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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한’ 사람 주체성과 ‘나’들의 공동체
2016-07-20 10:03:00

 

‘한’ 사람 주체성과 ‘나’들의 공동체

 

주요섭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전환 통

 

고단하다. 불안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버겁다. 아픈 나와 우리를 감각한다. 전복적 변화가 절실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새로운 삶을 그리는, 혹은 그리워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환기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의 삶도, 내가 활동하고 있는 한살림도,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도 지구촌도 ‘기틀이 위태롭다’. 위기危機다. 단순한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가 되려는 순간이다. 임계점이다. 임계점이란 사전적으로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다른 상태로 바뀔 때의 온도와 압력”을 말한다.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보글보글 소리가 나고 뜨거운 김이 새어나고 뚜껑이 들썩거리듯, 전환기에는 몇 가지 신호가 있다. 징후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절망: ‘희망 없음’에서 비롯된 극한 피로감이다. 청년들의 예고 없는 죽음과 요양병원의 예고된 죽음을 목격하며 정녕 이렇게는 아니라는 감각.

낯섦: 가상현실도 그렇고, 알파고나 인공지능도 그렇고 잘 알 수가 없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 알지 못했던 것들이 속출한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다. 아이들의 낯선 감정표현과 골목을 장악한 편의점의 편리한 밥·술 문화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혼돈: 무엇보다 혼란스럽다. 산업화·민주화 이후를 이야기하지만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유신의 잔영과 성장신화와 삼포세대가 뒤죽박죽으로 공존한다.

두려움: 불안하다. 두렵다. 취업을 못해서 두렵고 취업을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이 두렵다. 생존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징후들은 뭉쳐서 가끔 아픔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몸살을 앓듯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성장통’일까? 아니면 ‘성숙통’일까? 성장통은 다음의 성장을 전제하지만, 성숙통은 성장 없는 아픔, 마음의 아픔이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면, ‘전환 통’, 마치 갱년기의 그것처럼 전환기의 아픔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위기의 증거가 아니라 전환의 징후이다. 극적인 변화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때가 되면 아프다. 살아있음의 증거다. 더욱이 그것이 특별한 목적의식과 가치와 이상을 지닌 사회적 활동의 주인공들, 즉 사회운동의 주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통증은 전환의 시그널이다.

 

예의 그 나비 이야기다. 지금은 고치의 시절, 애벌레의 시기는 지났으나 나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절로 나비가 되지는 않는다. 상상세포(imaginal cell) 하나하나의 상상력과 그들의 공모共謀, 마음 속 깊은 네트워킹이 있어야 한다. 애벌레 시절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축복과 불안’의 역설적 시기, 고치의 시절이다.

 

‘조직’ 혹은 ‘3 인칭’이라는 우상

 

전환기의 주된 감정상태는 무엇보다 불안과 공포다. 두려움이다. 혼란스런 현재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의 배후에는 ‘자기’에 대한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도 조금 다르다. 실존적 혼돈이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니다. 애벌레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 이후도 아니다.

 

‘대2병(대학교 2학년 신드롬)’ 기사를 읽는다. 공부도 안 되고, 취업도 걱정이고, 자존감 상실도 문제지만, 핵심은 정체성의 부재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단다. 입시생 3년의 ‘나’ 없는 삶 때문일까?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다. 정체성의 상실, 즉 명사적 자기인식의 부재이기도 하지만 주체성의 상실, 즉 동사적 삶에 대한 자기돌봄이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사회적 활동의 주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적인 변화의 추이도 중요하고 조직적 준비도 중요하지만, 관건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더욱이 사회운동이 객관적인 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나’들이 이루어내는 가치창조, 나아가 세계창조라면 더욱 그러하다. 다시, 주체성에 관한 문제다. 그렇다면 그 주체성의 ‘주체’는 어떤 존재인가?

 

“<한살림모임>은 앞으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이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위한 대중적 협동운동(강조 글쓴이)을 구체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펼쳐 나갈 것입니다.”

- 「한살림선언」 발행의 글 “한살림모임은 이렇게 창립되었습니다”에서

 

30여 년 전 한국에서 대안운동의 효시가 되었던 한살림운동은 ‘대중적 협동운동’을 지향했다. 새로운 가치를 확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했으면서도 그 방식은 그 당시의 것, 즉 ‘대중운동’이었다. 한살림 생활양식 창조의 주체는 ‘대중’으로만 유의미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요구한 규모의 경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홀히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사업적 생존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 절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양적 접근은 불가피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전통적 사회운동은 집합으로만, 대중으로만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다. 세력으로 과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중(mass)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롯이 드러나지 못한 채 ‘무리’로만 존재한다. 더욱이 대중운동의 성장과 함께 조직이 커지면 한 사람은 집체(집단적 전체)라는 시스템의 일부로써만 ‘작동’당한다. ‘나’는 더 이상 없다. 소수의 리더와 전모를 알 수 없는 조직(시스템)만이 ‘우상’처럼 존재하게 된다. ‘나’는 조직적 위계 속에서만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나’는 조직에 치이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미 40여 년 전에 서구 사회의 경험을 배경으로 저술한 ‘제3의 물결’이라는 책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이야기하며 ‘탈대중화’를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시기 한국 사회는 산업화의 정점에 서 있었다. 한국의 대안운동은 그 이념적 지향과 관계없이 시대적 한계 내에서 실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대중이라는 ‘집단’이나 조직화된 집단인 ‘조직체’ 속의 존재로만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의 ‘나’는 가치 창조와 세계 창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목적 실현을 위한 집합적 구성인자, 즉 조직화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조직, 조직화, 조직체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조직組織은 본래 동사다. ‘짜서 이룸’, 혹은 ‘얽어서 만듦’이다. 씨줄과 날줄을 엮는 일이다. 조직이라는 동사가 실체를 가지면서, 명사화된다. 조직체組織體다. 당연히 ‘체’가 있어야 한다. 실체 없는 조직은 연체동물과 같다. 뼈대 없는 호랑이와 같다. ‘조직화’가 그 경계에 있다. 대상화하여 실체화하기 위한 준비 단계일 수도 있고, 사회적 열망을 물질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아슬아슬하다. 조직체가 완성되면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괴물이 되고, 이윽고 조직체는 하나의 우상이 된다.

 

우상화의 치명적 증거 중 하나가 ‘3인칭화’다. 사회운동적 서술의 주어가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이라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3인칭 집합명사가 된다. ‘노동자’와 ‘계급’도 그러하거니와 ‘한국 사회’와 ‘역사’도 그렇고, 심지어는 ‘인간’과 ‘생명’도 그렇다. 수많은 ‘조직체’들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속의 나’는 있으나 ‘나의 국가’는 없다. ‘조직 속의 나’는 있으나 ‘나의 조직’은 금기시된다. ‘생명의 그물망 속 나’는 있으나, ‘나의 생명그물’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심지어 대안적 세계관을 선언했다는 한살림선언마저도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쓰였다. 그 철학은 유물론과 변증법에 대한 도전이었으나,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시점은 여전히 전지적 작가시점의 객관주의였던 것이다.)

 

사적 욕망과 비공식의 너와 나는 사라진다. 아니 비공식으로만 존재한다. ‘나’와 ‘너’는 뒷골목이나 술자리나 뒷담화로만 살아 있다. ‘나’는 선수가 아니라 심판으로만 말한다. 심판으로 평론하고 항상 전체를 아우른다. 사와 공은 이분법으로 분열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는 멸종되고 공만 남는다. 멸사봉공이 하나의 문화가 된다.(짐작할 것이다. 대안은 활사개공活私開公. 공공철학자 김태창 선생의 언어다.)

 

그것은 무엇보다 객관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시선의 문제이다. 인식론의 문제이다. 이념이란 말도 그러하거니와 실재 혹은 진리는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사회운동은 객관적 진리의 실천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조직체만이 아니다. 3인칭화된 이념이 우상이 된다. ‘나’는 이념과 교조의 노예가 된다.

 

사회적으로도 3인칭화人稱化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 객관주의로 포장된 유체이탈 화법이다. 선생님은 “내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선생님 생각에는 말이야...” 마치 왕이 신하들에게 하는 말과 같다. “짐의 생각은 이러한데 경들은 어떠하오?”처럼 말이다. 집안에서는 “아빠가 그랬어.”, “엄마가 그랬어.” 식이고 글을 쓸 때에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식이다. 물론 ‘필자(^^)’도 그러했다.

 

그것은 하나의 사고방식이 된다. 집합적 사고방식과 명사적 사고방식,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실재를 실체로 보는 우상화의 사고방식이다. 조직과 이념 속에서 ‘나’는 뭔가 부끄럽고 조심스럽고 불편한 존재가 된다. 한국 문화에서는 ‘우리’는 강하고 ‘나’는 약하다.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이라는 뜻처럼 ‘우리’는 때로는 감옥이 된다.(반대로 서양의 경우 ‘I’가 강하다. 때문에 서안의 대안운동은 반대로 ‘we’, ‘oneness’를 강조한다.)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3인칭 집합명사’라는 우상과 주체성 상실의 시대. 3인칭화 속 1인칭의 상실, 집체 속 ‘한 사람’의 상실, 초월적 이념 속 몸의 상실이다. ‘나’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조직의 역사는 대강 ‘나 없는 공동체’에서 ‘너와 나의 연합체(결사체)’를 거쳐 ‘나들의 초공동체’로 진화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하나의 결론이다. ‘나’들의 초공동체로 가자는 것.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안고 넘는 새로운 공동체 말이다.

 

이는 의식의 진화사이기도 하다. 전분별-분별-초분별, 전이성-이성초이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흔히 전분별前分別과 초분별超分別을 혼동한다. 켄 윌버의 표현에 따르면 이른바 ‘전초前超’ 오류다. 이제 인간의 의식은 유아기의 무분별과 질풍노도 시기의 극단적 분별을 넘어 나와 너를 분별하되 동시에 ‘내 안에 너 있음’을 자각한 단계로 왔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다. 대중/조직에서 한 사람으로, 3인칭에서 1인칭으로. 한국 사회가 일제의 강점과 미국식 초고속 근대화를 겪지 않았다면 ‘세속적이면서도 거룩한’ 1인칭 단수를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 것이란 가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겪어야 했다. 주체 없이 주체성 없다. 욕망 없이 열망 없다. 항산恒産 없이 항심恒心 없고 적공 없이 전환 없다. 요컨대 구속의 공동체로부터의 해방 없이, 나의 독립을 경과하지 않고서 전일적全一的 나에 대한 자각, 즉 진정한 초월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포월抱越이다. 안고 넘어간다.

 

이제야 비로소 때가 되었다. 인도와 동아시아를 비롯해 동쪽의 문명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한국인에게는 자기초월의 유전자와 비전이 내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동학과 한살림이 그 증거 중 하나이다. 시대를 앞선 통찰은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한’ 사람 주체성

 

희망이란 더 나은 상태로의 전환에 대한 깨달음이다. 위기의 증거라면 ‘극복’이 짝이겠지만, 전환의 징후라면 ‘상상’이 답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희망과 자각의 주인공, ‘한’ 사람이 있다.

 

개체 없이 개성 없고 주체 없이 주체성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1인 사회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주체성 창조의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공동체 붕괴에 대한 우려가 있기도 하지만 새로운 공동체의 조건이기도 하다. 한 사람과 1인칭, 이것은 이미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한’ 사람 사회는 이미 도래했다. 서유럽만이 아니라 이미 한국 사회도 그러하다. 물론 전일적 ‘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1인’ 사회다. 그러나 그 흐름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1/4, 25%에 이르렀다고 한다. ‘혼밥’이 상징하듯 먹을거리 문화가 바뀌고 주택시장이 바뀔 수밖에 없다. 생활협동조합의 물품 구성과 이용 패턴이 바뀌고 있다. 블로그와 인터넷방송국 등 1인 미디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1인 제작 동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지구촌을 출렁이게 한다. 소액대출이나 중고물품 등의 개인 간 거래 시스템인 p2p경제는 만만치 않은 규모가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경제학자들과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3차원 프린터 등의 기술융합을 통해 소비자의 개인별 특성을 고려한 ‘1인 1품’ 생산시대가 열린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한 사람 경제다.

 

시민단체들의 집합 행동 대신 1인 NPO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1955년) 단지 인종차별 버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인 된 로자 파크스의 ‘한 사람 혁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링컨의 명구名句를 다시 읽는다. ‘한 사람의, 한 사람에 의한, 한 사람을 위한 사회운동’을 상상해본다.

 

ⓒMichael Pardo

 

그렇다. 1인 사회. 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다. ‘생명의 그물’을 출렁이게 한다. 1인 사회는 ‘한’ 사람 주체성의 사회적 조건이 된다. 결사체에서 독립된 ‘나’를 확인한 한 사람이, 하나로 연결된 세계를 자각한다. 전일적 주체에 대한 깨달음이다. 주체성의 회복이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자발성과 능동성만이 아니다. 주인으로 살기. 지금 여기의 실존 혹은 현존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 실제로 존재함. 즉 살아있음이다. 지금 여기 한 사람으로 살아있음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비롯한 성인들의 깨달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자기를 실체가 있는 주체主體로 인식하게 되면 주인됨이 명사화된다. 모든 존재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순간이다.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서유럽의 탈근대주의자들이 주체를 해체한 모양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다. 과정과 관계만 있을 뿐이다.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순간 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주체가 아니라 주체성, 주인됨이다. 다시 말해 실존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나로 살기, 한 사람으로 살기다. 나-한 사람 주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일적 주체성이다. 독립주체도 아니고 집합주체도 아니다. 사 私안에 있는 공 公이다. 이기와 이타, 욕망과 열망, 진보와 보수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복합주체성이기도 하다. 한 사람 주체성은 1인칭이면서 3인칭이고, 몸(體)의 주인이면서 몸을 초월하며, 완성이면서 생성이고, 독립적이면서 관계적이고, 하나이면서 모두다.

 

그런데 전일적 주체성은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만들어가는 것이다. 양성養成, 길러 이루는 것이면서, 동시에 양성釀成, 술을 빚듯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먼저 자기를 양성하지 않으면 지금의 여기의 ‘나’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자기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서쪽의 철학자 미셀 푸코와 동쪽의 종교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만난다. 나-한 사람으로 만난다. 푸코는 자기배려 (self care) 라고 말했고 해월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고 말했다.1)

 

푸코에게 인간의 주체성은 사회에서 만들어진 권력이나 도덕 혹은 어떤 형이상학적 담론들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만들어 그것으로 사회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근대적 주체성을 넘어서 새로운 자기 찾기이다. 그 출발점이 자기배려다. 자기가 깨어나도록, 진리와 하나가 되도록 스스로 거듭나는 일이다. 나를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환골탈태하는 ‘나’, ‘자기전환(self transformation)’이다.

 

이것이 푸코식 영성이다. 푸코에 따르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말한다. 영성이라는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이 중요하다. 단순한 인식(판단)만으로는 실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수련, 자기양성 없이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고, 전환적 주체가 되지 않고서는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푸코는 자기배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원형을 소크라테스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푸코는 그것을 서양의 역사에서 발견하지만, 또 다른 전형이 동아시아에 있다. 수행, 수양, 수련이 그것이다. 경영학의 학습이론에서 말하는 학습이 바로 수양 (practice)이다. 그리고 한국적 맥락에서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동학이다. 수양을 대중화하여 양반만이 아니라 백정과 노비에게까지 성인과 군자가 되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실현을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해월 최시형은 스승 수운 최제우로부터 배운 공부법을 실천하고 또 실천한다. 자기양성이다. 그리고 스승이 체험한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깨달음과 같은 자기전환을 체험한다. 그리고 평생을 기도하고 연마하고 또 공부한다. 그리고 갑오년 동학혁명의 참혹한 패배 이후 향아설위, ‘나로 향한 제사’를 선포한다. “아즉천我卽天”, 내가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의 집합명사 사람이 아니라, 나-한 사람이 하늘임을 고백하고 선언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부처님처럼. 집합적 주체에서 한 사람 주체로, 3인칭의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1인칭 나의 시점으로의 전회轉回다.

 

최근 야권의 유력한 대권주자 문재인이 히말라야로 도를 닦으러 갔다는 기사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제자가 해월에게 묻는다. “어떻게 도道를 깨우칠 수 있습니까 ?” 해월은 이렇게 대답한다. “도를 안다 함은 곧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니, 자기를 알고자 아니하고 먼저 남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야 가히 민망치 아니하랴.” 그렇다. 정치인 문재인도 이제 한 사람 문재인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양성하고 전환하기 위해 히말라야로 떠났을 것이다.

 

해월에게 자기배려란 ‘내’ 안에 마음의 씨를 모시고 기르고 살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해월의 십무천十毋天의 주어를 ‘나(자기)’로 바꾸어 다시 읽는다. 이를테면 동학판 ‘자기배려의 십계명’이라고나 할까. 9번째 계명, ‘나를 싫어하게 하지 말라’를 보니 마음이 스산해진다. 10번째 계명 ‘나를 굴屈하게 하지 말라’를 읽으니 부끄러워진다.

 

1. 나(자기)를 속이지 말라

2. 나(자기)를 거만하게 대하지 말라

3. 나(자기)를 상하게 하지 말라

4. 나(자기)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

5. 나(자기)를 일찍 죽게 하지 말라

6. 나(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7. 나(자기)를 주리게 하지 말라

8. 나(자기)를 허물어지게 하지 말라

9. 나(자기)를 싫어하게 하지 말라

10. 나(자기)를 굴하게 하지 말라

 

필자(^^)의 고향 정읍엔 ‘정해井海’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있다. 직역하면 우물바다인데, 보통은 ‘샘바다’라고 부른다. 보이는 것은 하나의 샘이지만 그 아래는 거대한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 한 생명(a life)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cosmic life), 하느님이시다. 낱 하나이면서 온 하나인 ‘한’ 사람. 샘이면서 바다인 샘바다 말이다. 샘이 바다를 만나려면 나를 뚫어 바다와 통할 준비를 해야 한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그것이 희망의 씨앗이다.

 

‘나’들, 자기실현의 공동체

 

이것은 이를테면 새로운 사회조직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다시 공부해보자는 말이다. 인간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조직 모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들의 공동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나’들의 공동체는 형용모순처럼 보인다. ‘나’들도 그렇고 ‘나’들의 공동체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나들의 공동체’란 선택불가능한 자연적 결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라는 자각에 기초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망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성을 자각한 ‘나’들의 결사체(의도적이라는 점에서), 한 사람 네트워크라고나 할까. 이때 ‘한’ 사람은 새로운 사회조직론의 인간학적 기초가 된다.

 

‘나’들의 공동체는 이를테면 바둑과 같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화제가 된 그 바둑 이야기다. 초나라 왕과 한나라 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전투조직 사이의 대결을 표현한 장기와 비교하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을 독립된 실체로 보는 원자론적 사회조직 모형과도 다르다. 바둑알 하나하나가 바둑판이라는 우주를 출렁이게 하는 중심이 된다. 바둑알 한 개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바둑판 전체를 살리는 길이다. 바둑알 하나가 우주의 배꼽이다. 거기엔 직책도 없고 직급도 없다. 바둑을 두는 지금 이 순간의 실존적 가치만 있을 뿐이다. 미래에는 미래의 실존으로 과거에는 과거의 실존으로 어떤 때는 폐석(버린 돌)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천하의 명점이 되기도 한다.

 

ⓒChad Miller

 

‘내’가 ‘생명의 그물’ 속의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다면 그것은 이미 ‘공동체共同體’, 함께 몸이다. 생명공동체다. ‘세계 내 존재’, ‘관계 지워진 존재’, ‘함께 존재’인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경험한 자기초월의 공동체이다.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자각적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주인공은 나다. 조상들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시스템도 아니고, ‘너’가 ‘나’임을 자각한 ‘나’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나’들을 위해 존재한다. 자기실현의 공동체이다.

 

“ 인간은 공동체에서 이웃과 협동함으로써 공생하지만 결코 그 자율성을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참다운 자기실현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한살림선언」

 

그렇다. 한살림은 ‘한’ 살림이다. 낱 하나하나가 온 하나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실현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의미의 한살림 공동체가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공동체가 진짜 가능한 일일까? 그런 사회조직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 있다. 그렇게 기대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일본의 대안적 공동체 애즈원커뮤니티as one community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또한 인간주의 경영학자 최동석이 소개하는 기업들에서 그것을 확인한다.

 

애즈원커뮤니티는 일본의 미에 현 스즈카 시에 자리 잡은 공동체이다. 무소유공동체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함께했던 몇몇 사람들이 거기서 한계를 느끼고 나와 2001년부터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가 애즈원커뮤니티다. 존 레논이 부른 이매진Imagine이라는 노래의 가사 중,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에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한다.

애즈워커뮤니티의 모토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회에서 자기답게 산다.”이다. 그리고 몇 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한다. 예컨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한다.”, “사람에게도 사회에도 속박/강제가 없다.”, “일체의 대립이 없다.” 등이 그것이다. ‘속박/강제가 없다’라든가 ‘대립이 없다’라는 말은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향하고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실제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애즈원커뮤니티가 지향하는 가치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 또 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실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고, 상하 관계가 없는 회사인 <애즈원 커뮤니티 컴퍼니>, <엄마손 도시락> 등을 만들어서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사업이 제대로 굴러갈까? 우여곡절은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애즈원커뮤니티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강조하는 말은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는 사회를 실현해보는 것, 그것이 애즈원커뮤니티다.

 

애즈원 커뮤니티 (출처: http://as-one.main.jp/eb/)

 

‘자기실현의 장이 되는 일터’는 홍보문구나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 주요기업들의 모토가 되고 있다. 자기실현 없이는 회사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영학자 최동석이 ‘자기실현을 위한 인간존중의 조직설계’를 제안하며 소개하는 기업조직들도 주목할 만한 사례가 된다. 서열이 없는 조직을 운영하는 고어텍스로 유명한 고어, 고정된 근무시간이 없으며 ‘왜’라는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브라질 회사 셈코, ‘자기경영’을 모토로 하여 일을 중심으로 동료들과의 자생적 질서를 만들어 스스로 일하는 세계 최대의 토마토 가공회사 모닝스타 등이 그것이다.

 

열풍이 지나긴 했지만 유력한 경제사회적 대안 중 하나인, 사업하는 결사체 협동조합을 떠올린다. 자기실현의 길을 지향하는 공동체, 한살림을 떠올린다. 기업에서는 오너가 직원의 자기실현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지만, 협동조합이라면, 대안적 공동체라면 완전히 다르다. 스스로 그 과정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들이 목표뿐 아니라 과정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각이 없는 나들이라면 협동조합은 이익집단이 되거나 이해관계자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규모가 큰 애즈원커뮤니티는 불가능한 일일까? ‘한 살림’ 세상의 이상은 불가능한 일일까 ?

 

다시 전환

 

이번엔 ‘자기 전환’이다. 삶의 전환, 사회의 전환이란 무엇보다, ‘자기의 기술’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에서 시작해 자기로 돌아온다. ‘나’를 향한 제사다.

 

다시 ‘한’ 사람이다. 출판가에는 여전히 자기계발서가 넘쳐나지만, 이제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물어야 할 일이다. 고치의 시간을 겪고 있는 애벌레에게 희망은 새로운 존재로의 전환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언론은 ‘ 젊은 육체에 성숙된 정신으로 리셋 ’ 이라는 타이틀을 뽑고 있다. 이른바 ‘리셋(초기화/reset)’ 세대 이야기다. 2015년 삼성이 공개한 글로벌 신세대 소비동향 보고서의 일부라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불확실성은 리셋 세대들로 하여금 삶을 진지하게 보게 만들었다. ‘생활의 변화에 욕구를 희생하겠다’는 비율이 65% 였다. 3분의 1은 절약하기 위해 소비를 줄인 경험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덕목’을 묻는 질문에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를 꼽은 비율이 67%에 달했다. 그 다음으로 ‘건강’을 선택한 비율은 58%, ‘사랑과 로맨스’는 47%였다. ‘진정한’ 리셋을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계발이 요구된다. 자기는 자기만이 아니고, 이웃이고, 자연이고 우주라는 각성 말이다. 자의식과 더불어, 70-80년대 386들을 설레게 했던 사회의식도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까지.

 

그렇다. 하나의 촛불이 100만 개의 촛불이 되는 ‘다시개벽’의 전야다. 구성원이 절반은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청년들), 구성원의 절반은 너무 일찍 밀려나는(장년들) 시스템이라면 폐기될 수밖에 없다. 시스템 밖에 있는 것이 행운인지도 모른다. 돔 건축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미국의 한 건축가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변화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델을 통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때 이루어진다.”

 

이미 리셋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시스템 말이다. 나아가 리셋 세대에 의한 문명의 리셋. 어떻게 하면 리셋이 ‘나’를 통해 일어날 수 있을까? 순수한 영혼으로 체코 혁명을 이끌었던 ‘한’ 사람 바츨로프 하벨의 시가 내게로 온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1) 이하는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과 해월법설, 관련 논문으로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해월 최시형의 “향아설위”」(허경, 『동학학보』 19호, 2010)를 참고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한살림서울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는 김재겸 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도움과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밝힌다.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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