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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변화와 공존을 위하여
2016-06-11 14:13: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변화와 공존을 위하여

 

윤기돈 (녹색연합 사무처장)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실종자 아홉 명을 찾기 위한 수색이 실종자 가족의 요청으로 중단되었다. 시신마저 찾지 못한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참사가 발생한 지 211일이 지났건만, 우리 사회의 변화를 잘 감지하기 어렵다. 그러한 실망감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에 대한 원망,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자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앞으로 변화에 대한 믿음이 크다. 물이 수증기로 바뀔 때까지 기화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들어가는 열만큼 왜 온도가 증가하지 않는지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노력은 사회를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과정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혹 우리는 뚜껑을 열어놓고 물을 끓이는 것은 아닌지, 사회의 곪은 곳을 치유한다면서 엉뚱한 처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점검하기 위함이다.

 

생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 중 하나가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다.다양성의 존중. 이것은 놓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다. 소수 민족, 소수 문화, 소수자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나와 다른 가치는 적대적 가치로, 사라져야 할 가치로 보는 것은 아닌가? 사회악을 근절시켜야 한다면서, 국가폭력을 근절시켜야 한다면서, 우리 사회에 적대감과 불신을 팽창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농작물을 지켜야 한다면서 땅과 우리 몸을 죽이는 농약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던 잘못을 우리가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이윤보다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말로만이 아닌 현실에서 더 빨리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에 대하여

 

너무 자책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책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의 철저성이 떨어지는지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례 하나. 배우 문근영 씨는 외할아버지가 비전향장기수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따라 문근영 씨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 사람들도 있겠으나, 문근영 씨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연좌제다. 이것은 빨치산을 친척으로 둔 사람들을 옥죄여왔었고, 공안몰이의 대상이었던 민주화운동 당사자의 가족들에게도 상처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박근혜 대통령은 독재자의 딸이라는 낙인을 달고 다녔다.

 

이러한 비판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누구의 딸이니 안 된다는 논리를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선 후보를 명확히 확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논란은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 지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례 둘.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함께 공감하는 더없는 비극이다. 그 어느 사안보다 전 국민의 공분과 비통함을 샀던 세월호 참사가 아직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원인은 무얼까? 그 원인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무책임과 집권 여당의 뻔뻔스러움이 있다. 그리고 제1야당의 무기력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일까? 혹시 성급한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반反 새누리당 전선을 그은 것이 사람들의 공분과 비통함을 감소시킨 것은 아닐까? 이념을 떠나, 진영논리를 떠나 세월호 참사에 비통함을 느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새누리당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반 이상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교감하고 공분하기 전에 전선을 이렇게 나눈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전선을 긋기 전에 왜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왜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는지를 묻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면, 우리는 세월호 이후 사회의 변화상에 상당 부분 공감을 이뤄내지는 않았을까?

 

사례 셋. 찬핵과 반핵의 대립 구도는 ‘위험을 기술적·과학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가치와, ‘위험을 100% 통제할 수 없고, 그 위험의 크기가 막대하고 세대를 초월하니 핵이 필요 없다’는 가치의 충돌이다. 이것을 선악의 구도로 풀어낸다면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사례 넷. 녹색연합은 고라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전환을 꿈꾼다. 그런데 고라니는 멧돼지와 더불어 농작물 피해의 주범이기도 하다. 이 측면에서 같이 생명운동을 하는 한살림의 생산자들과 녹색연합의 시각이 다를 수 있고, 서로 대립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맞으니 너희가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한살림 생산자들 중 누가 녹색연합과 함께 걸으려 할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관점의 다름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당연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차이를 만들어낸다. 권력을 쥔 자들은 그 차이를 차별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생명운동을 한다는 우리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가를 묻고자 했다. 아래 파커 J. 파머의 이야기를 우리는 가슴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나는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을 상상하지도 염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 없는 삶을 염원하는 것과 비슷한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갈등은 추방된다. 물론 갈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 쫓겨날 뿐이고, 폭력이 강요하는 단일함의 환상이 그 자리를 채운다. 건강한 민주주의 속에서 공적 갈등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장려되어야 한다.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것은 창의성을 북돋아준다. 그리고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등을 둘러싼 여러 비판적인 질문에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관성, 혹은 중요성을 간과했던 이야기

 

하나, 소통을 강조하나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깃발을 먼저 드는 우리

바둑을 소재로 직장인(상사맨)의 애환을 다뤘던 인터넷 만화 <미생>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중이다. 그 드라마에서 신입 인턴이 재무부서에서 거부된 기획안에 다시 도전하다 실패한 후, 재무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배웠다는 대사가 나온다.

 

“같은 기획서라도 각 부서의 입장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영업부서의 말은 재무부서한테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긍정적 반응’이라는 말은 ‘아직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라는 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중략) 앞으로 제 기획안이 보류되고 거부된다면 뭐가 잘못됐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을 만족시키지 못했는가를 고민할 것 같습니다.”

 

뭐가 잘못됐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만족시키지 못했는지를 생명운동을 한다는 우리는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둘, 제대로 된 소통을 방해하는 ‘선험적 도덕의지의 폭력성’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소통을 강조하나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에는 ‘선험적 도덕의지’가 있다. ‘선험적 도덕의지’를 처음 접한 것은 문광훈의 『사무사』라는 책이었다. 김우창의 비평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비평한 책이다.

 

김우창은, 한용운의 소설이 시와 달리 실패한 것은 선험적 도덕의지가 앞서서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평한다. 그의 비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라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긴급한 상황에서 해방을 위해, “어떻게 어떠한 통일적인 행동의지가 사회적으로 성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한용운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한용운에게 일제에 대한 저항은 “외로운 도덕적 인간의 실존적인 결단이거나 독재적인 의지”로 표현되어도 충분했다. 따라서 그는 구문명과 신문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하는지를 구체성 있게 그려내지 못했다. 선험적 도덕의지로 인한 구체성의 부족으로 한용운의 소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김우창은 비평한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선험적 도덕의지에서 자유로울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훨씬 더 선험적 도덕의지에 집착한다. 후쿠시마 사고가 났음에도 왜 우리 사회는 탈핵으로 안 나가는지에 대해 답답해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나 식량주권을 위협하는 쌀 전면 개방 문제, 의료복지를 위협하는 의료민영화 문제 등 중차대하고 긴급한 문제에 왜 사회가 떨쳐 일어나지 않는지 안타까워하고 조바심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치를 찾고, 그것을 구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것보다 최대치를 설정해 놓고 한걸음에 그곳에 도달하려하니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패턴의 운동이 반복된다. 이러한 배경에 바로 선험적 도덕의지가 있는 것이다.

 

선험적 도덕주의가 주는 폭력성의 심각함을 우리는 깨닫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다양하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노모나 어린 아이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노모나 어린 딸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채근하고 오르면 누가 내 모습에 동의해줄까? 우리가 긴급하고 급박하다고 여기는 문제,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는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힘든 계단을 오르는 어린 아이일 수 있다. 그들의 변화 가능성을 믿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나 노모에게 가파른 계단을 쉬지 말고 오르라는 요구처럼 무형의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시민들과 충분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우리의 의도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도 있다. 선험적 도덕의지가 강한 의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를 지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행위의 결과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녹색운동, 생명운동은 다양성의 관점에서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의도를 지운다는 것은 성인군자의 아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의도를 지운다는 것은 절박함, 간절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어떤 결과를 예측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그냥 바라만 볼 수 없어서 행위를 하는 것. 그것이 의도를 지운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의도를 드러낼 때, 의도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열광하며 열정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의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대 세력이 된다.

 

그리고 의도를 관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관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관심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운동의 의도는 식상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의도를 지우지 않고 교묘히 감추거나 드러내놓고 관철시키려 하는데 우리만 의도를 지우는 것이 너무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돈도 권력도 없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들보다 더 교묘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내려놓음으로써 상대방의 의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사람들에게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라 비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고, 누구를 내쫓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고, 어느 당을 짓밟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고. 우리가 행복한 삶, 걱정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을 만드는 과정(싸움)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섣부른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비효과란 말이 최근 많이 언급된다. 그런데 나비효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피드백 과정이다. 초기 조건의 민감성은 어떤 운동의 내재적 파급력이라는 측면과 함께 운동의 초기 시작 조건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와 연관이 있다. 운동의 내재적 파급력은 사실 운동가의 역할에서 벗어난 시대적 조건, 사건의 내재성 등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초기 시작 조건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는 운동가의 역할에 의해 좌우된다. 초기 시작 조건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의도를 지우는 것이다.

 

셋, 자기물음에 불철저한 우리

우리는 철저하게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진영의 정당운동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통합진보당 선거 경선 부정의 처리 과정은 우리의 자기물음의 불철저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안이다. 진보진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 사건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마디로 당내 권력 싸움이었다고 규정한다. 서로 다른 세력들이 모인 정당에서 당내 권력 싸움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권력 싸움을 했어야 한다. 교묘히 여론을 활용하여 한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그 세력이 주도하던 당내 권력을 잡겠다는 얄팍한 술수를 포기했어야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사실이 아니라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그렇게 비칠 소지는 다분했다. 그것이 상대편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도 실패한 이유가 아닐까? 합리적 의심과 질문들이 사라졌던 것이 바로 통합진보당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아닐까? 물론 당시 구 당권파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의 운영에서 소수자(소수 집단)의 문제 제기를 어떻게 반영하고 당의 변화를 일궈 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당시 필요했다. 그리고 겸허히 반성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이왕 다양한 세력들이 뭉쳐 하나의 세력을 표방하기로 했으면, 그 안에서 내가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은 자가 적어도 당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각 세력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통합진보당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의 부족, 합리적 의심과 질문의 실종은 오늘날 진보정당의 위기를 초래했다. 한편으로 그것이 또 다른 시작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여전히 부족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여러 현상에 대한 합리적 의심과 질문이 어떻게 자유롭게 오가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관련하여 『사무사』의 다음 구절은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민족’이나 ‘통일’, ‘평화’나 ‘평등’ 혹은 ‘정의’와 같은 이념을 선호하는, 그래서 이런 이념의 선창과 제시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양 여기는 한국 사회 특유의 명분주의 혹은 순결주의 병리학에서도 확인되는 일이다. 이러한 이념의 표피성에는 말할 것도 없이 피상적 감정과 불철저한 사고가 자리한다. 그리고 이 모든 파편화된 감정과 사고와 이념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 외양화-허세화-내용 부실로 이어진다. 명분주의의 강고한 체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강고한 아집 때문에 사회의 모순은 끊임없이 은폐되고, 이념의 불순성과의 정면대결이 끊임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정의와 어떻게 만나고 대결할 것인가라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의식은 거짓 정열의 구호 아래 파묻히고 만다. 그러나 삶의 조화는 모순과의 대결에 있고, 인간의 자유는 균열과의 싸움에 있다.”

 

무엇을 바꾸고, 어디서부터 바꿀 것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며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른들께서 많이 말씀해주신 내용이다. 수신도 못하면서 평천하가 되겠냐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당시에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순차성이 아니라 동시성이었다. 내가 수신하는 원리로 제가도 가능하고 치국도 가능하며 평천하도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평천하 없는 세상에서 수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프랙탈Fractal 이론도 한몫했다. 여기서 역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바꿔내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내 삶에서, 그리고 내가 속한 공간(조직)에서도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이 아닌, 온전한 주체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뭇 생명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얘기하면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효율과 능력을 중시한다거나 조직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정보의 공유를 제한한다거나 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그리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간혹 조직 운영에서 능력과 효율을 중시한다. 말로는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하지만 활동가의 삶에서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놓치기도 하고, 일과 가정이 양립해야 한다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 조직 운영에서 가능한 것인지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대상은 훨씬 더 강도 높게 일하기에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논리가 한때 성행했다. 여전히 이 논리가 남아있기도 하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니체의 경고가 현실이 되어버린 경우를 우리는 종종 만난다. 독재 권력과 싸우면서 스스로 권력화 되었던 사람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 해답은 힘의 논리라는 지금까지 사회운영 방식의 프레임을 뒤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힘의 논리가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소수자는 영원히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승자가 독식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해답은 관계맺음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관성으로 받아들이는 관계맺음을 비틀어, 다른 관계맺음을 이끌어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없애는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폐해는 돈이 돈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자를 주지 않는 은행이 있다면 어떨까? 주주에게 배당금을 주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어떨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실제 그런 은행이 유럽에 존재하며, 기존 은행 속에서 잘 운영되고 있다. 또한 그런 기업이 바로 요새 열풍처럼 불고 있는 사회적기업이며 협동조합인 것이다. 은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은행과 고객, 사회의 관계맺음의 변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을 상상해 보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무엇인가를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제외하는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운동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관계맺음의 변화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없어져야 할 대상에서 우리와 공존하는 무엇으로 바뀔 수 있다.

 

쌀 전면개방에서부터 의료민영화, 비정규직 문제, 수명이 끝난 원전에서부터 4대강 사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다. 대부분은 기득권자들과 지배 권력이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그들이 만든 프레임 내로 우리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반대만을 외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점점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판을 흔들어 없애고, 새로운 생명운동의 프레임을 짜야 한다. 그 프레임의 구체적 모습이 아직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힘의 논리가 아닌 공존의 논리가 사회운영 방식이 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관계맺음을 구체화해 나갈 때 생명운동의 프레임도 구체화될 수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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