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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힐링을 넘어 '마음살림'으로
2016-06-11 10:43:00

  

* <모심과 살림> 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힐링을 넘어 ‘마음살림’으로

 

김현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어딜 봐도 ‘힐링’이 대세다. 이 낯선 단어를 언제부터 이렇게 즐겨 사용하게 된 걸까. 몇 번을 소리 내어 발음하다 보면 그 어감에서 묘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참살이가 웰빙을 대신할 수 없었듯, 치유가 아닌 힐링이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걸까?

 

마치 10여 년 전 일었던 웰빙 열풍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소비문화와 빠르게 결합하며 힐링은 어느새 비타민C처럼 일상적으로 권장되는 제품이 되었고, ‘위로’와 ‘치유’를 테마로 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던 서점과 극장가에서도 그 ‘바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 문화예술계 흐름을 전망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공감의 문화예술, 아픈 사회의 치유’1)가 꼽혔을 만큼 힐링은 최근의 트렌드를 읽는 주요한 키워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믹스커피 한 잔을 마셔도 ‘웰-빙’을 찾던 그이들의 삶은 지금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힐링’도 그렇게 마음이 허한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공략한 뒤에, 무언가에 바통을 넘겨주고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얼핏 포장지를 바꿔 놓은 똑같은 상품 같아 보이지만, 한편 ‘잘 먹고 잘 살자’는 표어에서 드러나듯 몸의 건강을 중시했던, 혹은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추구했던 모습과는 또 다르게, 힐링 열풍은 그것을 있게 한 아픈 사람들과 아픈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힐링을 구입하고 힐링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별책부록처럼 힐링이 딸린 상품을 기꺼이 ‘소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래서 건강해지고 있나? 그조차도 아닌 사람들의 마음은, 누가 보살펴줄 수 있을까.

 

어쨌거나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고 사회화되는 데에는 그러한 표현을 갈구하고 거듭 사용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적 정서가 존재했기 마련이다. 그래서 ‘힐링’이라는 말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치유의’ 언어로써 두루 쓰이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상이라면, 소비적이고 일시적 만족감에 그치는 등의 드러나는 속성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속에 감춰진 변화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어떻게 긍정의 에너지로 만들어갈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아픈 사람들의 시대

 

요란한 열풍과는 달리 어딜 봐도 좀처럼 ‘힐링’이 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우울증 등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병이 수치로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각종 통계에서 해가 갈수록 그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밖에도 해마다 높아가는 자살률, 학교폭력과 무차별한 사회폭력 문제, 최근 들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는 감정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병든 사회를 증거하는 지표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왜 눈부신 경제발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행한가’라는 물음은 오래 전부터 늘 있어왔지만 그 해답을 찾고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던 것일까? 경제지표와 사회적 행복감·만족감과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각종 조사 자료에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조건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동시에 여전히 학습과 체감이 필요한 듯하다.

 

해마다 발표되는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그러한 현 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이 수치에서 매해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조사2)에서는 ‘물질적 행복’과 ‘보건과 안전’ 영역에서 평균 이상을 기록했음에도 주관적 행복지수는 가장 낮게 나타나 물질적 풍요와 만족감·행복감의 불일치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소비주의로 흐르고 있듯, ‘돈’이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고 본 보여줄 어른들이 없는 이상 아이들은 여전히 스마트폰과 좋은 옷에서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이다.) 또한 지금의 낮은 행복감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등 현실을 정당화하는 모습은 현재의 행복을 습관적으로 ‘유예’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2008년에는 우리나라 10대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어서였을까, 그 뒤로도 매해 그 순위는 바뀌지 않았고 지금도 하루에 한 명 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청소년들의 사연이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무엇이 아이들을 이토록 불행하고 아프게 하는 것일까? 2010년 통계청 자료를 참고하면 15~24세 청소년이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성적·진학 문제’였고, 뒤이어 경제적 어려움, 외로움과 고독, 가정불화 순이었다. 이는 대개의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다 충분한 설명을 위해서는 여기에 드러나지 않는 밑바탕의 문제도 함께 짚어야 할 것 같다. 탈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 ‘유유자적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유자살롱의 이충한 대표는 개인의 문제를 일으키는 지금의 ‘사회 구조’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사실상 한국 사회는 외톨이를 만드는 구조이다. 어떤 일도 자발적으로 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고, 성공과 실패의 기준 자체도 지나치게 양극화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다. …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두려움과 막막함. 이것은 지금 대다수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심리 상태일 뿐 아니라, 40대에 커리어를 마감하면서 90세까지의 인생을 걱정해야 하는 기성세대들이 조만간 맞닥뜨리게 될 문제이기도 하다.”3)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청년들의 활기가 없는 사회에서 어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일과 삶은 철저히 분리되고, 일상에서 쌓인 몸과 마음의 ‘독소’를 배출하기 위해 ‘힐링’이 필요하고, 더 많은 힐링을 위해 버거운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그 속에서 현대의학이 가져다 준 기대수명의 연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길어진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을 선물하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반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전 지구적 환경 변화, 식량 문제, 경제 위기 등 삶과 문명을 둘러싼 위기의 모습 속에서도 무엇보다 명확히 눈에 보이는 지금의 ‘위기’는, 이처럼 삶에 대한 기대가 점점 옅어져 가고 더 이상 삶을 지속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근저에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낙오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사회와 그로 인해 늘 불안하고 상처 입는 ‘마음’들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마음의 병을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인지하고 정부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건강검진을 실시할 계획을 밝히는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의학적이고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하여 ‘치료 만능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4)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치료’와 더불어 ‘치유’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물론 개인적·사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치유여야 할 것이다. 더하여 지금의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진정한 ‘힐링’은 자신의 삶을 기꺼이 즐겁게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와 에너지를 ‘자급’하는 일이다.

 

명상의 사회화와 ‘사회적 힐링’

 

‘힐링’ 바람이 동반한 현상 중 하나는 명상이나 수행, 마음공부를 위한 프로그램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지금껏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마음’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주목하고 있다.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기대와 동시에 ‘영성의 상업화’라고도 표현될 만큼 구입과 체험을 통한 확산 방식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돌아보면 ‘힐링’이 제 이름을 얻고 널리 쓰이기 이전에도 명상과 마음수련을 위한 공간과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존재했다. 이미 2000년대 초반 명상편의점이 등장하고 요가명상 등이 유행했으며, 각종 명상 수련원들이 종교적 색채를 걷어내고 대중화되면서 명상 체험의 기회는 생활공간 가까이로 점차 확대되어 왔다. 특히 그러한 ‘명상’을 현대 문명의 위기를 치유할 힘을 갖고 있는 대안5)으로 주목하는 관점도 있었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소수의 구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명상을 ‘사회화’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명상 인구는 정확하게 파악되진 않지만 꾸준히 늘고 있으며, 현재 대략 10% 가량이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명상 수련 활동을 하는 것6)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상은 흔히 ‘ ‘지금 여기’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 풀이된다. 다양한 명상법이 존재하지만 그 공통된 원리는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집착도 분노도 내려놓고 알아차리는 것”7)이다. 그럴 때 “마음은 과거의 사건이나 미래의 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지금-여기의 삶이 회복되면 마음이 명료해지고 평온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8) 이처럼 명상을 체험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긍정적 경험을 이야기한다. 또는 마음의 집착을 버리고 평화를 얻는다든지, 결국 문제와 그 답까지도 ‘내 안’에 있다는 근원적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최근에는 다양한 과학적 접근과 실제 사례들을 통해 그 효과가 입증되면서 의료 분야와 기업 등에서도 여러 차원에서 명상을 활용하고 있다.9)

 

삶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문제의식, 따라서 마음을 잘 돌아보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지만, 한편으로 지친 일상으로부터의 회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휴가 같은 일회성 프로그램과 그로 인해 얻는 일시적 충족감으로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할까, 라는 흔한 물음 역시 제기된다. 해답은 정말 내 안에만 있는 것일까? 정신건강 진단으로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듯 나 홀로 ‘힐링’하는 것 역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는 힐링의 욕구를 재생산해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고통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태도는 ‘생명운동’에 대한 오랜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공부’는 여전히 주효한 열쇳말이 될 수 있을까? 홀로 숲 속의 맑은 공기를 누리는 것보다 일상에서 함께 들이마시는 공기를 깨끗하게 바꾸려는 노력이 보다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한가로움’을 탈피하고 대안으로써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상센터나 수련원 안에서 존재하는 평화와 그 속에서 발견한 나의 청정한 ‘마음’을 일상과 사회 속으로 옮겨오는 일일 것이다. 이는 곧 나 혼자 소비하고 소유하는 힐링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와 관계 속에서의 힐링으로, 홀로 수행하고 깨닫는 평화가 아니라 함께 공명하는 평화로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참살이’를 위한 소비 생활,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고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는 일 역시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지속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소비문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생산과 생활양식까지를 두루 고려할 때 나의 소비 생활이 지속가능해지는 것처럼, 힐링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유기적’ 속성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생겨나는 ‘치유’ 활동과 프로그램들에서 쉽게 관찰되는 문화적·공동체적 접근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띤다. 일례로 ‘Social Nurturing Service’를 표방하며 공동체 문화 회복을 위한 다양한 문화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사회적기업 대추씨에서는 ‘나를 알고, 내가 편안해지고, 그렇게 편안해진 내가 다시 사회로 연결되는 것’이 곧 힐링이라 말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명상, 예술, 심리치유 등에 기반한 문화기획 활동을 벌이며 일상에서 놀이와 소통 공간을 넓혀 가고 있다. 이처럼 여러 형태의 문화 치유 프로그램들이 각광받으면서 ‘치유’라는 말이 주는 무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한편 서울의 한 지역에서는 마음복지관이라는 이름으로 비영리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치유 공간이 문을 열어 주민들의 마음 건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치유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마음과 복지관의 조합이 낯설지 않을 만큼 ‘돌봄’은 물질적·물리적 차원에서 점차 마음을 살피는 데로까지 확장되어 가고, 그 방식 또한 고전적인 병리학적 접근에서부터 놀이와 예술 등의 형태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죽음 가운데서도,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 이면에 있는 고통을 발견하는 마음, 위로와 치유의 정서가 존재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낸 <심리치유센터 와락>10)의 여러 프로그램들은 ‘치유’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기실 대부분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는’ 활동 자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과 공간들이 자꾸만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개개인의 마음과 삶에 든든한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임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은 당사자 개인뿐 아니라 거기에 함께 마음을 얹은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에게까지 더불어 힐링을 선사한다.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소하는 갖가지 노력 속에서 사회 문화 곳곳에 ‘숨’을 불어넣는 작용을 ‘사회적 힐링’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네가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는 곧 ‘네가 치유 받음을 통해 나 역시 치유된다’는 말과 통하듯, 이처럼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아픔에는 일방성이 아닌 상호작용의 치유가 보다 큰 긍정적 작용을 일으킨다. 아래 고백처럼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 서로를 살린다는 깨달음’은 손을 맞잡은 순간 찾아오며, 그 ‘순간’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치유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를 살리는 것으로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저 역시도 세상 속에 숨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제 손을 잡아줘서 내가 다시 이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제가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게 제 몫이기도 한 거죠.”11)

 

힐링의 다른 이름, ‘마음살림’

 

힐링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holy’와 ‘whole’, 즉 ‘신성’과 ‘전체’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힐링에 대한 갈증이 ‘분리됨’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자연과의 분리, (가족·사회) 공동체로부터의 분리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 즉 ‘힐링’이 필요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 분리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과 더 가까운 삶, 자연에 일치하는 삶에 대한 욕구가 발생하고, 최근 다시 ‘공동체’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가 겪는 스트레스가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만큼 그로부터 ‘해방’되려는 개인적·집단적 노력 역시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더 치열하게 나타나는 것이 지금의 모습인 듯하다. 정책·제도적 변화를 넘어 사회 전체 문화를 바꿔내는 일은 단기적 대책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역적·소규모 실험들로 그 가능성을 엿볼 수도 있다. 그것은 위로와 소통, 공감의 재발견으로, 돌봄의 확장으로, 끊어진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들이 곧 ‘힐링’ 신드롬에 견줄 만한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내리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다시 ‘마음’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치유를 통한 마음의 회복뿐 아니라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마음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든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마음’. 이것은 ‘영성’의 다른 표현이자, 오래 전 생명운동의 문건에서 ‘모든 사람 속에 숨은 채 드러나는 생명의 씨앗’이라고 표현되었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논증하고 입증하기보다는 일정 부분 ‘신념’과 ‘바람’에 기대어 있고, 그 믿음을 확산시키는 것은 오랜 동안 종교의 역할로 기대되어 왔지만 점차 종교의 틀을 넘어서 가능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 역시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편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경제적’ 논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도록 훈련되고 거기에 길들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보상금 논쟁 너머에 있는 밀양과 강정의 절실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제 ‘돈’과 ‘조직’, 그 안의 ‘기능’과 ‘자리’, ‘숫자’로 대체되었던 누군가의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불러들여야 한다. 경제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간과되어 왔지만, 실은 모든 일의 시작에는 ‘마음’이 있었고, 어떤 일이 잘 성사되기 위해서도 바라는 마음, ‘열망’이 모여야 한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 살고자 하는 마음,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과 함께이고 싶은 마음, ….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음’들을 돌아보고 보살펴야 할 때다. 힐링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부디 그 ‘마음’이 되살아나기를. 생명력을 되찾은 마음은 곧 생기 있는 문화를 만들고, 이것은 돈(자본)과 합리성으로 단단히 무장된 사회를 해체시키는 ‘부드러운 햇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2013 문화예술의 새로운 흐름 분석 및 전망’, 문화체육관광부, 2012.

2) ‘2013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 비교’에 관한 설문조사.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괜찮은 옷, 개인 컴퓨터, 인터넷 접근권, 휴대전화 등을 평균 이상 소유하고 있음에도 경제 만족도는 8개국 중 7위로 나타났다.

3) “무중력 청소년”을 찾습니다, 이충한, 『오늘의 교육』 2011년 11, 12월호,

4) 정신병원을 없애고 지역사회 서비스로 대체하는 움직임이 한 소도시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인 지지를 얻어내고 법적 근거 마련으로까지 이어진 이탈리아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국가인권위원회 웹진 <인권> 2008년 3 * 4월호)

5) 박석, “명상, 현대문명의 위기 치유할 힘 갖고 있다”, 프레시안. 2004.5.24

6) “대중에게 다가가는 명상”. 온라인중앙일보 2013.2.10

7) 김재성. “명상, 마음의 쉼터 만드는 일”, <인드라망 칼럼> 2012.8.

8) 위와 동일.

9) (명상은) 심장병 환자나 우울증 환자, 치매 예방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감성 지능 계발이나 공감 능력 계발 등의 분야에서도 명상의 유용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의료에 이어 앞 다투어 명상을 도입하는 곳이 바로 기업이다. 구글은 이미 ‘내면검색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명상프로그램을 적극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스티브 잡스의 선(禪) 수행으로 유명한 애플 역시 명상의 도입으로 직원들의 창의력 향상뿐 아니라 스트레스 감소라는 톡톡한 혜택을 본 기업으로 유명하다. (“명상은 ‘지금 여기’에 온 마음 집중하는 것” 현대불교, 2013.6.14)

10) <와락>에서는 집단적인 심리적 내상을 치유하는 상담뿐 아니라 노동자 개인과 그 가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치유밥상, 취미소모임(손뜨개모임, 요가, 엄마난타반 등 다양한 자조모임), 음악치유, 놀이학교, 문화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자원활동과 재능기부로 이루어진다.

11) 이정아, KBS 다큐3일 <다시 와락! 벼랑 끝에서 희망 찾기> 20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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