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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전쟁법안 반대운동’이 개척한 새로운 사회연대운동의 흐름
2016-07-30 15:40:00

* 『모심과 살림』 6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쟁법안 반대운동’이 개척한 새로운 사회연대운동의 흐름

 

세토 다이사쿠(瀨戶大作, 일본 팔시스템연합회 지역지원본부 부본부장)

번역 김이경 (모심과살림연구소 객원연구원)

 

 

이미 한국 언론에서도 보도되었지만 ‘집단 자위권’에 관한 안보법 법안에 대해 많은 일본 국민들은 회의적이거나 반대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2015년 9월 1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집단자위권’ 안보법을 강행하여 가결시켰다. 국회 앞은 “아베의 정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베 정권을 무너뜨리자”라는 요구로 넘쳐났다.

 

 

‘빈곤문제’와 ‘원전 사고’라는 전환점

 

일본 반전평화운동에서는 오랜 기간 정당·운동단체 간의 공동행동이 이뤄지지 못했다. 민주당과 공산당은 고사하고, 헌법 개악 반대를 밝혀왔던 공산당과 사민당의 공동투쟁도 어려울 정도였다. 사민당의 경우, 전신인 사회당(1986년 최대 야당) 당시 나카소네 정권에 의해 당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국철노동조합 등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해체’가 단행되고 노동조합 계파 간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통해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이하 일본노총)’1)로 재편되는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당정이 쇠퇴해 민주당 창당 이후 소수정당이 되었다. 일본노총은 전력이나 자동자 관련 노조들이 ‘노사일체화’ 경향을 띠면서 원전 문제, TPP 문제에도 반대 의견을 낼 수 없는 노동조합이 되어버렸다. 또한 민주당에서도 원전이나 TPP 추진 세력이 주류를 장악하던 상황이었다. 공산당의 경우 독자 노선을 갖고 당 세력 확대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 많았기에 시민운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진보세력의 대다수는 ‘반反자민(당), 비非공산(당)’이었다.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데 2008년경부터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몇 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우선 2008년 말, 히비야日比谷 공원에 ‘새해맞이 파견촌’2)이 세워져 빈곤문제가 가시화되었다. 이에 이듬해 민주당 정권에 의해 상대적 빈곤율이 표시되었고, 일본의 빈부 격차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정부가 피해자를 구제하지 않은 것이 명확해졌다. 빈곤문제와 대지진·원전 사고, 이 두 가지가 큰 전환점이었다.

 

 

코엔지高円寺 데모에서의 새로운 움직임

 

원전 사고 후 1개월이 지난 2011년 4월 10일에 도쿄 코엔지에서 ‘4.10 원자력발전소 정지 데모’가 일어났다. 당시 인터넷과 SNS를 통한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고, 1만5천 명가량 되는 인원이 참가하는 일본 최대의 데모로 발전했다. 이를 주최한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3)는 이렇게 말했다.

 

“데모 준비는 10일 전부터 시작했어요. ‘슬슬 데모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들려와 처음에는 열 명 정도가 술집에 모여 회의를 했죠. 그 후 트위터 등을 통해 데모 준비를 알렸고, 최종적으로 약 50명의 스태프로 실행위원회를 구성했어요.”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주도한 데모 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집회는 없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참상과 원자력 문제를 보면 모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도쿄에서도 수돗물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돼 많은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정당이나 노동조합뿐 아니라 기존 사회운동의 움직임은 여전히 느렸다. 코엔지에서 일어난 데모에는 원전 반대 단체에 속한 사람뿐 아니라 ‘원자력발전은 좋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모인 보통의 사람들, 특히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도 많았다.

 

코엔지는 예술가와 뮤지션이 많이 사는 거리였기에 사운드 카sound car를 내놓고 라이브 공연을 하며 시위를 했다. 예술가나 밴드, 아이들도 제각각 플래카드나 악기를 가지고 와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데모가 처음이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전형적인 데모는 자유로운 발언보다는 이미 정해진 슬로건만을 따라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시위를 마친 후 소외감과 고독감이 남아 다음번 참여를 망설이게 했던 데 비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데모에 나가라!’라는 것이 코엔지 데모의 다른 점이었다.

 

 

반원전연합운동이 만든 관저 앞 행동의 의의와 한계

 

수도권 반원전연합 주최로 2012년 3월부터 매주 금요일 총리 관저 앞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구성 단체의 대다수는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설립된 그룹이며 운동단체뿐 아니라 라이브하우스를 운영하는 이벤트 기획사도 참여하고 있다. 오사카 원전 재가동에 항의한 2012년 여름 집회는 최대 참여자 수가 20만 명에 다다랐다. 집회 참가자 몇몇이 총리 관저를 방문해 총리대신인 노도 요시히코野田佳彦와 면담을 하기도 했다.

 

츠다 다이스케津田大介는 “관저 앞 데모의 특이점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총리 관저 앞이라는 ‘장소’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타흐리르 광장4), 푸에르타 델 솔 광장5), 월가, 그리고 경제산업성 앞 텐트 광장의 흐름의 연장선상이다. 다만 월가나 경제산업성 앞의 운동이 지속적인 점거(Occupy)라면 금요일 행동은 6시-8시라는 틀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또한 타흐리르 광장 등이 토론의 장이나 출격의 거점이 되었다면 금요일 행동은 총리 관저라는 단일한 벡터를 가진 항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관저 앞에서는) 자기표현이나 개성표출보다는 저항의 표현이라는 점이 중시된다. … 이곳은 참가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집회 장소가 아니다.” 항의 행동의 대부분은 총리 관저를 향해 ‘재가동 반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참가자는 쌍방간의 관계보다는 오직 총리와 정권을 잡고 있는 여당의 귀에 ‘원자력발전을 그만둬라’, ‘재가동을 멈춰라’라는 메시지를 연신 일방적으로 외쳤다. ‘원전 재가동 반대’라는 단일한 이슈의 운동이었다. 이는 반원전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선택된 운동 방식이었다.

 

3년 반 동안 매주 같은 시간에 전국 이곳저곳에서 궐기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운동의 지속성은 사회운동의 재산이다. 그러나 참가자 규모는 1천 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특히 관저 앞 시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참가자 대부분이 고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원전 사고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실상이다. 필자의 주관으로는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고독감. 조직화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인 의사만으로 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항의 방법이 총리 관저 앞을 향해 “재가동 반대”를 일방적으로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참가자끼리의 대화나 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몇 번 시위에 참가했지만 항의 행동 중에 누구와도 대화하는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렸다.

 

둘째, 다른 의견과 다른 운동의 배제. 관저 앞 항의는 “재가동 반대”에 대한 의사를 표명하는 단일화된 행동인 데 반해 일본 탈원전운동은 복잡한 상황이다. 방사능 피해에 대한 인식과 피난 문제에 대해서도 온도차가 크다. ‘즉시 피난!’, ‘피난의 권리, 머무를 권리, 귀환할 권리’, ‘부흥 지원과 제염6)을 수반한 귀환 진행’ 등 다양한 주장이 모두 탈원전운동에 있다. 관저 앞 항의는 시민 측의 민주적인 논의의 장을 회피하는 봉인으로 작용, 즉 스스로 자기를 규제하는 상황에 빠졌다.

 

셋째, 원내협력·제휴. 관저 앞 항의 시 매회 국회의원의 발언이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나 안보법=전쟁법안 반대 운동처럼 관저 앞 시민 항의와 원내(야당)와의 협력·제휴를 추진할 수는 없었다. 원내 야당 중 원전에 대해 분명한 반대를 결정한 정당은 공산당, 사민당, 생활당 등으로 의석이 1/10도 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2030년 원전 제로’를 내걸었지만 당 내에서는 탈원전 방침이 결정되지 않았다. 진보세력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계열과 원전 기업계 노조의 지원을 받는 의원이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사카 원전 재가동을 강행한 것도 노다 민주당 정권이었다. 또한, 관저 앞 항의 행동만의 일방적인 노선으로 인해 탈원전파 의원과의 협력·제휴에 소극적이면서 정책 제언 능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운동의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 요인이다.

 

 

안보법제에 반대하는 대동단결된 운동을 시작하다

 

일본의 전후 평화운동은 크게 사회당 계열, 공산당 계열, 특정 정당과 관계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세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올해(2015년) 5월에 열린 헌법 집회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집회도 4~5개 단체에서 각각 진행했다. 각각의 진보세력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대립하고, 그렇게 다르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연다. 헌법수호 운동뿐 아니라 반전·평화운동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기지투쟁, 오키나와 투쟁의 경우에도 원수폭금지운동7)을 포함해 여러 흐름이 있다.

 

노동운동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베 정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의견 차이와 역사적 경위를 넘어설 수 있는 큰 결집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폭주를 막을 수 없다는 여론이 작년 초부터 급속도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에 대한 해석 변경이라는 위기가 닥친 작년(2014년) 초, 문화인들과 평화포럼 등이 중심이 되어 ‘전쟁하지 않는 1000인 위원회’를 발족했다. 이어 여러 시민단체의 요구로 수도권 137개 시민·민주·노동단체가 ‘해석 변경으로 헌법9조를 깨지 마라! 실행위원회’를 만들었다. 5월 말에는 공산당 계열의 전노연 등을 중심으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을 멈춰라! 헌법을 지키고 살리는 공동센터’를 개편 발족했다. 이 세 단체 모두 작년 정기국회와 임시국회 기간 동안 아베 정권의 개헌 폭주에 반대한 운동의 모체였다. 여기에서도 3개 단체의 공동행동을 필요로 했다. 총리 관저 앞 항의집회에는 단체에 속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작년 말 세 개 단체는 출신이나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행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쟁하지 않는다·헌법 9조를 깨지 말라!’ 총행동실행위원회(약칭 총행동)를 만들었다. ‘총행동’에서는 헌법 개정과 전쟁 관련 법제 정책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국회 행동과 신문 의견 광고의 공동행동 대처 등 종래의 범위를 넘어서는 큰 규모의 운동을 전개했다. 올해 5월 헌법기념일에는 요코하마 시 임항 공원에서 3만 명이 모인 헌법집회를 이뤄내기도 했다. 대규모 반안보법제 공동행동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이 시기로, 운동의 기세가 빠르게 올라갔다.

 

5월 2일에 2,800명이었던 국회 앞 항의자 수가 불과 한 달 만에 열 배로 증가했으며, ‘집단자위권 행사는 헌법 위반’이라는 헌법학자·개헌론자들의 발언 등을 계기로 전국적 운동으로 결집하게 된다. 학생과 연구자들의 전쟁법 반대운동도 빠르게 확대되었다. 단기간에 1만 명이 넘은 학생·연구자 성명운동은 ‘대학 자치’, ‘학문·연구의 자유’를 빼앗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항해 대학생의 ‘자유를 되찾자’는 운동이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전쟁법과 경제적 징병제8)는 정신적 압박이자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일이기에 반대운동이 시작되자 그 열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등학생으로 확대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안보법=전쟁법안 반대운동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 데는 두 가지 공동행동이 있었다. 첫째, (55년간 하지 못한) 운동단체 간의 공동행동이 실현되었다. 정치적 입장, 정책, 사상의 차이를 넘어서 ‘평화’와 ‘민주’라는 공동행동을 만들었다. 안보와 자위대에 찬성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 모두 법안 반대에 발을 맞췄다. 변호사와 학자의 광범위한 참여도 있었으며, 대도시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참여했다. 405개 지방의회에서 반대 의견서를 냈고, 의견서를 내지는 않았으나 반대와 신중의 입장도 393개 의회에서 나왔다. 자민당 지방의회 의장이 반대집회에 나오기도 했다. 8월 30일에는 국회 주변에 모인 12만 명의 대항 행동만 주목받았지만 실제로 전국에서 1천 개 이상의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총 30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신문의 논조도 지방지일수록 강성이었다. TPP, 원자력발전소 문제 등으로 지방이 피폐해져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야당의 공동행동이다. ‘총행동’이 ‘야당과 함께 힘내자!’라며 끈기 있게 노력한 점이 큰 힘이 되었다. 민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은 것은 민주당 창당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8월 12만 명의 공동행동에서는 참가한 야당 전원이 손을 잡았다. 운동의 힘이 야당의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국회에서도 질문 항목을 사전에 합의하고 조율했고, 막바지 투쟁에서 5개 야당이 공동투쟁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청년이 만든 실즈SEALDs, 운동의 공감을 만들다

 

일본 사회에서는 때때로 정치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랐다. 정부에 반하는 항의 활동이 이렇게까지 확산된 것은 1970년대 전공투운동 이후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학생과 여성의 참여가 크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해야 할 때를 알고 나섰다. 여론조사에서는 전례 없이 성별 차이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안전보장 관련 법안 가결 이후 한 달간 많은 국민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항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10원 말 일요일, 학생운동 참가자들이 시부야역 인근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메가폰부터 레코드, 턴테이블까지 다양한 물건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참가자들의 옷차림은 데모활동과 파티를 반반씩 하며 오후를 보내기 위해 모인 것 같았다. 다양한 연설에 이어 참여자들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를 논했다. 집회에서는 지역 인기 DJ 차베Chabe가 레게와 리믹스를 틀었고 마지막에는 랩 그룹 ‘스차다라파’가 참여해 집회장을 달구는 등 독특한 인상을 각인시켰다.

 

학생단체 실즈가 봄부터 주도한 국회 앞 항의 집회는 세련된 플래카드와 개개인의 등신대等身大9) 발언, ‘랩’을 접목하거나 SNS와 미디어를 활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학생단체 실즈는 “아베 총리의 정책이 평화헌법의 해석을 바꿔 일본이 오랫동안 중요하게 지킨 것에서 이탈했으며, 끝도 없는 전쟁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학비의 급등과 소득격차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실즈의 K군은 “저 역시 대학 졸업할 때 600만 엔의 장학금10)을 상환해야 합니다.”라며 일본의 높은 학비가 경제적 징병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보안법제와 빈곤은 겉과 속이 같은 것으로, 만약 제가 아이 한 명을 키운다면 10만 엔의 월급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만일 내일 일을 잃는다면 이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오늘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내일을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그들의 절실한 생각이었다. 그는 “아베 총리는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 ‘모든 여성이 빛나는 사회’, ‘1억 총 활약사회11)’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 상황은 어떠한가. 이 나라에는 진학을 단념하고 카바레에서 일해 가족을 부양할 수밖에 없는 10대 소녀들이 있다. 또 몇 차례나 생활보호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하고 먹을 것이 없어 앙상해진 채 생명을 잃은 여성도 있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홀로 한겨울 차가운 길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빈곤’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장학금을 받는 대학생 비율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1996년에 21.2%였던 수치가 2010년에는 50.7%로 증가했다. 2명 중 1명이 장학금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장학금은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의 학업을 돕기 위한 돈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빚지게 하는 터무니없는 제도이다. 다른 나라의 장학금은 보통 ‘급부’인 데 반해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장학금은 대부분 ‘대부형’으로, 그 과반수는 이자가 있다. 일종의 ‘론loan’인 셈이다.12) 이 때문에 장학금을 보류한 학생도 있다. 그런 경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한편 졸업 후 상환 금액이 500만~1000만 엔에 이르는 학생도 적지 않다. 그들은 상환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재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쨌든, 현재 장학금 제도는 아르바이트의 억제로 연결되지 않는다.13)

 

쥬코대中京大의 오오우치大內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유효응답 4700명)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 28%가 주 20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고, 25시간 이상도 10%나 차지하고 있다. 1주일에 20시간 이상 일을 하면 ‘피곤해서 학업에 소홀하게 되는’ 학생이 당연히 증가한다. 25시간 이상 일한 학생의 약 3할이 ‘피곤해서 공부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학생다운 생활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블랙(음성) 아르바이트’도 횡행하고 있다. 정규 직원과 같은 일을 하도록 강요해 학업에 지장을 주거나, 일정 등의 변경을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수업과 과외 활동 참여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파견 등의 비정규 고용에 의지하는 회사가 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인건비 절감을 위해 예전에는 정규 사업만 하던 책임 있는 업무를 학생 아르바이트와 같은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에게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비정규 고용의 기간화基幹化’라고 부른다.

 

 

‘보수성 속의 혁신성’ - 삶의 현장에 밀착된 언어로부터 나온 새로운 흐름

 

『현대사상』 10월 임시 증간호에는 실즈 간사이SEALDs Kansai 오오사와 마미大澤茉美의 글 “실즈의 주변에서, 보수성 속의 혁신성”이 실렸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는 연설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대화도 서툴다. 대학을 오가는 길에는 이어폰을 꽂고 아래를 보고 걷는다. 유행하는 옷도, 음악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작년 12월, SNS를 하던 중 실즈의 전신인 SASPL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SASPL 멤버가 말한 ‘일상 속의 행복’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보통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은 잠시도 한 적이 없다. 빨리 누군가가 이 일상을 망가뜨려주기를 바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꿨다. 당연한 것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 그리고 남들처럼 분발하지 않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그런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성들이었다. 임신한 채 장학금 상환에 쫓기고, 미혼모로는 지금 이 세상을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아이를 지우는 소녀. 원조교제에 의존한 JK. 이혼 후 실종된 어머니를 찾는 여성.

 

“그녀들도 나도 절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안보법의 ‘안’자도 모르지만, 매일 삶을 힘껏 살아가고 있다.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당장 다음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고 있는데 국회에서 논의하는 것에 관심을 둘 수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생명을 깔보는 정치를 용서할 수 없다. 안보법안뿐 아니라 학비 문제, 노동자 파견법 개정, 여성이 빛나는 정책… (중략) 그녀가 살리고 싶었던 아이는 이미 죽었다. 단 한 사람의 아이를 살리고 키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정치가 지금 안전보장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생명을 죽게 내버려둔 정권이 (만든) ‘안전’과 ‘보장’을 강조하는 법안에 순진하게 찬성하기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는 벌써 안전하지 않다.”

 

국회 앞 거리에는 ‘자신을 일컫는 발언, 개인과 정치를 연결 짓는 발언, 미래를 그리는 단어’가 넘쳐났다. ‘엄마 모임’ 웹사이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습니다. … 아이들이 지저분하게 먹거나, 싫다고 도리질 칠 때 무심결에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 잠든 아이들의 평온한 얼굴을 보면 ‘사랑하고 미안해’라고 사과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에 반대합니다. 인간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전장에 동원되어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할 필요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전쟁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엄마’의 발언은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들의 발언은 국회 심의에서 여당 측 사람들이 사용하는 온갖 한자뿐인 탁상공론 같은 말처럼 피상적이지 않다.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젊은이들과 엄마의 발언이다.

 

 

앞으로의 운동

 

일본 사회는 결국 안보법 강행 통과를 막지 못했다. 60% 여론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국회의 여야 의석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러나 국민적 반대운동으로 야당은 활기를 띄게 되었고 유례없이 단결해 시끄러운 국회를 만들었다.

 

독선적이라고 비판받던 공산당이 ‘국민연합정부’ 참여를 전 야당, 특히 민주당에 제안했다. 야당 결집을 요구하며 ‘전쟁법안에 찬성한 의원을 낙선시키자!’라는 구호로 국회 앞을 뒤흔든 시민운동은 현재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최대 야당인 민주당이 흔들리고 있다. 진보와 신자유주의가 혼재하는 민주당에서 내년 참의원 선거를 목표로 야당연합이 가능할지 시민운동이 주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시민운동은 더 크게 결집해야 한다.

 

지금 오키나와 헤노코에서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All 오키나와’ 투쟁을 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본토에서 기동대를 투입해 게이트에 주저앉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탄압하고 있다. ‘총검과 불도저’로 다시 류큐 처분14)이라는 이름의 차별이라 할 수 있는 기지 강압을 강행하고 있다.

 

전쟁법안 저지 투쟁은 ‘All or Nothing’의 투쟁이 아니다. 아베 정권을 하루라도 빨리 무너뜨리자는 투쟁이다. 아베 정권이 무너진다면 다음에 어느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이러한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법안을 쉽게 강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노코 기지도 만들 수 없다. 또한 명문개헌도 불가능하다. TPP도 원자력발전도 중단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법안 반대라는 지점에서 함께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비정규 고용 비율이 38%, 연수입 200만 엔 이하의 사람이 1,200만 명이나 된다. 이러한 빈곤층 증가는 아베 정권이 계속되는 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전쟁 책임, 재일조선인 차별, 혐오발언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민운동’의 한계를 넘어 국가에 차별 받는 재일외국인과 연대하자. 법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표한 정치는 그곳을 향하고 있다. “아베 정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정치로!”

 

 

 

1)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日本勞.組合總連合會(Japanese Trade Union Confederation, JTUC): 일본 노동조합의 내셔널센터로, 약칭은 연합連合(RENGO). 국제노동조합총연합(ITUC)에 가입해 있다.(편집자 주)

2)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2008년 12월 31일부터 2009년 1월 5일까지 진행된 빈곤문제를 알린 시위이다. 시위는 여러 NPO 및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되었고 파견노동자를 비롯해 실직자, 노숙자 등 수백 명이 공원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 당시 자원봉사자 1700여 명, 후원금 2300만 엔 등을 지원받기도 했다.『빈곤에 맞서다』(유아사 마코토, 검둥소, 2009)에 2008년 일본 빈곤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역자 주)

3) 마쓰모토 하지메松本 哉는 일본 도쿄의 코엔지高円寺라는 지역에서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을 운영하고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청년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책『아마추어의 반란』(이후, 2009)이 발행되어 한-일 청년간 교류도 이뤄지고 있다.(역자 주)

4) 타흐리르 광장: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 이집트어로 타흐리르는 ‘해방’이라는 뜻. 이집트 혁명 당시 데모의 중심지.(편집자 주)

5) 푸에르타 델 솔 광장: 스페인 마드리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 스페인어로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편집자 주)

6) 방사능 물질로 오염된 의복·기기·시설에서 오염을 제거하는 것을 이른다.(역자 주)

7) 원수폭原水爆 금지운동: 원자폭탄 수소폭탄 금지운동. 1954년 3월 1일, 비키니 섬에서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Castle작전의 Bravo실험)으로 일본의 원양어선들이 피폭당하면서 전국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민적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전국적으로 핵병기 근절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실시되고 다음해인 1955년 8월에는「제 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 서명운동의 실행위원회가 이름을 변경하여「원수폭 금지 일본 협의회」가 되면서 명실상부 일본의 반핵·평화단체를 총칭하는 전국조직이 되었다. 다만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이 배경이 되어 사민당 계열, 자민당 계열, 일본 사회당 계열 등이 탈퇴하여 별도의 단체를 만들었다.

8) 안보법과 관련 징병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장기 자위대 인턴십 프로그램(기업과 제휴하는 인재확보 육성 프로그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기업측에 신규채용자를 2년간 자위대에 실습생으로 파견, 2. 자위대는 해당 실습생을 “임기한정”의 임기제사(군인)로써 받아들인다. 3. 자위대는 해당자를 자위관으로서 근무하게 한다. 해당임기 종료후까지 사이에 일정한 자격을 취득시킨다. 4. 임기종료 후 해당실습생은 기업측에 돌아가서 사원으로 근무한다. 5. 자위대가 받아들인 기간 중 급여는 관이 부담한다. 일본사회의 저출산 고령화에 따라 젊은 계층이 줄어들고 자위대가 필요한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징병제가 검토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안정적인 직장을 마련하지 못한 빈곤층이 어쩔 수 없이 자위대원이 되기에 이는 경제적인 이유로 강제징집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9) 여러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자신이 가진 힘에 맞추어서’라는 의미로 쓰임. 예를 들어 등신대의 국제교류, 등신대의 활동 등.

10) 한국의 학자금대출제도와 같은 제도.(편집자 주)

11) 고령화시대에 일본 인구 전체가 모두 활약한다는 의미로 아베 정권의 슬로건이다.(역자 주)

12) 일본에는 국비로 상환이 불필요한 장학금이 없다. 35개 OECD 가맹국 중 급부형 장학금이 없는 나라는 (처음부터 아예 학비가 없는) 아이슬란드와 일본뿐이다.

13) 월 10만 엔(이자 별도) 대여 장학금을 빌릴 경우 졸업할 때는 480만 엔, 20년 상환기간으로는 총액이 650만 엔이나 되고 매달 갚아야 하는 금액은 약 3만 엔이다. 젊은이들의 비정규화가 이어지면서 상당수가 반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14) 1872년과 1879년 두 차례 일본이 강제로 실시한 류큐 처분琉球處分에 의해 류큐 국이 일본 영토로 편입되어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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