직 운영을 위한 기업적 책상 배치. 고전적 운동판에서 습성화된 투쟁의 관성. 나이가 들수록 좁아지는 자유의 길. 포기할 수 없는 운동의 성취들과 순수한 열정의 대가로 자연 발생한 권위와 존경들이 범벅되어 활동가 선배들만의 단단한 조직 형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지금 사회운동 조직, 생명운동 조직들은 단언컨대 그들만의(선배들만의) 무쇠 그릇이다. 무쇠 그릇이 무슨 문제인가? 튼튼한 그릇 안에 찰진 밥(이념적 정교함)이 담겨 있음에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있으랴? 다시 한 번 묻자. 그런데 왜? 그들은 세대교체가 일어나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는가? 바로 그 불안한 마음이 훌륭한 조직. 무쇠 그릇들의 진영 논리 속에 숨은 생명의 보물 혹은 반생명의 어둠이다.

 

얼마 전 생명운동의 대표적 조직이라 볼 수 있는 한 단체의 연(年)단위 교육 프로그램을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생명담론과 철학, 조직 강화를 위한 실무 교육, 다양한 연수 프로그램들은 어린 실무자와 후배 활동가들을 위해 꽤나 알차게 짜여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고, 안정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연봉과 의지만 있다면 가치 실현을 위해 평생을 투신할 수 있을 좋은 조건이 갖추어진 조직에서조차 ‘세대 교체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는 단단한 형태의 조직은 있고 부드러운 손 맞잡을 친구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 온 조직은 생명운동을 범주화하고 조직의 계승을 강요한다. ‘선배’들은 동료이기보다는 멘토 혹은 길잡이임을 자처하며 세대교체의 대상이라 생각되는 ‘후배’들에게 교육적·계몽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생명운동의 주체인 선배 활동가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조직은 이제 내용의 질이 아닌 형태2)가 문제인 것이다. 선배들은 그들 스스로의 넉넉한 성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명의 전환과 여전한 위기감을 조직의 유지와 강화로 등치화시켰을 뿐 그들 스스로의 수확물을 갈무리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밤의 세계에 할 일이 남아 있다며 너희 후배들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그릇을 갈고 닦아 빛내야 한다고 기도한다. 그러나 선배들의 기도는 유통기한이 임박했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조직에 투신할 후배들은 이제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운동을 전승할 새로운 주체들은 대체 어디 있을까? 이 글을 읽을 선배들에게 미안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로운 주체는 없다. 단지 온전하지 못한 생명운동의 일부인 듯 보이는 현상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발적 개인들이 모인 잠깐의 집단이에요.” 두물머리 유기농지 보존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의 이와 같은 자기소개처럼 새로운 세대3)들은 생명운동의 현상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마치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끊임없이 파동을 만들어내지만 결코 하나의 원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이들은 기존 사회운동과 생명운동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습관적으로 굳어지는 원의 각질을 경계하며 언제든 철저한 고립 속으로, 자기 성찰의 침묵 속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왜일까? 생명운동을 규정하고 범주화 할수록 그 형태 속의 우리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태어나 그 체제 속에 익숙해진 습성들을 품고 살아야 하는 불완전한 개인들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생명운동은 확신과 신념에 가득찬 활동가들이 모여 만드는 운동일 수 없다. 불완전한 개인들이 모여 자신의 몸과 마음 중 전환이 가능한 부분부터 조금씩 참여하고 응집하는 운동의 현상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정서적 연대와 상상력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들은 어떤 방식으로 생명 운동에 참여하고 있을까?

2012년 7월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던 유기농 집회4)는 새만금에서 시작되었던 삼보일배 이후 가장 충격적인 집회 방식이었다. “집회는 유기농지의 아픔을 상징하는 밭 전(田)자 모양의 다이인(die-in: 죽음·아픔등을 상징하며 상징물과 함께 죽은 듯이 누워있는 퍼포먼스)과 함께 시작됐다. 이어서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만들어온 ‘공사 말고 농사’ 노래에 맞추어 분필모내기(실제 모내기에 사용했던 못줄에 맞추어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모를 그려서 심어나가는 퍼포먼스)를 하고, 한쪽에서는 그 노래에 몇몇 친구들이 만들어온 낫-호미-괭이 춤을 추었다.” 이들의 집회는 삼보일배의 생명운동적 관점을 오롯이 담고 있으면서도 선배들의 경건함을 춤과 유쾌함으로 대체해 낸 새로운 세대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한 집회 방식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요 속에서 모순되게도 ‘상상력’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보석을 발견해 낸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이여, 다 그만두고 우선 밥부터 같이 먹자’5)는 김이경의 말에서 이 유쾌한 상상력의 발현 과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은 현대 문명의 대량 정보 속에서 자신들과 교감할 수 있는 언어와 동료를 찾아내는 정서적 촉수를 얻었다. 이들은 치열하기보다는 유쾌한 삶을 향유하기 위해, 혈연의 가족을 해체하고 그 속에서 기어나와 촉수를 뻗는다. 이들이 찾아 이동하는 것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 혈연, 지연, 학연에서 탈주하여 충만한 에너지의 교감과 비언어적 공감이 가능한 또 다른 가족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의해 무너져버리기 이전의 가족공동체가 그러했듯이 이들의 대화와 창조적 발상은 새로운 가족과의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진다.

2010년을 전후로 빈집, 만행, 랄랄라, 에코토피아, 에오라, 대안교육 1세대들과 탈학교 친구들의 무수한 실험들이 한국 사회의 구석진 틈새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6) 이 실험들의 특징은 자발성에 기초한 공감 기획과 유희, 역동하는 에너지의 정서적 연대이다. 그리고 ‘생기발랄 불복종 저항의 모든 것’7) 두물머리 유기농지 보존 투쟁은 새로운 세대가 이 사회에 드러낸 작은 외침들 중 일부이다.

 

로맨스조: 모여서 저항하자! 이러면 부담감 때문에 가지 못했을 텐데, 두물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그런 정치적인 싸움의 차원이라기보단 삶의 차원에서 프로젝트들이 만들어지고 발신되는 부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었던 여러 가지 생태적인 삶의 실험이 열린다기에 놀러갔다가, 자연스레 4대강과 두물머리 유기농지의 문제도 접하고 얘기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자기 이야기, 자기 삶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노래도 만들어진다. 만약에 ‘지금 여기 농부들이 싸우고 있는데, 가서 저항의 노래를 만들자!’ 이렇게 하면 사실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근데 노래를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얘기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노래가 터져나왔다.

- 두물머리 투쟁의 정서, 저항의 스타일 중

 

이 조직화되지 않는 정서적 연대 속 개인들의 특성은 철저한 자기 만족 혹은 자신에게 필요한 삶의 전환 지점들을 찾기 위해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로맨스조가 이야기하듯 정치적인 문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회적 문제들과 그에 대항하는 운동은 개인의 성찰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의 연대 속에 만들어지는 부가적 요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두물머리에서 만들어 냈던 운동의 방식들은 우연의 연속 속에서 신선한 자극과 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관계와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며 강정에서 콜트콜텍에서 쌍용에서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운동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회운동의 변방에서 만들어 내는 이들의 움직임은 상상력을 기초로 한 유희와 유목적 공동체. 틈만 나면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회귀의 본성을 토대로 함께 짓고 나누는 밥상 놀이에서부터 시작되는 생명운동의 형태적 전환 실험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대들의 상상력은 놀이로 실체화되고 놀이는 운동과 결합하여 형태의 전환을 만든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들의 놀이는 창조적 에너지, 곧 살림이다. 그러나 또한 이들의 상상력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획하지 않는 축제, 자발적 투쟁, 유목적 공동체 실험 이후의 일상과 생존을 위한 정착, 관계 맺음 실험 속에서 나타나는 마찰음과 갈등이 바로 그것. 이들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들은 아직 생명운동의 변방에서 유목적 공동체의 형태로 놓여 있지만, 이제 놀이가 중심이 되는 일상의 운동, 생존의 확장을 위한 지역 정착 운동으로 그 촉수를 뻗어 가고 있다. 이들의 사회적 이동은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미래세대 소외와 무지한 국가 정책에 의한 심각한 청년 실업, 전 세계적 금융 위기, 후쿠시마 사고와 같은 문명적 위기감들에 편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상상력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 낸 양가적 속성을 지닌 채 오디션 프로그램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등 생명운동의 형태적 전환을 어렵게 하는 변수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이들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정서적 연대감들의 ‘지속가능함’에 대한 환상이다. 새로운 세대들이 실험하고 있는 자발성과 상상력에 기초한 운동의 형태 전환 실험들은 이들에게 역동적 에너지와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했지만 한편으로 생명 현상의 시간의 영속성 안에서 긴 호흡에 대한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들의 환상은 생명운동 선배들이 가지고 있는 문명의 위기에 대한 시간적 압박감과 유사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일본에는 ‘7 generation walk’라는 걷기 운동이 있다. 그들의 운동은 일곱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운동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운동은 여전히 급박하다. 생명평화결사의 지난 7년간의 탁발 순례 이후 도법스님이 100년 순례와 같은 생명운동 방식을 제안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생명운동의 현재이다. 마음이 바쁜 것이다. 새로운 세대들의 신선한 시도들 또한 일상 속에서 불완전한 개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시간을 무시한다면 생명 현상의 역동성에 모순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식물이 지금 꽃을 피워냈는가 잎사귀를 피워냈는가를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상 기후로 인해 계절을 놓치고 이른 시간에 꽃을 피워낸 벚나무가 시린 겨울에 좌절을 맞이하듯 새로운 세대들이 맞이해야 할 희망의 이른 출수는 허무를 낳는다. 지금은 단지 희망과 허무 사이의 어느 지점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조적 생명들이 갖는 일상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 혼란기의 계절을 맞고 있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파생될 마찰음과 갈등들이 충분조건으로 활용되고 그 마찰음은 조직 대 조직이 아닌 나와 타자 사이의 성찰적 모심의 길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생명운동의 불완전한 실험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지난한 생명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세대교체란 성급한 바람이다. 다만 지난 30년간 세대를 뛰어넘어 사회 곳곳에서 만들어 왔던 생명운동의 빛나는 성과를 토대로 그 진화는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뿐이다. 이 과도기적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새로운 주체’란 혼란스럽고 반복되는 한계들 속에서 희망의 열매를 감각적으로 맺을 수 있는 이들, 결국 다시 새로운 세대들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주체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실험이 필요하다. 지난 30년이 생명운동에 있어 의식적 변화를 이루기 위한 이성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30년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체화해서 표현해 낼 수 있는 세대들을 기다리는 마중물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상화된 습성들, 심지어 생명운동의 관성화된 습성들조차도 해체하고 새로워지기 위한 실험들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실험들은 어떤 것일까?

첫 번째는 단단한 언어에 대한 해체의 실험이다.

일방소통의 언어. 조직의 언어. ‘새로운 세대’들과는 여전히 괴리되어 있는 이 단단한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나는 괴롭다. 이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내가 논과 밭의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충만함과, ‘너’를 이해하고 만나기 위한 침묵의 시간을 빼앗겼다. 이 글쓰기는 나에게 자학이고 사고 체계가 다른 독자(선배)들을 위한 통역이자 희생, 강요된 폭력이다. 생명이 단단하고 복잡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가? 나의 감정을 삭제한 채 합리의 언어만으로 생명을 정의하고 소통할 수 있는가?

선배들이 분리시킨 ‘새로운 주체’, 내가 경험하고 관계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언어는 감성의 언어이다. 무의식의 언어. 합리로 치장하기 이전의 감각적인 만남과 공감의 언어. 여성성이 깃든 언어. 문자화될 수 없는 교감의 언어들이 있다. 새로운 세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투쟁에서 조직에서 가치에서 이념에서부터 개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 개인과 개인이 함께 먹는 밥 속에서, 자지러지는 웃음 속에서, 흙 속을 뒹구는 놀이 속에서 발현되어 친구에게 친구에게 친구에게 전파되어 운동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두 번째는 정착과 유목 사이의 공동체 실험이다.

2010년을 전후로 이루어졌던 새로운 세대의 실험들이 일상을 해체하고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탈피해 보는 유목적 실험들이었다면,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빈집’, ‘만행’, ‘미세’, ‘8당은에코토피아’와 같은 실험들은 느슨한 일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불완전한 개인들의 새로운 소통방법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실험들이다. 이 실험들의 행보는 선배들이 고민했던 정착적 생태 공동체와는 조금 다른, 들고남이 자유로운 유목적 생태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현대 사회의 현실적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타협의 경계에서 철저하게 생존과 운동을 고민해 보는 일상 속의 통합적 실험인 것도 사실이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해남 미세마을의 일상은 밥 먹는 게 일이며 놀이이며 투쟁의 현장이 되고 있다. 밥상머리에서 관성화된 조직의 해체를 연습하고 생존을 위한 자급을 준비하며 한국 사회에서 습관화된 남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일상의 관계들 속에서 유희와 비폭력 평화의 출발점을 찾으며 에너지 전환과 적당 기술과 마을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고민한다.

 

세 번째는 생명운동의 인간적 규모에 대한 실험이다.

한살림을 비롯한 생명운동 단체나 조직의 성장이 생명운동의 사회적 성과물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생명운동의 확장이 그 조직의 성장과 규모의 확대를 말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는 여타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투쟁이나 생명운동 조직들의 운동 방식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2004년 파주에서 열렸던 생명문화포럼을 기억한다. 수천 명이 몰려든 포럼 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학계의 지성들, 생명운동의 선배들이 모여 나눈 대규모 학술 토론회가 내 삶의 실제적 전환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2004년 함양 산골에서 40여 명 정도의 또래들이 함께 살며 나눴던 녹색대학의 불완전한 토론들과 2009년 30여 명이 그 어떤 가치에 대한 논쟁 없이 평화롭게 보냈던 랄랄라 캠프의 일주일이 생명운동을 고민하고 그 속에서 내 삶의 방향들을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생명운동은 이제 온전한 한 지성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닌 개인의 필요와 자발성에 근거하고 즐겁게 교감하고 충분히 나누기 위한 인간적 규모의 소통 형태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이후 만들어졌던 보따리 학교나 탈학교 친구들의 끊임없는 소규모 만남들이 생명평화결사의 탁발순례와 서울 광장의 촛불집회와 강정의 해군기지와 두물머리의 유기농지 보존 투쟁으로 이어지는 현상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환 아닌 전율을 염원하며

 

사회운동과 생명운동이 지난 30년간 분리시켜 구체화했던 열매들을 이제 개인의 일상 속에 통합하고 정치와 합리와 이성의 언어가 아닌 몸의 언어와 공감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운동과 실험들이 시작되었다. 새롭게 시작될 생명운동은 더 작아져야 한다. 선배들이 더 작아진 생명운동이 이 절박한 위기의 시대에 과연 대사회운동으로 전환이 가능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길은 하나뿐이다. 가볍고 작고 유쾌하게 융합된 일상, 개인들의 자발적 실험들이 온 마을 마을에서 춤을 출 때 그 변화는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새로운 세대들은 감각적으로 타고난 생명운동의 매개자들이고 선배들은 든든한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환의 운동이 아닌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전율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마을에 대해 고민하고, 자립과 자치가 가능한 너와 나의 관계를 고민한다는 것은 무감각해진 감정을 일깨우고 습관화된 남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이고 그 속에서 나를 만나고 변화가

가능한 경계의 지점들에 끊임없이 서보는 것이다.

때로는 실패하고 처참하게 뒹굴어 상처를 입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프며 걷는다.

너에게 표현해서는 안 될 미안함조차 놓지 않고 살아가리라.

우리 실험의 시작과 끝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생명운동의 전승과 세대교체라는 물음이 던져진 배경과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세대들의 생소한 혹은 신선한 실험들에 대해서 보다 심화된 논의로 가기 위한 한 후배의 독백이라 생각하며 읽어 주셨기를 바란다.

 

 

1)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1982

 

2)  운동의 형태에 대한 문제는 원주보고서가 쓰였던 시기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진행되어온 생명운동의 운동 형태에 대한 해석 또한 조직과 대사회 운동의 범주에서 비판받고 있다.

 

3)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주체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뒤에서 밝히듯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생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선배들의 새로운 주체에 대한 대상화를 받아들였을 뿐 스스로를 새로운 주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분리된 세대간 인식 격차에 대한 매듭 정도로 내 삶의 역할을 해석하고 있다.

 

4) 2012년 7월 18일, 대한문에서 두물머리 행정대집행 계획에 항의하는 유기농 집회가 열렸다. 두물머리 투쟁의 정서 저항의 스타일 중 http://suyunomo.net/?p=10972

 

5) 김이경. 2013, “벗을 찾아 단결하라.” 『녹색평론』 128호

 

6)  2010년을 전후로 사회운동의 변방에서는 새로운 세대들의 실험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위에 나열된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모임들 외에도 소규모의 다양한 모임들이 있었다.

 

7) 두물머리 개인 지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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