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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욕망’과 공동체 - 욕망은 어떻게 공동체에 생명에너지와 활력이 될 수 있는가?
2016-06-12 16:22: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욕망’과 공동체

- 욕망은 어떻게 공동체에 생명에너지와 활력이 될 수 있는가?

 

신승철 (철학공방 <별난> 공동대표)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은 미래를 구성한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탐욕, 갈애, 맹목적 충동, 성-욕망, 신체-욕망 등의 개념이 주마등처럼 스치지는 않는지요? 초기 공동체운동에서는 욕망을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어떤 경우에는 금욕주의와 계몽주의를 통해 욕망을 억제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발생했다는 것은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특이한 아이디어와 실천이 등장해서 공동체의 기존 질서를 변화시킬 촉매제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욕망을 잘 들여다보면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들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욕망은 공동체 안의 생명에너지이고 활력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욕망은 아이, 동물, 광인 등 욕망을 통해서만 존엄성이 인정되며 소수성을 갖고 있는 존재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주체는 노동의 주체나 이성의 주체와 엄밀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욕망이 잘 순환하는 공동체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공동체일 겁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다른 사람이 뭘 원하는지에 대해서 귀 기울이게 될 테니까요. 물론 자본주의적인 욕망은 자기계발의 논리에 따라 성공과 승리를 향해 앞으로 내달립니다. 또한 아주 통속적인 소비를 통해서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의 욕망은 다릅니다. 그것은 가장자리에서 생성되며, 주변에 위치하는 소수성과의 접속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재생시키는 활동의 대부분은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낮은 곳으로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이 흐를 때의 경우입니다. 최근 한국사회 곳곳에서 색다른 공동체들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골이나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지역사회는 개발주의, 성장주의를 경유하면서 서로를 빤하게 보고 규정하는 관계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공동체, 협동조합 등 곳곳에서 열린 공동체의 질서를 설립하기 시작하면서, 욕망의 긍정과 생성에 기반하여 서로의 잠재성을 바라보고 소수자들의 욕망을 존중하는 관계망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욕망이 등장했다는 것은 단지 이익이나 이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문제제기가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공동체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욕망은 영어로 ‘desire’로 표기되는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de’는 ‘~로부터 떨어져 나온’의 의미고, ‘sire’는 ‘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원래 의미는 ‘별에서 떨어져 나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유별난 것, 색다른 것, 이색적인 것의 함의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일단 욕망이 생성되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지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에는 엉뚱한 상상력이나 색다른 꿈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 감지됩니다. 체 게바라가 “인간은 꿈으로부터 내려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욕망은 꿈과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창조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꿈은 몽상이나 공상, 환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만약 꿈의 의미를 환상으로만 치부한다면 역동성과 실천성이 사라지게 되겠지요. 최근의 젊은 세대들은 이미지-영상의 흐름에서 나오는 환상을 횡단하면서, 그것이 관계망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환상은 욕망과 달리,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된 개인들에게서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한 사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러 사람의 꿈은 현실이다”라는 경구처럼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환상을 넘어서서 능동적이고 관여적인 차원에서 생산됩니다.

 

보통 아카데미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오언과 같은 협동조합과 공동체 사상의 선구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공상’이라는 단어는 고립된 개인이 몽환적이고 망상적인 사상을 전개했다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지요. 그래서 저는 공상적 사회주의가 아닌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라고 개념화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유토피아의 의미는 Utopia=U(no)+topia(where)’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카데미의 일원들은 ‘어디에도 없는’(no where)이라는 의미에서 환상적이고 공상적이라는 혐의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띄어쓰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지금 여기에’(now here)라는 의미로 재배치될 수 있습니다. 아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의 삶과 실천의 면면을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어디에도 없는 것을 몽상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만들어내고 생산하려고 실천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욕망의 미래구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었던 사람들입니다. 오언의 협동조합, 생시몽의 산업종교,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등의 구상은 자신이 욕망하고 원하는 것에 해당했으며, 환상처럼 그저 개인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운동의 태동은 바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로부터 출발합니다. 당신이 꿈꾸고 욕망하는 유토피아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을 언급한 이유는 공동체 역시도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꿈과 상상력의 차원이 작동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보고, 공동체가 함께 욕망하고 꿈꾸는 영역에 대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욕망(desire)은 욕구(need)와는 다릅니다. 욕구는 결여와 부재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게걸스럽게 소모하고 소비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욕구는 자본주의 등가교환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요. 반면 욕망은 생산하고 창조하고 꿈꾸고 상상합니다. 누군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다는 지점은 “고정되어 있는 현존 질서에 변화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제기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색다른 질서와 규칙을 만들려고 할 때, 재미있는 놀이에서와 같이 욕망이 촉발되면서 갑자기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우리 사이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옵니다. 욕망은 마치 어지러운 놀이에 빠져든 아이처럼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흐름과 횡단의 상태를 만듭니다. 이러한 욕망이 갖고 있는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통해서 공동체가 풍부해진다면, 어떤 경건함이나 결의결사보다 재미있게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이한 ‘누군가’와의 마주침과 공동체

 

공동체에서 일단 변화를 촉발하는 욕망이 생산되면 ‘우리 안의 어느 누군가’라는 주체성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나, 너, 그로 특정되지 않는 욕망의 흐름 속에서 공동체집단의 강렬도에 무언의 춤을 추듯 발언이 불쑥 터져 나오고, 웃음이 갑자기 번지고, 특이한 아이디어, 뜻, 지혜가 등장합니다. 이런 순간은 매우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합니다. 책임 주체로서 한 사람이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서, 어디서 누군가에게서 특이성이 나타날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이러한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염되고 전염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특이한 욕망은 마치 우리 사이에서 떠다니며 유동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지인 중 한 분은 무척 특이한 사람이라서 모임에서 감초 역할을 하고 색다른 상상을 가진 발언을 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달 뒤에 그 모임에 다시 찾아가보니 그 사람의 역할을 다른 분이 아주 재미있게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의 ‘주체성 생산’이라는 개념입니다. 매 순간 욕망의 흐름은 ‘우리 안에 어느 누군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와 아마추어가 따로 없고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전달되는 욕망의 진행형적 과정과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공동체에서의 주체성 생산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적인 관계망에 욕망이라는 색다른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던져주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서, 지각작용, 감정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성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에서의 욕망의 흐름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군가’이지요. 공동체 내에서의 활동은 자율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재미있는 놀이와도 같지만, 동시에 공동체 사업을 해내야 하는 과업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재미와 의미 사이에 서 있지요. 공동체에서 ‘재미’로 시작했던 것들이 ‘의미’가 되어 일로 다가올 때 활동가들에게는 부담으로 작동할 때도 더러 있습니다. ‘우리 사이의 어느 누군가’였던 주체성이 ‘그 일을 해내야 할 책임주체’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욕망의 흐름이 생산해내는 ‘주체성 생산’의 순간에 유연하게 감응해야 하는 관계망입니다. 만약 책임 역분과 기능, 역할만이 남게 된다면 겉으로는 공동체가 잘 운영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의무나 당위에 의한 지루한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동체에서의 회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회의가 미리 결정된 내용을 단순히 승인받는 형식적인 과정이나 절차가 아니라, 마치 미지의 항로를 향해 떠나는 여행처럼 탐색하고 구성하는 미래진행형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회의는 욕망이라는 미래구성적인 추동력을 내부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회의의 경우에는 미리 결론이 빤하게 나와 있는 관광처럼 책임 역분과 역할 분담을 위한 자리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참신한 상상력과 욕망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겠지요. 사실 공동체 회의에서 특이한 생각과 욕망, 상상, 열망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힘을 받고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생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 회의 속에서 욕망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감응하고 편승하면서 상상력이 배가된다면,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는 회의주의자들을 양산한다”라는 통념에 도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안에 내재한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을 촉발하고 촉매하기 위한 놀이와 같은 설정과 배치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의 활동에서도 욕망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의 활동은 규모를 늘리거나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재생하고 자기생산하기 위한 토대입니다. 대부분 욕망노동이나 돌봄노동, 정동노동이라고 불리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이나 타자생산을 위한 노동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공동체 내에서의 사업을 하는 경우 대부분 공동체의 뼈와 살을 다시 만드는 자기생산을 위한 ‘활동’을 기반으로 ‘노동’이 배치되기 때문에, 열정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며, 그만큼의 물질적 보상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활동과 분리된 임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질 나쁜 일자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공동체 사업이 갖는 자기생산을 위한 활동으로서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노동 혹은 정동노동에 의해서 유지되고 지속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노동은 공동체의 뼈와 살을 다시 만들고 세포를 재생하는 것처럼 살림과 돌봄의 경제를 만듭니다. 욕망노동은 여성의 돌봄노동이나 아이들의 학습노동, 정신질환자들의 정상화노동과 같은 영역도 포함하며, 대부분 부불노동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욕망노동의 최종 목표는 이윤과 잉여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의 자기생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적 관계망에서 욕망이 발생하여 특이한 것이 생산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공동체는 작은 변화에도 예민한 배치이며 관계망입니다. 만약 공동체에서 욕망이 생성되어 특이한 생각이나 아이디어, 지혜를 만든다면, 공동체적 관계망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마치 도토리 한 알이 온 산에 떡갈나무 혁명을 만들 듯이, 욕망이 특이한 것을 만듦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고장 내고 변화시킵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는 작은 기계부품들이 기능연관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했습니다. 때문에 공동체에서의 ‘특이성 생산’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망에 불가역적인 변화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예술, 과학, 혁명 등 특이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욕망은,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구도처럼 분자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원천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동창회 자리에서 채식을 선언하면 그날 동창들 사이에 채식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이슈가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도로에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면, 어느새 차들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속도문명이 고장 나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일상과 삶의 매순간에 특이한 욕망은 그저 별종적인 특이행동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와 공동체를 바꾸는 혁명의 수준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소수자의 욕망

 

소수자(minority)는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만이 아니라, 특이한 욕망의 흐름을 만들어내어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주체성입니다. 소수자는 여성-아이-노인-장애인-이주민 등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 위치해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소수자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협동조합에서 세미나나 회의가 있을 때, 옆에서 아이들이 응앙응앙 울어대고 동물들이 오락가락 하면 그 자리가 무척 풍부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소수자들의 욕망이 유감없이 드러나서, 그들을 향해 돌봄의 시선과 정동의 흐름이 발생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수자는 공동체의 관계성좌에서 특이점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돌봄노동과 정동노동의 과정은 그저 ‘약자를 돌본다’는 행위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욕망에 접속해서 색다른 욕망의 흐름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의 돌봄노동은 감정을 소모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욕망을 산출하는 매우 능동적인 실천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정치 권력이나 미디어 등 우리 사회시스템은 성인-자국민-남성-비장애인이라는 다수자의 시선에서 조직되는 측면이 여전히 강합니다. 그에 반해 공동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소수자를 향하는 욕망의 흐름이 대안을 꿈꾸는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에서는 대부분 산과 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가장자리에서 생명이 생성됩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소수자들은 욕망을 생산함으로써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 자본주의는 공리주의의 원리에 따라 소수자의 희생이나 배제를 전제로 다수의 행복과 쾌락을 보장하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공과 승리를 향해서 질주하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는 소수자가 위계와 서열의 하단에 위치하거나 차별받고 배제되는 상황이 종종 연출됩니다. 소수자들은 이 사회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배제당하고 희생된 소수에 대해서 눈감는다면, 이는 사회 전체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줍니다. 오히려 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당하는 상황을 당연시하게 되는 전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사회에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화, 증오, 차별과 배제 등의 미시파시즘이 발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시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의 원천에는 ‘생명에 대한 도구화’와 ‘제3세계 인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질서’가 보이지 않게 주는 영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욕망에 대해서 눈감고 ‘고기 만드는 기계’와 같이 여길 때, 그것은 우리 사회 관계망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주어 인간에 대한 도구화로 드러납니다. 그 결과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또한 13억 명이 굶주리고 있고 매년 600만 명의 제3세계 인민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보이지 않게 영향을 주어 학교에서의 왕따와 같은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소수자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마치 생태계처럼 구성된 공동체에서 차이와 다양성의 풍부한 잠재력을 긍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소수자의 욕망은 수동적 의미에서 보호받아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능동적 의미에서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욕망의 흐름을 만들어 공동체를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공동체에서 삶의 스토리와 사랑의 움직임, 살아가는 지혜가 생기는 것은 소수자라는 특이한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소수자의 욕망은 관계성좌를 풍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생태적 지혜와 집단지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서로의 정체성이나 역할이 분명해서 빤한 사람으로 간주된 사람들이 만날 때, 관계가 성숙될 수 있는 여지는 최소화됩니다. 반면 소수자의 욕망이라는 특이한 흐름이 생산될 때, 공동체는 너와 나 사이의 관계가 성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소수자로 인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욕망의 흐름이 돌봄, 사랑, 변용으로 나타나겠지요.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는 ‘소수자되기’라는 개념을 통해서, 관계가 성숙되고 발효되기 위해서 어떤 욕망의 흐름이 필요한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관계가 성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너와 나 사이의 관계가 성숙하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공유자산,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통의 아이디어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공유共有 영역의 토대에는 소수자가 촉발하는 특이한 욕망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관계망의 성숙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에서는 ‘공유경제와 돌봄노동(=소수자되기)’이 마치 한몸처럼 붙어 있다는 점이 발견됩니다.

 

현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의 욕망가치를 긍정하는 대안 경제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소수자들은 관계를 성숙시키고 관계성좌를 풍부하게 만드는 주체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이 갖고 있는 가치를 존중받아야 합니다. 소수자라는 특이점은 생태적 지혜의 원천입니다. 생태적 지혜는 관계 외부의 진리가 아닌 관계 내부의 지혜입니다. 예컨대 우리 할머니들이 알고 있는 음식, 약초, 풍수, 절기 등이 생태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태적 지혜는 집단지성의 원천이 되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계류 혁신에 직간접적인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기술혁신에는 혁신적인 기업가와 기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욕망이 발효시키고 성숙시키는 관계망에서 나오는 생태적 지혜도 숨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에 대한 기본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임노동이 아닌 비노동인민들로 구성된 소수자들이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게 기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는 얘기인 셈이지요.

 

공동체에서의 욕망의 미시정치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운동을 할 때 생태주의를 준거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생태주의를 금욕주의나 자연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먼저 공동체는 자연주의라는 ‘자생성의 신화’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기술매개적인 지평도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욕망에 대한 태도는 금욕과 절욕의 금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미시정치’를 통해서 공동체가 욕망을 자주관리해야 합니다. 욕망의 미시정치의 기원은 심원한데, 불교에서 붓다의 수행과도 관련되어 있지요. 붓다는 해탈하기 전에 아주 금욕주의적인 수행을 하면서 혹독히 자신의 욕망과 신체를 대했습니다. 그래서 수개월간의 뼈를 깎는 수행과정에서 길에 쓰러져 있는 붓다를 수지타라는 여성이 구조해서 유미죽을 먹이고 돌봐주었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비로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을 하였지요. 붓다가 생각한 것은 욕망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생명사상과도 통합니다. 또한 붓다의 사유는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개념과 공명합니다.

 

독일정신분석가 중 한 사람인 빌헬름 라이히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의 흐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금기하고 터부시함으로써 죄의식을 갖게 만들고 결국 굴절되고 변형된 2차적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2차적 욕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억압을 욕망하는 파시즘으로 향할 수 있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욕망에 대한 태도를 취할 때 계몽적이거나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금지되면 그 생명에너지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쪽으로 굴절되고 변형되어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지와 억압보다는 욕망 자체가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다는 결과론적인 생각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욕망을 더 억압하는 악순환에 빠져들지요. 그러나 공동체에서 욕망을 선순환시키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들면,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넘치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과 ‘자본주의적인 욕망’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은 예술, 과학, 혁명 등 특이한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신체로부터 기인한 부드러운 흐름입니다. 반면 자본주의 욕망은 통속화되어 있고 스테레오타입화된 형태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적인 욕망은 TV, 육식, 아파트, 자동차 등 탄소중독적인 소비와 향유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TV 앞에서 달콤한 졸음에 빠져든 사람처럼 외부를 보지 못하게 하고 통속된 욕망에 만족하면서 풍요롭게 잘 살도록 유도합니다. 자본주의는 맛, 취미, 기호, 미디어, 게임 등 시시콜콜한 일상에까지 개입하면서 부드럽게 억압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외부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제3세계 인민들의 현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의 미시권력에 맞서 공동체는 ‘사랑과 욕망의 미시정치’를 실천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력(power)이 우리의 일상을 촘촘하게 지배하듯이 우리 사이의 미시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욕망의 역능(force)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크고 작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욕망의 미시정치는 성, 약물, 빈곤, 게임, 먹거리, 패션, 미디어, 문화 등 삶을 구성하는 아주 작고 미세한 영역을 대상으로 합니다. 욕망의 미시정치의 방법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엌에서의 미시정치가 그것의 좋은 예입니다. 부엌에서의 삶의 형태를 바꾼다면, 남녀관계나 먹거리에 대한 관계망 등도 함께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남성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욕망의 미시정치가 가진 한 모습이지요. 또한 생협의 먹거리를 이용하는 주부의 등장도 욕망의 미시정치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실에 컴퓨터를 배치하는 것도 욕망의 미시정치의 차원입니다. 배치와 재배치는 욕망의 미시정치의 좋은 방법 중 하나지요. 욕망의 미시정치는 금기나 제도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 스스로의 자주관리를 통해서 자율성을 배가하려는 방법론입니다.

 

물론 미시정치를 하자고 해서 거시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시정치의 몫이 분명 있지요. 하지만 모든 삶을 거시정치를 통해서 단번에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미시정치는 담고 있습니다. 지금 직접적인 삶의 문제를 미시정치로 풀어가면서, 공동체의 파견부대로서 거시정치의 영역을 배치하고자 하는 실천이지요. 거시정치도 미시정치의 기반 없이는 어떻게 제도와 법률을 바꾸어야 할지 방향성을 설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마을공동체에서의 협치(governance) 구상은 미시정치에 기반한 거시정치의 구도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생활정치의 기반이 없을 때, 사실상 거시정치도 일상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니까요.

 

최근 들어 욕망의 미시정치는 미디어, 게임,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색다른 배치에 대한 태도와 관계 맺기에 응답해야 할 상황에 와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기술 매개적 관계망에 대해서 더 익숙해 하는 상황에서 공동체는 대면적 관계망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욕망의 미시정치의 장은 이제 네트워크나 SNS에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의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이 기계에 둘러싸인 젊은이들의 마음을 감싸고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관계망인 대면적이고 유대적인 관계망을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영적 공동체로 만드는 색다른 운동도 기획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이한 것을 사랑하는 공동체 만들기

 

앞서 말했듯이 공동체에서 욕망은 특이한 것을 생산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욕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 상당히 고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이성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단독성, 유일무이성, 일의성, 고유성이라고도 불려왔지요. 특이한 욕망은 빤하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공장식 축사에서 소는 그저 보편적인 소에 불과하지만, 소농 축산인들은 소에 ‘예쁜이, 꽃순이’ 등의 이름을 각각 붙여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욕망은 유한하고 국지적이고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며,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인 각각의 특이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의 관계성좌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저 군인, 노동자, 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각기 특이한 욕망을 생산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사람들이 관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생물 종 다양성의 개념처럼 생태계에서 다양한 종이 어울려야 서로에 연결되어 있는 전체 생태계가 지속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점과 같습니다.

 

국가주의는 보편적인 질서로서의 국가를 상정하고 개인들을 모두 ‘국민’으로 포섭해버립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것 아래에 복속된 개별성 혹은 개인성으로 간주하면서, 특이한 것도 결국 체제나 시스템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개인을 언급할 때 대부분 국가에 포섭된 개인의 의미가 아니라 특이성으로서의 개인을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보편-특수-개별로 위계화된 질서는 국가주의적인 발상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와 완전히 다른 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동체에서의 공통성(common)은 ‘특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통된 의견이나 생각이 모아진다고 해서 특이하고 색다른 의견을 무시하거나 포섭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통성은 특이성(singularity)을 사랑하며, 특이성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적 관계망과 배치는 아주 작은 특이한 욕망의 발생에 민감한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특이한 욕망의 발생은 공동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특이성을 사랑하는 공통성’의 의미로서의 공동체는 이제 색다른 과제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특이성을 어떻게 생산해서 공동체의 배치와 관계망을 풍부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즉, 특이성은 미리 주어지는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욕망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로 향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고 말하고 실현시키고자 열정을 바치는 그러한 욕망이 그것의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은 공동체가 정체되고 침체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하고 다양하고 다채롭게 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욕망이 해내는 특이성 생산은 공동체를 색다른 질서로 이끌 것이며, 세상의 재창조를 가능케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관계망에서 욕망이 생산하고 창조하는 영구적인 혁명입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혁명과정에 관한 한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왜냐하면 어떤 혁명가도, 어떤 혁명운동도 없을지라도, 모든 수준에서 혁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을 하자는 이유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낙관주의의 모든 혁명적 유토피아들과 대비된다.”1)

 

이렇듯 욕망은 공동체적 관계망 속에서 분자혁명의 특이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혁명적인 열망과 열정은 욕망의 모습으로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1) 『가타리가 실천하는 욕망과 혁명』, 윤수종 역, 문화과학사, 2004,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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