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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위기의 민주주의,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
2016-06-30 12:24:00

* <모심과 살림> 2호(2013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위기의 민주주의,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실장)

 

 

대선 유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시간의 흐름은 역시 불규칙적이다. 연초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들이 마무리되지 못한 채 여전히 눈앞에 쌓여 있는데 한 해가 쏜살같이 휙 지나간 느낌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 정치에서 시간 흐름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대선을 치르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난 일 년과 다음 대선까지의 남은 시간 모두가 아득하기만 하다.

 

2012년 대선 상황을 애써 떠올려보면 당시 박근혜 후보의 핵심 공약이 ‘복지’와 ‘경제민주화’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위 진보 영역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복지’와 ‘민주’라는 개념을 보수 정당의 후보가 전면에 들고 나온 것은 당시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진보의 정체성과 가치를 내세운 야권의 후보들이 여권 후보의 ‘과거’ 이력과 태생적 한계를 문제 삼고 있을 때, 보수를 대표한 박근혜 후보는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국민행복과 대통합 시대를 여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런 선거 구도가 실제 득표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결국 박근혜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해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일 년 전에 치러진 이 선거가 지금 온 나라를 걷잡을 수 없이 뒤흔들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국민행복과 대통합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사회 전체를 긴장과 갈등, 충돌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가 국민적 피로감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운 현실의 밑바탕에 바로 ‘정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공유하면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정치는 실종되고, 적대적인 영향력 행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대결 정치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의 이런 사태에 대해 소위 진보적 가치를 주창한 야당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들은 그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과 박근혜정부야 말로 당면한 문제의 가장 일차적인 책임 당사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난 대선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볼 때 민주주의 차원에서 중대한 왜곡과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과의 약속에 대한 책임 있는 이행으로 신뢰의 기반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인데, 지난 대선 때 핵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 복지, 국민행복, 대통합의 내용은 지금 실종 상태에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선거 때 주장했던 것과 달라진 지금의 현재 상황에 대해 그 어떤 책임 있는 해명과 이해를 구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거 후 1년 사이에 어떤 불가피한 상황 변화가 있었는지 유권자인 시민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공약을 이행하고 그 성과를 체감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분명한 비전과 단계별 실행 계획을 가지고 유권자들로부터 이해와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정부와 여당 스스로 자신들의 핵심 공약들을 부정하고 파기하면서 그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알아서 잘할 테니 참고 기다리라’는 인식과 태도를 보인다면 유권자를 업신여기는 오만함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위기의 민주주의, 무엇 때문인가?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지친 사람들 가운데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통해 보다 안정된 삶과 행복이 실현되기를 기대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선택에는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며 신뢰의 정치인으로 자신을 내세운 박근혜 후보가 공약대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게 되면, 같은 영역에 있는 보수 쪽의 반발도 최소화해 그 실현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이런 기대가 매우 헛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과정과 절차의 측면에서 발견된다. 바로 지난 대선 과정 자체가 공정성 논란에 휩싸여 심각한 양태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데, 안타깝게도 지난 대선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자체가 심각하게 훼손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급기야 종교인들까지 나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 당면한 문제점들을 몇 가지 측면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제도적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기본 요소이자 사회적 신뢰와 질서의 기반인데, 지난 선거에서 이것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치열한 경쟁의 결과에 대해 패자는 승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고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려면 과정과 방식 자체가 공명정대(公明正大) 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선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독재는 권력의 자의적(恣意的) 사용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권력의 독점과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중요한데, 이것을 특정 집단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훼손해 버리면 사회의 기본 신뢰와 질서가 흔들리게 된다. 이 점에서 지금 우리는 선거의 공정성 원칙을 집권 연장을 위해 훼손시킨 심각한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 성숙시켜가기는커녕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이 주요 과제가 된 현실에 당면하고 있다.

 

둘째,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사회적 신뢰 확보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국가 권력기관이 민주주의의 기본을 훼손시킨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내용이 무색하게도, 국가정보원,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국가 권력기관이 대선 과정에 광범위하게 지속적,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으니 충격 그 자체다.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누구보다 공정하게 주어진 책무를 수행해야 할 공적 기관들이 스스로 이익집단이 되어 편향적으로 선거 과정에 개입하여 유권자들의 가치 판단에 영향력을 미치려 한 점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셋째, 이런 엄청난 사태에도 불구하고 관련 당사자들의 잘못을 밝히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하고 다른 곳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라 상식의 영역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사건 당사자 개인과 조직은 물론이고 정부와 여당까지 진실 규명은커녕 상황을 호도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까지 적으로 몰아 배제시키려 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에 대한 외압 의혹 속에 조사 주체인 검찰까지 신뢰를 잃어버렸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삼권분립의 취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게다가 심지어는 대선 불법 개입의 진실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소위 ‘종북’(從北) 세력으로 몰아 사회 전체를 낡은 이념 갈등의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특정한 의도를 담아 만들어낸 조어(造語)인 ‘종북’이란 말은 비판의 상대를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집단’, 나아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손한 세력’으로 규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런 엄청난 말을 자신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불법 선거 개입 행위가 구체적 증거로 밝혀지면 단순한 ‘개인적 일탈’ 행위로 돌리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참혹한 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공안통치’, ‘협박정치’, ‘증오의 정치’라는 말이 다시 등장할 만큼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일각에서는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침없이 나오고 있고,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숭고한 마음은 어느새 조롱의 대상이 되어, 약한 상대를 따돌리고 업신여기는 의미에서 ‘민주화 시킨다’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의견에 강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라는 파커 파머의 이야기가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민주주의는 소위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가려서 선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문명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그런데 지난 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부르던 민주주의’가 제도화 과정을 거쳐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져 왔었는데, 이것이 다시 질식당하고 뿌리 뽑힐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이 시점에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최근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오늘날 일본이 우경화, 군국주의화의 길로 치닫는 배경에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음을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금기의 영역을 설정하고 공론의 장을 억압하는 것이야 말로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민주주의는 그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상처받고 깨지기도 쉽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서 지키고 살리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만큼 이번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해 온 사회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노력을 외면한 채 오히려 논란을 확대, 지속시키려 한다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사회적 불안 상황을 역이용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질 게 없다”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국가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공인으로서 역할과 자연인 개인으로서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환의 시대,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민주화 이전 시대로 되돌린 듯한 사건들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우리 사회 전반을 둘러싼 환경 변화 또한 여간 심상치 않다. 올해 정전 60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주변 강대국들의 핵심 이익을 둘러싼 양보 없는 대결 태세는 동북아지역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동안 동북아 지역은 역사와 영토를 둘러싸고 국가 간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어 온 곳인데, 최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을 계기로 분쟁지역화의 가능성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아베 정권 주도 하에 노골적으로 군사력에 기반한 전쟁국가로의 길을 재촉하고 있고, 북한 정권은 한반도 전체를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핵무기를 앞세워 군사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하려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대대적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로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미・중간 패권 경쟁을 경제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이처럼 ‘힘’을 앞세운 대결 구도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확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차세대 전투기와 공중급유기 도입 등을 위한 군비 증강과 함께 경제적으로는 FTA와 TPP 등을 통해 세계 시장경제 체제에 깊숙이 참여해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양보 없는 경쟁 상황에서 힘의 우위를 앞세운 생존전략이 우리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해 줄지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과 검토가 필요하다. 힘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하기도, 올바른 대안을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런 ‘힘겨루기’ 방식은 위기 상황을 빌미로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함께 인류가 문명사회를 향해 축적해 온 인권, 평화, 생태, 공동체 같은 가치들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전쟁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전환의 시대에는 그동안 익숙해져 온 가치와 제도, 시스템 전반에 대해 새로운 진단과 모색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과 접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당면한 위기 상황이 심각하고 중대하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한 판단과 선택을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깊은 간극과 단절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클수록 다른 목소리에 인내를 갖고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분노를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고 책임을 떠넘길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불확실성이 만들어 낸 혼란에 편승해 중요한 결정을 성급하게 내리거나 심지어 투기적 행위를 확산시킨다면 다가올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흔히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한 채 일치된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국익을 위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성찰이 배제된 단결에 대한 호소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또 다른 억압적 권위주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논리로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 간 패권적 대결구조와 이로 인한 긴장과 충돌 상황을 해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한 지구적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있는 행동도 어렵게 만든다.

 

한편, 그렇다고 제각기 각자 살 길을 도모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방식도 올바른 선택은 아니다. 이미 지금 당면한 현실의 문제는 파편화 된 개인주의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데다, 책임을 개인화해서 떠넘기는 방식은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국가권위주의나 시장 자유주의 체제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의 책임을 개인 차원으로 돌린 뒤 이들의 일상생활과 생각, 행동 등을 지배하고 관리함으로써 결국 시민적 무책임성과 무기력감을 확대시켜 민주주의의 발전 자체를 가로막아 왔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전환의 시대를 열어갈 해결책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성찰과 책임 있는 연대를 통해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이 점에서 민주주의의 의미와 역할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70년대의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에 당면했던 민주주의 문제와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경쟁국가 시대에 요구되는 민주주의 문제는 성격상 분명 다른 측면이 있다. 따라서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 제기되는 민주주이ㅡ 위기 문제 역시 ‘유신시대로의 회귀’ 또는 ‘유신의 부활’로만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절대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성장을 기획하고 추동하던 때에는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 자유와 분배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로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의 불균형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 경제위기와 연동된 장기 저성장 상황에서 양극화의 확대에 따른 불안감과 박탈감으로 사회적 관계가 급속히 해체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 자체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특히 우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이웃을 돌보고 배려하는 마음을 닫아 버리고 새로운 변화와 도전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전환의 시대에 민주주의는 기본 생존권 보장은 물론 개인의 삶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책임을 종합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보다 넓고 깊어져야 한다. 물론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개발독재를 지탱했던 성장지상주의, 목표달성주의, 속도주의, 결과중심주의 논리가 민주화가 된 지금도 우리의 일터와 삶터, 아이들 교육 현장 등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이번에 문제가 된 대선 불법 개입 논란은 물론이고 4대강 사업이나 원전 비리,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문제 등에서처럼 우리사회에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케 하는 일들도 연이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 역시 그동안의 고속 성장이 만들어 낸 화려한 빛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로, 그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지난 세기 우리가 걸어온 성장 과정이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와 제도 영역에서도 시간 단축을 통해 압축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를 몸과 마음으로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양적 성장을 목표로 경쟁과 효율, 속도를 강조해온 ‘성장 사회’에서 협력과 균형, 공존과 합의를 바탕으로 질적 발전을 이끌어내야 하는 ‘성숙 사회’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할 때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결국 말도 많고 그만큼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국가 권위주의와 시장 자본주의가 공통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활용해 작동해 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외면한 그 어떤 해결책도 위험하다.

 

당면한 위기 상황이 복합적이고 전환의 과제가 복잡할수록 결국 중요한 것은 시민들로부터 지혜롭고 책임 있는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질 높은 의사결정을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마련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익갈등과 가치갈등이 혼재되어 지역과 계층, 세대 간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미래를 향한 사회적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길도 다양성과 차이로 인한 긴장과 갈등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민주주의를 통해 길러내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제도화 된 권력과 정책에 의존하지 않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민주주의가 중요한 때다. 자신의 생각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성찰적 자세,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인내와 겸손함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전환의 시대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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