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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전환시대의 리더십: 영성과 살림
2016-06-20 17:39: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전환시대의 리더십: 영성과 살림

 

이나미 (방송통신대학교 전임연구원)

 

 

2014년 올해, 두 명의 리더가 한국을 강타했다. 하나는 조선의 장군, 하나는 서양의 사제. 바로 이순신 장군과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 <명량>은 관객 수 1700만 명으로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인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매 순간마다 화제를 낳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에 대한 한국인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두 인물 모두 훌륭해서이지만, 그보다도 이들이 한국인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무능한 대응과 이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성이, 능력 있고 도덕적인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현 정부는 무능한데다 부도덕하다. 현 정부의 부도덕성은 이미 선거 과정과 이후 선거 부정에 대한 대응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도 정부가 국정 운영에 있어 조금이라도 능력을 보여줬더라면 어쩌면 국민은 정부를 약간은 용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 정부는 심지어 무능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통령과 정부이다. 이런 리더를 두었으니 한국인이 진정한 리더십에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순신과 프란치스코의 리더십

 

이순신과 프란치스코는 도대체 어떠했기에 국민의 사랑을 그토록 받았는가.

 

우선 이순신을 보면, 그는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 능력은 타고난 것도 있겠으나 그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정보 수집에 남달리 애썼다. 꼼꼼하게 현장을 답사하여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을 철저히 파악했다. 전쟁이 난 후에도 피난민, 포로, 척후병, 정탐선 등을 통해 적의 규모와 동향을 면밀히 살폈다. 가장 어려운 전쟁이었던 명량해전에서도 정보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해전에서는 적의 함대가 아군의 10배, 병력 수는 50배나 컸다. 이순신은 명량의 물목을 해전 장소로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는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 수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또한 조수가 계속 바뀌며 복잡하게 움직이는 곳인데 이런 조건을 잘 이용하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 배는 서로 부딪히며 부서졌다. 조류가 바뀌는 1시간 동안이 물의 흐름이 멈추는 결정적 순간인데 이 순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를 그는 강조했다.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세월호 침몰 전 물살이 잔잔하여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최적의 때에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아 수많은 인명을 어이없이 죽인 정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임란 때처럼 전쟁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구하지 않아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전략적 능력 면에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천적으로도’ 뛰어났다. 즉 그는 무엇보다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는 늘 몸소 앞장서서 진두지휘했다. 여진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60여 명을 구출할 때 다리에 화살을 맞았으나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몰래 화살을 뽑고 계속 부대를 지휘했다.

 

현대는 특히나 말보다 행동을 먼저 보이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아랫사람에게 명령하기만 하는 방식은 이제 효과가 없다. 다른 이에게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직접 행동함으로써 모범을 보이는 것이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리더십이다. 이순신 등 과거의 뛰어난 장수들은 다 그러했으며, 이는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킬 때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이론가들도, 말이나 논리가 아닌 행위와 감성이 설득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아이리스 영Iris Marion Young은 논리적인 말보다 따뜻한 인사, 수사적이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표현법이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한다. 한때 한국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보자. 릴레이식으로 계속 이어졌던 그 대자보들의 특징은 바로 ‘인사’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대자보처럼 강한 주장을 하거나 동참을 호소하기보다는 방관자였던 자신에 대한 반성, 자신과 이웃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제 ‘주장’은 먹히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이는 곧 이성의 한계를 의미한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사고(thought)의 한계를 강조한다. 사고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는 전달매체라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과학, 또한 분석의 한계이다. 봄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친밀감’이다. 주장의 ‘논리성’이 아닌 ‘친밀함’이 깊어지면 결정에 어려움이 없다.

 

신학자 김경재는, 요아킴이 역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시대로 나누었는데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라고 했다. 이를 세속에 적용해보면, ‘성부의 시대’는 ‘권위의 시대’로, 공포를 통해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민중들이 신이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다. 한편 ‘성자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로, 말과 논리가 지배한 시대라고 여겨진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로, 신을 믿게 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조하며 정치적으로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는 시기이다. 즉 예수가 복음을 전하듯 권력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시대이다. 이제 다가올 시대는 ‘성령의 시대’로 ‘영성과 실천의 시대’이다. 계산적 이성과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과 실천을 요청하는 영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실천 역시 바로 그 다가올 시대를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 실천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다. 높은 자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정의롭고 아름답다. 정의로운 이유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른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으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요, 아름다운 이유는 높은 것이 낮은 것을 지향해야 조화롭고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는 정의롭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새 시대를 맞는 전환기의 리더십이요, 영성과 생명 즉 살림의 리더십이다.

 

영성과 살림의 리더십

 

세계적으로 성공한 협동조합의 특징은 바로 “영혼이 살아있는 지도자와 사회화된 영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몬드라곤의 돈 호세 마리아 신부와 가톨릭 영성,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와 기독교 영성, 그리고 한살림과 원주 협동운동의 바탕인 무위당 장일순의 ‘모심’ 사상이 그것이다. 협동운동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사업의 규모나 경영적 효율성보다 정신, 영혼, 영성에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결사체인 협동조합의 성패는 결국 ‘사람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의 자발성과 그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바로 ‘영성’이라는 것이다.

 

영성이 이성과 다른 점은 존재 간의 끈을 느끼는 것, 일체감을 느끼는 것, 공감하는 것이다. 즉 ‘느끼는 것’이다. 분석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도 영성에 속한다고 본다. 그것은 본능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며, 맹자가 말하듯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드는 급한 마음처럼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위험에 빠진 아이를 보고 바로 드는 느낌은 무조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구하라는 것, 살리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앞서는 가장 중요한 내면의 명령이다. 즉 ‘살림’은 영성의 명령이다. 아이를 구하려는 것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칭찬을 얻고자 하거나 자신의 평판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아주 나중에 드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도 이성과 합리성의 영역에 놓으려고 애썼는데 이는 이성에게 과분한 지위를 준 것이라 여겨진다. 황태연에 의하면 칸트는 사람들을 모두 독일 병정으로 만들려는 철학적 기획을 했다. 근대 이후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성과 합리성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능신이 되었다. 사회과학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론’이 판을 친다. 이 이론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예컨대 투표 행위에 있어 지역적으로 편향된 투표를 하는 경우도 알고 보면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아닌지를 따지는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본래 심부름꾼이다. 우리에게 행위를 명령하는 최초의 것은 이성이 아니다. ‘감각’이거나 ‘감성’이거나 때로는 ‘영성’이다. 배고픈 감각이 우리에게 먹으라고 명령하고, 슬픈 느낌이 우리를 울게 한다. ‘아이를 살리라’고 명령하는 것은 ‘영성’이다. 놀란 ‘감성’과 긴장한 ‘감각’도 영성과 함께한다. 이성은 이들의 명령을 받은 후에야 아이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쓴다. 밧줄을 구해야 하나, 사람들 불러야 하나 등등. 그런데 이성이 주제넘게 나서는 순간, 아이 부모에게 칭찬받을 생각까지 하는 괘씸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성을 본래의 자리인 심부름꾼 자리에 두자.

 

전환기의 리더십

 

<다이버전트>라는 공상과학 영화가 있다. 미래 사회를 그린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계급을 나눠 살아간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각각 자신의 적성을 알아낸 후 자신의 특징이 속한 집단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타적 그룹, 엘리트 그룹, 정직한 그룹, 용감한 그룹, 협조적 그룹 등 모두 5계급이 있다. 이들은 각각 성직자, 관리, 법조인, 경찰, 농부와 유사하다. 영화 줄거리를 보면, 본래는 성직자들이 최고 리더인데 엘리트 그룹이 사람들을 조작하여 권력을 잡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 영성을 몰아내고 주인 노릇을 하려는 것인데, 그 상황은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는 듯했다. 즉 한 줌의 영악한 자들이 나머지 대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타적 사람들, 즉 영성을 가진 자들은 착한 사람들이라 간악한 이성인들에게 약했다. 영화에서 주장하는 바는, 한 성격이 아닌 여러 성격을 가진 ‘다이버전트’가 결국 엘리트 그룹을 이기고 이타적 그룹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이들이 아니라 여러 성격을 가진 이들이 간악한 자들을 이겼다고 하는 결말은, 작가가 의도하고 그렇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는 역시나 ‘마키아벨리가 정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특히나 위기 시에, 또한 전환기에 마키아벨리적 리더십은 필요하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자라면 때로는 여우처럼 때로는 사자처럼 굴어야 한다고 했다. 개인적 덕성과 정치가의 덕성은 다른 것이며 따라서 착한 개인이 반드시 좋은 정치가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특정 시기에 착한 성품은 큰일을 그르치게 하기도 한다. 이순신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단칼에 죽였는데 그것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정치란 ‘개인적 착함’을 포기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 다면적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공동체적 더 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다면적 능력은 결국 이성이 아닌가? 답은 ‘아니다’이다. 그런 능력은 판단력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판단력은 무엇인가. 많은 리더십 연구자들이 판단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판단력은 리더십의 본질, 중심, 핵심이라는 것이다. 판단력이 없다면 다른 어느 성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 뛰어난 판단력은 목표를 명확히 하고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며 다른 이의 에너지를 종합하는 전략을 개발한다. 사실상 판단력은 리더뿐 아니라 모든 이의 활동에 중심적인 능력으로 정치, 육아, 법정, 운동, 예술의 평가에서도 핵심적 능력이다. 베이너Ronald Beiner는 판단력을 “우리가 행동 노선을 결정하고자 할 때 필요한 정신적 성질”이라고 한다.

 

그런데 판단력은 이성과 다르다. 코헤인Nannerl Keohane에 따르면 판단은 이성을 수반하기는 하나 영리함이나 가르침만으로 될 수 없는 선천적 반응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직관이나 육감과 비슷하며, 어떤 확신과 유사한 것이다. 그것이 논리라고 생각해서 파고들면 사실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라 깊게 파헤치기 싫은 그 어떤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논리적으로 보자면 근거는 없지만 육감적으로 왠지 꼭 그럴 것만 같은 그런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으로, 모든 분야에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난다. 즉 판단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오랜 경험과 성찰로 연마, 향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험이 많은 간호사의 경우 아무 근거 없지만 왠지 환자가 꼭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거의 맞는다고 한다.

 

판단력은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알아채는 능력으로, 선견지명과도 관련이 있다. 즉 문제를 사전에 감지하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가지면 문제 해결은 훨씬 더 쉽다. 문제를 이미 맞닥뜨려버리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현명한 지도자는 현존하는 문제가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룬다. 또한 판단력은 숙련된 리더들이 중대한 상황에서 복잡한 단계를 거칠 생각 없이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 민첩함과 관련이 있다. 즉, 복합적 상황을 다루는 데 있어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란 점에서 이성과 차이가 있다. 이는 경험, 직관, 지능을 결합하여 결정에 접근하는 방식으로서의 특별한 정신적 능력으로, 합리성이나 일반화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특별한 문제에 더 발휘되는 능력이다. 판단력에 따르는 자들은 매뉴얼대로 하지 않으며, 다른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독창적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궁극적으로 판단력은 자신과 인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예감된 소통이며 통찰력이다.

 

이성과 판단력의 비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폴레옹과 꾸뜨조프의 대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은 모든 전략 전술을 동원하고 철저한 계획에 의존하여 전쟁을 벌여 백전백승하는 영특한 전쟁 천재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다. 반면 꾸뜨조프는 그와는 정반대로 전략회의 때 늘 졸며 작전 수립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는 상황이 돌아가는 ‘감’을 잘 잡고 병사나 민심의 동태를 파악하여 ‘때’를 잘 포착한다. 그런 그가 결국 나폴레옹을 이긴다. 그는 마치 허균의 ‘호민豪民’을 연상시키다. 허균에 의하면 호민이란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서, 권력자들이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면, 저들 원민怨民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恒民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고무래·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나라가 썩을 대로 썩어 확 뒤집어엎어야 할 시기에 그때를 잘 노려 호민이 앞장서면 평소 원한이 가득한 원민이 바로 따라나설 것이요 그렇게 되어 대세가 바뀌게 되면 일반 백성들인 항민들은 그러기 싫더라도 자신이 살기 위해 따라나선다는 것이다.

 

호민은 세상 변화를 예감하고 민심을 읽는 자들이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오래된 진리는 세상 바뀔 날을 민중의 마음이 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변화를 바라는 민중과, 이들 앞에 앞장서는 호민들이 바로 전환기의 리더들이다. 이들은 정권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한다. 120년 전 갑오년의 동학도들이 바로 그러했듯이, 이들은 개벽을 꿈꾸는 자들이다. 즉 영성을 갖는, 예언자 같은 이들이다.

 

번스James Mcgregor Burns에 따르면 리더십은 변혁적인 것과 거래적인 것이 있다. 변혁적 리더십은 근본적 변화, 본질의 변화,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이다. 반면 거래적 리더십은 서로 주고받는 것에 그치는 브로커적 리더십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한심한 야당이 하는 짓거리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바뀌질 않는다.

 

돌아가며 하는 리더

 

허균이 말하는 호민은 특별한 신분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호민에서 ‘민’이란 말이 의미하듯 그저 백성들이다. 그러나 세상 변화를 예감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리더십은 이러한 특별한 능력을 갖는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인가. 위기가 사라지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또한 이에 적합한 리더가 필요할 것이다. 한 사람의 뛰어난 리더가 있다고 해서 그가 늘 어느 곳에서나 리더로 적합한 것은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요구되는 리더가 따로 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지역에는 약 50명 정도의 노숙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캠프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다소 엉성하지만 민주적으로 만든 규칙도 갖고 있다. 촌장은 존 프리타스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새로운 노숙자가 와서 ‘왜 당신이 대표를 맡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촌장 일을 그만 두었는데, 그러자마자 캠프 내에 논쟁이 일어나고 무질서해지고 음식이 도난당했다. 그래서 노숙자들은 다시 투표를 통해 그를 촌장으로 세웠다. 노숙촌은 다시 질서를 잡았다. 이렇게 훌륭한 지도력을 갖춘 존 프리타스는 왜 노숙자로 살아가는 것일까. IBM과 같은 큰 회사에 입사했더라면 훌륭한 CEO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마도, 그의 리더십은 바로 노숙촌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곳에서는 리더이다.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인 사람이 동네 야구단에서는 코치일 수 있다. 영원한 지도자, 영원한 추종자란 없다. 또한 실제로는 리더인데 추종자인 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 인기 있었던 한 동영상의 장면을 보자. 풀밭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이상한 사람이 나와서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다들 그 사람을 비웃듯이 쳐다보거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와서 그 이상한 사람 옆에서 똑같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자신과 같이 온 친구들을 나오라고 해서 같이 춤을 추게 했다. 풀밭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을 비웃지 않는다. 유쾌하게 생각하며 점점 동참하기 시작한다. 멀리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보고 달려와 춤 대열에 함께한다. 결국 수십 명이 이 이상한 사람과 더불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그 동영상을 보여준 강사는 설명한다. 맨 처음 춤을 춘 이상한 사람은 그저 미친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을 따라 춤을 춘 두 번째 사람이 진짜 리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을 리더로 만들었다. 이렇듯 추종자인 척하는 진짜 리더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도자, 추종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사람의 마음을 이성, 의지, 욕망으로 삼분하며 이 각각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철인왕, 무사, 생산자가 있다고 했다. 맨 아래에 위치한 생산자인 민중은 생산과 교환에 종사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욕망만을 갖는 존재로서 리더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영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사카르는 사람들을 단순노동자, 무사, 지식인, 자본가로 사분한다. 사카르는 이것이 인도의 카스트와 다르다고 강조하지만 그 역시 노동자 그룹이 단순하고 본능적이고 생존에 충실하다고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을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놓는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들은 높은 열망과 역동성을 결여하고 있고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이들은 지도자가 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허균의 『호민론』에서의 ‘항민恒民’을 연상케 한다. 항민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허균은 특별히 단순노동자가 항민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허균의 분류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른 것이다. 즉 장관과 같은 고위공직자라도 법이나 지키고 대통령 눈치만 보면 항민인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오히려 이러한 이들에게서 많은 항민을 볼 수 있다.

 

영화 <다이버전트>의 장점은 모든 계급에 고유한 덕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농부들의 경우 평화를 사랑하고 따뜻한 감성과 협조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로 이들 역시 훌륭한 리더감이다. 이들은, 생명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일차적으로 살리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이것을 알아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다. 즉 생산자들을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사카르 역시 지도자를 특정 계급에서 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지도자라면 모든 계급이 갖는 장점을 다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말한 종합 능력인 판단력이 지도자에게 중요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 여러 능력을 갖는 ‘다이버전트’의 필요성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도자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지도자란 특별히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지도자를 신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일단 ‘리더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조금씩 부족함이 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성공적인 많은 지도자들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기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기 시에는 결단력 있고 용감한 수호자형 지도자, 골치 아픈 문제가 산적할 때에는 지적인 지도자, 사람들 간의 갈등의 골이 깊을 때는 관용적이고 협조적인 농부형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추첨민주주의’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추첨민주주의란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택된 사람이 대표가 되는 것이다. 그 정신은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가며 리더를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리더의 자리는 공은 많이 들어가나 소득은 별로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중이 주인이고 지도자는 하인인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컨대 마을 이장을 보자. 그는 마을의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지 권위를 갖는 사람이 아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부족한지 살피고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모임을 주선하고 마을 사람들의 결정을 돕는 사람이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마을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렇듯이 결정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리고 이런 이장 같은 지도자만 있어도 되는 세상이 바로 유토피아일 것이다. 맑스가 말한 바, 정치는 필요 없고 행정만 있는 세상인 것이다.

 

서번트 리더십, 통합, 소통, 사랑, 영성 등이 최근 리더십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를 보면 과거와 같이 ‘군림하는 지도자’ 상은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심지어 경영학의 실용서적마저도 리더의 ‘헌신’을 매우 강조한다. 즉 기업 이윤의 증대를 위해서도 봉사하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이나 NGO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앞서 언급한 이순신과 프란치스코와 같은 지도자, 즉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며 깊은 영성으로 ‘살림’을 실천하는 지도자, 이러한 사람들이 변화된 시대에 요구되는 지도자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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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2012. “영성과 협동조합”. 『모심과 살림』, 0호. 모심과살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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