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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탈성장의 길
2015-12-24 08:42:00

[특별기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탈성장의 길

* <모심과 살림> 6호 특집 원고로 필자에게 청탁해 실은 글입니다.

 

글 세르주 라뚜쉬 (파리11대학 석좌교수, 양심적성장반대주의자)

번역 김신양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위원)

 

 

일부 저자들의 글에서처럼 탈성장(decroissance)을 지속가능한 개발의 변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탈성장이 가지는 의미와 범위를 역사적, 이론적, 정치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과 같다. 정치생태주의와 개발비판적인 모든 흐름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식상한 문구와 단절할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에 우연히 탈성장이라는 행동지침을 던지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 용어는 성장과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한계의 의미를 되찾자는 목적을 가지는 선동적인 정치 슬로건이었다. 특히 탈성장은 퇴보도 아니요, 부정적인 성장도 아니다. 이 단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장을 위한 성장이 그러하듯 탈성장을 위한 탈성장도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탈성장주의자들은 성장이 파괴한 삶의 질, 공기의 질, 물의 질 등 많은 것들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무신론(a-theisme)이라 하듯 그리스어 부정접두사 ‘a’를 붙여서 무성장(a-croiss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탈성장은 신앙과 종교가 되어버린 진보와 발전을 폐기하자는 것이므로, 성장과 경제의 무신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장과의 단절은 말과 사물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상상력의 탈식민지화와 다른 세상의 구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탈성장의 역사, 이유, 의미

 

소비사회와 성장 신봉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출하는 급진적인 운동이 나타난 것은 여러 사건의 우연적인 만남도 있지만 역사적 필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급진자유주의의 승리와 마가렛 대처 수상의 그 유명한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 선포에 직면하여 반개발주의와 생태주의자 동지들은 더 이상 제3세계주의자1)들이 하던 방식의 비판적 이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단일사고와 이념의 승리가 가진 다른 얼굴이 다름 아닌 모두가 동의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것이다. 이는 생태위기에 직면하여 성장의 종교를 구하기 위해 유엔환경계획(UNEP)이 내건 그럴싸한 모순어법으로 다른세계화운동가들2)도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는 듯했다. 그래서 세계화된 시장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다른 문명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는 것,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생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긴급해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개발도상국에서 사용되는 생산주의의 다른 형태인 ‘개발주의’와의 단절로서 그것이 이 대안프로젝트의 토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케인즈주의처럼 신고전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다른 경제패러다임을 제시하자는 것인가? 니콜라스 조지스쿠 로젠(Nicolas Georgescu-Roegen)의 바이오경제3) 프로젝트 이후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물론 성장사회에서 다른 경제정책도 가능하긴 하다. 1945~1975년의 ‘영광의 30년’ 동안 케인즈주의-포드주의 조절방식이 성공을 거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가들의 상황처럼 성장 없는 성장사회에서 경제시스템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정책을 생각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사실 탈성장은 지배적인 생산주의의 질서에 복종하는 나약한 합의를 깨기 위한 선동적인 구호이다. 이러한 이름의 운동은 2002년 3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개최된 ‘개발을 부수고 세상을 다시 만들자’라는 콜로키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지적인 모험은 몇 달 후 저널의 탄생으로 이어져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탈성장은 급속히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소비사회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구축하고자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깃발이 되었고, 성장사회와의 단절 필요성을 의미하고 검소한 풍요의 문명이 도래하도록 하기 위한 ‘움직이는 픽션(허구)’이 되었다.

 

탈성장프로젝트는 다른 성장도 아니고 다른 개발(지속가능한, 사회적, 연대적 등)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회’의 건설, 즉 검소한 풍요의 사회, 성장 없는 번영의 사회(Tim Jackson)의 건설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경제프로젝트가 아니라 현실로서의 경제, 제국주의 담론으로서의 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하는 사회프로젝트이다. 그러한 까닭에 탈성장이라는 말은 정치적, 이론적 함의를 가지는 복잡한 대안프로젝트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성장이란 자연스런 현상으로 그 자체로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산 자의 탄생에서 발전, 성숙, 쇠락 이후의 죽음,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생물학적 순환은 인류 생존의 조건으로서 동식물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한다. 인간은 이 상호의존성과 자연에 대한 부채를 인정하며 그들의 안녕을 보장하는 우주의 힘을 상징적인 형식으로 찬미해왔다. 그런데 상징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괴리가 생기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사회는 성장에 정당한 숭배를 바쳤지만 근대 서구사회만이 그것을 종교로 만든 것이다. 지략이나 시장의 속임수, 혹은 노동력 착취의 결과물인 자본의 산물은 다시 자라는 식물과 동일시 여겨져 왔다. 사회의 생존 조직인 경제유기체는 더 이상 자연과 공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며 물신인 자본이 증가하듯 무한정 성장해야 한다. 자본/경제의 재생산은 생식능력과 소생능력 그리고 이윤율과 성장률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 자본/경제의 신격화의 종착지는 소비사회라는 불멸의 환상이다. 이것이 성장사회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성장사회란 성장경제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며, 성장경제에 먹히는 사회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을 위한 성장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었거나 경제와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성장이 아니라 - 그건 좋은 일이다 - 성장하기 위한 성장이다. 성장사회는 당연히 소비사회로 귀결된다. 그 사회는 3개의 무제한에 근거한다: 첫째, 무제한 생산으로 재생가능한 자원이나 불가능한 자원을 무제한 사용한다. 둘째, 필요(needs)를 무제한 만들어서 불필요한 잉여생산물 또한 무제한 생산한다. 셋째, 쓰레기를 무제한 배출할 뿐 아니라 공기와 땅, 물을 사용한 오염물을 무제한 배출한다.

 

지속가능하려면 모든 사회는 스스로 제한을 두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모든 제약을 넘어서는 것을 찬양하고 과過함을 선택했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충동질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를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껏 모든 사회는 이러한 열망이 방향을 잘 잡아 공동선에 복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왔다. 예컨대 이 열망을 비상품적인 스포츠에 투자한다면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상품과 돈의 축적과 같은 탐욕의 충동에 내맡긴다면 “더 많이, 더욱 더 많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와 지구의 생존을 위하여 한도限度에 대한 감각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탈성장은 성장과 물신의 세포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는 사회를 탈출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상상력의 탈식민지화가 절실하다.

 

 

상상력의 탈식민지화

 

상상력의 탈식민지화에 대한 사상과 계획은 두 가지 원천을 가진다. 하나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인류학적 비평이다. 이 두 가지 원천은 생태비평과 더불어 탈성장의 기원이 된다. 카스토리아디스는 상상력에 방점을 찍고, 제국주의 비평가들은 탈식민지화에 중점을 둔다. 이 두 원천을 돌아봄으로써 ‘상상력의 탈식민지화’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사회제도』의 저자인 카스토리아디스는 사회현실이 상상력의 의미, 즉 정서를 동원하는 표상表象이 실행된 것으로 본다. 풀이하자면 성장과 발전이 진보와 경제의 토대가 되는 모든 범주와 같이 믿음, 곧 사회적 상상력의 의미이듯 그것을 벗어나고, 종식시키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탈성장사회의 실현은 세상의 변화가 우리를 고통 속에 살도록 선고를 내리기 전에 진정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우리의 상상력부터 식민지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카스토리아디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중요성을 가지는 새로운 상상력의 창조이다. 이 창조는 인간사회의 중심에 생산과 소비의 확장이 아닌 다른 의미를 둘 것이고,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삶의 목표를 제시해줄 것이다. (중략) 이러한 점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어마어마한 어려움이다. 그것은 경제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 삶의 수단으로 제자리를 잡아서 경제적 가치가 유일한 중심이 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이 광적인 소비의 행진을 포기하는 사회를 원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지구 환경의 완전한 파괴를 피하기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대인의 심리적, 도덕적 비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4)

 

다시 말하면 이 소비와 연극의 초근대적 사회를 탈출할 필요성은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구인들의 사회심리적 조직인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 한마디로 그들의 상상력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라는 - 불합리하고 품위 떨어지는 -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남성들과 여성들, 오로지 여러 사람들만이 그걸 실현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한 조직은 잘해봐야 가능한 방향을 준비하고, 비판하고, 부추기고, 개괄적인 그림만 그릴 수 있을 뿐이다.”5)

 

지배적인 상상력에서의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들어갔는지를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상품화에 갇힌 의식의 경제주의화 과정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카스토리아디스에게나 우리에게나 경제란 만들어진 것이다. 『상상의 사회제도』의 마지막 부분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경제의 발명』이라는 책에서 발전시키고자 한 내용 - 근대 서양의 상상력 속에서 경제가 제도화되는 방식에 대한 분석 - 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6)

 

하지만 카스토리아디스에게 성장과 발전은 긴 분석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판단은 토론을 통해 혹은 다른 주제에 대한 성찰의 과정에서 간결한 몇 문장으로 이미 아주 잘 해결되어버렸다. 발전의 위기에 대해 언급하며 그는 그것을 발전과 관련된 상상력의 의미의 위기로 분석하며, 특히 진보의 위기는 더욱 그러하다고 분석한다. 발전에 대한 놀라운 이념적 탄성에너지는 더욱 더 놀라운 진보에 대한 탄성에너지에 기초한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한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진보를 믿지 않는다. 모든 이는 각자 내년에 더 많이 벌기를 바랄 뿐 ‘연 소비 3% 증가’에 인류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성장에 대한 상상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건 어쩌면 서구사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조만간 고화질 텔레비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북부/남부 보고서의 분석에서 믿음이 뿌리 뽑히는 형태는 탈식민지화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드러난다. 식민지화는 반제국주의 인류학에서 정신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서, 여러 저서의 제목에서 발견된다. 옥타브 마노니Octave Manonni는 ‘식민지의 심리’라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고, 제라르 알타브Gerard Althabe가 1969년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연구에서 ‘상상력의 탄압과 해방’이라는 제목을 붙여 더욱 분명히 드러내었다. 특히 세르주 그루진스키Serge Gruzinski는 1988년에 ‘상상력의 식민지화’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부제7)가 서구화 과정을 환기한다. 그런데 그루진스키가 상상력의 식민지화를 말할 때 그것은 엄격한 의미의 식민지화 과정의 탐구, 즉 선교사들에 의한 토착민의 개종의 과정에 관한 것이다. 종교의 변화는 식민지화 계획 속에서 정신이 전통문화로부터 벗어나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동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상상력의 탄압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단지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널리 사용했던 것처럼 화형대 재판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신 상태의 개종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는 진보와 경제에 대한 상상력을 새로이 제도화하는 이념적이고 거의 종교적인 일로서, 아미나타 트라오레(Aminata Traore)의 멋진 표현을 빌리면 ‘상상력의 위반’인 것이다. 서양의 ‘상상력의 식민지화’는 우리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주범이기도 하기에 정신적 침략과 관련된 일이다. 그러하기에 이는 어떤 부분에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자주식민지화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탈식민지화라는 표현은 어미변화를 통해 생긴 것이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변화,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진정한 상상력의 혁명에 관한 것이다. 우선 문화적 혁명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에서 벗어나야 하며, 가치를 바꾸어야 하며, 따라서 탈서구화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탈성장 옹호자들의 개발 이후 프로젝트에서 발전시킨 프로그램이다.

 

지배적인 상상력 혹은 식민지적 상상력에서 벗어나는 문제는 카스토리아디스에게나 반제국주의 인류학자들에나 핵심적인 문제였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상력을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남의 상상력을 바꾸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이들의 상상력을 바꾸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카스토리아디스가 생각한 방안은 교육(paide.a)으로, 이것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사회에서 시민교육인 파이데이아paideia가 없다면 참여의 자유나 가능성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민교육이란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누구도 시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시민은 어떻게 되는가? 시민이 되도록 배움으로써 가능하다. 우선 배우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보아야 한다. 요즘처럼 텔레비전을 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8)

 

그런데 해독치료는 탈성장 사회가 완전히 실현되었을 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전에 우선 우리를 틀에 가두는 소비사회와 시민을 바보로 만드는 제도에서 벗어나고, 이를 깨부수어야 한다. 현대의 이념 전파수단인 광고의 공격을 고발하는 것은 카스토리아디스가 말한 ‘소비주의와 텔레비전 체계’를 벗어나기 위한 반격으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탈성장’ 잡지가 ‘광고 부수는 자들’로부터 나온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광고는 성장사회의 본질적인 외형물이고 양심적 성장반대운동은 당연히 이 광고의 공격에 대한 저항과 연결되어 있다.

 

탈성장은 그 자체로 대안은 아니며 대안들의 모태이다. 그것은 경제 전체주의의 방탄복을 벗기며 운명의 다양성과 창조의 공간으로 이끄는 인간의 모험이다. 그것은 세상을 단일한 형태로 만들며 문화를 죽이는 원리의 원천이 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혹은 마르쿠제가 말한 단면적 인간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성장’사회는 유럽, 아프리카, 혹은 남미나 텍사스, 치아파스나 세네갈, 멕시코에서 다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성과 복합성을 양성하고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탈성장사회 모델의 비법을 손에 쥐고 제안할 수는 없는 일이고, 모든 지속가능한 비생산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요소와 구체적인 전환 프로그램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환 프로그램은 반드시 개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탈성장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많은 ‘대안들’의 제안도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탈성장은 전략적 타협과 전술적 동맹을 양성하는 지역별, 부문별 많은 투쟁에 방향을 제시하는 넓은 틀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상상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단절을 수반한다. 그러니 “이윤추구, 항상 더 많이”에 경도된 경제주체의 탐욕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규칙을 정해야 한다. 예컨대 환경 및 사회적 보호주의9), 노동 관련 법, 기업 규모의 제한 등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구적 상품인 노동, 토지, 화폐를 ‘탈상품화’ 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세계화된 시장에서 빠질 때 경제의 사회 속 통합과 동시에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투쟁의 출발점을 찍을 것이다.

 

탈성장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주의와 단절하고 행복의 의미를 ‘연대적인 사회에서의 검소한 풍요’로 다시 정의한다면, 우리는 필요(needs)를 무제한 만들면서 무제한으로 생산한 결과로 양산되는 좌절감의 증대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제自制는 성장 없는 번영을 향한 인간문명의 멸망을 막는 조건이 될 것이다.

 

부에 관한 지표의 타당성에 대한 최근 논의는 GDP가 복지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근거가 취약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런데도 GDP는 성장사회에서 작동하는 영원한 물신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이 기회로 경제 그 자체가 존재론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GDP를 비판하면서 경제에 대한 신앙 또는 신앙으로서의 경제에 대한 토대가 흔들렸던 것이다. 담론으로서의 경제는 그 대상을 전제하고, 경제적 삶은 그 담론 때문에 존재한다. 정치경제학을 어떻게 정의하든 - 생산, 분배, 소비로 이루어지는 고전주의 방식이든, 희소자원의 대안적 사용이라는 최적의 할당으로 정의하는 신고전주의 방식이든 - 경제는 스스로 전제하는 조건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자원의 할당으로서의 부가 경제에만 해당될 때 구체적인 실천과 관련 이론의 영역은 제한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게리 베커Garry Becker는 아주 논리적인 주장을 하는데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바로 경제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것이 다 경제적인 것이거나 아무 것도 경제적인 것이 될 수 없다”10)라고 하였다. 사회적인 것의 수량화와 셈의 강박관념은 세상 전부를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제도의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세상의 상품화는 세계화로 인하여 촉진되었다. 탈성장운동이 행동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상품으로의 전환프로젝트에 저항하는 것이다.

 

 

1) 제3세계란 서구에도 사회주의국가에도 포함되지 않는 가난한 국가들을 총칭한다. 제3세계주의란 이러한 제3세계와 연대하여 그들의 정치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식민지 반대와 인권보장을 주장한다(역자 주).

2) 다른세계화운동: 한국에서는 반세계화운동으로 알려져 있으나 2001년경 벨기에의 한 기자가 ‘다른세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후 널리 확산되어 이제는 반세계화운동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용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반세계화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제기구(IMF, WTO 등)에 대한 반대운동 중심의 저항운동이었다면 이제는 다른 세계화의 건설로 나아가자는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흐름에 동의하는 이들을 반세계화운동가들이라고 칭하는데, 특정한 집단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핵심적인 문제를 ‘상품화’로 보며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연구자나 정치인 또는 현장 활동가들을 아우르고 있다.(역자 주)

3) 바이오경제(bioeconomy) : 러시아의 생물학자 바나로프(T.I. Banaroff)가 1925년에 최초로 사용한 용어. 이후 1970년대 중반 조지스쿠가 경제의 과정을 인류에 고유한 생물학적 진화의 확장으로 개념화하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경제에 대한 사고의 개혁이 필요하다. 우선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에 영감을 준 합리적 메커니즘보다 생물학과 열역학이 경제에 더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 개념은 경제활동에 작용하는 자연의 제약을 근거로 든다. 이로 인하여 경제와 생태의 관계를 좁히며 생태경제학의 흐름에 원천이 되었다.(역자 주)

4)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무의미의 증가, 미로의 교차로 IV (La montée de l'insignifiance, Les carrefour du labyrinthe)』, Editions du Seuil, 1996, p.96.

5)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이탈하는 사회 (Une société à la dérive)』, Editions du Seuil, 2005, p.244.

6) 『경제의 발명 (L'invention de l'économie')』, Albin Michel, 2005.

7) 세르주 그루진스키, 『상상력의 식민지화. 16세기~18세기 스페인어권 멕시코에서의 토착사회와 서구화(La colonisation de l'imaginaire: Sociétés indigènes et occidentalisation dans le Mexique espagnol XVIe-XVIIIe)』, Gallimard, 1988.

8) 카스토리아디스, 『민주주의와 상대주의, MAUSS와의 토론』, Mille et une nuits, 2010, p.96.

9) 보호무역주의와 같이 각 국가가 자국의 사회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자 주)

10) 게리 베커의 이 문장을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다 경제의 영역이 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은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 감정 등 비물질적인 것까지 다 경제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만물과 우주 전체가 경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경제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경제란 특정한 것에 한정되는 개념인데 그 한계를 넘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라는 영역으로 넓혀버리게 되면 경제란 것의 의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자 주)

 

 

세르주 라뚜쉬 Serge Latouche

1940년 프랑스 반느Vannes 출생. 정치학 고등학과정을 마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2002년부터 빠리남부대학(빠리 XI대학) 석좌교수로 경제사상사를 강의하고 있다. 북부국가와 남부국가 간의 경제·문화 관계와 사회과학 인식론 전문가로, 프랑스를 비롯해 콩고, 라오스, 아프리카 등에서도 강의와 연구 활동을 했다. 탈성장 이론 및 정책을 다루는 『Entropia』 창간에 기여했으며 현재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2년 이후 본격적으로 탈성장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관련된 여러 편의 책과 글을 발표했다. 주요 저술로는 「개발을 거부해야 하는가? 제3세계의 반경제에 대한 시론」(1986), 「풍요사회의 결과: 개발이후에 대한 탐구」(1993), 「경제이성의 비이성 : 효율성에서 대비책의 원칙으로』(2001), 『제한 없는 정의: 세계화된 경제에서의 윤리의 모험』(2003), 『개발에서 살아남기: 경제적 상상력의 탈식민지화에서 대안사회의 건설로』(2004), 『탈성장의 모험』(2006). 『탈성장, 불평등 그리고 빈곤 ‘in’ 소외된 도시빈곤지역을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 정책』(2011) 등이 있으며, 『낭비 사회를 넘어서』(2014), 『탈성장사회』(2014),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2015), 『발전에서 살아남기』(2015) 등이 국내에 번역·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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