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모심의눈 모심과 살림 읽기

모심과 살림 읽기

게시글 검색
[2호] 문명의 전환과 노동의 미래
2016-06-21 13:36: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문명의 전환과 노동의 미래

 

강수돌 (고려대 교수, 경영학)

 

 

삼중의 위기와 우리의 삶

 

지금 우리는 ‘삼중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첫째는 일의 위기요, 둘째는 땅의 위기며, 셋째는 얼의 위기다1). 이 삼중의 위기는 우리를 스트레스로 내몬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인데도 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과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해, 대학생들은 취업 스트레스로 세월 다 보낸다. 설사 취업을 해도 직장인들은 날마다 일이나 사람에 치여 스트레스의 극치를 달린다. 적령기 젊은이들은 결혼 문제로 스트레스요, 때마다 명절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좀 쉬고자 휴가를 떠나려 해도 도로 위에서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 모인 곳마다 산천이 온통 스트레스 덩어리다. 언론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시원한 건 없고 백성의 마음을 달래야 할 정치는 스트레스를 더 키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얼빠진 이들이 너무 많다. 배웠다는 이들일수록 얼빠진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이런 세태에서 아무리 스트레스 퇴치법을 배워도 별 소용없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이미 ‘스트레스 사회’다. 각종 암 발병률이 높아지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대체 이 스트레스 사회를 극복하고 높은 문화와 삶의 질을 누리는 행복 사회의 길은 무엇인가? 이걸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직면한 삼중의 위기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첫째, 일의 위기는 일자리의 위기일 뿐 아니라 일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위기다. 일자리의 위기는 당연히도 자본의 위기에서 온다. 따지고 보면 일자리 또는 일의 위기란 결국 자본의 위기가 보여주는 한 모습에 불과하다. 인간적 필요의 원리가 아닌 무한 이윤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은 주기적이고 구조적인 위기를 번갈아 겪는다. 너무 뚱뚱해진 자본이 군살빼기를 할 때, 1998년의 현대자동차나 2009년의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보듯, 노동자는 목숨 걸고 정리해고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 한창 잘나갈 때조차 노동은 행복하지 않다. 삶보다 일에 치여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생산하여 더 많이 팔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보다 생산이나 실적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IMF 사태’를 겪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대규모 정리해고라는 ‘집단적 상흔’을 경험한 우리는, 대개 “아직 안 잘리고 남아 있을 때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생각, 민주노조조차 지켜주지 못한다는 상처가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나 홀로’ 살아남고자 발버둥쳐 봐야 금세 먼지 같은 존재 또는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운신의 폭은 ‘생존이냐 잉여냐’ 하는 좁은 공간 안에 있다. 2) 이렇게 좁아진 운신의 폭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잉여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 생존의 몸부림만 치는 우리들은 그야말로 속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시금 자신을 추슬러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생존이냐 잉여냐’가 아니라 ‘속물이냐 행복이냐’ 하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속물주의와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나아가 나와 내 내면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참된 나와 다시 접촉하고 나를 다시 바로 세우면서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하나는 약하지만 둘은 강하고 셋은 더 강하다. 그렇게 서로를 이어가야 한다. 끊어진 유대를 다시 엮어야 하며, 찢겨진 가슴을 서로 어루만져야 한다. 또한 고개를 들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사회를 어떤 식으로 다시 설계할 것인지 서로 풀어내야 한다. 꼭 술을 마셔야 하는 건 아니다. 술 없이도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이어져야 한다. 캄캄한 밤중에 큰 광장에 모인 촛불들처럼, 경찰 ‘물대포’ 속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희망버스 사람들처럼 그렇게 모여야 한다. 그것만이 일의 위기를 넘어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길이다. 그것만이 돈벌이 경제가 아니라 ‘살림살이’ 경제를 여는 길이다. 그것만이 스트레스 사회가 아니라 ‘행복 사회’를 여는 길이다.

 

둘째, 땅의 위기다. 사실, 땅의 위기는 하늘의 위기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이끈다. 흔히 말하는 생태계의 위기, 기후 위기, 에너지 위기, 핵 위기, 식량 위기 따위를 모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도 사람의 위기와 연결되며, 그 사람의 위기는 결국 자본의 위기와 연결된다. 그런데 자본의 위기는 결코 ‘외부’ 요인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내부’ 요인으로 생긴다.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관계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자본의 세계화는 사람의 식민화와 더불어 땅의 식민화까지 촉진한다. 결국은 사람의 황폐화, 땅의 황폐화를 부른다. 사람이 피폐해지니 불감증에 걸려 땅을 더욱 무자비하게 부순다. 땅에 대한 폭력은 별로 처벌되지 않는다. 그렇게 악순환이 지속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핵무기요 핵발전소다. 핵발전소는 핵무기의 중간 단계다. 이들은 순식간에, 대규모로, 되돌릴 수 없이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고가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고통 속에 빠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다. 어느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이 고등어, 명태, 표고버섯 등이 방사능에 가장 많이 오염되었다며 먹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이런 식품들뿐이랴? 그리고 이런 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새 세상을 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본과 권력을 주무르는 자들에게는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생태계의 입장, 여성의 입장, 일반 민초의 입장, 사회적 약자의 입장, 가난한 나라의 입장은 완전 반대다.3) 과학기술이 농업, 공업, 서비스에 적용된 결과 갈수록 삶의 근본 토대인 땅이 망가진다. 이제, 사막처럼 푸석푸석해진 땅을 살리고 더러워진 물과 공기를 살려야 한다. 땅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며 모든 살아 움직이는 존재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속가능성’의 출발점이다.

 

끝으로, 얼의 위기다. 얼이란 정신이요, 문명이다. 문명의 위기를 돌파하려면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과연 우리가 뭘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죽으러 가는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호랑이한테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있듯, 아무리 시대의 위기가 우리를 두렵게 해도 정신을 차리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남보다 뒤처질까봐 두렵고 남보다 우위를 유지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오죽하면 인간 교육이 이뤄져야 할 학교에서조차 ‘우등과 열등’을 가르는 우열반 편성을 할까? 아이들이 우수한 그룹에 많이 들도록 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우열반을 편성하지만 그럴수록 열등반에 빠질까 두려워하는 이가 더 많이 생긴다. 학교가 두려움을 조장하는 셈이다. 일반 사회로 나와도 마찬가지다. 경제와 사회의 기본 구조는 피라미드 질서이다. 이 피라미드에서 높은 곳을 차지한 이들은 기득권의 달콤한 떡고물을 누리면서 중독되어 가고, 중간 이하 아래쪽에 자리잡은 이들은 기득권의 달콤한 떡고물을 동경하면서 중독된다. 상층부는 향유 중독에 빠져 있고 중하층은 동경 중독에 빠져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기득권) 중독사회라 해도 무방하다. 온 사회가 말은 않지만 기득권(돈, 지위, 명예, 권력 등) 경쟁을 하는 사이, 사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돈 중독, 일중독, 소비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마약 중독, 관계 중독,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등에 빠진다. 요즘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기는커녕 온갖 중독에 깊이 빠져드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이다. 이렇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중독자가 되니 피라미드처럼 생긴 사다리 질서는 변함없이 유지될 뿐 아니라, 시나브로 더 가팔라진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실패에 집착하고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며 미래의 불안에 갇히고 만다. ‘스트레스’ 사회의 미시적 기초요, 불행 사회의 정신적 기초다.4)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나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진짜 얼차려야 한다. 얼이 빠진 얼굴에만 집착하다보니 성형 수술만 한다. 골은 비어 있는데 얼굴만 잘 가꾸면 무슨 소용인가? 그 약효는 얼마 가지 않는다. 그렇게 큰돈 들여 인위적 수술을 해봐야 얼빠진 두개골은 금방 들통난다. 그 사이 사회 전체는 몰개성 사회가 된다. 개성과 줏대는, 역사를 알고 사회를 알고 자기를 아는 데서 생긴다. 그래서 독서를 하고 대화를 하고 감동을 나눠야 한다. 두려움이 생기면 피하지 말고 충분히 느껴보라. 무엇이 그 두려움의 실체인지 가만히 체감해 보라. 그리고 마음 맞는 이와 그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 보라. 그러는 가운데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리고 서로 평화로워진다. 이 모두가 값진 삶을, 행복한 사회를 창조하는 기초다.

 

자본과 권력이 만든 스트레스 사회, 그들에게 이 망가진 세상을 되살려달라고 기대할 순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 누가 뭐래도 소통과 연대가 희망이다. 그렇게 해서 경제와 사회를 새롭게 살려내는 ‘더불어 혁명’을 해나가야 한다. 혁명이라고 해야 별 것 없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도록 기초부터 바꿔보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이윤을 탐하지 않는다. 남을 지배하는 것도, 남을 속여 잘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물같이 바람같이 자연스레 살자는 것이다. 그런 얼을 가지고 서로 힘을 합쳐 행복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삼중의 위기가 결국 삶의 위기로 나타난다. 흔히 말하는 경제 위기도, 실은 민중의 살림살이가 위험에 처한 상황이다. 위기는 자본이 초래했지만 위기로부터의 탈출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한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은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가?

 

자본이 삶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

 

자본은 그 속성상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한다. 한편으로는 개별 자본이 고용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다른 개별 자본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기업과 기업, 상품과 상품이 경쟁하는 상황이 강해질수록 개별 자본은 자신의 노동력을 통솔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요컨대, 노동자들끼리 경쟁을 열심히 하도록 잘 부추겨야지만 자본은 경쟁적으로 더 많은 이윤을 뽑아 올릴 수 있다. 이것이 자본관계의 본질이다. 이런 면에서 경쟁은 지배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명제가 성립한다.5)

 

최근 들어 “고용 없는 성장”, “정규직 없는 고용” 등이 화두가 되고 있지만 이제는 “성장 없는 경제”를 대비해야 한다. 오히려 “축소지향적인 사회경제”를 적극 모색하는 것이 참된 대안일지 모른다.6) 그렇다면 우선은 “성장 없는 경제”가 어떻게 해서 도래하고 있는지, 상호 연관된 몇 가지 측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 경제이건 세계 경제이건 팽창 국면이 끝나고 위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사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 경제는 약 30년 동안 줄기차게 성장했다. 선진국에서 복지국가가 건설될 수 있었던 물적 토대가 바로 이것이었다. 공장 규모를 키우고 생산량을 늘려도, 또 해외로 확장해도 받아줄 곳이 무한한 것처럼 비춰졌다. 그럴수록 완전고용의 신화는 더욱 커졌다. 이제 공황이나 위기는 더 이상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 외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면서 선진 자본은 위기에 빠졌고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깃발을 들고 나왔다. 1979년의 영국 대처 수상, 1981년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선두에 섰다. 이제 선진 자본들은 개방화, 탈규제, 민영화, 유연화 등의 기치를 내걸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온 세상에 강요했다. 그 와중에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중진국들도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결국은 선진 자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이른바 ‘틈새’를 공략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도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상징되는 금융 위기를 계기로 종말을 고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파국에 빠진 신자유주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시점에 있다. 캐나다 요크 대학의 D. 맥낼리 교수는 『글로벌 슬럼프』라는 책에서 “향후 세계는 10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될 슬럼프에 빠져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둘째, 시장 경쟁을 통해 성장과 분배를 추구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 자체가 “성장 없는 경제”를 촉진한다. 갈수록 경쟁이 격화하니, 기업들이 생고생해서 뭔가 생산을 해봐야 잘 팔리지도 않고 망하는 기업도 많이 생긴다. 성장보다 낭비가 심해진다. 생산의 측면과 시장의 측면을 간단히 살펴보자. 생산의 측면에서는 ‘피크 오일’로 상징되는 석유 위기, 나아가 모든 자원의 고갈 위기가 도사린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 노동력이 기계처럼 24시간 내내 일할 수도 없고 또 인권 침해를 당하면서까지 계속 묵묵 히 일을 하진 않는다는 면, 더 적극적으로는 서로 소통, 단결, 연대하여 집단적으로 저항하기도 하는 측면, 즉 인간 노동력의 주체적인 면도 자본에게 일정한 한계를 지운다. 다음으로 시장의 측면에서는 갈수록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공간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의 소련 및 동유럽 사회가 새로운 공장 및 시장으로 개방되면서 한계에 직면한 자본들 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지만 이제 그것도 포화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기업들은 유행이나 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소비 성향을 부채질하지만 갈수록 사람들은 일회용품보다는 내구재를 선호하고 윤리적 소비 내지 생태적 소비를 지향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시장 확장에도 일정한 한계가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범지구적 경쟁이 초래한 자가당착적 상황이다.7)

 

셋째로, 기술의 성격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성과들이 생산과정에 적용되면서 생산의 효율은 엄청 높여주고 있으나 결국은 노동력을 절감하거나 배제하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갈수록 기술은 대형화, 고가화, 복잡화하고 있지만 이제 사람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사람은 한편에서는 노동자로, 다른 편에서는 소비자로 기능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 모습인데, 노동배제적인 기술이 대거 투입되다 보니 실업 문제는 만성화하고 노사 간 협상이 있어도 상호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상호 투쟁이 고양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자는 생산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결사’ 항쟁을 해야 하고 기업은 하나도 양보하기 어려워 기존의 협약조차 ‘파기’하고 만다. 정부가 실업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아무리 돈과 인력과 제도를 갖추려고 발버둥쳐도 ‘한강에 돌 던지기’ 식으로 세금만 낭비하고 만다. 이미 40년 전에 E. 슈마허 선생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중간기술’을 주창하며 기술을 소형화, 저렴화, 단순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물레 돌리기’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8) 이런 인간적 기술들은 인간 노동을 중시하고 자립의 능력을 높이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고양시킨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투입되는 거대 기술 시스템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파편화하며 마침내 생산과정에서 추방하고 만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오늘날 경제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넷째로,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가 낳은 금융 부문의 거품 문제를 들 수 있다. 원래 화폐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물자들을 효과적으로 거래할 수 있게 돕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는 금융자본이 되었고 은행은 적은 돈을 갖고도 이자에 이자를 붙여 돈을 불려나가는 연금술사가 되고 말았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제 포기’를 선언하면서부터 달러는 금과 맞교환되지 않는 종이에 불과 한 상태가 되었다. 다만, 사람들이 가진 신뢰가 화폐 가치를 유지해주는 유일한 근거가 되고 만 셈이다. 그 뒤로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각종 파생 상품이나 선물상품 등, 실제 가치의 생산이나 유통과는 무관한 허구적 가치를 표시한 상품들이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 마치 M.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에서 호주의 참사람 부족이 “당신네 무탄트들(현대인과 같은 돌연변이 족속)한테는 사업이 일종의 도박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사업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물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죠. 또한 사업은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하구요. 이제는 당신네 경제 구조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오늘날 사업의 목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되어 버렸어요.”라고 말한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는 하루에만도 약 5조 달러의 돈이 돌아다닌다. 그런데 국제 무역의 수출입 결제를 위해 쓰이는 돈, 즉 실물경제를 돕기 위한 돈은 그 중의 3%도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 97% 이상의 돈은 금융자본이 몸집을 불리기 위한 각종 투기성 자금 또는 허구적 상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가 갈수록 실물경제라는 토대를 상실하고 허공의 풍선이나 거품처럼 떠다니게 되니, 과연 자본이 삶의 위기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있을까?

 

문명의 전환과 노동의 미래

 

이제 우리는 일의 위기, 땅의 위기, 얼의 위기 등 삼중의 위기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이러한 위기들이 결국은 자본의 돈벌이 위기와 맞물려 있으면서도 마침내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삶의 위기가 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자본이 결코 삶의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의지나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결국, 대안은 우리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살핀 바, 경제의 위축이나 경쟁의 격화, 노동배제적 기술의 확대, 그리고 금융 부문의 허구적 거품 증가 등 여러 측면은 우리로 하여금 ‘문명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명의 전환, 말이야 거창하지만, 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큰 것보다 작은 것을, 많이 먹기보다 적게 먹기를, 부자 되기보다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좀 달리 표현하면, 양보다 질을, 결과보다 과정을, 교환 가치가 아니라 사용 가치를, 이윤이 아니라 필요를, 소유 양식이 아니라 존재 양식을,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를,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구조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패러다임 전환이고 문명의 전환이다. 경제인류학자인 K.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의 품을 떠나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설치는 경제를 다시금 사회의 품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경제를 다시금 사회의 품속으로 깃들게 한다는 것, 이것은 결국 상품으로 변해버리고 만 노동, 토지, 화폐를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탈상품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다시금 평화공존의 관계가 활성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람의 내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은 정규호 박사가 『모심과 살림』 1호에서 정식화한 ‘사회적 진화’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즉, 문명의 패러다임은 과거 권위주의 통치 시대로부터 현재의 시장주도 경쟁 시대를 거쳐, 미래의 협동과 공생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9) 영국의 보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조차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인간 협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데 (주류) 경제학의 모순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가?10)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의 전환과 더불어 노동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나는 우선, 세 가지 측면에서 노동의 근본적 전환도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사람의 손노동이 중시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미래다. 앞서도 말한 바, 과학기술이 경제 과정에 투입되면서 인간 노동력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걸핏하면 정리해고 대상 내지 잉여 인간으로 취급된다. 세계시장 차원에서 살벌한 경쟁을 수행해야 하는 개별 자본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고가의 기계나 설비를 투입할수록 개별 자본은 ‘아직’ 잘리지 않고 살아남은 노동력을 더욱 가혹하게 짜야 한다. 그래야 빚도 갚고 본전도 찾고 나아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중간기술’ 내지 ‘적정기술’이 대안으로 부각된다.

 

이 부분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제주 해녀 이야기다. 추운 겨울에 산소통도 없이 해녀복만 껴입고 간단한 장비와 바구니만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들, 이들은 숨 한 번 길게 들이쉰 다음 다시 모두 내뱉을 때까지 해산물을 채취해야 한다. 이런 ‘원시적인’ 모습을 본 어느 외국 관광객이 이렇게 말했다. “해녀님, 산소통도 메고 장비도 세련된 걸로 갖추고 들어가면 지금보다 열 배나 많이 잡을 수 있을 걸요.” 이 말에 해녀가 말했다. “그렇게 많이 잡아버리면 우리 이웃들 아홉 명은 뭘 먹고 살게요?” 결국, 사람의 손노동이란 이웃과 더불어 사는 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기계적 효율성을 맹목적으로 드높이는 일은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나만의 편협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다. 반면, 손노동을 중시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은 좀 더디게 가더라도 나 자신의 삶의 자율성이나 삶의 지혜를 드높이는 길이며, 나아가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협동노동을 중시하는 사회가 희망적 미래를 연다. 지금의 경제는 개별 노동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해답인 것처럼 돌아간다. 그러나 앞서 말한 삶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고 이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협동 노동을 중시해야 한다. 예전의 우리 농어촌을 생각해보라. 집을 지어도 온 동네 사람들이 같이 지었고 모내기나 추수를 할 때도 같이 하지 않았던가. 길쌈질을 하고 옷을 만들 때도 이웃과 같이 했으며, 누군가 돌아가셔도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슬퍼하며 서로 도와 일을 치렀다. 오늘날 다행히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어 협동조합 식으로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은 구축되었다. 사실은, 그런 법이나 제도가 없어도 사람들 스스로 협동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부분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미국 백인 학교에 북미 원주민(인디언) 후손들이 전학을 왔다. 몇 달간 공부를 한 뒤에 선생님이 말했다. “얘들아, 시험 칠 준비를 하여라.” 이 말에 백인 아이들은 모두들 자기 책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옆에 있는 짝이 볼 수 없게 했다. 그런데 인디언 후손들은 달랐다. 그 아이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시험 칠 준비를 하지 않는 이 아이들을 보고 선생님이 화를 냈다. “아니, 너희들은 왜 시험 칠 준비를 않고 그렇게 게임만 하려고 하느냐?” 이에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예전부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항상 서로 협력해서 풀라고 배웠는데요.”11)

 

사실,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쓴 Ch. 다윈도 ‘자연 선택’이나 ‘적자생존’을 강조했지만 모두 환경에의 자연스런 적응을 강조한 것이지 ‘약육강식’을 말한 건 아니다. 특히, 다윈이 1871년에 쓴 『인간의 유래』는 자기희생적인 이타주의가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출현했다고 말한다.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늘고 도덕성 기준이 진보할수록 부족 전체는 타 부족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이 있어서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힘겹게나마 대안적으로 가고 있는 일부 사례들 속에서도 확인된다. 일례로, 인천의 키친아트나 청주의 우진교통은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의 대표적 사례인데, 이 기업들은 원래 기존 경영주가 극심한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버리고 떠나버린 회사를 노동자들이 인수해 십시일반 출자금을 투입하여 협동조합적인 자주관리 기업으로 재탄생시킨 조직들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기업들은 기존 기업들처럼 노동자 간 경쟁을 부추기거나 노동자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업들은 힘든 시절을 함께 극복하는 가운데 서로 신뢰하고 협동하며 자발성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쳤다.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조직의 효율성과 구성원 만족도를 동시에 높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인 셈이다. 결국, 신뢰와 협동이 새로운 효율성의 미시적 기초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지배적인 경제처럼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적대적 경쟁은 결코 인간의 미래가 아니다. 이 게임은 결국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로 갈라지는 ‘공멸’의 게임이다. 이러한 게임의 본질적 성격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우리는 대개 “내가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기만 하면 나도 승자 그룹에 속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공부도 그러하고 노동도 그러하다. 설사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공무원이 되어도 ‘승자’ 그룹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아니, 그런 환상을 품고 계속 개별 경쟁력 향상을 위한 일을 하는 한, 우리는 갈수록 깊이 빠지는 늪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이런 식이다. 필자가 고교생 시절엔 고2 겨울 방학부터 1년만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갔다면 요즘은 초등 시절부터 열심히 해야 대학을 갈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스트레스는 어린 시절부터 느낄 만큼 점점 빨라지고 있고 그 사이에 우리 모두는 ‘생존이냐, 잉여냐’ 하는 늪 속으로 더 깊이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 경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돌파구는 ‘협동’의 패러다임밖에 없다. 협동노동이 중요한 까닭이다. 오늘날 핀란드의 교육이나 일본의 사토 마나부가 제창한 ‘배움의 공동체’가 세계적 주목을 받는 까닭 중 하나도 ‘협력 학습’에 있지 않던가?

 

셋째, 비임금노동의 중요성에 다시 주목하자. 이반 일리치 선생이 강조한 ‘그림자 노동’은, 동일한 가사노동도 한 여성이 파출부로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하면 일정한 월급을 받지만 자기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면 아무런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용어다. 똑같은 가사노동이 그림자 속에 가려지듯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12)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인간 노동력 없인 돌아가지 못한다. 영국에서 15세기 이후 엔클로저 운동이 이뤄지면서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도시의 공장으로 쫓겨났다. 이들은 예전엔 땅과 더불어 자연 경제 속에 살다가 이제는 공장 노동으로 임금을 받아 연명해야 했다. 가면 갈수록 삶의 모든 과정이 돈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변했다. 일리치 선생은 『젠더』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의 주부는 시장에 가서 달걀을 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가스레인지를 켜고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 달걀을 부친다. 그러나 그녀의 할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닭장에 달걀이 있나 보고 그것을 집어 와서 집에서 만든 돼지기름 덩어리를 조금 떼어낸 다음, 아이들이 공유지에서 해온 땔감으로 불을 붙이고 사둔 소금을 달걀에 뿌린다.”

 

이 정도로 우리 삶의 조건은 변했다. 화폐독립적인 생활방식에서 화폐종속적인 생활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은 화폐의 식민지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삶을 화폐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 못지않게 화폐 식민지로부터의 독립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화폐독립적 생활방식의 활성화는 결국 손노동을 중시하는 일이나 협동노동을 중시하는 일과 연결된다. 이 측면들은 상호 상승작용을 하면서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 와중에 지난 수십(백) 년 동안 임금노동이 차지하던 ‘삶의 중심성’은 서서히 약화할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임금은 노동력에 대한 가격으로 주어진 화폐이지만 그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을 사는 ‘구매력’의 근거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던 생활방식이 손노동이나 협동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변할수록 임금에 대한 의존성이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 결과다. 일례로, 2013년 11월에 만나 친밀한 대화를 나눈 한 대기업 부장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입사한 지 12년 만에 부장을 달고 지금껏 일을 해왔는데, 향후 2-3년이 지나면 명예퇴직을 하고 귀농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귀농 준비는 약 10년 전부터 한 셈인데, 이미 집을 지을 땅은 보아둔 상태이고요. 귀농 후에는 크게 돈을 벌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돈을 적게 쓰면 되거든요. 일단 채소는 거의 자급할 생각이고, 차츰 과일이나 쌀도 자급할 것입니다. 집도 가능한 한 혼자 직접 짓거나 지인이랑 함께 지으려고 목수 일도 제법 배웠답니다. 아내는 천이나 옷으로 뭔가 만드는 일을 많이 배웠죠.”

 

다른 하나는, 임금이 ‘자본’의 한 모습이란 점이기 때문이다. 인간 노동력과 임금은 노동시장에서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호 교환된다. 그런데 이 임금과 맞교환된 노동력은 실제 노동 과정에서 임금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도록 채찍질 당한다. 이런 면에서 임금과 교환된 노동력은 ‘가변자본’으로 불린다. 생산 과정에서 그 가치의 크기가 변동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요컨대, 임금과 교환되는 노동력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자본의 몸을 불려주는 부속품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손노동이나 협동노동이 증가하여 삶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만큼,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이 삶을 지배적으로 규정하던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자본의 힘이 약화하게 된다.

요컨대, 손노동, 협동노동, 비임금노동이 늘어날수록, 그리하여 화폐독립적인 생활방식이 확산될수록 기존 사회경제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즉 실업 문제나 소외 문제, 생태 파괴, 불평등 문제 같은 것들이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업을 유발하고 소외를 일으키며 불평등을 조장하고 생태계에 해로운 노동을 ‘죽임의 노동’이라 한다면, 손노동, 협동노동, 비임금노동은 화폐독립적 생활방식을 장려함으로써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때문에 ‘살림의 노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텃밭 농사나 반찬 만들기, 옷 만들기, 집 짓기 등과 같은 일들은 귀찮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다. 때로는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점을 무릅쓰고라도 굳이 그런 걸 직접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예컨대, ‘건강’에 좋다는 점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나아가 ‘재미있다’, ‘즐겁다’, ‘보람을 느낀다’, ‘감동이 있다’라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 또,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내가 직접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삶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성이 향상되면서 ‘이것이 진정한 삶’이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쉽게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몸에 익혀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갈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강박에 스스로 갇힌 게 아닌가.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불편함이나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고 느낄 수 있는지 모른다. 특히 마음의 여유나 삶의 살가운 모습들, 그리고 자신이나 주변의 친밀한 관계와 같은 중요한 것들은 돈벌이 때문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아니던가. 지금부터라도 삶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노동 패러다임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근본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조건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노동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끼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면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실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조건들을 논해야 한다. 앞에서 손노동, 협동노동, 비임금노동을 강조했지만,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기는 어렵다. 게다가 지금은 정부나 경제계가 손노동을 경시하고 협동보다는 경쟁노동을 조장하며 임금노동만 중요한 것처럼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지 않은가?

 

이런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현실에 변화를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썩은 손톱 아래서 새 손톱이 조금씩 자라나 서서히 썩은 손톱을 자연스럽게 밀어내는’ 방식이다.13) 역사적으로 노예제에서 봉건제가 탄생하는 과정이나 봉건제에서 자본제가 탄생하는 과정이 모두 그랬다. 현재의 경제 역시 언젠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면 그 변화의 싹은 이미 현재의 경제 속에서도 자라나야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 현실을 다시 살피면, 바로 그러한 싹들이 이미 산재하고 있거나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사회적 과제는 바로 그러한 싹들을 더욱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촉진하는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 여건의 형성 과정을, ‘경쟁력’ 중심적 구조조정에 대한 대안으로 ‘삶의 질’ 중심적 구조혁신이라 부른다.14)

 

첫째, 땅의 경제, 자연의 경제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농사의 중요성, 먹을거리의 중요성, 식량자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 땅은 재산 증식의 수단인 ‘부동산’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이다. 이런 관점에서 잘못된 제도는 바로잡아야 하고 모든 생명의 토대로서 우리 모두의 공동 재산이라는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 유기농 농민을 공무원처럼 대우하여 생계 걱정이나 판매망 걱정 없이 농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젊은 청년들이 소신을 갖고 농사에 종사할 수 있는 획기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각 나라마다 식량 자급을 기초로 하여 약간 부족한 부분은 이웃 나라 사이에 호혜의 관계망을 통해 우애롭게 해결하는 방식이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일례로, 남미의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사이에 맺어진 ‘민중무역협정’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훌륭한 대안 모델이다. 특히 쿠바는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 관계가 단절되면서 식량난에 처했으나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땅이란 땅에는 모두 채소, 과일, 곡식을 심어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결과 20년이 지난 오늘날 식량자급률이 95%에 이르고 있다. 이 놀라운 사례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둘째, 영역을 막론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 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이뤄 내야 한다. 이것 또한 땅의 경제를 회복하는 것과 더불어 청년 실업 문제에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9명(M)이 10시간(H)씩 일을 해야 하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총 90M/H의 노동량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총량에서도 일자리를 늘리려면 노동 시간을 줄이면 되지 않을까? 즉, 15명이 일하되 모두 6시간씩 일을 하면 된다는 계산이다. 이렇게 되면 6명분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 좋고 각 사람들은 4시간씩 여유가 생겨 좋다. 그 정도로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여유가 생기고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 곧 발전이요 진보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보수 세력들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줄여 6명이 15시간씩 일하게 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이것은 실업을 유발하며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방향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을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아래 계속 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세계화를 매개로 범지구적으로 확산된다. 이런 식의 잘못된 변화를 학자들은 ‘바닥을 향한 경주 (race to the bottom) ’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극소수의 기득권층만 배를 불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사람은 늘리되 시간을 줄이는 방향의 구조 혁신을 해야 비로소 삶의 질이 증진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늘어난 여가 속에서 손노동의 즐거움을 느끼며 다양한 협동노동이나 비임금노동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분야, 즉 주거, 교육, 의료 문제를 사회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 추가로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15) 전자를 사회보장이라 해도 좋고 사회임금 또는 간접임금이라 해도 좋다. 이것은 후자의 기본소득과 함께 결합되면 사람들이 임금노동에 훨씬 덜 얽매이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특히, 이런 식으로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화하면, 아이들 교육이 지금처럼 극심한 경쟁 속에 내몰리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사회적 삶의 비용 중에서 각 개인이 직접 부담해야 할 부분이 갈수록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개성 있는 평등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즉, 고교나 대학, 심지어 직업까지도 지금과 같이 일류고교, 일류대학, 일류직장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그 개성을 존중받으며 평등한 대우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사실이다. 존엄성이 진정으로 인정되는 사회라면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갈-비의 법칙’ 16)을 작동시키는 자기 모순적 구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질서 속에서는 모두가 비인간화한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려면 ‘개성 있는 평등화’가 절실하다. 특히, 고교, 대학, 직업에 있어 만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사회적 대우를 비슷하게 한다면 우리는 자부심과 함께 겸손함을 갖고 상부상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치열한 생존경쟁이 사라질 뿐 아니라 각자 자신의 잠재력에 집중함으로써 나름의 실력을 맘껏 내뿜을 수 있어, 전반적으로 더욱 풍성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런 구상을 추동할 주체의 문제이다. 선거를 통해 이런 구상에 동의하거나 비슷한 구상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뽑을 수도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경기, 강원, 전라의 혁신 교육감 사례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민 사회에 그러한 전환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더욱 두텁게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부분적으로 실천하거나 주창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너도 나도 적극 결합하여 힘을 더욱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 텃밭도 좋고 생협도 좋으며 동화 모임도 좋고 교육 모임도 좋다. 마음을 열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다. 예컨대,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조차 단순히 제도적으로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잘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4천 개 이상의 지역발전 그룹, 15만 개 이상의 NGO/NPO 그룹, 30만 개 이상의 학습 동아리들이 그 밑바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7)

 

결국, 희망의 싹은 바로 우리 ‘안에서’ 나온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뭉치기만 하면 새로운 지도자나 새로운 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들이 모여 ‘헌 손톱을 밀어낼 새 손톱’을 키워낼 것이다. 마침내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밀어내는 그날이 곧 문명의 전환을 이루고 노동의 미래를 새롭게 여는 날, 즉 ‘살림의 노동’이 꽃 피우는 날일 것이다. 물론, 이 전환에는 결코 끝이 없다. 그것은 대를 이어 지속되는 꾸준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1) 졸저, 『경제와 사회의 녹색혁명』, 문화과학사, 2011.

2) 김수환, 소영현, 심보선 대담, “‘진정성’ 함부로 차지 마라, 넌 한번이라도 뜨거운 ‘잉여’였나!”, <프레시안 > 2013. 11. 8.

3) H. 헨더슨, 『그린 이코노미』, 이후, 2008, 82-98쪽 참조. 그녀는 특히 여성들이 수행하는 무보수 노동인 ‘사랑의 경제’ 및 ‘어머니 자연’인 생태계 자체가 전 세계 GNP의 절반을 구성함에도 공인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

4) 김준수, “대한민국 ‘20대 고졸’, 이렇게 삽니다.” <오마이뉴스> 2013. 11. 19. 참조.

5) 강수돌, 하이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이후, 2009 참조.

6) 대런 장, “탈성장: ‘경제성장 vs 평등’ 담론을 넘어서”, 『모심과 살림』 1호, 205-211 참조.

7) 최근 독일에서 ‘기업의 자유’만 외치던 자유민주당(FDP)이 의회로부터 퇴출당한 사건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김 누리, “독일 의회에서 퇴출당한 시장자유주의”, <한겨레> 2013. 11. 11. 참조.

8) E. F. 슈마허, 『굿 워크』, 느린걸음, 2011; 김종철, 『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 2010; E. F. 슈마허, 『내가 믿는 세상』, 문예출판, 2003;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문예출판, 2002 참조.

9) 정규호, “전환의 시대, 사회운동의 방향과 역할”, 『모심과 살림』 제1호, 99쪽.

10) <이코노미스트>, 2005. 12. 24. 참조; H. 헨더슨, 위 책, 53쪽 재인용.

11) 졸저, 『나부터 교육혁명』, 그린비, 2003 참조.

12) ‘그림자 노동’에 대해선, 이반 일리치, 『그림자노동』, 미토, 2005 및 박경미, “하느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녹색평론』 133호 참조.

13) 김진홍, 『새벽을 깨우리로다』, 홍성사, 2006. 참조.

14) 졸저, 『살림의 경제학』, 인물과사상, 2009. 또는 『팔꿈치 사회』, 갈라파고스, 2013. 참조.

15) 기본소득은, 괴츠 베르너, “시민권으로서의 소득”, 『녹색평론』 133호, 16-48쪽; 강남훈, 곽노완, 김종철 좌담,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녹색평론』 131호, 3-51쪽 참조.

16) ‘갈-비의 법칙’이란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야 승진과 출세가 보장되는 사회 구조를 지적한 말이다. 졸저, 『팔꿈치 사회』, 갈라파고스, 2013 참조.

17) 진노 나오히코, 『인간회복의 경제학』, 북포스, 2007. 참조.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