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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죽음의 자율성과 생명에 대한 고찰
2016-07-08 14:39:00

 

죽음의 자율성과 생명에 대한 고찰

 

나준식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민들레의원 내과의사)

 

 

들어가는 글

 

내가 몸담고 있는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올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 어르신들의 건강돌봄 사업을 시작했다. 지역의 민관 복지자원들의 협력을 통해 기존의 복지서비스로부터 소외된 돌봄의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협동과 나눔을 통해 돌봄과 건강한 노년의 삶을 만들어가자는 취지다. 이 사업의 한 영역으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가 어르신들을 직접 가정방문하는 주치의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각종 복지자원과 의료서비스가 연결되고 어르신 리더들이 발굴되면 이들과 함께 여러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갈 예정이다.

 

그러나 주치의사업이 진행되고 어르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과 맞닥뜨리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고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문제다. 계획된 사업의 진행과 실적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사업과 활동의 성과로 우울증 척도에서 호전되는 결과를 보여줄 것이고, 아름다운 노년의 삶과 마무리에 대한 소개나 프로그램도 배치되어 있으니 구색은 갖추어 있다. 하지만 건강, 복지, 삶의 질 그 모든 문제의 근본에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있다는 점을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풀어갈 방도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많은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맞이해야 할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 것들은 사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방법이나 대책은 없다. 그것은 나의 삶 속에서 마찬가지로 풀어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진료실을 찾는 80~ 90대의 어르신들 가운데, ‘죽게 해줄 수는 없느냐, 이렇게 살아서 무얼 하겠느냐,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이 끔찍하다.’라고 호소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 분들은 몸이 건강치 않지만 그나마 스스로든 도우미에 의지해서든 병원에 나올 수 있는 분들이다. 병원조차 나오기 어려운 여건에 있는 어르신들의 경우는 어떨까?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경우에는 늙고 병들어서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미안해하고, 홀로 사는 분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자신이 사회에 짐이 되는 것을 미안해한다.

 

이런 저런 몸과 마음의 고통을 가져온 근본은 외면한 채, 약에 의지하고 약만 먹어도 배부르다 할 지경에 이르게 만든 건 나를 비롯한 의사들의 잘못이다. 어르신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아프면 쉽게 병원에 와서 약을 먹으니, 죽어야 할 쓸모없는 늙은이들이 죽지도 못하고 온 천지에 깔려 있다고.

 

어떻게 죽음 문제를 다루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원고 청탁을 받고서 ‘내가 죽어보지 않고는 죽음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었다. 살아 있는 한 죽음을 경험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그 딜레마는 바로 죽음을 육체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시각에서만이 존재하는 것인데, 지금의 나는 그런 육체적인 죽음과는 다른 관점의 죽음, 매순간 ‘거짓 나’의 죽음과, 삶과 죽음을 넘어있는 ‘참 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간다. 개별의 나, 몸이 나라는 생각, 내 것, 내 삶, ‘나’가 있다는 생각, 자신을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수준에서만 죽음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끝나고 사라져야 하는 육체적 ·물질적인 차원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이지만 내가 처한 구체적 현실에서 죽음 문제를 다루는 데 제대로 한걸음 나아갈 기회라는 생각으로 어수선한 이야기라도 풀어내보려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23인의 환자들의 죽기 전 모습과 사후의 모습을 나란히 사진에 담은 책 『마지막 사진 한 장』(베아테 라코타, 웅진지식하우스, 2008)에서)

 

죽음에 대한 다른 시선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

어쩌면 참으로 고리타분한 질문이란 생각이 앞설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옛 선조들이 평생을 화두로 삼아 얻어낸 인생의 네 가지 고통, ‘생로병사’란 답을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것으로, 내가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인 양, 피하고 말지도 모른다.

 

의사는 직업적으로 매일 많은 이들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함께한다 . 누구보다도 죽음을 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 나 역시도 많은 죽음들을 목격했거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해왔다 . 장례지도사란 직업이 더 많은 죽음을 경험하겠지만, 그들이 죽음 이후에만 일한다면 의사는 죽어가는 과정, 즉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한다 . 그러나 이런 특별한 기회를 부여받은 직업을 가진 의사들이 그렇다고 인생의 네 가지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더 민감하거나 죽음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알거나 삶에 더 진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소아보다는 노인들을 주로 진료하는 내 경우에는 늙음 , 질병 , 죽음이란 말을 더 많이 떠올리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 의미를 충실하게 내 삶에 반추해 볼 기회가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나는 많은 환자들이 겪는 고통의 순간들에 대해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로병사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심히라도 말해주는 의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비록 환자나 그 가족에게 욕을 듣게 되더라도 고통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그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의사가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해 강의를 해왔던 어떤 분은 신문의 부고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거의 매일 새로운 죽음 소식을 보고 듣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나의 죽음과는 무관한 듯 스쳐 지나고, 부정하며 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나의 죽음 문제가 현실로 닥치는 순간에는, 그동안 외면했던 죽음들로터 아무 것도 배우고 학습된 것이 없으니 난생 처음 접하는 일 앞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 꼴이 된다.

 

우리가 언제부터 죽음을 이렇게 터부시해왔을까? 내가 어린 시절이던 1970년대만 해도 상여소리와 함께 집 앞으로 지나가는 상여행렬을 종종 보곤 했다. 호기심에 장례행렬을 따라 동네 야산의 공동묘지까지 가보기도 했고, 집안에 천막을 치고 장례를 치르는 곳을 기웃거리는 일도 흔했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은 집이 아닌 큰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아졌다.(표 1) 이것은 죽음을 멀리하고 피하고 삶과 떼어 놓고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예전에는 모든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집에서 임종을 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손자와 손녀가 다 지켜보고, 세상을 떠나는 가족의 마지막 삶을 가족 구성원이 옆에서 보살폈고, 죽음은 결혼처럼 우리 일상사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표 1> 2004~2014년 사망 장소 변화  자료: 통계청(단위 : %)

 

몇 년 전, 서울 어느 구에서 ‘웰다잉을 위한 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 준비교실’의 강의 준비를 담당했던 공무원의 이야기다. 처음엔 강좌 제목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는데, 상부에서 결재를 해주지 않아 몹시 애를 먹었단다. 후에 죽음 대신 웰다잉으로 바꿔 넣었더니 비로소 계획했던 강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죽음이란 단어조차 얼마나 혐오스러워하고 기피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영화 속 이야기지만 , 루게릭병에 걸린 주인공이 점차 사지가 마비되면서 맞게 되는 임종을 그린 < 내 사랑 내 곁에 3> 속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장례지도사가 바람직한 죽음 문화의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 행사를 열면서 경로당 노인들에게 관 속에 들어가 볼 것을 권유하는데, “이게 지금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야, 뭐야? 노인네들 모아놓고 희롱하는 거야?” 하는 폭언과 함께 폭행까지 당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무관심과 부정, 회피, 그리고 혐오인 경우가 많다. 몸이 건강할 때,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성찰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최근에는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도 만들어지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나서서 ‘죽음, 그리고 아름답고 존엄한 나의 삶’이란 웰다잉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죽음 교육, 존엄한 죽음 등이 점점 공론화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죽음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가장 큰 변화의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도 있었다. 이른바 ‘웰다잉법’, ‘존엄사법‘이라 불리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안’1)이 입법된 것이다. 이 법은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8년에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의사들은 가족이나 보호자의 요구와 동의하에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 1997년 일명 ‘보라매 사건’ 이후 의사들은 연명치료 여부에 관한 모든 결정에서 배제되었고 연명치료를 지속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부인의 요구로 퇴원시킨 중환자실 환자가 사망하자 환자의 동생이 의료진을 살인죄로 고발한 사건으로, 대법원은 부인에게 살인죄를, 보라매병원 의사들에게는 살인방조죄를 적용했다. 이후 2009년 ‘김할머니 사건’은 이런 분위기를 급반전시켰다. 식물인간 상태로 입원해 있는 김할머니의 가족들이 병원을 상대로 낸 연명치료 중단 요구 소송에 대해 대법원은 김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9년 만에 연명치료중단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연명치료를 대체로 원치 않는다. 201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88.9%가 연명치료를 반대했다. 10명 중 9명은 연명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통계다. 찬성은 4.9%에 불과했으니 연명치료에 관해서는 이미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통계에 의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이 지금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어떤 것을 원하는가 물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위 법은 ‘안락사 허용’만큼 적극적인 죽음의 선택은 아니지만, 무의미한 연명의료행위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의 과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의미는 연명치료에 대해 불가피하고 현실적인 결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논란에 기준을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영향을 미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호흡이나 심장박동, 뇌의 기능과 같은 생물학적이고 생리적인 경계를 지어놓고 죽음을 정의하고 이야기했던 우리의 관점에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동안 터부시되어 왔던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주할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회문화적 변화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우리 개인의 내면의 의식 변화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죽음은 본래적인 삶의 한 부분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근본 문제와도 닿아있지만, 우선은 의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통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의학협회 내 ‘죽음의 정의 위원회’에서 1983년에 죽음을 “심장기능 및 호흡기능과 뇌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1993년에는 「뇌사에 관한 선언」에서 “사망은 심폐기능의 정지인 심폐사 또는 전뇌기능의 소실인 뇌사로서 판단한다”고 하여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법적으로는 2000년 “미성년자의 장기기증을 막고,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사실상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로서 뇌사가 죽음으로 인정되었다. 뇌사의 죽음 인정 여부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의학계에서 논란이 된 것이며,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장기이식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죽으면 다 끝난다고 전제하는 뇌사와 심폐사처럼 육체 중심의 죽음 이해가 만연하면서 장기이식이 활성화되었을지는 몰라도, 또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의 15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는 자살률은 어찌 보면 죽으면 다 끝나므로 자살하면 고통 역시 끝난다는 논리로 생명을 이해한 결과일 수 있다. 또 죽음의 질이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의식을 돌아봐야 할 이유다. 우리가 현재 추구하는 삶의 질이나 행복이라는 것도 물질적 풍요를 쫓는 사회 구조와 의식으로는 근본적인 한계에 도달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볼 이유가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한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이다.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는 철학이나 종교, 사회적 판단의 문제를 떠나, 현재 내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태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고, 그럴 때 죽음은 더 이상 벽이나 끝이 아니라 그 문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나서는 일로 현재의 삶과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현세적 삶이 전부인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죽음을 삶에서 분리하고 소외시켜 왔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그의 전체 삶에서 소외시키면 시킬수록, 삶 그 자체도 비인간화되고 소외된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포함해야 온전할 수 있는 삶은, 죽음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기형적이 되고 왜곡된다. 죽음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우리 삶이 영원할 것처럼 현혹된 채 살아가는 건 모래성을 쌓는 것보다 허망한 삶이다. 죽음이 없는 삶은 어떨까를 상상해보라. 시간이며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며, 우리의 감정, 생각, 의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듯이, 죽음이 없는 삶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삶의 가치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의 가치는 삶으로부터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미국의 한 심리학자의 연구가 신문에 소개된 바 있다. 사는 게 힘들고 버겁게 생각되면 공동묘지를 걸어보라는 내용이다. 의외로 공동묘지에 가면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 자신과 남에 대한 해악을 최소화하는 생각과 자세를 갖게 된다고 한다. 전반적인 인생 목표와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시 매기게 되며,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증가하여 술과 담배를 줄이게 되고 건강을 챙기게 된다고 한다. 또한 공동묘지를 정기적으로 산책하는 사람은 낯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아 나그네를 도와주는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높아져 인내심, 평등의식, 연민, 감정이입 그리고 평화주의에 대한 동기가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납골당조차 혐오시설이라며 사람이 사는 동네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반대하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인식도 이렇게 공동묘지를 걷고 난 사람처럼 쉽게 바뀔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성찰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주어진 삶을 더 충만하고 빛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삶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영적인 성장의 기회로 승화시켜 나감으로써 죽음이 갖는 의미를 더욱 깊게 확장시켜 나가게 될 터인데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명연장 의료기술의 발달도 죽음을 터부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의료진도 죽음을 삶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중요한 한 단계로 보지 않고 의료의 패배나 실패로 보는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다.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환자의 가족이나 의료진이 매달리는 것도 이러한 가치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죽음을 근본적인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하는 종교가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데도 책임이 있다. 의학이 육체만을 중심으로 육체적 지속성이 끝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정의하고 사회의 법과 제도조차도 이에 근거하여 죽음을 판정하며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지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근본에서 묻는 철학과 종교는 우리 삶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5년 전쯤 한 환자의 임종을 함께했던 기억이 있다. 혼자 사는 70대 남성 단골환자였다. 병원에 오실 때마다 ‘나는 나원장한테 내 몸을 맡기고 산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자주 하시던 분이었다. 속이 좋지 않아 위 내시경을 했는데, 진행된 양상의 위암이 발견되었다. 만성폐질환이 있었지만 대체로 건강하셨는데, 더 이상의 검사와 수술은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한 의사를 말씀하셨다. 오히려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으셨다. 내 몸은 나원장한테 맡긴 것이니 앞으로도 모든 걸 맡기겠다 하시면서. 그 말을 신뢰했기에 나는 적절한 수준의 비타민주사 방법만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지켜보자고 했고, 어르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며, 멀리 있는 딸에게 최소한의 치료비용을 지원받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3년여를 1주일에 1~2회 정도 한 시간가량 주사를 맞는 것 외에는 다른 치료 없이 평소처럼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셨다. 가끔 속이 불편하실 때도 있었고 체중과 먹는 양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특별히 힘들어 하신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로 좋아진 것 같다며 한 번, 음식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증상으로 한 번, 1년 간격으로 두 번의 내시경을 더 했는데, 암은 위의 출구 쪽으로 조금씩 진행되어 음식이 내려가는 통로를 좁히고 있었다. 임종 한 달쯤 전부터는 잘 드시지를 못하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셨고, 숨이 차서 오래 활동하기 힘드셨지만 병원에 나오실 수는 있는 상태였다. 그즈음 딸이 집에 함께 머무르기 시작했다. 임종 1주일 전부터는 병원에 나오시지 못하고 몇 번의 전화연락을 했다.

 

임종 하루 전날 연락을 드리고 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누워 가쁜 숨을 쉬고 계셨다. 의식도 명료하고 손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말을 하시기는 쉽지 않은 상황 같았다.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느끼며 말씀드렸다. 이제 여행이 끝나 가시는 것 같다. 두려워하실 것 없다. 몸을 벗어야 하지만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동안 잘 사셨고, 저한테 맡기기로 하셨으니 마지막 두려움까지 제게 맡기셔라. 저도 덕분에 많이 배웠고 감사드린다. 어르신은 내 눈을 바라보며 다 들으신 후,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며 이제 편안하다고 고맙다고 가쁜 숨 사이사이 입모양만으로 말씀하시더니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그런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딸과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이튿날 아침 병원 문을 열자마자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러 딸이 진료실로 찾아왔다. 그날 밤 주무시는 상태로 편안하게 임종하셨다고 했다.

 

이 경우와 달리 일반적으로는 누구든 현재 의료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죽음 방법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다. 내가 길을 가다 심장 이상이라도 생겨서 쓰러진다면 누군가 발견하는 대로 구급차를 부를 것이고 응급구조사의 심폐소생술과 함께 응급실로 이송되어 인공호흡기가 삽입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가족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우선 생명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의료시스템의 의무니까. 그것을 소홀히 한다면 응급구조사나 의료인 누군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설사 앞서 말한 연명의료법에 따라 사전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는 피할 수 없다. 물론 회복 가능한 상황일 수 있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불가피한 순간에조차 자신의 선택을 주장하기 위해 목걸이나 가슴에 ‘NO CPR(심폐소생술 하지 마세요)’이라고 새기고 다니는 외국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적극적인 개인의 선택이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9988234라고 하는데,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기(4)를 바란다는 것이다. 늙어 병들지 않고 팔팔하게 살고 싶지만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2~3일만 앓다가 죽는다는 것도 갑작스런 변고가 아니라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를 단순하게 보면, 오래 살았으면 좋겠지만 병든 채로 오래 살긴 싫고, 고통을 겪지 않고 죽고 싶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는 것’을 꼽고, 그러면서도 ‘가족이나 의미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볼 때, 마지막까지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부담 주지 않는 팔팔한 건강을 원하는 마음은 생각 이상으로 절실한 것이다.

 

<표 2>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에 이것이 중요하다2)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아프지 않은 노인들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 즉 사망할 때까지 온전히 건강하게 사는 기간은 대략 남성 68세, 여성 72세로 기대 수명보다 10년 정도 짧다. 3)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간 격차는 주로 만성질환에 기인한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는 1인당 평균 3.34개의 만성질환을 갖고 있으며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질환의 유병률이 높았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는 것은 의학과 과학기술, 혹은 위생과 사회시스 템의 발전에 기인한다고들 한다. 해방 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남자 45세, 여자 49세였다. 70년 만에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늘어난 수명을 그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한편 최고 수명은 크게 변화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평균수명이 40세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100세 이상을 사는 사람들은 있었고 평균수명이 80세인 지금도 여전히 최고수명은 120세를 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 인구는 2016년 3월 기준 1만6천여 명에 이를 만큼 늘고 있지만, 아직 인간의 한계수명이 120세를 넘길 것이라는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유전자는 종족의 유지를 위한 생식기능이나 번식이 끝나는 시점부터는 우리 생명에 이롭기보다는 해롭게 작용하도록 코딩되어 있다는 자연선택이론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요즘은 자기 나이에 0.7을 곱해야 실제 나이라고 할 만큼 건강을 자랑하는 어르신들이 있지만 실은 그 반대편에 질병으로 고통 받는 노년기를 사는 분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비율이 2012년 11.3%에서, 2020년에는 15.7%, 2030년에는 24.3%, 2050년에는 무려 37.4%에 이를 것이라고 하니, 전체 인구 중 질병을 앓는 노인들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급격히 증가하게 되리라는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생물학적인 수명과 신체적 건강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 사용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노동시장에서 배제해 버리는 생산적 노동으로부터의 죽음을 선고한다. 그 나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이제 50대 중반이 넘어서면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 결과는 사회 전체의 노화를 촉진시키고 ‘사회적 노인’을 양산하며 생물학적인 고령화로 인한 질병과 죽음에 복합되어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하는 분리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결국, 우리 사회가 죽음을 지금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살도록 부추기고 감추어 왔지만 죽음은 한 번도 우리와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아무리 밀어내고 거부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고령화와 더불어 공동운명체로서의 삶을 부정하는 사회가 되어갈수록 오히려 죽음은 우리 삶에 한층 더 중요하고 가깝게 다가와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 지성 가운데 한 분인 신영복 선생은 암으로 투병하다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저런 죽음의 과정을 접할수록 죽음은 단순히 최후과정을 어떻게 맞이하고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삶이 지속되는 순간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연장선에 닿아 있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죽음의 자율성

 

앞서 얘기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소극적인 죽음의 선택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죽음의 방법과 과정을 선택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안락사가 있다. 그러나 실제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네덜란드가 2001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한 데 이어 2002년 벨기에, 2004년 룩셈부르크가 이에 동참했다. 미국에서는 오리건 주가 1997년부터 허용한 이후, 5개 주에서 안락사를 허용했고, 20개 주에서 관련 법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경우 직접 안락사를 시키는 것은 불법이지만 안락사를 돕는, 이른바 ‘조력자살’은 허용하고 있다. 스위스에는 4곳의 안락사 지원 병원이 있다. 그중 외국인 들을 받는 디그니타스병원에서 원정 안락사를 한 외국인이 19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치열한 찬반논쟁 끝에 의회가 말기환자 안락사 법안을 부결시켰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4월 캐나다가 내국인에게만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을 발표했다.

 

안락사는 전 세계적으로 논쟁 상태에 있는 문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 존엄사 = 소극적 안락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려하는 점은,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경제적 조건 같은 외적 상황이 개입되면서 환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우려도 있다. 자살과 같이 죽음을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삶에 대한 존중의 결여로 볼 수도 있다. 죽음에 의해 현재 삶의 의미가 배제되는 선택이라면, 현재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현재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죽음의 가치조차 부정하는 자기 부정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와 자살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자살은 대체로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며, 격리되거나 은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남겨진 가족과 친구들이 죄책감과 상처를 안게 만든다. 안락사는 여러 주변 여건을 숙고한 끝에 이루어지는 온건하고 평온한 죽음의 과정이며, 가족구성원의 협의와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도움과 협의하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러 의료적 처치를 통해 고통 없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회적인 논란을 떠나 안락사에 관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앞서 언급한 ‘9988234’에서도 표현되듯이 나 자신의 죽음에 있어 안락사의 권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많은 어르신들은 진료실에서 ‘나를 죽여줄 수 없냐? 그런 약을 처방해 줄 수 없냐?’라고 반복해 하소연하곤 한다. 2011년에 사망한, 130명의 말기환자에게 안락사를 시행하고서 의사면허도 박탈당하고 감옥까지 갔던 미국의 의사 잭 케보키언은 죽기 전 인터뷰에서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겁니다. 제가 갖고 싶은 권리거든요. 저도 심각하게 아플 수 있고, 그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동료의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인간은 실제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이 죽음 그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이미 죽음은 우리 삶이 주어지는 순간 내재되어 있어, 우리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이든 안락사든 존엄사든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다만 죽어감의 과정과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라고 봐야 한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대체로 죽음을 앞당기거나 늦추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죽음 자체를 선택의 문제로 보는 데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인식이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삶을 ‘나’라는 개체와 육체에 제한된 것으로 볼 때 죽음은 ‘나’의 소멸이고 끝이며, 그것이 언제 오는가 하는 것은 현재 내 삶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좌우하는 최고이자 최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죽음의 자율성이란 죽어감의 과정과 방법의 선택이든, 죽음의 시기를 앞당기거나 늦추는 선택이든, 죽음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로 다시 귀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생명이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주어지지 않았듯이, 생명 자체의 발생과 변화, 소멸의 원리 안에 인간이 존재하므로, 그 어떤 인간의 죽음도 생명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다. 불의의 사고, 전쟁과 테러 등에 의한 무고한 죽음조차도 그렇다.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지만 또 꽃이 지고 낙엽이 지고 모든 것을 버리는 시절이 있다 해도 그 나무의 뿌리에서 생명이 이어지듯, 육체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생명의 소멸로 볼 수 없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단지 죽음의 시기와 방법과 과정이 어떻게 주어지고 일어나는가에 좌우되지 않는, 생명의 근본 흐름 안에서 죽음의 의미를 찾고 발견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숙제를 풀어갈 열쇠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 의 죽음, 그 후의 삶

 

그런데, 과연 나는 지금 죽음을 순순히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갑작스럽게 죽음이 내게 찾아온다면 하고 떠올려본다.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가족’이다. 현실세계에서 죽음은 지금까지 내가 맺었던 가장 친밀하고 의미 있는 관계의 단절에 대한 상실감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혼신을 다해 하고 있는 일이나 성취해 가고 있는 삶의 내용들을 한순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일들이 예고 없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이 죽음을 수용하기 주저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또한 죽음은 자살, 사고, 집단적 죽음, 또는 다른 어떤 것이든 결국 홀로 맞이해야 하는 사건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함께할 수 없는 일이며, 유일하게 ‘나’라는 존재가 어찌될 것인지를 좌우하는 사건이다. 죽음이 생명의 흐름 안에서 변화의 한 과정, 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동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해도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마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앞둔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 이후에 대해 알고자 했다. 최근에는 심폐소생술의 발달로 육체적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연구로 죽음 이후에 대한 힌트를 얻고 있기도 하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정지하며 동공반사가 없는 ‘사망’의 정의에 합당한 상태로 있다가 심폐소생술로 소생한 사람들이 자신의 심장과 호흡이 멎어 있던 동안의 근사체험 혹은 임사체험 (near-death experience) 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임사체험은 심폐소생술로 회생한 이들 가운데 10~25%에서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을 연구한 권위 있는 의학전문학술지 『랜싯Lancet』에 2001년에 실린 연구를 보면, 네덜란드 연구자들이 의사로부터 사망 판정을 받은 직후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344명을 조사하여 그중 18%인 62명이 근사체험을 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 (50%), 긍정적인 감정 (56%), 체외이탈 경험(24%), 터널을 통과함 (31%), 밝은 빛과의 교신 (23%), 색깔을 관찰함 (23%), 천상의 풍경을 관찰함 (29%),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와의 만남 (32%), 자신의 생을 회고함(13%),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인지함(8%)이었다.

 

이 연구에서는 근사체험이 체험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를 알기 위해, 근사체험자 23명과 소생하기는 했지만 근사체험을 하지 않은 15명을 8년에 걸쳐 조사하고 비교했다. 근사체험 무경험자에 비해 경험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되고, 인생의 목적을 더 잘 이해하며, 영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사후생에 대한 믿음과 일상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크게 증가했다. 몇 분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의 체험이 8년 뒤까지도 영향을 미쳐 체험자들의 삶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듯이 보편적인 인간이 죽음 이후의 삶을 다 알지 못한다 해도, 죽음을 개별적인 ‘나’가 아닌, 모든 것이 연결된 ‘큰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으로 본다면 그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애벌레와 나비가, 그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듯이 죽음 역시도 우리 삶에 그렇게 공존한다. 탄생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미래와 과거가 함께 하나의 큰 삶으로 공존하며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삶이 그 공존, 공생, 공동의 삶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살아간다면, 죽음 역시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이 아니다.

 

나가며

 

의사는 건강과 질병을 다루는 직업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죽음을 다루는 직업이기도 하다. 누군가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의논해야 한다면, 그래도 먼저 의사를 떠올릴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직업적인 측면에서 의사는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호스피스란 이름으로, 죽음학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부분적으로 배우고 공부할 기회가 마련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의사는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서만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의사 또한 미래에 없어져야 하는 직업일지 모른다고 예측하기도 하는데, 그 이름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건강과 질병, 탄생과 죽음을 하나의 흐름에서 살피고 안내하는 역할을 할 누군가는 필요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 자신 스스로가 될 때 우리는 죽음의 진정한 주인인 동시에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리라.

 

이제 나는 진료실에서, 또 주치의사업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어르신들과 함께 죽음맞이 여행준비를 구체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그 시간들이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 그리고 지나온 삶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물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말이다.

 

1) 이 법은 죽음이 수일에서 수주로 임박한 환자에게만 적용되는데, 환자가 임종 시기가 임박했는지는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이 판단하게 된다. 환자가 미리 결정하여 받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연명의료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심폐소생술과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으로 한정되어 있다. 평소 건강할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 놓거나 병원에서 연명의료계획서를 쓴 사람은 임종 시기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런 서류를 작성하지 않았어도 평소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가족에게 표시했다면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한데, 가족 2명 이상의 진술이 일치하면 인정된다.

2) 「웰다잉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윤영호 교수 연구팀, 2012.

3) 2013년 기준. “한국인 수명 늘었지만 숨질 때까지 10년간 앓아”, <연합뉴스> 2015. 9. 27.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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