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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공생과 호혜의 관점에서 한국협동조합사 읽기
2016-06-30 15:32: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공생과 호혜의 관점에서 한국협동조합사 읽기

- 천도교 공생조합운동을 중심으로

 

이경란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협동조합의 역사 속에서 공생과 호혜의 경험 찾기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조합 지역사회’라든가 “지역을 사회적 경제 생태계로 만들자”라는 말들이 자주 오르내린다. 오랫동안 협동조합인들의 꿈이었던 협동조합 지역사회의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온 듯하다. 정부에 의해 추동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기업들이 대거 등장하고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으로 많은 협동조합들이 생겨나는 지금, 사회적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을 넘어 ‘시급하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늘긴 했지만 상당히 많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자립하지 못한 채 외부의 지원에 기대 있는 현실이고, 그런 취약함을 지탱해줄 만한 연대활동은 충분히 자리잡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연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그럼 그 연대의 목표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계열별 협동의 원리가 많이 작동한다. 농협중앙회나 생협 연합 조직들이 그러한 연대의 결과이다. 이는 각 조직의 운영 안정화와 조합원의 필요 충족이라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연대활동이다. 그런데 그 연대의 목표를 ‘사람’에 둘 경우에는 연대의 관계가 좀 달라진다. ‘한 사람을 둘러싼 생활 생태계는 어떠해야 할까’, 또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연히 떠오르는 것이 ‘지역’이다. 다양한 영역의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주민들의 삶과 지역사회 경제 구조를 협동적이고 호혜적인 공생 사회로 전환시켜 가는 협동조합 지역사회, 사회적 생태계 구축으로 방향이 잡힌 것이다. 생활의 터전인 ‘지역’과 ‘마을’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관계망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국내외 여러 경험들이 모델로 등장했고, 사회적 경제계에서는 벤치마킹의 붐이 일고 있다. 원주나 홍성군 홍동면에 가면 오랜 시간 묵묵히 협동적 지역사회를 만들어 온 곳에 대한 감사와 경외감을 느끼고, 서울의 성미산마을같이 거대 도시 속에서 주민들이 자기 필요를 협동으로 풀어가는 모습에서 새로운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가능성에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해외에서도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델로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나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지아 지역, 캐나다 퀘벡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모델을 보는 것은 희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실체를 접한다는 점에서 힘을 준다.

 

이런 움직임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역사 속에서도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까지, 협동적 지역사회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호혜와 공생의 사회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억압적인 사회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는 부단히 이어져 왔다.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협동조합 지역사회와 같은 논의는 처음이 아닌 것이다.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다각적으로 시도되었고, 수많은 성과와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는 중에 현재 우리 협동운동계가 마주하고 있는 고민거리들을 성찰하는 단초를 얻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은 현재 남북한의 협동운동 맥락 속에 면면히 살아있다. 홍성 홍동면 풀무학교와 협동적 지역사회의 역사적 연원은 일제 하 평북 정주에서 만들어졌던 오산학교와 협동적 지역사회였다. 이는 사회개혁과 민족해방을 꿈꾸는 기독교인들의 이상인 ‘이상촌운동’이었다. 이상촌운동은 만주 지역의 이상촌운동으로도 연결되며, 해방 후에는 월남한 이들에 의해서 <사상계>의 인맥으로도 모이고, 함석헌과 원경선으로도 이어진다. 바로 현재 한국 생협운동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는 흐름이다.

 

사회주의 협동조합의 맥은 북한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초반 한반도를 뒤흔든 함경남도의 농민운동 세력은 단천이나 홍원과 같은 군 지역 전체를 해방구처럼 만들었다. 사회주의 농민조합운동 역사상 대표적인 이 운동의 내부에는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과 각 부문별 세대별 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농민운동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된 구조라 할 수 있다. 저항적 운동조직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제도개선 운동을 하는 한편 일상의 호혜적 관계망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 경험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이 지역사회를 이끌어가는 인물들, 나아가 북한정권을 만드는 한 그룹의 역사적 연원이기도 했다. 북한 사회에서 수월하게

협동조합 또는 협동농장, 소비자협동조합을 기반으로 농업과 상업이 재구조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경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협동조합 또한 남북한 체제화 과정에서 이념과 종교에 기반한 방향으로 분단되어 있다. 그런데 여전히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 전체의 공존과 공생을 염두에 둘 때,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역사 속에서 남북의 이념 대립 혹은 체제 대립을 완화시키거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찾으려는 시도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공생과 호혜의 관점에서 협동조합사가 재구성될 필요이다. 현재 남한에서는 국가와 개인만이 살아남던 사회 속에 협동적인 공유섹터가 성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국가와 협동적 사회 구성 속에서 장마당과 같은 개인적 섹터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볼 때 협동운동 진영에서도 남북한이 함께 논의하고 공통의 경험을 놓고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하는 현실을 보면서 한국협동조합 또는 협동운동사를 공생과 호혜라는 과점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에서는 그간의 학계 연구 성과에 기대 ‘공생’과 ‘호혜’의 관점에서 현재의 협동운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을 성찰할 수 있으면서도 남북한의 공생과 호혜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는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공생’이라는 말을 협동조합에 붙여 활동했던, 식민지 시대 가장 큰 사회 세력의 하나였던 천도교 공생조합의 이야기다.1)

 

 

인내천의 생활화와 사회개벽을 실현하는 천도교 농민공생조합

 

천도교 농민공생조합은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천도교 신파(천도교청년당으로 활동) 그룹의 농민운동조직인 조선농민사의 협동조합운동이었다.2)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조선 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식민지 지주제라는 구조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의 현실을 타개하려는 방안이 다각적으로 모색되었다. 그 하나의 흐름이 ‘농촌계몽’과 ‘농민의 단체적 훈련’을 통해 농민들의 빈궁을 해결하자는 목적으로 1925년 천도교 세력과 여러 사회운동 세력이 힘을 합해 만든 조선농민사였다. 조선농민사는 농민 계몽과 더불어 농민 현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잡지 『조선농민』을 발행하였다. 각 지역에 구독자 모임이 조직되었고, 필진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와 토론회,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잡지를 매개로 확장되었던 조선농민사 조직은 1928년 무렵에 군 농민사, 면 농민사에서 리 농민사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조직이 가장 컸던 평남 맹산군의 경우, 1925년 『조선농민』 구독자 200명을 모집하여 조선농민사 맹산지사가 설치되고 리 농민사도 85개 리에 조직될 정도였다. 그 결과 1930년에는 사원이 3,300여 명으로 전군 주민 호수의 46%에 달했고 1932년 무렵 전국에서 가장 성장한 농민사로 꼽히기에 이르렀다.

 

조선농민사의 활동은 크게 농민 계몽을 통한 ‘신인간’으로서의 농민 주체 세우기, 공동구매와 판매를 하는 알선부 사업, 나아가 공생조합을 통한 협동적 경제 관계망 만들기에 집중되었다. 농민사는 농민 계몽을 위한 야학을 설치하여 한글·산술·일어·습자를 가르치고, 농촌지도자 강습회를 열어 한글·산술·작문·상식·경제·조선근세사 등을 가르쳤다. 동시에 독서회를 열어 대중독본·대중산술·주산·작문·상식 등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덕분에 맹산군의 천도교인 중에서는 문맹자가 사라졌고, 농민사원이나 공생조합원도 문맹률이 매우 낮아졌다. 군 농민공생조합은 이익금 중 1%를 각 리의 야학 및 교양운동비로 충당하였다.

 

또한 1926년부터 ‘알선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생산품 공동판매 및 필요 물품에 대한 공동구입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번지고 있던 소비조합운동 방식을 낮은 수준에서 도입한 것이다. 사원들이 출자금을 내 자본을 마련하고 공동구입과 판매 활동을 통해 그동안 중간상인들에게 빼앗기던 이윤을 농민들에게 되돌려 스스로 경제상황을 개선하려는 활동이었다. 알선부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자 천도교청년당은 1931년부터 알선부를 소비조합인 공생조합으로 개편하고 이를 전국 조직으로 통제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는 천도교청년당이 농민사를 조직적으로 장악하여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치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재조직해가는 과정에서 진행된 변화이기도 했다.

 

이들은 공생조합을 “농민 대중의 상호부조를 원리로 하는 경제운동”을 하는 ‘당면획득운동’ 조직으로 규정하였다. 즉 중간상인배에게 이윤이 착취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고, 이 조직의 확대를 통해 사회의 경제 제도가 갖는 결함을 고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한 것은 단순한 경제적 당면이익 획득을 넘어 천도교 세계관으로 일깨워진 농민대중들이 협동으로 만드는 지상천국의 건설이었다.

 

이들에게 지상천국은 “모든 사람이 서로 한몸이라는 관념 아래서, 또는 사람이 우주의 주인공이요 만물의 영장인 위대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정신 밑에서 농업을 토대로 하여 서로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도우며, 그 생활로 하여금 조화를 얻고 균형을 얻고 그리하여 진보와 향상과 발전이 있게 하”는 천도교 세계관이 실현되는 ‘후천개벽’ 세상이었다. 공생조합은 지상천국 건설 과정에서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조직이었다. 천도교인들이 상호부조의 협동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며, 서로의 삶을 지원하고 민중 스스로 사회 경제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 그 성과를 보고 모인 사람들을 천도교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인간(신인간)’으로 개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생조합 활동은 협동적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개인의 정신개벽을 이루는 일상적 협동의 생활화에 방점을 두었다. 우선 공생조합은 조합원의 출자를 기반으로 공동의 자본을 조성하고, 소비부·생산부·신용부·이용부·위생부의 5개 부서를 두어 조합원들의 생활과 활동을 조직화하는 종합농협의 성격을 띠었다. 그동안 중간상인들에게서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던 포목, 잡화, 석유, 염료, 미곡 등의 생활필수품들을 공동구매해서 염가로 구입하는 혜택을 누렸고, 공생조합 덕에 지역 주민들의 삶도 변화되어 갔다. 각 군별 공생조합은 저렴한 가격으로 생필품을 공급하는 염매시를 여는 등 지방의 고高물가수준을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강동에서는 상인들이 공생조합에 대응하기 위해 상인단체를 조직하고 공생조합보다 낮은 가격에 물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공생조합이 설치된 많은 지역에서 상권의 변화는 컸다. 정평이나 삭주에서는 소상권을 장악하였고, 선천에서는 공생조합 설치 이후 의료기관과 특수품 알선 기관까지 생겼으며, 정주에서는 농민창고가 설치되는 등 지역사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공생조합이 안정적으로 경영하며 조직세를 빠르게 확대할 수 있던 요인의 하나는 공생조합들과 천도교 조직이 긴밀하게 협동하는 구조 덕분이었다. 공생조합이 각지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민공생조합 관서연합회가 창립되었다. 관서지방 조선농민사의 알선부 활동이 곧바로 공생조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3년째인 1933년 무렵 공생조합은 전국 300여 개의 지부와 10만여 명의 조합원 규모로 커졌고, 그에 기반하여 공생조합 경영 관리 및 운영 통제와 물품의 유통 활성화를 위해 조선농민공생조합중앙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공생조합은 중앙회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의사결정구조를 만들고 중앙이 각 지역의 공생조합을 통제관리하는 조직으로 재구성되었다.

 

소비의 결집이 이루어지면서 생산 부문에서의 변화도 일었다. 공생조합중앙회는 지방 공생조합의 출자를 받아 주요한 소비품인 고무신을 생산하는 농민고무공장을 설립하여 ‘농’표 고무신을 공생조합에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에서의 협동으로 이어지면서 이상촌운동의 활동 기반을 만들어가게 되었다. 동일 조직 내의 수직적 협동을 통해 유통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생산 활동까지 가능하게 된 경우였다.

 

이러한 빠른 성장은 1930년대 초반 생존 위기에 몰려 있던 농민들의 절박한 요구에 부응했기에 가능했다. 특히 192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소비조합들이 경영난에 빠지고 있던 시점에서 조직적 협동구조를 만들어 경영 문제를 개선했던 공생조합의 안정성이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공동경작과 이상촌운동

 

1932년 천도교임시대회에서 “천도교인들이 공동으로 생산 사업에 종사하여 실제 서로 협동하는 정신을 양성하고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공동경작계 조직과 천도교자주촌 건설 방향이 결정되었다. 천도교자주촌은 공생조합, 공동경작, 리 단위 청년회와 부인회, 소년회 등 활동별 세대별로 조직되어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 생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마을의 생활을 주도한 것은 리 청년회였다. 리 청년회는 매일 아침 일정장소에 모여 정말(덴마크)체조를 하였고, 매주 토요일이면 조 대표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공동작업을 하였다. 매 시일侍日은 회원 전부가 모여 교리 연구를 하고 신문·잡지를 강독했다. 일상적인 모임을 통해 인내천 원리를 학습하고 생활 방침을 공유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청년회는 소비조합을 조직해 회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해갔다. 리 소비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자본을 조성하고, 출자금의 일시 불입이 어려운 경우에는 분할 납부도 가능하게 하여 빈농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출자금과 적립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토지를 매입해 공동경작계를 조직했다. 소비조합은 본래 목적대로 농촌 소비품을 공동구입하였는데, 동시에 빈貧농가를 위해서 소와 돼지를 사서 주거나 가난한 아동들의 학비를 보조하는 등 마을의 상호부조 조직의 역할도 했다. 알선부가 행하던 소비품 공동구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을 단위 상호부조 조직인 일상적 생활협동 조직이 된 것이다.

 

공생조합은 천도교인이어야 가입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어 마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천도교에 가입했다. 공생조합에 가입하면 청년회·부인회·소년회라는 천도교청년당의 조직체계 속에 들어가 조직활동을 했으며. 적극적으로 마을이나 면 단위에서 운영하는 농민야학과 농민강습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문맹이 사라지고, 아이들은 배움을 얻으며, 공동경작을 통해 마을의 자산을 늘려가는 일도 가능해졌다.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주민생활개선운동을 시작한 곳에서는 관혼상제의 허례를 폐지하고 외국산 의복의 금지 및 국산품 애용 풍토를 살리고 금주를 실천하는 등 농민의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마을에서는 언제나 독서회와 신문강독회가 열렸고, 농민학원도 설치되었다. 위생부가 조직되어 매월 15일과 30일을 위생데이로 정해 청결 활동을 하고, 파리를 박멸하기 위해 파리 잡는 기구를 공동구입하기도 했다. 소년 조직도 만들어져 소년들 스스로가 경제 사업으로 소년경리사를 만들어 일용소비품을 공동구매하고 그 이익금으로 소년회의 학습비와 기타 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공생조합이 소비조합운동에 머물지 않고 이상촌 만들기로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은 공동경작이었다. 1933년경부터 각지에서 본격적인 공동경작계가 설립되었다. 공동경작계는 토지를 매입, 개간 또는 임대해서 공동으로 경작하거나 기타 생산 사업에 공동으로 협력 종사하고, 그 수입은 공동 저금하여 계원의 자작농화를 위해 융통하거나 조합원 간의 애경사에 상조를 하고 천도교회 사업에 기여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공동경작이 갖는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동경작이야말로 일반사원의 교양과 훈련을 농한기만이 아니라 농번기에라도 할 수 있고 방내房內에서만이 아니라 야외에서라도 할 수 있다. 집단 생활의 가정적 단락으로 침체된 성의를 진작할 수 있으며 아직도 원시농업 상태를 미면한 우리로서 농사를 이론으로부터 실지에로 연구 개량할 모범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사社의 모든 경비를 원만히 조달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공동경작으로 함으로써 사세확장 문제, 교양 문제, 경제사업 문제 등등 사의 모든 활동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니 지도를 받기만의 사원이 아니라 지도를 하는 사원 즉 수동적의 사원이 아니라 자동적의 사원을 얻을 수 있다”3)

 

생존 위기에 처했던 농민들에게 농민공생조합 활동과 천도교농민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져갔던 지역사회의 모습은 생명줄과 같았을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는 느낌이랄까? 그곳에 참여하면 공동경작을 통해 자신의 토지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배움을 얻고, 혼자서 살아가야만 하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농민강습회를 통해 농업 기술을 배우고, 자신이 처한 사회 현실도 알고, 천도교 교리 공부를 통해서 자신이 진정 한울임을 확인하는 가운데 농민들은 새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협동조합 설립 붐이 일어나는 배경을 생각할 때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공동경작은 소규모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천도교자주촌을 만든다는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일상생활과 경제생활 전반에 걸쳐 공생조합원, 농민사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 활동과 공유 영역 확대를 통해 개인과 지역사회, 그리고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신생활의 실질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천도교 농민공생조합이 가진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초기의 소비조합운동과 달리 소비조합 활동을 매개로 공동경작과 같이 토지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더불어 영성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인간형을 키워간다는 천도교만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과 사회와 민족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삼대개벽론에 기초한 천도교 이상촌운동은 이 시점에서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4)

 

 

 

 

삼대개벽과 생활의 발견

 

천도교 공생조합과 이상촌운동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초는 천도교 이념이지만, 그 이념은 그것의 해석자에 따라 다르게 활용되어 왔다. 종지인 ‘인내천’ 사상을 근대사상으로서 어떻게 재해석하고 사회화하는가에 따라 당시 사회 속에서 대처하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천도교 신파의 조선농민사를 지탱해주는 ‘인내천’ 사상을 사회운동의 논리로 전환시킨 것이 정신개벽-사회개벽-민족개벽을 추구하는 ‘삼대개벽론’이었다. 1910년대부터 시작된 천도교 교리를 근대사상의 언어로 바꾸고 확산했던 것이 1920년대 초반부터 천도교청년회가 발간한 잡지 『개벽』이었다. 『개벽』은 제목 그대로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과 후천개벽을 근대적 사회사상으로 드러내고, 당시 새롭게 퍼져가고 있던 근대사상들 속에서 주도권을 발휘하고자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잡지는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사회사상가 또는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1920년대 전반기 한국 근대 사회사상의 틀을 주조한 공론장이었다. 그 속에서 한국 사회주의 사상의 담론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문화주의와 결합하거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의 논리와 연결해 천도교 사상을 설명하고 그것과 천도교의 차이를 찾아내기도 했다.

 

천도교 세력은 사람들의 개조에 의한 새로운 문화 확립과 문화적 역량 강화를 통해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점진적 민족운동에 집중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삼대개벽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이었다. 개인은 ‘자아 안에 들어있는 우주의 대자아와 접속’하여 자기를 정화하는 정신개벽을 통해 자주·자립·자력적인 신인간이 될 수 있으며, 신인간은 타인과 사회를 위해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절제하는 인간으로서 서로 협력하여 사회 개조와 민족의 정신적 개벽을 이루는 존재였다.5) 그 사람의 생활의 변화, 즉 ‘신생활’의 실천이 사회 개조의 기초이며 민족성 개조의 길이었다.6)

 

삼대개벽과 공생조합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생활’에 대한 이해이다. 이들에게 신생활이란 단순히 생활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안에서 한울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의 개벽을 뜻한다. 그 사람의 생활 자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을 함께 이뤄가는 사람들 속에서 개벽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공생조합운동은 이러한 영성의 회복과 그 영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일상적인 필요를 함께 해결하는 협동적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현재 우리의 협동조합운동이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역사적 경험이다. 한국 협동운동계에서 한살림이 동학사상을 자기 뿌리의 하나로 삼고 있으며, ‘모심’과 ‘살림’의 원리나 ‘생활’의 중요성이 생협운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며 천도교 농민운동의 맥이 우리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의 생협운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일깨움이 모여 생명을 살려가는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형성되어 온 과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생협이 제도화되고 규모화되는 과정에서 생협운동의 근저에 있던 영혼의 일깨움, 자신과 모든 생명 안에 숨 쉬는 한울(창조주, 생명의 근원)이 서로 마주하는 경험은 점차 사라지고 ‘합리적 소비’만 남는 느낌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생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조합원들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생협 안에서 연결되는 생명의 그물망을 깨달아가면서 자기 삶과 사회개혁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주도권 경쟁, 깨어진 연대

 

천도교 농민공생조합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이러한 일깨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의 천도교 농민운동과 공생조합운동을 흔쾌히 본받기만 하기에는 마음 편치 않은 점이 많다.

 

역사학계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처럼, 1920년대 중반의 천도교청년당, 즉 조선농민사를 좌우하던 이 조직을 기반으로 천도교는 자치운동을 시작했고, 조선농민사 또한 이 자치운동의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대중조직으로 위치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 일본의 파시즘화가 강화되고 만주와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천도교청년당은 공식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었다. 결국 공생조합운동은 그 독자성을 상실하고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어 버렸다. 이러한 천도교의 친일화, 그리고 일제의 농정에 흡수당해 버린 공생조합운동의 결과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런 경험은 현재 한국협동조합운동이 행정주도형 제도화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과 전망을 어떻게 형성하고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할 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빚게 된 요인의 하나는 식민지 민족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사회운동/민족해방운동 세력 사이의 경합과 갈등에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천도교는 식민지 시기에는 현재로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세력이었다. 인내천 사상이 갖고 있는 신분제 철폐 등의 반反봉건적·근대사상적 흐름과 근대자본주의적·기계주의적 사회 질서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의 강조는 당시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깊게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근대적 종교사상이나 사회사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사상, 사회주의 사상, 상호부조적·노자협조적 사상 등 당시 사회에 유입되던 다양한 사회사상 조류와 결합할 수 있는 사상적 포용력도 가졌다. 유연하면서도 폭넓은 사유를 할 수 있는 동학사상의 장점이 발휘되는 시점이었다.

 

이러한 조직력과 사상적 자부심은 천도교 스스로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이들의 삼대개벽 사상은 그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 초반까지는 새롭게 성장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그 세력들과 협력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폭도 넓히고 사회주의 세력의 보호막도 될 수 있었으나,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서로 경합하는 관계가 되어갔다. 동시에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급성장해 있던 기독교 세력과는 이미 그 지역 내의 경합 관계에 있었다. 평안도 지역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평안도 일대는 서북 지방이 받아온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과 양반제나 지주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이 결합되어 프로테스탄티즘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고, 교육운동도 활발하여 많은 선교사가 세운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정주 지역의 오산학교나 평양의 숭실대학 등은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동학농민전쟁으로 초토화 되었던 남부 지역과 달리 북접의 중심이 이동했던 평안도 일대에는 1900년대 초반부터 천도교가 급속히 자리를 잡았다.

 

일정한 세력 균형을 가지고 있던 1920년대 중반, 천도교청년당과 기독교 세력 일부, 그리고 민족부르조아운동 세력 등 자치운동을 추진했던 그룹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개혁론, 즉 점진적인 사회개혁(개조)의 방법론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고, 점점 커져가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 필요성을 느껴 공동행동을 시작했다. 이상촌운동은 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보다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역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생활의 안정과 자치력을 키운다는 논리와 연결되어,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살아남으면서도 사회를 개조해갈 방법은 ‘자치’를 통한 공간의 확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사회주의 세력은 계급투쟁론의 입장에서 무산대중들의 조직화와 그들간의 연대를 통한 일본 제국주의 전복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었고, 그 입장에서 자치운동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1927년 좌우합작운동조직 신간회 결성, 1929년 원산총파업과 1930년대 초반의 혁명적 농민운동의 폭발은 노동자 농민운동의 주도권을 사회주의운동에서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활동이었다. 이 운동들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어 지하운동화되고 말았다.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천도교 신파는 대외 활동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위 조직인 천도교청년당 조직 강화를 추진했다. 이들은 좌파 진영의 계급운동이 계급독재를 통해 어느 한 부문만을 주권자로 만드는 것이므로 평화로운 이상적 사회를 형성하기 어렵다고 보아, 각 부문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조정할 수 있는 전적운동을 의미하는 당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졌다. 그들이 전적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든 부문 조직이 천도교소년회, 천도교내성단, 조선농민사, 천도교청년회, 조선농민사 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조직을 기반으로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그것을 통해 자치운동이 가능하리라 전망하였다. 공생조합운동은 그러한 시기에 자치운동을 위한 조직체로 활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천도교 신파의 친일화에 따라 공생조합운동은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좌우합작을 기초로 한 신간회 운동을 전후하여 천도교 신파 세력은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 떨어졌다.7) 1920년대 초기 민족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연대활동을 해오던 세력들이 서로의 방법과 태도에 대해 공격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면서 연대는 깨어지고 말았다. 현상적으로 볼 때 공생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1930년대 초반 모든 사회운동 세력은 그 운동의 꽃을 피우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연대가 깨어진 이후 곧바로 일제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아 독자적인 민족운동/사회운동 세력으로서의 역할은 급속하게 축소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사회개혁의 방향성

 

친일화의 또 다른 요인은 이들을 포함한 자치운동과 실력 양성을 통한 점진적 사회개혁론이 사회개혁에서 자기의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 농민운동 세력들은 기독교 농민운동 세력과 더불어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농업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나는 농민 자신의 개혁을 통한 농업 생산 증가, 생활 개선 및 협동적 조직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총독부를 향한 제도 개선 요구였다. 구체적으로는 지주 중심의 농정을 폐하고 소작농의 자작농화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 소작법 제정을 통한 소작제도의 개선, 농업 경영의 다각화를 통한 생활형 농업으로의 전환, 공동경작과 협동조합 설립을 통해 생산과 소비를 협동적으로 영위하는 농민조직화, 저소득 빈농층에 저리 금융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신용조합 설립이나 금융조합 지원 확대 등을 요구해 왔다.

 

이런 요구는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세계대공황의 타개책으로 선택한 파시즘농정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일본 내부에서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의 만주 침략과 더불어 중장기적인 병참기지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농업공황으로 인한 농민들의 심각한 몰락, 사회주의 농민운동의 격렬한 조직적 저항, 조선인 자본가들의 조선인 본위의 정책 요구 등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와 맞물려 식민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 통제와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노동자 농민들의 경제 개선을 통한 체제 내 통합이라는 방향을 내세웠다.

 

농촌진흥운동은 표면적으로는 태만과 게으름에 빠져 있는 농민들의 정신생활을 변화시켜 자주성을 회복시키고, 농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고리채를 저리 부채로 전환할 수 있는 정책 자금을 지원하고, 자작농 창정을 위해 지주층에게 토지 매각을 설득하고, 농민들에게는 토지 구입 자금을 대출하며, 모범 농촌을 만들어 마을 전체의 생활을 개선한다는 방안을 수립하였다. 심지어 1930년대 중반 본격적인 전쟁기로 접어들면서 금융조합은 농촌 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식산계를 조직해갔다. 식산계는 농민 전부를 통제 조직 속에 편입시켜 전쟁 체제에 복무시키는 농촌조직화의 일환이었지만, 이를 통해 개별 빈농에 대한 농자금 대부가 가능해지고 공동 판매와 구매 조직이 전 농촌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동안 지주층을 농업 정책의 주요 파트너로 삼아 왔던 조선총독부로서는 농정의 커다란 전환이었고, 표면적으로 볼 때 농민을 배려한 정책이었다. 이는 그동안 일제의 농정을 비판해왔던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특히 소작 문제의 해결을 강조해왔던 사람들은 소작 조건과 소작 관계를 완화해 줄 소작법의 제정 방향이나 자작농지 설정 사업을 그동안의 요구가 수용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천도교청년당은 농촌진흥운동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당연하게 자신의 산하 조직인 조선농민사와 공생조합의 활동을 농촌진흥운동과 발맞춰 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공생조합운동의 자주성이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천도교청년당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일전쟁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고 전국적인 교단 조직을 활용해 시국강연회, 특별기도회, 출정병사 환송 등 친일 협력 활동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38년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단체로 참여,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결성, 1940년 국민총력천도교연맹으로의 재편 등을 통해 관제 친일 기구의 일부가 되어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동학농민전쟁을 통해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 조직이 친일에 앞장선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이미 1900년대 초반 동학의 후예 중에는 일진회와 같이 문명개화와 인민의 생존권이 국가 주권보다 앞선다는 생각을 표명한 세력이 있었고, 1920년대 이들은 자치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것이 본격적인 전쟁 체제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인종주의, 나아가 인류주의와 결합되어 친일 논리로 전환되었다. 이미 시세는 세계 대결에서 승리할 일본에게 있으므로 그와 융화되어야만 새로운 신질서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8) 그 과정에서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가 공식 노선으로 천명되었다. 대동방주의는 더 이상 민족 독자의 생존을 모색하지 말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협동하여 황인이 동양을 수호하자는 것으로, 그동안 취해 왔던 ‘민족개벽’의 포기였다.

 

“종교운동이나 정치운동의 최초 발단이 다 같이 개인주의 사상에서 시작하여 가지고 그것이 점차 확대되어 민족과 사회를 통하면서 종교운동으로 정치운동으로 변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거니와 천도교 사상도 역시 그 경로를 밟아 개인주의로 민족주의로 인류주의에까지 도착한 것”이라 하여9) 민족을 넘어선 최종적 단계로서 인류애, 인류주의가 제시되었고, 동방은 인류애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 설정되었다. 동방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조선민족의 권익과 문화 등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 ‘조선민족 자치’는 포기되어야 하며, 두 민족의 융합을 통한 공동번영이 추구되어야 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새로운 ‘국가민족’ 속에서 내선일체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었고, 이런 국민화 논리는 모든 이상의 건설과 현실적 생존의 근거를 국가로 보고 국가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과 헌신을 강조하는 국가지상주의로 연결되었다.

 

 

개인과 조직의 자주성과 민주주의

 

천도교청년당이 친일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을 할 때, 각 지역의 농민사원들이나 공생조합원들의 의견이 어떠했는지 또는 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민족의식이 꽤 높았던 천도교인들 속에서 천도교 신파의 친일논리가 말단조직까지 확산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천도교청년당의 중앙집권적 조직체계의 한 부문 운동인 농민공생조합의 의사결정 구조에 주의를 둘 필요가 있다. 1932년부터 조선농민사는 ‘통제구’를 설치하여 농민사와 공생조합에 대한 통제와 지도 체계를 마련하였다. 공생조합중앙회도 농민사의 지도와 감독을 받았다. 중앙회 대표는 농민사 경제부장이 맡고, 지방공생조합 대표는 군 농민사의 경제부장이 겸직하도록 했으며 지방공생조합은 결성과 동시에 중앙회에 가입해야 했다. 천도교청년당의 결정에 따라 조선농민사는 어느 때고 공생조합의 운영과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취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을 취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와 더불어 농민사와 공생조합이 행한 농민 계몽이 천도교청년당의 사회운동 방향과 점진적 사회개혁론, 자치운동론들을 일상적으로 학습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상기해보자. 또한 이미 방대해진 천도교의 조직 체계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사회주의운동 조직들처럼 일제의 탄압에 집요하게 저항하면서 붕괴당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직의 보위가 중요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써 ‘시운시변時運時變’의 논리로 친일을 받아들였다.

 

그런 조건에서 개별 공생조합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활과 경영 부분에서는 자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 조직의 운명이나 그 정치적 방향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조직에 참여하는 개인과 그 조직을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의 단위들 사이 자립성과 민주적 소통구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중앙집권적 조직 체계가 갖는 기본적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천도교 신파의 이상촌운동이 친일과 결합되며 식민 정책에 흡수되어버린 것과 달리 천도교 내부에는 다른 흐름도 있었다. 천도교연합회는 천도교 내의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전라도 등 남부 지역의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세를 형성했다. 남부 지역은 식민지 지주제의 폐해가 가장 극심하게 드러난 곳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 의식이 더 컸다. 삼남 지방의 천도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개벽은 토지 문제의 해결이었다. 당시 이들은 식민지 현실에서는 토지 문제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다고 보아 만주로 이주하여 공동촌을 설립하고 그것을 민족해방운동의 기초로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국내에서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좌우합작에 적극적이었다.

 

이들과 천도교청년당의 사고방식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차이는 조직운영 방식이었다. 이들은 천도교청년당이 갖고 있는 계급적이고 위계적인 차별제를 없애기 위해 개인 본위와 지방교회 중심의 교회 운영으로 바꿀 것을 촉구하였다. 심지어 “교주와 소사의 봉급을 동일하게 하라”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사회적·경제적 평등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화하여 교주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고 일반 교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에 따라 협의제로 운영되는 제도를 만들려 하였다. 주권자의 독재제는 협의제로, 대도주의 천선제(교주의 지명에 의한 세습제)는 인선제로 변경하려 했고, 지방교회 중심의 교회 운영을 위해 성미금의 2/3을 지방에 주고 1/3을 연합회로 보내도록 함으로써 전 교회를 지방교회의 협의제적 성격을 띠는 연합회로 운영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신개벽의 핵심인 개인의 수기정심에 의한 심적 수양을 중시하는 것을 한 사람 한 사람의 평등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인간성 발휘를 막는 계급 차별과 전제구속적이었던 제도와 식민 지배질서를 타파하고 인본적 개인 본위의 신제도를 만드는 것을 사회개혁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 나아가 공산주의 사상과 인내천이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았다. 연합회에 속한 상당수의 천도교인들은 천도교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을 함께 받아들였고,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만주 지역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 활동을 하려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고려혁명당은 “오등의 인간적 실생활의 당면의 적인 모든 계급적 기성 제도와 현재 조직을 일체 타파하여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 자유, 평등의 이성적 신생활을 건설함,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항하는 우리들에 공명하는 피압박민족과 결합하여 동일전선에서 일치하는 보조를 취함”을 강령으로 삼아 활동을 시작하였다. 물질계와 정신계의 개벽을 통한 자유·평등한 세상에서 신생활을 영위하는 길은 민족해방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도 넘어서는 사회를 전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로써는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여러 세력들과의 통일전선,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여러 국가들과의 연대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혁명당과 같은 무장투쟁까지 결합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자들과의 좌우합작 필요성을 강조한 이들의 논리는, 천도교청년당에 비해서 세력은 약했지만 해방 이후 진행된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중요한 입지를 갖는 관계망과 사회개혁론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천도교계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정치 조직인 천도교청우당은 남북한에 조직·운영되었고, 특히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30여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기반으로 북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이자 북조선 민전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한 정권 수립과 여러 사회개혁에 함께하였다. 새롭게 구성된 북조선청우당은 당면의 임무를 “소비에트 연방 및 제 민주주의국가와의 우호를 강화한다, 모든 반일본 제 정당과 함께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한다, 모든 대규모 산업을 국영화한다, 토지를 국유화하여 빈농층에게 나누어준다, 국민교육 체계를 개선한다, 20세 이상의 모든 국민들에게 활발한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국민의 언론, 출판, 집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 속하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건설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내걸었다.

 

청우당 당원은 주로 농촌에 거주하는 천도교인이었는데 대부분이 빈농이었다. 이들은 북조선공산당과 달리 토지 문제에 관해서는 국유화의 방향을 강조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그들은 ‘동귀일체의 신생활 이념에 기초한 신경제 제도의 실현’을 경제개혁론으로 제시했는데, 그를 위해서는 모든 악의 근원인 소유 제도를 철폐하고 토지뿐만 아니라 자본주의화한 공장도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개혁의 동일한 방향 덕분에 두 당은 1946년에 진행된 북한의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 남녀평등법, 노동법령 등의 민주주의 개혁을 함께 수행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1953년 한국전쟁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협동농장화 과정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공동경작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우리 안과 밖의 공생과 호혜사회

 

천도교공생조합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조직이고 활동이었다. 그 역사적 경험의 여러 측면들을 섬세하게 검토해본다면, 현재 우리의 협동운동뿐만 아니라 남북한 사회의 전환 논의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영성과 생활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주요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 논의를 협동조합을 통해 실현하고 새로운 이상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운동 속에 결합한 것이 천도교 공생조합운동이었다. 이는 동학(천도교)이 가지고 있는 세계 인식의 주요한 부분이다. 일상 속에 지상천국이 존재하며, 그것은 개인의 수양과 협동하는 호혜적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즉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구상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개인 주체와 조직 주체가 자주성과 민주적 의사소통 그리고 의사결정구조를 상실했을 때, 공생과 호혜의 구조는 아주 좁은 의미에서만 작동할 뿐 그 사람과 조직을 둘러싼 사회 구조는 오히려 왜곡될 수 있다는 점도 잘 보여주는 경우였다. 같은 인내천 사상을 두고 아주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는 것 또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무엇을 중심에 놓고 사상을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할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돌보고 서로 돕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작은 공동체 속의 자족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전체 사회를 자기 속에 넣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이 사회 전체가 호혜적 공생관계를 만들어가는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세운다는 것일 테다.

 

또한 언제나 시민운동과 협동운동은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마련해가는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그것을 제도화시켰을 때 상당 부분 왜곡되어 버리는 경험을 많이 해왔다. 그럴 때 의제를 주도하지 못하고 휩쓸려버린다. 특히 서로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합의하지 않고 주도권 경쟁에 빠질 때 그 결과는 늘 상황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정체성과 지향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뤄갈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연대의 원칙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천도교의 공생조합이나 이상촌운동을 넓게 본다면 그 속에서 남북한 양측의 협동운동에 대한 공통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안목으로 볼 때, 현재의 남북한 사회구조가 동떨어져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맥에서 갈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논의는 협동운동의 바깥에 놓여있는 남북한 관계를, 서로의 바깥에 놓여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이미 서로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내부적 존재로 보고 공존과 공생,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 갈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면 남북 간, 그리고 두 사회가 각각 협동사회, 공생사회로 전환해갈 물꼬를 열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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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서. 2004.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정치노선과 활동(1945-1948). 『한국사연구』 125호.

정용서. 2011. 일제말 천도교세력의 친일활동과 논리. 『한국근현대사연구』 58집.

김정인. 2009. 『천도교 근대민족운동 연구』,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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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미 외. 2012. 『한국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 푸른나무.

이경란. 2013. 한국 근현대 협동운동의 역사와 생활협동조합. 『역사비평』 102호.

 

 

1) 이 글의 천도교 공생조합활동에 대한 내용은 참고문헌들에 의존해 쓰였다.

2) 천도교세력은 단일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시기 가장 큰 세력은 천도교 신파와 그들의 사회운동조직인 천도교청년당이었다. 그리고 이 신파의 운동방향에 동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화를 꾀했던 그룹이 천도교 혁신파와 천도교연합회조직이었다.

3) 이기환. “공동경작을 시작하면서”. 『농민』 1932년 5월호. 30쪽.

4) 이렇게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협동조합 활동은 천도교 공생조합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기독교협동조합운동이나 사회주의적인 혁명적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도 이 시기에 이르면 각자의 사상이나 이념에 기반한 인간형을 꿈꾸며, 그들이 지역에서 협동조합과 농민운동, 협동조합과 노동운동, 협동조합과 교육운동을 통해 만들어가는 세상을 만드는 활동을 전개했다.

5) “그 사회의 생존과 진보를 위함에는 육체와 정신이 강건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국민을 요한다. 특히 그 힘을 남용치 아니하고 사회 전체를 위하여 공헌할 줄 알며 타인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需用을 능히 제한함과 같은 강건한 개인을 요구한다. 즉 사회심이 최강한 개인개인을 요한다”(김기전, 「사회봉공의 근본의식」, 「개벽」 10호, 1921.4, 12쪽)

6) 그럴 때 그 민족은 스스로 강하며, 활동하는 민족이다. 민족해방운동의 논리에서 본다면 실력양성론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7) 천도교 구파는 신간회 결성의 주요 세력이었다.

8) 여암(최린). 「천도교의 금후진로에 대하야」, 『신인간』, 1935년 5월호.

9) 조기간. 신앙의 갱생과 제도의 재건. 『신인간』, 193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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