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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나를 눈뜨게 한 ‘치유’
2016-06-20 17:45: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나를 눈뜨게 한 ‘치유’

 

정보연 (전 도봉시민회 대표)

 

 

치유의 경험

 

나는 시민활동가이다. 학생운동을 하고 졸업 후 시민운동가로서, 특히 풀뿌리운동가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난 3년 반 동안 암 투병을 해 왔다. 2011년 6월 대장암 진단을 받았고 1차 수술 후 6개월 만인 2012년 1월, 간에서 4개의 전이암이 발견되었다. 그후 서울살이를 마감하고 양평의 산속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현대의학과 한의학, 자연의학을 병행한 암 투병을 하고 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2014년 올해부터는 일주일에 2~3일 정도 서울 나들이를 하며 조금씩 일을 시작하고 있다.

 

간으로 전이된 대장암의 경우, 특히 필자와 같은 다발성인 경우는 대개 10% 이내의 생존율을 보인다. 필자가 다니던 병원의 자료에 의하면 4% 정도의 5년 생존율을 보인다고 적혀 있다. 매우 위중한 상황인 셈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보낸 3년 반이었다. 그 3년 반의 투병은 내게서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다. 두 번의 수술로 20cm의 대장과 30%의 간이 없어졌다.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여러 기회를 놓쳤다. 쉽게 말해 출세할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세상은 빼앗기만 하지는 않는다. 만나기 힘든 것들과 만나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산에서 생활하게 되었고(지금도 세 시간 동안 산에 다녀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을산은 얼마나 청명한가.) 우리 아이들 앞에 온전히 존재하게 되었고, 아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게 되었고, 흰 옷 입은 자를 만나게 되었고, 옷자락을 잡은 자가 되었다. 이제야 무엇이 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암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치유가 있다.

 

첫째 내가 암을 치유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 역시 아직 암을 치유하는 중이다. 현대의학은 5년간 암이 재발하지 않아야 완치로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치유는 암이 날 치유하는 것이다. 암이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가기 어려운 곳까지 나를 인도하고 있다. 이 치유도 진행 중이다. 나는 이 두 번째 치유를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과연 암이 나를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할 것인가? 암이 내 삶을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가?

 

그래서 나는 암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암에도 못 걸려본 이 불쌍한 사람들아! 암을 통해 자기 삶의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 이 바쁜 사람들아! 당신들은 언제 진짜 치유의 삶을 살아갈 텐가?

 

암이 이 시대에 보내는 메시지

 

다음은 보건복지부 중앙암등록본부의 2012년 통계이다.

2012년에는 100만 명이 암으로 고통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세계적으로는 3천만 명이 투병 중이고 해마다 증가해서 2030년에는 7천5백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평균수명 81세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은 36.9%이다. 3명 중 1명꼴로 암에 걸리는 것이다. 성별로는 남자(평균수명 77세)의 경우 5명 중 2명(38.1%), 여자(평균수명 84세)는 3명 중 1명(33.8%)에서 암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암 발병은 명백하게 증가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인도 있고, 진단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는 모르고 살았을 암까지 알아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암의 증가 추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분명히 우리는 할아버지 세대보다 암에 더 많이 걸리고 있다.

 

나는 지난 3년 반 동안 암에 대해 깊이 관찰했다. 많은 암 환자를 만났고, 많은 치유자를 만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암 관련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도 내 몸과 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을 성찰하면서 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확신한다. 암은 행복하면 걸리지 않는 병이다. 일부 현대의학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많은 연구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암 발병이 늘어난 건 우리 사회가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먹고 살 만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역사는 그들을 산업전사라 불렀다. 우리 세대는 민주화되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이 사회의 폭력적 정치구조가 사라지고 정의가 구현되면 행복하리라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주화운동을 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민주투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대한민국은 지금 별로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국민 3명중 1명이 암에 걸리는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정치적 폭력이 줄어든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상처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치유하지 않고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두 세대 동안 무엇을 잃었는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가? 무엇을 치유해야 하는가?

 

관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는 로제토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1950년대 후반, 로제토에는 이탈리아의 로제토 발포르토레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심장마비 환자가 주변 다른 마을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한 연구자가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대단했다. 로제토에서 55세 이하는 누구도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을 뿐더러 심장질환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65세 이상의 경우에도 심장마비 사망률이 미국 전역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심장마비뿐 아니라 모든 사망 원인을 종합했을 때 로제토의 사망률은 기대치보다 30~35% 낮았다.

 

처음에 연구자들은 로제토 사람들의 건강 비결이 이탈리아의 식단을 그대로 미국에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제토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와는 달리 올리브기름이 아닌 식용 돼지기름으로 요리를 했고, 피자에도 소시지, 햄, 계란 등을 얹어 먹었으며, 이태리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나 먹던 과자(biscotti and taralli)를 일 년 내내 먹었다. 칼로리 중

41%를 지방을 통해 섭취할 정도였다니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굶었던 원수를 갚겠다는 심정으로 기름진 음식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럼 운동을 많이 하는 건가? 그들은 거의 운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배를 많이 피우고 비만율도 높았다.

 

음식과 운동이 로제토 사람들의 건강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유전적 요인이 있는 것일까? 연구자는 미국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사는 이탈리아 로제토 출신 이민자들을 추적해 그들도 낮은 심장마비 사망률을 보이는지 조사했다.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로제토 주민들의 건강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그 마을이 위치한 뱅고어 지역에 초점을 맞췄다. 이 지역 자체가 장수에 유리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로제토와 면적이나 유럽 이민자의 수가 비슷한 몇 마일 떨어진 나자레스 마을을 조사했다. 그러나 나자레스의 심장마비 사망률은 로제토에 비해 세 배나 높았다.

 

아마 그 연구자들은 매우 집요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그들, 어느 날 로제토 마을을 거닐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건강 비결을 우연하게 발견했다. 로제토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뒤뜰에서 음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허물없이 서로를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혹시 이것이… 그러고 보니 이곳 주민들은 일(노동)도 여자들은 블라우스 공장에서, 남자들은 함석 채석장에서 함께 했다.

 

아! 마을 전체가 하나의 식구였구나. 그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놀고, 함께 찬송을 했다. 한 지붕아래 3대가 모여 사는 집이 많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고작 2천여 명이 사는 로제토 마을에 모임이 22개나 되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정서가 강해서 부자들도 함부로 거들먹거리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봤다. 게다가 산 위의 성모교회가 마을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로제토 마을의 건강 비결은 식이요법과 운동, 유전적 소인이 아니라 유대감, 사회적 지지, 사랑, 평화였던 것이다.

 

로제토 마을의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자.

최초의 연구로부터 25년이 지나고, 이민 1세대가 퇴장한 이후의 로제토 마을은 여전히 건강한 마을일까?

보리센코 박사는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25년 뒤, 불행히도 로제토 주민 또한 다른 미국인들을 닮아 버렸다. 물건을 사들이고 옆집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경쟁하는 것이 가족, 친구와 함께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 변화가 일어나자 로제토 마을의 심장병 발병률은 미국인의 평균치까지 상승했다.”

 

(필자의 블로그 “암 자기치유 매뉴얼” 중)

 

로제토 마을은 지난 한 세대 동안 부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유대감, 즉 관계를 잃었다. 그리고 낮은 심장병 발병률도 잃었다.

 

이와 같은 일이 지난 두 세대 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다. 우리는 관계라는 사회적 자본을 소모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쟁취했다. 지난 60년 동안 가족은 해체되었고, 마을은 사라졌다. 공동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고립된 개인과 경쟁이 자리 잡았고 우리는 상처 받았다.

 

관계의 질과 풍부함이 사람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난 믿는다. 현대사회 특유의 단절된 관계가 복원되지 않는 한, 어떤 진보를 쟁취한다 해도 우리는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의 복원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시대정신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한 시대에 직면했다. 사실 우리 모두 아프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다. 고독하고 또 고독하다. 주변에 많은 관계들이 있는 듯 보이지만 삶의 깊은 것을 나누는 관계는 드물다. 우리는 일과 관련된 관계는 지나치게 많고 존재와 관련된 관계는 지나치게 적은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 치유 시대의 첫 번째 과제이다.

 

복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복지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건 아파보면 안다. 지난 3년 반 동안 힘든 투병을 견딜 수 있었던 데에는 건강보험제도가 한몫 했다.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건강보험이 우리 같은 암 환자들에게 높은 커버리지coverage를 제공하게 되었다. 많은 성실한 건강보험 납세자들 덕분에 내가 맘 놓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실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건강보험보다 더 강력하게, 한 일곱 배쯤 강력하게 나를 붙들어 준 것이 있다. 그건 아내다. 아내는 암에 걸린 내 삶에, 그 두려움과 고독함의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이었다. 아내는 때로는 현명한 의사로, 때로는 억척스런 주부로, 때로는 자애로운 관세음보살로 내 곁에 있어줬다. 건강보험이 없었다면 내 투병은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십중팔구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의 미래상으로 스웨덴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분들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웨덴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스웨덴은 가구당 사람 수가(2001년 기준) 유럽에서도 가장 적은 1.9명이다. 미국 2.61명, 영국 2.3명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적다. 2.3명인 영국의 경우 29%가 1인 가구라니 1.9명인 스웨덴은 전체 가구의 40% 이상이 1인 가구일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1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다. 우리 앞집에 이탈리아계로 보이는 노부부 둘이 살았는데 1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외로웠다. 그들뿐 아니라 많은 미국 사람들이 매우 외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스웨덴은 미국보다 더 외로운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우울증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더 따뜻한 관계가 필요하다. 복지는 스웨덴으로부터 배워오면 된다. 따뜻한 관계는 스웨덴보다 우리가 낫다. 가족 안에서, 마을 안에서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 왔던 경험이 우리 안에 있다. 그걸 다시 복원해야 한다.

 

그 알싸함을 되살릴 수 있을까?

 

<표> 채소에 들어있는 영양소의 변화

※채소 100g당 함유량(mg)

*출처: 문부과학성 과학기술·학술 심의회 자원조사분과회 ‘일본 식품 표준 성분표’

 

암에 걸린 뒤 읽은 산야초 효소 관련 책에 실린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듯 지난 50년 사이에 경작 채소에 들어있는 영양소가 크게 줄었다. 어림잡아도 대략 1/4 수준으로 줄어든 듯하다.

 

채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과도 그렇고 닭도 그렇다. 사과는 더 커지고 더 달아졌다. 사위가 와야 한 마리 잡을까 말까 하던 닭은 이제는 누구나 어디서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과와 닭의 질은 1/4 수준으로, 아니 그보다 현저하게 낮아졌다.

 

현재 우리 삶의 많은 영역이 이와 비슷하다. 보육기관은 많아졌지만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깊은 따뜻함’은 줄었다. 교육은 있지만 진짜 스승은 찾아보기 어렵고, 의료는 있지만 진짜 의사 선생님은 정말 드물다.

 

원래 가족과 마을이 담당했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사회화, 즉 국가화 되거나 시장화 되는 과정에서 진짜 알싸한 그 핵심적 가치는 줄어들고 껍질만 크게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사회화가 불가피한 현대 사회에서 다시 그 알싸한 원래 가치를 복원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세 가지는 확실하다.

 

하나, 그 알싸한 원래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둘, 그 시작은 관계의 복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알싸한 원래 가치를 되살린다’ 함은 보육을, 교육을, 의료를 단순 사회 서비스를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한 교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 관계의 복원이 가능하려면 우리 삶이 더 비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일찍 퇴근해야 하고 수첩의 스케줄을 줄여야 한다.

 

사회 치유

 

관계의 복원은 기본적으로 사적 생활 영역, 혹은 친밀권1)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사적 영역과 친밀권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관계 복원을 지원하기 위해 공공의 영역에서는 기존의 복지 정책을 치유의 정책으로 재구성하는 ‘앵글의 변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사를 공무원으로 더 많이 뽑는 정책도 필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우애의 망이 만들어지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더 절실하다. 기초노령연금도 중요하지만 노인들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존엄하게 늙어가기 위한 조금 더 포괄적이고 다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민영화 압박 속에서 건강보험 제도를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아픈 사람들이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대우받고 주도적으로 자기치유를 해나갈 수 있는 정책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변화가 사회정책 전반에서 포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건 20세기의 진보전략이었던 ‘복지’를 더 깊고 풍부한 인간 문제로 성찰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돌아보면 복지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정책의 내용으로 구체화되는 데는 약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치유라는 앵글로 사회제도를 바라보고 정책화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지금, 그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다시 치유의 경험

 

다시 글의 시작으로 돌아와 작은 치유를 경험한 암 환자로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암에 걸리고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암을 통해 밥 먹는 법도, 걷는 법도, 숨 쉬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다시 배웠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치유란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고, 뜸을 뜨고, 부항을 맞고, 인삼을 먹고, 커피관장을 하고, 온열치료를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많이 울고, 희망을 잃지 않고, 결단을 내리고, 자기 안의 아픔과 직면하고, 기도하고, 우리가 얼마나 가냘픈 존재인지 통찰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치유란 기본적으로 삶을 사는 일상의 태도라는 것을. 조금 더 대담하게 표현하면 영적 풍요로움 속에서 삶의 매 순간을 명징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치유라는 것을.

 

치유를 지원하는 공공 정책도 중요하지만 역시 치유의 본질적 측면은 결국 개개인의 각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개인적 차원의 치유는 나의 경험으로는 따뜻한 관계, 예술적 자극, 신체적 운동,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촉진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 대 존재로서 관계를 맺고, 예술과 가깝게 지내고, 신체적 운동을 장려하며,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문화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 삶이 치유와 가까워질 것이다.

 

그 여러 가지 촉진물들 가운데 영적 성장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적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또 내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론하고 싶은 것은 그게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이라는 관점을 가지는 것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관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건 엄마로서, 과장으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살아가는 세계이다. 사회적 관계의 세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 외에 또 하나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건 존재로서의 세계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으로서 살아가다가 다시 우리가 온 그 세계로 돌아가는 어떤 존재로서의 세계. 유한하지만 무한한 한 존재로서의 세계. 그 세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눈은 영적인 눈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눈과 영적 눈이라는 두 눈으로 이 세상을 볼 때 온전하게 세계를 볼 수 있고 온전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리면 자연스레 죽음과 직면하게 된다. 암이 전이되어 양평 명달리로 들어올 당시, 나이를 떠나 투병 친구로 친하게 지내던 비슷한 병기의 환우 5~6명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게 암 투병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은 가려져 있던 오른쪽 페이지를 열어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 삶과 죽음 모두를 균형적으로 보게 해준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동안 감고 있었던 영적 눈을 뜨게 되었다. 영적 눈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존재들이 유한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고, 우리 삶이 소중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비 오는 날 아이의 학교 앞에서 우산을 들고 바보처럼 웃으며 서 있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 살아온 지난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런 영적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치유의 순간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런 순간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한다. 나처럼 암을 통해서건, 종교를 통해서건, 압도적 자연을 통해서건, 깊은 사랑을 통해서건 그런 순간과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 사적 생활 영역과 공공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어떤 생활공간. 주로 자조모임, 공간이나 관심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등을 지칭. 개인 간 관계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사적 영역에 가까우며 배려와 사회적 관심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공공과 연결된다. 대개 개인은 친밀권을 기반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여 공공에 개입하게 된다. 사이토 준이치의 『민주적 공공성』에서 그 개념을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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