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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생명운동과 합리성은 공존할 수 없는가?
2016-06-14 11:46: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생명운동과 합리성은 공존할 수 없는가?

 

서영표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들어가며

 

한국의 생명운동은 이미 1980년대 초에 자본주의적 산업문명이 불러온 생태적 위기를 경고했다. ‘원주캠프’로 알려진 일군의 생명운동가들에 의해 준비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1982)은 인간과 자연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버리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주민주항쟁 직후 폭압적인 군부독재를 대상으로 한 민주화투쟁은 생태 환경에까지 눈을 돌릴 만한 여유를 주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사상을 토대로 폭압적인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비판하면서 지구생태계 위기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시한 생명운동의 기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 발표된 지 31년이 지났다. 그 정신을 계승한 「한살림선언」(1989)이 세상에 나온 지도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환경파괴를 걱정하고 지구생태계의 미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2천여 명의 기후 관련 과학자들로 구성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nter-Governmental Penal for Climate Change, IPCC)’의 4차에 걸친 보고서는 기후변화에 관한 암울한 미래를 경고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에 공감하고 있다. 각종 국제회의와 정상회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일 정도가 되었다. 성장과 경쟁만을 추구하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위기’에 대한 인식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양식은 전혀 바뀌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장의 논리, 성장과 경쟁의 논리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정신마저도 상품과 화폐의 논리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상대로만 생각하고 잠재적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 공격자로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더 이상 사회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듯 보인다. CCTV로 상징되는 서로에 대한 감시만이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은 놀 공간을 상실하고 성적을 위한 공부와 사이버공간의 게임에 갇혀 지낸다. 공존과 협동을 위한 사회성을 키울 가장 기본적인 교육의 장인 놀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감성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싸이코패스를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생태계 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생명운동이 30여 년 전에 제기했던 인간성 파괴의 정도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이런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화폐적 관계라는 ‘차가운 얼음물’ 속에 넣어져 모든 사회적 관계가 차갑고 냉혹한 자본의 논리로 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생명운동이 제기한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리 시대가 자각하고 있는 생태 위기는 ‘생명의 위기’가 아니라 ‘화석연료의 위기’이며 ‘지속적 성장의 위기’일 뿐이다. 기후변화와 자원고갈을 자본주의 문명의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장 기제를 통해 극복해야 할 ‘장애’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태 위기는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 시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탄소배출권 시장이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급기야 기후변화 시대의 대안으로 원자력발전이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분명 생명운동은 시대를 앞서 생태 위기와 문명 위기를 감지하고 근본적 사회변화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생명운동이 내세웠던 일상과 풀뿌리에서의 실천과 의식의 전환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생명운동이 실천운동의 영역으로 개척했던 생활협동조합운동과 먹을거리 운동마저도 좋은 먹을거리를 얻기 위한 소비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혹시 생명운동은 스스로가 표방했던 풀뿌리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공감하기 어려운 운동가들만의 담론에 붙들려 있지는 않았는가? 과거 변혁운동(주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교조적 태도와 경직된 입장을 비판했지만 생명운동 또한 실천과 융합되기 어려운 ‘고담준론’에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종교적 각성과 개인적 결단만을 촉구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종교적 영성과 생명존중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은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명사상이 비판했던 ‘교조’와 ‘독선’이 자기 안에서 생겨날 위험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운동의 출현과 역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생명운동이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가지는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민주화운동이 제도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에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생명운동은 자본주의 문명 그 자체에 깊이 자리한 병리적 증상과 상처에 대해 통찰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시대에 앞서 제기한 것이다.

 

생명운동의 비판은 소비주의적 자본주의만을 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겠다고 나선 마르크스주의와 다양한 입장의 사회주의도 비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물질적 성장과 과학기술의 무한한 발전이라는 근대자본주의의 ‘신화’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적’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었고 교조적이기도 했다. 협동과 나눔, 존중을 인간과 삼라만상이 조화되는 원리로 간주하는 생명운동에 있어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비민주적이고 반생태주의적이며 반생명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명운동 진영에서 발간된 많은 글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회운동과 사회비판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명운동만의 것은 아니다. 생명운동의 독특함은 반생명적, 반생태적인 현실을 동양사상, 특히 동학사상을 통해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에 있을 뿐이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서구의 신사회운동(반핵평화운동, 여성해방운동, 흑인인권운동, 성소수자 권리운동, 녹색운동, 지역운동 등)은 생명운동과 유사한 인식을 다양한 근거로부터 찾고 있다. 신사회운동은 때로는 근대적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확장과 급진화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때로는 서구적 근대성과 계몽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재해석, 그로부터 얻어지는 차이와 정체성에 근거한 급진정치를 이론적 자원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녹색운동의 일부는 생명운동이 강조하는 동양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세계관을 적극 수용하면서 생태주의 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포기하지 않는 다양한 조류의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한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의 흐름은 일상의 정치, 참여적인 정치, 수평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생명운동의 그것과 많은 부분에서 공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급진적인 사회운동의 초점은 노동자운동과 정당운동으로부터 풀뿌리 지역에서의 주택, 의료, 교육, 먹을거리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운동은 세계적 수준의 역사변동이라는 맥락에서 신사회운동과 신좌파로 상징되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전환의 다양한 경로와 사상적 근거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동양 사상과 동학사상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생명존중의 사상이 역사적 전환의 시기에 출현한 다양한 운동, 사상과 어떤 면에서 공명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이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지를 고민하기보다는 한국적 생명사상에 인류의 ‘문명사적’ 전환을 선도해야 하는 ‘지도’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서구의 과학기술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근대화 이론이 불러온 폐해가 크다고 하나 ‘그들’과 ‘우리’를 가르고 ‘우리’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이러한 태도는 생명운동이 내세우는 가치와도 공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무리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한다고 해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게 드리운 담론은 이미 조직화된 이념적 ‘공동체’를 벗어나 동의를 얻기 힘든 법이다.

 

생명사상이 담고 있는 생태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가치가 우리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공동체를 넘어선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해야만 한다. 과연 ‘선각자’와 ‘선지자’의 시각에서 제시된 동학과 종교적 가치는 우리 삶과 공명하고 있을까?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한살림의 사상은 생활협동조합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그들의 의식을 바꾸기는커녕 의식전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서조차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

 

생명사상의 근간은 ‘선한’ 인간 본성(human nature)에 대한 믿음이다. 생명운동은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공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후 수백 년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모스Marcel Mauss는 그의 주저 『증여론』에서 사유재산의 소유가 아닌 증여가 더 오랫동안 인간 사회를 규제하는 원리였음을 주장했다. 평화적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은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1)에서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재해석해 협동적이고 이타적인 종이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 번성할 수 있는 적자(the fittest)라고 주장했다. 그는 곤충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또한 이러한 공동체적인 인간 본성에 기대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타적 인간 본성에 기댄 주장은 이기적 본성에 기대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만큼이나 본질론(essentialism)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로부터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모두가 전제하고 있는 원자처럼 고립되어 있고,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이기적 인간이라는 ‘이미 전제된’ 인간 본성을 지우면 경제학 교과서의 모든 함수와 그래프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타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인간 본성을 지우면 협동과 결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안적 삶의 형식은 소수의 엘리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이타적이지도 공동체주의적이지도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 또 다른 계몽주의 기획으로 전락하게 된다.

 

생명운동은 모든 만물에 깃든 영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근본생태주의(deep ecology)와 닮아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연은 인간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 또는 영성(spirit)을 가진 존재로 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본생태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자연적 대상의 가치를 동일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실제로는 생명사상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존중의 사상과 멀어진다. 지구생태계에 가장 위협적인 종은 인간이며 이런 점에서 인간종의 가치는 바이러스보다도 못한 존재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일 뿐이다. 진화의 오랜 과정을 거쳐 출현한 자연적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인간혐오(misanthrophy)는 생명사상과 공존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운동의 혼란이 생겨난다. 생명운동은 근본생태론의 자연주의적 태도에 공감하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과 화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생명운동은 인간이 가지는 자연주의적 태도조차도 종교적 영성에서 찾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근거해 모든 자연적 대상을 존중한다고 할 때 그 사상을 만들어 낸 것도, 자연을 존중하는 가치체계를 세우는 것도 모두 인간의 능력이다. 그런데 생명운동은 이러한 인간이 가지는 독특한 능력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능력, 영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생명사상은 충분히 ‘자연주의적’이지도, 충분히 ‘인간주의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야할 때 생명사상은 인간중심주의의 면모를 보이며, 인간주의가 요청될 때 모든 사물에 깃든 영성을 강조한다. 생명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과 자연적 대상의 상호연관성과 자연생태계의 대상들이 가지는 내재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생태파괴적인 근대자본주의의 논리를 비판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영성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경도되면서 사회구조에 대한 체계적 비판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게 되는 근본생태주의의 약점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녹색사회로 전환하는 문명적 전환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와 인간주의적 이해를 종합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사회학적 논쟁에서 자연주의적 해석은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인간이 자연의 한계 안에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설명이 인간사회가 가지는 독특성과 인간사회 안의 문화적 다양성과 투쟁을 간과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대 구조에 대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언어활동이 물리학·생물학적 구조로 환원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두뇌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활동을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구조로 환원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주의적 입장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독특함을 가지지만 그것이 곧 인간 사회가 자연적으로 배태되어 있다는 것의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환원론으로 오해되는 다윈의 진화론을 재해석하면 그것의 핵심은 유전적으로(genetically) 주어진 잠재성(potentials)이 서로 다른 사회적-환경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종의 유전적인 배경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발현이 의존하고 있는 조건의 다양성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개념화하면서도 사회적·환경적 조건에 따라 주어진 자연적 가능성이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자연적 과정인 동시에 인간만의 독특성을 출현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외적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편적 존재로 스스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파악하는 ‘존재론적 분석’이 곧 현재의 생태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현재의 사회구조 즉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항하는 사회적 실천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안적 실천은 곧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넘어서, 공동체적이고 상호호혜적인 인간주체성을 길러내는 실천이다. 공동체적이고 상호호혜적인 인간 주체성은 곧 자연을 욕구충족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자연적·정서적·문화적 일부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언급한 “비유기체적 신체”(inorganic body)로서의 자연을 복원하는 것이다.

 

 

생명운동과 영성

 

생명운동이 제시하는 문명전환 운동의 주요 경로는 각성과 의식전환이다. 현대 물질문명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만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생명 존중과 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는 정신운동이 중요한 것이다.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러한 의식전환 운동은 협동조합과 같은 공통의 경험을 통해 발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적 결단이다. 종종 생명운동은 이러한 결단과 전환을 ‘종교적 체험’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영성이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일깨워지고 그 결과로 ‘우리’ 밖의 모든 존재들도 역시 내재해 있는 영성을 찾아내고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앞 절에서 제시한 비환원론적 자연주의 입장에서 종교를 해석한다면 종교는 인간 진화의 산물이다. 종종 사회학자들은 종교를 문화적 또는 사회적 현상으로 다룬다. 종교는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와 연관된 정신적 또는 도덕적 발전에 의해 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의 일부라는 것이다. 때때로 사회학적 분석은 종교의 출현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은 그것을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올바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정신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구체적 인간들의 세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과 무관한 이미 구성된 종교의 원리로부터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진단과 처방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종교가 사회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적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악한 것과 선한 것 등등. 결국 종교성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에 근거한 배타성을 넘어선다고 해도 종교는 사람들을 교화와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독단주의로의 위험을 내포한다. 종교적 원리로부터 끌어내지는 정치운동의 방향은 살아 숨쉬는 구체적 인간들의 경험, 감정, 윤리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종교적 원리로부터 얻어진 방향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교육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이미 완성된 종교적 원리는 살아 숨쉬는 구체적 인간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구름 위에 존재하는’ 영성에 호소하는 신비주의적 담론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로의 경도는 동양사상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에서도 드러난다. 목적으로서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서구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반생태적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사상이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이 곧 동양사상이 서양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서구 사상 모두를 반생명적인 것으로 거부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동양사상은 서구의 분석적 사고가 놓치고 있는 상호연관과 복합적 전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합적 전체와 부분과 부분 사이, 전체와 부분 사이의 상호연관이 존재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분석과 그것에 근거한 해결 노력이 필요하다. 자연과학의 발전과 사회과학 철학에서의 지난 30여 년간의 논쟁은 실재하는 대상의 복합성과 복잡한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이러한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과학적 분석과 결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탈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과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은 서구학계에서 출현한 새로운 과학철학 운동의 대표적 이름이다.

 

따라서 도구적 합리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합리성과 과학은 옹호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이 각성하고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와 계기를 줄 수는 있지만 종교적 체험과 원리가 합리성과 과학을 송두리째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대체를 주장하는 입장은 신비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이 높다. 탈정상과학론과 비판적 실재론이 공유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의 추구이되 설명의 대상이 가지는 복합적 관계에 의해 그 설명은 언제나 잠정적이라는 것에 있다. 비판적 실재론과 페미니스트 관점이론(feminist standpoint theory)이 강조하는 것은 복합적 대상에 대한 설명이 정치적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통찰이다. 중립적인 과학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주장하는 실증주의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 객관성은 언제나 특정한 입장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안에 존재하는 약자와 소수자 입장에서의 인식과 분석이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사회를 설명하는 조금 더 진실에 가깝고 조금 덜 허위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객관성을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이라고 부른다. 서구의 정상과학론이 주장하는 객관성은 중립성을 가장하고 있기에 현실에 대한 비판적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약한(weak) 객관성을 가질 뿐인 반면 특정한 입장에서 현실을 해석하는 구체적인 지식은 현실에 대한 보다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의 힘을 강조했던 계몽주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는다. 계몽주의의 어두운 면은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새로운 억압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사상가들 스스로가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근대적 합리화의 어두운 면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20세기 벽두에 우려했던 것은 목적합리성(도구적 합리성)의 일면적 지배가 불러올 결과는 합리성이 우리를 가두는 쇠우리(iron cage)가 되는 것이었다. 194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었던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e Adorno는 미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이성이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과학과 기술이라는 미신에 빠져드는 근대성의 역리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 급진운동의 멘토였던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러한 현대문명은 비판정신을 상실한 ‘일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을 양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과 합리성을 포기할 수 없다. 계몽의 밝은 면은 곧 합리성의 증진과 과학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해방, 미신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일 뿐이다. 탈정상과학론과 비판적 실재론, 그리고 페미니스트 관점이론이 제기했던 그런 성찰과 반성 말이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도전인 기후변화는 자연과학자들의 분석이 없다면 제대로 인식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대응전략도 찾아낼 수 없다. 현대인의 낭비적이고 반자연적 생활방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요청된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도시계획, 화석연료체제를 넘어서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은 과학적 분석과 처방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단 한순간도 구체적 삶의 경험과 보통 사람들의 정서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삶의 경험과 정서와 느낌이 없는 과학은 텅 비어 있어 아무런 지식과 정보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서와 느낌이 종교적 경험일 수도 있다. 동양적인 문화와 전통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서와 경험, 문화와 전통이 ‘보수적’ 민족주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동양적 세계관을 우월한 것으로 제시하고 그것에 근거해 옳고 그름을 판결하려는 편견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적이면서 개방적인, 그러나 민주적인 토론과 합의를 추구하는 합리주의가 필요하다. 그러할 때에만 현실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고 여기로부터 도출되는 경제적, 정치적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

 

생명운동의 종교적 각성과 의식의 전환보다 더 강력하게 제시하는 실천은 협동조합운동이다. 이미 생명운동의 가장 강력한 흐름인 한살림은 생활협동조합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농촌과 도시, 농업과 소비, 생산자로서의 농민과 소비자로서의 도시거주자를 연결할 수 있는 통로로 제시된다. 생명운동은 그 안에서 먹을거리가 가지는 소중함을 깨닫고 밥 한 알에도 존재하는 우주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생활협동조합은 우리 안에 있지만 상품화폐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고 억압되어 있는 우리의 영성이 일깨워지는 통로인 것이다. 그리고 생활협동조합은 모든 조합원의 능동적인 참여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로부터 발전한다. 따라서 생활협동조합은 풀뿌리 지역 도처에 싹을 틔우고 뿌리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인 사회주의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쯤에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생명운동의 문헌들은 반복적으로 사회주의적 실험의 실패를 언급한다. 현실에서 사회주의는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운동과 같은 대중적 운동이 제시된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파산한 것 못지않게 역사 속의 협동조합운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만약 협동조합운동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대양에 떠 있는 작은 섬들로, 상품화폐의 논리에 대한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면 굳이 실패했다고까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의 논리에 심각하게 오염되었지만 세계 곳곳에는 생활협동조합이 존재하고 자본주의와 훌륭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이 원주캠프의 주장과 「한살림선언」에 표명된 문명전환을 목표로 한다면 역사 속의 운동은 실패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협동조합운동을 대안으로 믿었던 활동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본주의적 시장의 힘은 훨씬 더 강력했고 국가의 힘은 언제나 자본의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운동가의 의지와 각성으로는 넘기 힘든 현실의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난파하거나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농협’의 모습은 예외적이기보다는 협동조합운동의 ‘정상적인’ 경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운동이 시도했던 생활협동조합 내부로부터의 비판적 목소리는 이미 이러한 위험스러운 경향이 커져가고 있음을 증언한다. 조합원의 수가 증가할수록 생명운동이 표방한 문명전환의 정신은 약화된다. 곳곳에 매장이 생기고 생활협동조합 간의 경쟁이 강화된다. 조합원 교육은 형식화된다. 활동실의 활동가들과 경영을 담당하는 실무진 사이의 시각 차이는 커져만 간다. 이제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생명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양질의 먹을거리를 구매하려는 단순한 소비자일 뿐이다. 문명전환은커녕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하고 그에 편승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저변 확대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생활협동조합의 활동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그래서 우리도 변하고 있다는 변명으로는 운동과 자본주의적 경영 사이에 커져가는 간극을 덮을 수는 없다. 운동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회원 확대와 공격적 마케팅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이런 주장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향해 휘둘렀던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무딘지에 대해 말해줄 뿐이다. 그 어떤 노동운동가도, 그 어떤 사회주의자도 스스로 타락을 원하지 않았다. 조건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이미 들었던 변명이 다시 들린다. 그리고 익히 보아왔던 실패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생명운동이 천명한 문명전환과 의식전환의 통로로서 생활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본의 힘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실패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실패 속에서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 덕분에 성공한 몇몇 사례를 찾아 그것을 어디에서나 실현가능한 ‘정답’으로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즉 자본의 힘과 국가의 자본 친화적인 성격을 전제했을 때에, 그래서 언제나 실패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 생활협동조합운동은 의미 있는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의지의 낙관은 지성의 비관을 전제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의지의 힘으로 지성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조만간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종교적 각성과 체험이 우리의 의식이 전환할 수 있는 수많은 경로 중 하나이듯이 생활협동조합은 새로운 탈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출현하고 실현되는 많은 실천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 또한 중요하다.

 

생명운동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실천방식인 ‘생명민회’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민회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우회하고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통로로 제시되고 있다. 시민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 경험을 축적하고 정치세력화하는 길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생명운동이 제시하는 민회운동과 문명전환의 생명정치는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문명전환과 녹색사회로의 전환은 제도정치 자체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제도정치의 변화는 제도 바깥으로부터의 저항과 압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생명민회의 급진성은 기존 정당에 대한 압력 또는 지지로 약화된다. 생명민회의 목적 자체가 처음부터 비판적 여론조성과 자유주의 정당에 대한 로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 저항정치는 처음부터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요약하다면 생명민회운동은 제도 바깥의 진지를 구축하지도, 제도정치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축적하지도 못한다.2)

 

 

영성과 자기 절제가 아닌 만족과 행복에 호소하는 생명운동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는 분명 인류진보의 밝은 면이다. 하지만 모두가 마냥 행복하고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의 향유가 불평등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필요는 없다. 백화점과 대형할인 매장에 물건이 넘쳐나지만 누군가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할 수 없는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의 풍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3세계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의 소비를 지탱하기 위한 자원은 자원생산국 사람들의 피와 땀을 대가로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그런 사실이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고 단순한 ‘정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만약 우리 스스로에게 인류애나 인권 같은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이댄다면 물질적 풍요의 뒷면에 숨겨진 고통과 불평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생각해보기 전에 ‘풍요’ 속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한국 시민들의 삶은 안정되고 행복한지 질문해야 한다. 수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향유하고 있는 우리 삶의 풍경이 만족스러운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만족스러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학교를 나와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것일까? 안정적인 직장으로부터 얻어지는 높은 소득과 그것이 보장하는 높은 수준의 소비일까? 그런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좋은 학교의 졸업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텔레비전 광고가 보여주는 성공한 삶의 모습은 널따랗고 전망이 좋은 고급 주택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원하는 것이 공부에 찌들어 정신과 육체가 병드는 것은 아닐 테니까.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이 연장근무와 야근, 그로부터 생겨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는 아닐 테니까. 차와 집을 위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그것을 갚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만족스럽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좋은 학교의 졸업장과 좋은 직장, 높은 수준의 소득과 소비는 모두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삶이란 가족과 시간을 같이하고 이웃,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비싼 장난감과 옷으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교실의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일 것이다. 직장의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로 남는 것이 더 좋은 것일 게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얘기가 꿈처럼

들린다. 토마스 모어라는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땅인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의 불안은 바로 여기로부터 온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데 그 과정은 행복과 만족의 기회를 빼앗아 간다. 그리고 만족과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일이 되어 버린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왜 사는 것인가에 대해 혼란스럽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전원이 꺼지지 않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끌 수도 없는 러닝머신이라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앞에 켜진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멋있는 차와 집과 가전제품과 휴양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로 가려고 쉬지 않고 뛴다. 그리고 문득 문득 깨달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화면에 펼쳐진 삶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그저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그 자각의 순간 멈추어 선다면? 뒤로 나동그라지게 된다. 그런 생각을 지속한다면 회사에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혀 쫓겨나고 사회적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의 현실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헛된 꿈을 좇는 유토피안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또 다른 현실인 것이다. 결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하지만 멈출 수도 없는, 그래서 너무나 피곤한 삶이 우리 불안의 근본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삶과 노동, 삶과 소비의 ‘분열’이라고 이름 붙여 보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의 수단이어야 하는 노동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있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소비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그래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슬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분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분열은 우리를 사람의 무리와 분리하여 고독한 개인으로 만든다. 노동과 소비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수 없다. 그것 자체가 타인과의 경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다른 불안의 원천이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원자화된 개인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서구에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기초를 놓은 사상가들은 정치적 질서의 출현을 고립된 개인들 간의 무한 경쟁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설명했다. 소위 ‘자연 상태’에서 고립된 개인들은 스스로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적대적으로 투쟁하다 종국에는 이러한 경쟁상태가 필요와 욕구 충족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협약을 통해 법과 규칙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가 힘과 부를 통해 지배되는 상태라면 계약으로 성립된 정치질서는 합리적인 법률과 절차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우리 사회가 이러한 합리적 정치체를 가지고 있다고 배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깨닫는다. 재벌총수와 평범한 시민이 평등하다고, 그래서 힘과 부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유토피아’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이러한 체험과 자각이 사회 전체의 문제, 또는 조금 어려운 표현을 빌자면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경우 사회운동이 생겨난다. 때로는 재벌을 해체하자는 운동으로, 때로는 힘과 부가 유착된 정치를 개혁하자는 운동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회구조 자체를 완전히 전변시키자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이렇듯 구조적 수준에서 사회적 모순을 체험하거나 자각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겨를도, 그럴 만한 정보도, 그럴 만한 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합리적 정치체라는 환상과 힘과 부가 지배하는 현실을 대면하는 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처음부터 동료 시민과의 연대는 불가능하고 정부는 부를 가진 사람들의 편일 뿐이다. 이 길에서 보장된 것은 하나도 없다. 부도 힘도 없는 평범한 시민에게 마치 자연 상태와 같은 무한경쟁의 사회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언가 징표가 필요하다. 항상 존재하는 낙오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상쇄시켜 줄 징표가 필요한 것이다. 그 징표는 바로 ‘소비’로 나타난다. 광고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삶을, ‘그들’이 타는 자동차, ‘그들’이 입는 옷, ‘그들’이 누리는 레저 스포츠를 공유함으로써 무참히 짓밟혀 사회의 밑단으로 떨어지고 있는 동료 시민들의 고통,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가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로부터 무감해지는 약물을 투입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비라는 약물은 당연히 중독성이 강하다. 처음부터 삶, 그리고 노동과 분리된 소비란 소득을 훨씬 넘어서는 끝없는 욕망일 뿐이다. 소비를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빚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돈에 저당 잡힌 소비란 더 큰 불안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파산하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더욱 경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문득 문득 깨닫게 되는 불가항력의 현실로부터 괴로워한다. 불안이 극대화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어차피 자연 상태의 경쟁에서 도와줄 동료 시민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국가는 이미 시민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추는 공적 임무를 포기한지 오래되었으니 현실과 유토피아의 괴리의 자각이 더 이상 소비라는 약물로 감추어질 수 없을 때(종종 파산으로 드러난다) 철저히 고립된 개인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예상가능한 일이다.

 

학자들이 ‘신자유주의’라고 어렵게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사회현실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시장에서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연대망을 통해 위험을 분담하고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다시 시장의 자유로 되돌려진 상태, 또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사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극단적인 경쟁과 불안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주었던 노동조합, 지역공동체,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까지 시장의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해체되고 상품화되는 현실 말이다. 미래 시민을 양성하는 학교는 이미 이기적인 강자를 교육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공동체의 유대를 지탱하고 재확인하는 의례들(예를 들어 장례식)마저도 상조회라는 이름의 ‘돈놀이’에 내맡겨져 버린다. 사람들은 이러한 해체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저항할 엄두를 못 낸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해체의 힘이 돈, 이윤, 경쟁의 논리로 우리 몸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할까? 육류 소비를 위해 저 많은 소와 돼지를 생매장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행복일까? 지구상 어디인가에서 어린 아이들의 착취를 통해 만들어진 값싼 상품을 소비하는 우리는 행복할까? 휴대폰에 사용되는 티탄을 얻기 위해 수많은 어린 소년병들이 총을 들고 어린 소녀들이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끝없는 경쟁과 비교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 행위라는 일상의 경험 속에는 불만과 저항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이다. 자본주의적 소비는 결코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행복한 삶의 기본을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생명운동이 사회운동으로, 그리고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성과 종교적 각성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필요(needs)와 욕구(wants)로부터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금욕과 절제에 호소하기보다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즐거움과 행복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를 통한 욕망의 충족은 사회적 유대와 도덕적 통합을 붕괴시키고 생태적 조건을 파괴한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우리 모두는 시장에 의해 인식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한 빠른 이동이 소비문화의 쾌락이라면 아이들의 안전, 소음과 대기오염으로부터의 자유, 걷기와 자전거 타기에 의한 건강한 생활 등은 그것을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억압된 욕구다. 승용차 이용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안전의 위협, 각종 오염, 운동 부족에 따른 비만 등 각종 질병의 발생을 초래한다. 여기서 걷기와 자전거 타기에 의한 안전한 공간의 확보와 쾌적한 생활조건, 그리고 건강한 신체의 연관은 인식되지 않는다. 저항의 계기는 억압되어 있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다른 방식의 즐거움에 대한 열망에 있는 것이다.

 

물론 소비주의적 쾌락 속에 잊혀진 대안적 삶에 대한 자각으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목표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이러한 대안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이러한 자각을 ‘실천적 지식’이라 불러 보자. 실천적 지식은 비록 그것이 시장의 힘에 의해, 그리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문화에 의해 억압됨에도 불구하고 맹아적 형태의 대안적 행위양식을 보여준다. 행위자들은 자본주의적 소비를 통해 충족할 수 없는 필요들에 대한 정식화되지 않는 어렴풋한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생명운동이 추구해야 할 정치 전략은 이러한 어렴풋한 지식(암묵적 지식이라 해 보자)을 정치적 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실천적 지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생명정치는 현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상주의적 규범을 올바른 것으로 제시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처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화폐소득의 증가에 따른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경쟁적인 일상에서 피로감을 느낀다. 한편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상당수는 우리의 일상에서 도저히 실현되기 어려운 전원적인 삶, 생태적인 삶, 느린 삶을 보여준다. 일상에서는 대형 할인마트에서 판매되는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식재료에 의존하고 값싼 외식과 정크 푸드를 먹을 수밖에 없지만 텔레비전 속에는 유기농으로 재배되는 싱그러운 먹거리들이 등장한다. 요리할 시간조차 없이 쫓기는 삶을 살지만 텔레비전, 신문, 잡지에는 요리에 관한 프로그램들과 기사들이 넘쳐난다. 재개발에 동반되는 이익과 보상금에 목을 매지만 아련한 기억 너머 속의 시골 풍경이 사라져 감을 한탄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일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스스로가 느끼는 인간적 필요들이 끝없는 일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얻어지는 소비를 통해 충족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렇듯 이미 존재하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맹아적 저항의 계기들이다.

 

대안적 삶에 대한 열망은 상품-소비사회의 구조적 조건의 무게에 짓눌려 체계적인 저항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대안적 삶의 추구마저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소비해야 하는, 그리고 돈을 주고 상품으로 구매해야 하는 조건은 화폐소득-소비의 악순환으로 사람들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불만과 저항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무리 지배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완벽하게 자본주의화 또는 상품화할 수는 없다.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자본의 논리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에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리는 상호이해와 존중 그리고 협동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자본의 힘에 의해 잠식되어 가고 있는 기존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안적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생활공동체, 생활협동조합 같은 대안적 운동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설 수 있다면 노동조합 또한 이러한 대안적(비시장적) 사회관계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운동의 정치의 과제는 대안적 생활, 실천의 공간을 지키고, 만들고 확장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 속에서 대안적 인간관계, 타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적 윤리와 더불어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1) 『만물은 서로 돕는다』 (르네상스, 2005)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2)  이러한 어려움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녹색당(초록당)을 건설하려는 몇 번의 시도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기존 정당에 대한 로비 또는 비판적 지지가 아닌 스스로의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아직까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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