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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다람살라의 스마트폰
2016-06-30 16:59: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다람살라의 스마트폰

- 변화하는 티베트 난민 문화

 

오은영 (“티베트 난민과 함께하는 록빠” 활동가)

 

 

티베트 난민과 다람살라

 

해발 1780미터. 인도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 주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다람살라는 인도와 네팔, 티베트를 가로지르는 히말라야 산맥의 한 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그리고 20만 명에 이르는 티베트 난민들의 정신적·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거처와 50년 넘는 세월 동안 풍찬 노숙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합니다.

 

1959년 중국에서 망명한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베트인들이 다람살라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 1961년,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람살라는 티베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 되어왔습니다. 중국이 지배하는 티베트를 떠나오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눈 쌓인 히말라야를 넘다가 중국 경찰에 잡히거나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은 꾸준히 인도로, 이곳 다람살라로 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50여 년간 티베트인들이 왜 고향을 버리고 난민의 삶을 택했는가에 대해 설문조사와 같은 객관적인 자료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중국의 지배 이후 꾸준한 정치적 압박, 종교 활동에 대한 탄압, 티베트어 사용 금지와 같은 문화적 제약이 큰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중국인에 의해 경제마저 장악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거나 생활이 어려워서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티베트 언어와 문화, 종교를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은 학생과 승려들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열 살 티베트 소녀 빼마는 다람살라에 가서 티베트어와 티베트 문화를 배우라고 부모님이 친척 아저씨와 함께 인도로 보냈습니다. 한 달 가까이 히말라야를 걸어서 넘으면서 코피가 나서 울기도 하고 부모님이 보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인도에 와서 7년이 지난 지금 고등학교 졸업반인 왕모는 내년에는 대학에 진학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녀의 가족은 가난한 유목민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은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무얼 배우겠냐며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와서 학교를 다니게 된 왕모에게 인도는 배움과 기회의 땅이 되어주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제2의 고향 다람살라의 과거, 현재

 

티베트인으로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제 2의 고향, 다람살라. 이곳은 어떤 곳일까요? 달라이 라마가 다람살라에 정착하던 해에 태어난 인도인 싱은 자신이 어렸을 때는 훨씬 더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었던 시절의 다람살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 친구들과도 가까이 지냈고, 돈은 비록 부족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도 티베트어가 능숙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티베트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들은 하나 둘씩 외국으로 떠나버렸고, 이제 이곳을 찾는 티베트인들은 더 이상 다람살라에 관심이 없다고 그는 쓸쓸하게 말했습니다. 다람살라를 그저 거쳐 가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요즈음의 젊은 티베트인들이 그에게는 함께 마음을 나눌 이웃이 아닌 것입니다.

 

다람살라는 지난 50년 동안 꾸준히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30년 전 처음 다람살라를 방문했고 그후 지금까지 다람살라를 오가고 있는 영국 출신의 비구니 사라 스님은 만약 그 당시 누군가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다람살라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서나 인터넷을 하고, 술집과 식당이 늘어선 다람살라의 모습 말이지요. 참으로 작은 산골 마을이었던, 나라를 잃고 망명정부를 따라 떠도는 가난한 난민들이 모여 살던 다람살라, 그것이 사라 스님이 기억하는 다람살라의 모습입니다. 그런 상황이 바뀐 것이 달라이 라마가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부터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유명해지면서 덩달아 다람살라를 찾는 외국인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경제적 파급 효과 또한 적지 않다고 합니다. 실제 어느 핸가 티베트인과 현지 인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자 티베트 난민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는 달라이 라마의 말에 히마찰 프라데시 주지사가 찾아와 정중히 사과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티베트 난민 사회의 문화

 

이렇게 현재의 다람살라는 과거와는 무척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단 몇 년 전에 이곳을 찾았던 여행자들도 새로 들어선 건물과 상점들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곳이 바로 이곳 다람살라입니다. 그래서 난민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 전쟁이나 기아로 난민이 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주기도 하는 곳이 바로 다람살라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한자리에서 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곳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겉모습만큼 하나의 사회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문화라는 것을 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공유하는 문화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시대, 그리고 자본주의, 혹은 물질문명의 사회, 그리고 첨단의 기술사회와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티베트에서 태어나 인도로 온 많은 이들이 문화적 격차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화적 격차의 성격이나 정도는 출신 지역이나 계층에 따라서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이전과 현재의 세대 간 차이도 큽니다. 15년 전 어린 나이에 동생과 함께 인도에 온 장축은 시골 마을 출신입니다. 그에게는 인도가 신세계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왕모의 경우처럼 장축은 자신이 티베트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렇게 컴퓨터를 쓰거나,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니거나, 핸드폰으로 채팅을 한다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울 수 있는 다람살라에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고향 마을에 남아 있을 친구들과 친지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도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20세가 넘어 인도에 온 남걀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는 처음 인도에 와서 티베트의 고향 마을과 달리 너무나 더러운 데다가 수많은 거지들이 손을 내미는 모습에 질렸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젊은 세대들이 경험하는 티베트와 인도는 비록 중국의 지배 하에 있지만 티베트가 경제적으로는 더 발전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 경제의 지배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는 별개로 하고 말이지요. 그러니 티베트 문화를 배우고 자유롭게 종교를 믿기 위해서 왔다고는 하지만 다람살라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이럴 바에는 어딘가 다른 나라로 떠날 기회를 찾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세대, 계층, 혹은 각자 문화적 영향 속에서 벗어나 다람살라라는 한정된 공간에 모여 있는 이들 티베트인들이 공유하는 문화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 문화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장축과 남걀에게 다람살라에서의 생활은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다람살라의 티베트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다람살라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물질문명, 첨단기술의 영향 아래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외국인이 오가는 다람살라야말로 문화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터미널, 혹은 허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배경과 목적을 갖고 다람살라에 왔든 티베트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람살라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 문화 그 자체입니다.

 

첨단의 물질문명과 만나는 티베트인들

 

7년 전 티베트에서 인도로 온 소남은 외국에 간 친구가 보내주어 스마트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내 다른 친구들이 가진 최신형 휴대폰을 부러워만 하다가 드디어 자신도 하나 장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스마트폰이 왜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친구들 모두 가지고 있거든요. 아, 아니지요. 이 스마트폰으로 친구들이 단체로 채팅을 하는 데 사용하는 위챗(we chat)이라는 프로그램을 깔면 심지어 티베트에 있는 가족들과도 음성과 화상 채팅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60이 넘은 소남의 어머니도 티베트에서 소남과 위챗으로 안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최신형 아이폰을 장만한 다와에게 비싼 아이폰을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쑥스러운 표정의 다와가 한 대답은 티베트에 있는 누나가 보내준 용돈으로 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돈 1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는 티베트 사람들이 자기 돈으로 비싼 스마트폰이나 아이폰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특히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비싼 다람살라에서 생활 자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경제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티베트, 혹은 외국에 있는 티베트 친지들입니다.

 

티베트에서 가족 중 한 명을 인도로 보내고 남아있는 가족들이 생활비로 돈을 보내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최근 들어 티베트에서 넘어오는 많은 티베트인들이 인도에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람살라를 정거장 삼아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로 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에 보낸 가족이 현지에서 자리를 잡아 티베트의 가족을 마저 부르거나 경제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이 과정을 거쳐 외국에 거주하는 친지가 있을 경우 다음 단계는 좀 더 쉬워집니다. 형제, 자매 혹은 친척을 외국으로 바로 부르거나 아니면 다시 다람살라를 거쳐 다른 나라로 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 다람살라에 머물고 있는 티베트 출신의 청년들은 티베트에서, 혹은 외국에서 보내주는 경제적 도움에 주로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고, 많은 경우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갈 준비를 한다는 명목 하에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러니 당연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수준의 일일지라도 말이지요.

 

한편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티베트나 해외의 친지들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지금과 같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티베트의 가족과 연락이 끊겨 전전긍긍하거나 인편에 소식을 전해야 했지만, 급속한 경제적·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는 티베트 현지는 물론이고 다람살라에서조차 인터넷을 이용한 접촉은 보편화되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생활수준을 뛰어넘는 소비에 대한 욕망, 이것이 왜곡된 물질문명이 빚어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일례로 아이폰은 컴퓨터에 설치된 아이튠즈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이나 영화를 동기화하지 않으면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은행 통장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은 티베트인들은 신용카드 정보가 필요한 앱스토어에 등록할 아이디조차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람살라에는 컴퓨터도 없고 아이디도 만들 수 없는 아이폰 사용자들에게 음악이나 영화를 대신 복사해 주는 가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돈을 주고 구입한 스마트폰이나 아이폰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소비자들입니다. 그들이 그 첨단 기술의 결정체를 가지고 누려야 할 콘텐츠는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실제 삶의 모습과 상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인 경우도 많지요. 이것이 단지 그들이 소비자 가운데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게다가 심지어 난민의 신분이기 때문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인들이 급속하게 이런 문화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인인 제이크는 티베트인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종 만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고 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함께 모여서도 언제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게임을 하거나, 위챗으로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친구들과 채팅을 하기 일쑤라는 것이죠. 미국에서는 그런 행동은 정말 무례한 거라고 제이크는 말합니다.

 

최근 필자가 일하고 있는 NGO인 ‘티베트 난민과 함께하는 록빠’에는 새로운 규칙이 하나 생겼습니다. 업무 시간에는 위챗 사용 금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로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는 위챗은 이렇게 업무도 방해할 정도가 되었지요. 점심 식사 시간에 각자 전화기를 들고 음성 메시지를 보내느라 정작 옆에 있는 동료와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함께 모여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요즘의 문화를 돌이켜보니, 과연 새로운 기술과 문화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사회의 일부가 되며 성숙한 문화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을 쓰면서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뒤섞이는 문화들 속의 티베트 문화

 

티베트 현지, 인도의 난민 사회, 그리고 또 다른 나라에 흩어진 사람들. 이렇게 여기저기 나뉘어 각기 다른 사회,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것입니다.

 

티베트어를 가르치는 따시 선생님은 중국에서 스물한 살에 인도로 왔습니다. 처음 인도에 와서 영어도 인도어도 잘 모르던 시절, 인도 사람들이 티베트어 단어를 섞어서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단어는 본래 인도어였고, 인도를 다녀온 티베트인들 덕분에 티베트어에 섞여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2010년 필자가 티베트를 여행할 때 수도 라싸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 노블링카에서는 인도의 대중적인 음료인 짜이를 파는 카페가 영업 중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인도를 오고가는 티베트인들이 전파한 문화입니다. 티베트에서의 문화가 인도로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문화가 반대로 티베트로 흘러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티베트 현지에서는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자연스런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강력한 중국화 정책의 결과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문화의 뒤섞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과정입니다. 록빠에서 일하는 스태프 중 비교적 최근에 인도에 온 라모는 티베트어보다는 중국어가 쓰고 읽고 말하기에 더 편합니다. 티베트어는 집에서 부모님께 배우고, 학교에서는 중국에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티베트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유럽과 미국 등의 다른 나라에 난민으로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2, 3세대 자녀들 역시 문화적으로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에 해당하는 TCV(Tibetan Children’s Village)에는 해외에 살고 있는 티베트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티베트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태어나 나라도 아닌 망명 정부와 난민촌을 모국으로 여기고 찾아온 아이들과 티베트의 가족을 떠나 히말라야 산맥을 목숨을 걸고 넘어온 아이들 사이에는 큰 정서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자녀들을 이곳으로 보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도록 하려는 열의를 가진 부모와 그에 따라 다람살라를 찾는 학생들의 존재가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텐진은 휴학을 하고 다람살라에 티베트어를 배우러 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려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네팔의 국제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대학을 간 경우입니다. 국제학교에서 각 나라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의 자녀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 그는 회화에 비해 부족한 쓰기나 문법을 좀 더 제대로 배우기 위해 다람살라에 왔습니다. 하지만 텐진이 느끼는 티베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다람살라의 티베트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부모를 비롯한 많은 티베트인들은 티베트의 문화와 종교를 배우고 지키기 위해 험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고 낯선 타국에 자리를 잡기위해 노력했는데, 티베트의 문화는 히말라야 저쪽 너머의 티베트 땅에서도, 힘겹게 넘어온 인도 땅에서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위협받고 있는 티베트인의 삶과 문화

 

재일 조선인 학교의 생활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하나가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끼리 살고 있으니까 우리 것을 조금 소홀히 하고 열심히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생활 속에서 지켜지지만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일본 문화에 흡수되어버리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우리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약 이 말을 티베트인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곳이 중국 지배하의 티베트일까요, 아니면 자유를 찾아온 이곳 다람살라일까요? 아니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떠나간 다른 어느 나라일까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팝송을 부르거나 힙합 댄스를 추는 일,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일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라면 누구나 누리고 싶은 문명이자 문화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지켜지지 못하고 곧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티베트 문화의 쓸쓸한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소위 근대화, 중국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해방’을 경험해야 했고, 이제는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갑작스레 내던져진 티베트 사람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위협하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먼 길을 떠나온 티베트인들을 위협하는 것이 실제로는 이곳다람살라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인 것입니다.

 

현재는 정치적 권력을 민간에 이양했지만 여전히 티베트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끊임없이 중국 정부에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치를 허락한다면 기꺼이 돌아가겠다고 제안해 왔습니다. 국방과 외교에 관한 권한은 중국 정부에서 가져가도 좋다는 것이지요. 단지 티베트인으로 살고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최소한의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인으로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티베트 현지에서, 망명지 다람살라에서, 그리고 또 다른 희망을 찾아 떠나간 티베트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티베트인으로서의 삶과 문화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습니다.

 

결론을 대신하여

 

앞서 살펴본 많은 사례들만을 놓고 본다면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비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긴 시간을 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희망의 증거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낯선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고, 살아남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오늘도 여전히 달라이 라마의 거처가 있는 남걀 사원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오체투지를 올리며 ‘세상의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이라고 기도합니다. 산길을 걷던 아저씨가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멈춰서 마른 땅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지렁이를 축축한 나무 아래의 그늘로 옮겨주는 일은 참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TCV 학교 운동장에 쓰인 커다란 글귀는 ‘others before yourself’, ‘come to learn, go to serve’입니다.

 

2013년이 끝나가는 지금도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50년이 넘는 시간을 거치며 각자가 속한 사회와 문화 속에 동화되어버리거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남을 위하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기원하는 심성만은 아직 티베트인들에게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이 따뜻한 마음이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습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필자가 다람살라에서 생활하며 만난 사람들입니다. 난민인 그들의 신분을 고려하여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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