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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동학, 120년 전의 생명사상
2016-06-11 10:20:00

  

* 모심과살림 3호(2014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동학, 120년 전의 생명사상

 

박맹수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동학 새롭게 보기: 서로 활짝 열린 ‘동’

 

현재 우리가 쓰는 한글에는 한자의 음과 한글의 음을 결합시켜서 한자화 된 게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동東’자인데요. 일반적으로 아는 ‘동’은 ‘동녘 동’으로, 동쪽이라는 방위를 뜻하고 있어요. 그런데 방위로써 ‘동’은 원래 우리말이 아니었대요. 많은 사람들이 동학 창도의 배경을 서세가 물밀 듯 들어오고 우리 정체성에 위기를 느껴서 그걸 극복하고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죠. 많은 역사교과서에서 그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자가 ‘동녘 동’이 아니라, ‘족속, 또는 무리로써의 동’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동족’과 ‘이족’이 합쳐져서 우리 조상 ‘동이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경남 양산의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계시는 채현국 언어고고학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면 고대 역사 속의 동이족은 어떤 민족일까요? 「산해경」이라든지 「위지동이전」 같은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난 동이족의 특성은 ‘호생불살생好生不殺生’, 즉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민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일본에 체류할 시, 서울대에 유학하여 한국철학을 전공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토대학 교수와 같이 공부한 적이 있는데, 이분 말씀도 동학을 서에 대한 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동’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못 본 거라고 해요. 원래 한민족의 무대가 중앙아시아잖아요. 거기에서부터 동으로 동으로 이동합니다. 이동 경로가 실크로드와 거의 평행하죠. 밝음과 광명과 빛과 생명을 찾아서 동으로 온 것입니다. 바로 그 1만5천 년 전의 역사적 기억을 수운 최제우 선생이 다시 19세기 판으로 리바이벌한 게 동학이라는 것입니다. 채현국 선생 이야기와도 상통합니다. 이처럼 우선 동학에 대한 이미지부터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에 대한 동, 서학과 대립되는 동, 서를 극복하는 ‘동’이 아니라, 생명, 살림, 빛, 광명을 내포하는 동, 그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꼈던 조상들의 마음을 새롭게 리바이벌한 게 동학인 것입니다.

 

수운 선생 당대에도 동학에 대해서 여러 시시비비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동학 수련의 핵심이 21자 주문인데, 거기에 ‘천주天主’라는 말이 나오잖아 요. 그게 그 당시 널리 유행하던 천주학의 천주와 같다고 해서 서학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2009년에 번역한 『동경대전』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동학과 서학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선생님의 가르침에는 동학과 서학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니 이렇게 간단히 답을 했어요. ‘운즉일運則一이고 도즉동道則同이며 이즉비理則非라.’ 운은 하나요 도는 같으며 이치는 다르다. 우선 ‘운’이라는 것을 학자들이 풀어서 ‘모더니티’라고 합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으로써 서학이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나 동학이 등장한 것이나 똑같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본다면 수운 선생은 상대방인 서학을 100%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도즉동’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서학(지금의 천주교, 가톨릭을 말합니다)이 추구하는 길이나 동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길은 똑같다. ‘도’의 보편성을 얘기한 거죠. 타 종교와 타 사상에 대해서,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다원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는 서로 다르다고 했어요.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나는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이것을 서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 동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라고요. 이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상황에 충실한다는 얘기인 동시에 나의 주체성과 개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편으로 타 종교나 사상, 문화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개방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갖는 것이 바로 동학인 것 같아요. 보편적인 걸 인정하면서도 내가 서 있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충실하는 것이죠. 따라서, 1860년에 등장했던 동학은 제 나라 제 땅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세상과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은 이처럼 미래지향적인 실천운동이었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120년간 짓밟히고 폄훼당하고 왜곡당했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동학이 만약 민족주의적 사상에 머물렀다거나 다른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사고였다면 지금 우리가 이것을 다시 쳐다볼 이유가 없겠지요. 120년이 된 지금, 바로 그 진정한 의미를 되물어서 살려내는 새로운 출발의 해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살림의 사상, 살림의 군대

 

1860년~1894년까지 이 나라와 이 땅은 국운이 급전직하急轉直下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동학이 등장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1년에 세상을 향해 선포한 「포덕문布德文」에 자신이 동학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국我國은 악질惡疾이 만세滿世하여 민무사시지안民無四時之安하니, 시역是亦, 상해지수야傷害之數也라’ 즉, ‘우리나라는 나쁜 병이 가득차서 모든 백성들이 한시 한때도 편안한 날이 없으니, 이 또한 생명들이 다 상처를 입는 운수다’라는 뜻입니다.

 

밖으로는 서세동점이라는 서양 열강의 침탈 위기, 안으로는 삼정문란이라는 내적 위기, 여기에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들이 10년 간격으로 유행하고 기근과 흉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도될 그 무렵에 이 땅의 민초들은 단 한 때도 편안하게 숨 쉬고 살 수가 없었어요. 나라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백성이 죽어가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농민들이 왜 죽창을 들었겠습니까. 나라가 민초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생활과 생명과 생업을 보장하지 못했잖아요. 도리어 압살하고 억압했죠. 바로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이 ‘보국안민輔国安民’의 하나의 계책으로 등장합니다. 나라와 민초들을 살리려고 등장한 것입니다. 부족한 나라, 모자라는 나라,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돕는 것의 목적은 바로 ‘안민’입니다. 그럼 동학의 궁극적 지향은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투쟁과 저항? 아닙니다. 살리는 데 있었던 거죠.

 

동학농민군이 일어나던 당시 상황을 볼까요? 흔히 동학의 역사에서 갑오년에 해월 선생과 전봉준 장군이 대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해월 선생은 전봉준이 병사兵事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러면서 동학 도인들이 타살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물어죽이고 있는데 앉아서 죽을 수가 있느냐.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서 싸워라.”라고 했습니다. 이 얘기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그걸 갑오년 9월로 해석하고 해월과 전봉준이 대립한 것으로 말해 왔습니다. 동학의 역사가 왜곡되어 온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해월 선생이 폭력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해월 선생이 내린 명령을 보면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않으며,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 남의 물건에 해를 끼치거나 민폐를 절대 끼치지 말고, 충신과 효자와 열녀와 존경받는 학자가 있는 동네에는 절대 주둔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일본 외교 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공사관 보고 일건」이라는 자료에 들어있는, 동학농민군들이 갑오년 당시에 선포했던 행동강령과 규율 관련 문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갑오년 혁명 당시 풀뿌리 백성, 농사짓던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1년 이상을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 많은 농민군들이 어디서 먹고 자고 어떻게 생활했을까요. 동학군들이 내세웠던 보국안민의 슬로건에 공감했던 전·현직 관리들은 말할 것 없고, 지방의 뜻있는 지식인들과 부자 양반들이 뒤에서 몰래 도왔던 것입니다. 전라도 쪽 상황을 보면, 군수나 현 감들이 무기고나 군량창고 열쇠를 놓고 슬며시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면 동학군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들어가서 밥해 먹고 또 이동하고, 그렇게 뜻있는 관리들과 부자들이 몰래 도왔더라고요. 그래서 1년 이상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2010년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라는 일본군 대대장의 후손 댁에서 갑오년 당시 압수해 갔던 동학 문서 35건을 찾아서 국내에서 전시한 적이 있어요. 그 중에는 뒤에서 몰래 동학농민군을 도와줬던 관리 10여 명의 죄상을 적은 1.2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문서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산부사 유제관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고서가 따로 첨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서에 유제관 여산부사가 전봉준을 도왔던 대목이 나옵니다. 군량미 300석과 짚신 3천 켤레를 제공하고, 농민군 지도부가 여산을 지나갈 때는 소 일곱 마리를 잡아서 걸게 대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듯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에 현직 관리를 비롯하여 생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혁명 대열에 가담했더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저항사상으로서의 동학, 또는 투쟁 부대로서의 농민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에 대한 나름의 공감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죠.

 

 

시천주와 유무상자: 한국적 평등사상과 공동체정신

 

동학에 대한 그 시기 민중들의 폭발적 반응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863년에 선전관 정운구가 수운 선생을 체포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고 내려갑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문경새재쯤 갔더니, 그로부터 경주가 400리(약 160km) 정도인데, 골짜기 마을 마을마다 동학 주문이 아니 들리는 날이 없고 아니 들리는 곳이 없다고 나옵니다. 경상도가 동학 판이 되어 버린 거죠.

 

수운 선생이 1860년 4월 5일에 득도하고 나서 첫 번째 한 일이 바로 집에 데리고 있던 어린 여자 종 두 명을 해방시켜서 각각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후에 어린이운동 하셨던 소춘 김기전이라는 분이 경주에 가서, 그 당시 노비였던 80대의 주朱씨 할머니를 만나서 인터뷰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수운 선생 당대 때 상황을 얘기해달라고 하니, 용 담에 신인이 났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집지(스승을 찾아뵐 때 가지고 가는 예물)로 한지韓紙 한 다발이나 곶감을 주로 많이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 곶감을 먹고 남은 가지를 버렸더니 집 앞에 산을 이룰 정도라, 마을 사람들이 나무하러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용담 정 앞에 쌓여 있던 나무를 한 짐씩 가져갔을 정도로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씨 할머니의 어렸을 적 회상 속에 용담정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힘들게 밥하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렇다면 수운 선생 당시 무엇이 그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요?

 

우선 동학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 가운데 ‘시侍’라는 내용 하나만 간단히 소개하면, 「논학문」이라는 글에서 수운 선생이 이렇게 해설합니다.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化하며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 不移者也라’. 안으로 신령함을 가지고 있고, 밖으로는 널리 사람들을 감화 시키는 작용이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옮기지 못할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이걸 제 나름대로 간단히 얘기하면, ‘시’의 상태는 영성과 혁명이 통일된 상태, 자기완성과 이웃사랑이 통일된 상태예요. 내유신령이라는 게 자기 완성, 즉 영성이라고 한다면 외유기화는 이웃사랑, 곧 세상 혁명이에요. ‘시=모심’의 경지에 있는 사람은 안으로 늘 신령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즉 영성의 상태를 늘 발휘할 수 있고, 밖으로는 그런 영성의 바탕에서 모든 사람을 요즘 말로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한 단계 높이는, 이게 ‘시’의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수운 선생의 ‘시’는 한국적 영성과 혁명을 통일시킨 사상입니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가 다 시천주 상태로 태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게 수운 선생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은 제 안에 가장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를 모시고 있다. 이 내용이 사람들에게 파고들면서 1860년대 초반에 동학이 거대한 속도로 퍼져 나갑니다. 경상도 상주에 있는 도남서원과 우산서원이라는, 동학을 탄압하고 배척했던 서원들 간의 연락문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동학은 신분의 등위가 없어서 술장사들과 백정들이 좋아하고, 남녀의 차별이 없어서 홀아비와 과부들이 좋아하고…’ 굉장히 악의적인 표현이지만 또한 굉장히 상징적인 표현이죠. 그 뒤를 이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한다.’, ‘당시에 이 세상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고 고민하는 일부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도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었다.’고 나옵니다. 시천주가 결국은 우리 근대의 한국적 평등사상으로 정립된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죠.

 

이런 내용은 갑오년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이 갑오년의 상황들을 기록한 『오하기문』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책을 남겼는데 최근에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집에서 양반과 상놈이 동학에 뛰어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제까지는 분명 나으리고 종이었는데 오늘부터는 서로 동학 신도가 되어서 양반이 종한테 맞절을 하니까 종이 견딜 수가 없는 거죠. 주종관계가 어떻게 갑자기 바뀔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절을 못 받고 노비들이 도망간다는 내용, 서로 맞절을 해 사람 차별이 없었다는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이처럼 동학을 배척하고 탄압하고 비판했던 보수 지식인으로부터도 동학 조직의 평등함을 표현한 내용들이 아주 풍부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이 평등사상이라는 게 엄청나게 민중들을 휘감았던 것 같아요.

 

두 번째, 동학에 뛰어들면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무상자有無相資입니다. 단순히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거나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재물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서로 도왔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재물로, 없는 사람은 노동으로, 많이 배운 사람은 문자를 못 배운 사람에게 깨우쳐주고, 기술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가르쳐주고, 이러한 유무상자가 갑오년까지 끊이지 않고 실천되었습니다. 갑오년에 충청도 서산에서 농민군 접주가 되어서 싸우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홍종식이라는 분이 <동학난 실화>라는 증언을 남겼는데, 후배들이 찾아가서 “선배님은 어떻게 갑오년 동학혁명에 뛰어드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동학에 뛰어들면 우선 첫째는 굶는 사람이 없었다.” 유무상자有無相資죠. “또 하나는 동학에 하루 늦게 들어가면 하루 늦게까지 상놈으로 있고 하루 먼저 들어가면 하루 먼저 양반이 된다. 그런 말을 들어서 양반과 상놈들이 서로 맞절을 한다.” 이렇게 동학에 들어가면 굶는 사람이 없고 차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들었다고 대답했어요. 바로 그런 부분이 1860년부터 1894년까지 모든 민초들이 동학에 다투어 뛰어들게 된 결정적 요인이 아닌가. 시천주侍天主라는 만인평등 사상,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공동체적 요소.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동학에 끌어들인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 체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민초들 차원의 새로운 생활양식, 삶의 실천이 동학 접포 조직에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움직임으로 갑오년(1894) 또는 그 이전인 경신년(1860) 무렵부터 조선 사회를 휩쓸었습니다. 그 핵심 키워드 하나는 ‘살림’이고, 또 하나는 ‘개벽’이었습니다. 새로운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대안적인 삶의 양식들을 동학이 참으로 모범적으로 보여줬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으로부터 갑오년 동학군들이 일 년 이상 싸울 수 있었고 수백만 명이 뛰어들어 30만 명이 희생되는 것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합니다.

 

 

사람이 하늘, 밥이 하늘: 해월 사상의 구체성

 

그런 동학을 있게 한, 가장 결정적으로 큰 공을 세운 분이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입니다. 1861년에 동학에 뛰어들어 1898년에 처형될 때까지 38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학사상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기르고 조직을 재건하고 경전을 집성하고 전국을 네트워크로 연결했습니다. 해월 선생은 무엇보다 동학의 핵심 가르침을 평범한 주부나 어린이, 노비, 평민들이 누구나 알기 쉽게 대중화하고 사회화한 공이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890년대 초에 동학이 널리 퍼지니 조직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접이나 포를 다시 일으키는 방편으로 편의장便義長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해월 선생이 전북 익산의 백정 출신 남계천이란 분을 전라 좌도와 우도를 총괄하는 편의장으로 임명합니다. 엄청난 상징적 사건이었죠. 백정 출신이 동학 최고의 해월 선생 다음의 위계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가문·문벌 중심 사고를 가졌던 제자들을 설득 혹은 제압해버렸습니다. 그 뒤에 남긴 말씀이, “내가 젊었을 때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때 양반들이 머슴놈, 머슴놈 하는 말을 듣고 한이 맺혔다. 사람이 하늘인데 어떻게 천대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해월 선생 평생의 화두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即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남계천 얘기를 한 거죠. 또한 매우 흥미로운 것은 동학혁명이 한참 진행될 때에도, 해월 선생께서는 충청북도 옥천 청산의 문바위골에서 수련과 공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 지도자, 대접주, 접주들이 봉기해서 난리가 나고 있는데도 교대로 올라오게 해서 수련을 시킵니다. 갑오년 혁명 정국하에서도 제자들을 끊임없이 공부시켰다는 것, 굉장히 의미심장한 사실입니다.

 

어느 날은 청주를 지나가면서 서택순이라는 제자 집에서 하룻밤 머무는데, 밤늦게 건넛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리니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하고 묻습니다. 제자가 답하길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죠.” 하니 안타까워하면서,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님’이 베 짜는 소리다.”라고 하죠. 여기에 한국적 양성평등 사상의 원형이 나옵니다. 또 1889-90년 사이에 경북 김천 복호동에 숨어있으면서,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여성들 가운데 도통한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여성들이 공부하고 수도해야 한다는 뜻에서 여성 수도 규칙 「내칙」과 「내수도문」을 선포합니다. 다가올 시대에 역할 해야 할 여성들의 위상을 확실히 보여주는 수도규칙입니다. 그 「내칙」과 「내수도문」에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기르고 잉태하고 가꿔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린이에 관한 말씀이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 한울님은 생명의 기가 꺾이는 것, 상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한, “도가에 손님이 오셨으면 손님이 오셨다고 말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해라.” 이런 내용들이 해월 선생 말씀 속에 나옵니다.

 

또 하나, 밥 이야기입니다. 1888년은 조선 땅에 대가뭄이 드는 해입니다. 무자년戊子年 대흉년은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굉장히 큰 가뭄이었어요. 전라도, 충청도 쪽은 거의 황토밭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굶어 죽어갈 수밖에 없었죠. 바로 그때 해월 선생의 ‘밥’에 관한 법설이 나옵니다.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온 우주의 이치를 안다’는, 만사지万事 知가 식일완食一碗이라는 법설입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해월 선생 말씀이 상황이라든지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장 절박하고 절실하고 간절하게 무언가를 꿈꾸고 그리워한 그 시기에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동학의 역사, 한국 근대사에서 하신 역할은 모든 사람은 거룩한 한울님이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구체화시키고 사회화시키고 대중화시키고 확대시켜서, 모든 신분 계층, 계급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한울님으로 드러나도록 아주 실감나는 말씀으로 전파한 것이고, 또 하나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다 거룩한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 내용이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입니다. 이게 최시형 선생의 역할이었습니다.

 

 

동학, 새로운 세상을 여는 사상

 

동양에는 예로부터 60간지 중에 ‘갑甲’자가 들어가는 해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전통적 사고가 있습니다. 올해가 마침 그런 해네요.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라는 큰 비극을 겪었는데, 그 비극이 주는 교훈과 어떤 비전이 있다면 이 갑오년에 정말 새로운 세상을 열고 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면 그에 걸맞은 어떤 사상과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정말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시간적으로는 동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합니다. ‘생명’이라는 가치죠. 그리고 또 하나는 저항입니다. 생명은 저항하는 것 같습니다. 생물학을 하시는 분이 항상성恒常性이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모든 생명체는 비정상적 상태에 있을 때 정상적 상태로 가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거죠. 사람으로 보면 부당한 억압과 체제와 잘못된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부당한 것을 뚫고 어떻게 정상적 상태를 회복할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상태입니까?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기성세대 믿지 마라. 전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너희들의 몸으로, 머리로, 손발로 하나 씩 확인해서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라고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생명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왜곡당하는 지금, 그것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항상성, 저항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지금 동학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 측에서 없애버리려고 무시하고 짓밟았던 그 속에서 뭔가 건져 올리려고 한다는 것. 수운 선생, 해월 선생, 수많은 무명의 동학농민군들이 이 땅에 실현하려고 했던 정신, 가치가 나라와 국경과 민족과 계층을 뛰어넘어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인 일본에서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개벽으로 가는 상서로운 조짐이 아닌가 합니다. 각자가 그 흐름에 동참해 개벽 세상을 앞당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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