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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집담회] 탈성장시대, 살림운동의 새로운 좌표를 묻다
2016-09-07 15:32:00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탈성장시대, 살림운동의 새로운 좌표를 묻다

- 편집위원회 집담회

 

김신양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위원)

김용우 (원주 한알마을 이사장)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주요섭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하만조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허남혁 (지역재단 먹거리정책 교육센터장)

 

이 글은 지난 4월, 『모심과 살림』 편집위원회에서 ‘탈성장과 살림운동’이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난 6호에서 ‘성장, 그 지속불가능한 신화’라는 주제로 저성장국면에 들어선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시대인식과 그에 따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 데 이어, 이번 호에서는 ‘탈성장’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따른 우리 삶의 전환의 방향을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또한 한살림 30주년과 접목하여 보다 넓은 지평에서 한살림운동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편집위원회 구성원들은 각각의 ‘한살림 경험치’와 활동의 장이 다르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살림운동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한살림선언에서 보여진 한살림 정신을 새로이 하고 그 운동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또한 그 성찰의 과정이 한국 사회의 다른 부문이나 지역운동과의 접점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소망한다는 점에도 공동의 지향이 있었다.

 

특정한 이슈 중심으로 진행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을 드러내다보니 논의가 다소 산만하게 전개된 측면이 있으나 전체 맥락에서 대략 다음의 화두가 던져졌다.

 

1. 한살림운동의 확장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여 이 운동이 제기되었던 시대에 가졌던 새로움(불온함?)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재창조될 수 있을까?

2. 살림운동이 되기 위한 조건은 주체의 조직인데, 집단의 필요의 충족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열망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프로그램)이 있었던가?

3. 거대해진 조직의 시스템 속에서 관성화되고 공동체적 관계성이 약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활동가의 자율성과 주체성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을 것인가?

4. 당위로 받아들여지는 경직된 운동이 아니라 상상력을 펼치며 틀 속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

5. 지역사회 안에서 생산(자)과 소비(자)가 순환되고, 자율과 자치의 원리가 확립된 지역 간 네트워크로서 큰 살림을 만들어갈 수 있는 전망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아래 내용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잘 조직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해결책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이 활성화될 때 함께 찾아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먼저 질문을 공유하고자 한다.

 

“불온不穩하지만 불온不溫하지 않은 운동으로”

 

주요섭 > 현실적인 운동 목표를 봐서는 이런 평가가 필요한 것 같다. 30년 전에 했던 선배들의 작업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했다기보다는 선각자들의 깊은 사색과 자각 속에서 서유럽 소비협동조합운동의 한계와 대안을 관찰하면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작년에 중국 상해에 가보니 이제 막 도농직거래, 대안교육 같은 것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산업화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고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욕구와 열망이 생겨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한살림 역시 산업화 혹은 경제성장과 궤를 함께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다만 시선이 더 멀리 있었다는 것이다. 통찰력이 있었다고 할까.

 

그러나 오늘의 한살림을 보면 오히려 근대적 협동조합운동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손가락은 먼 곳을 가리키고 있으나 물질적 욕구와 권리의식 등 정신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퇴행으로 비칠 수도 있으나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사춘기를 겪지 않은 청년의 방황 같은 느낌이다. 실천적으로 보면 지금부터가 본격적으로, 원래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지점의 실천이 구체화되고 사회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한살림 밖을 보면 그런 흐름들이 적지 않다. 한살림 영향일 수도 있고 자각도 있을 텐데, 여러 형태의 공동체운동, 전환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김신양 > 한살림 조직은 30년밖에 안 된 청년이지만 활동의 주역들은 다 나이 드신 분이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현재도 운동의 주체가 중장년층이다. 그래서 조직의 사이클로 봤을 땐 30살 청년기인데 그것을 주체적으로 한 사람들은 중장년층이다. 이 상황에서 사회에 치고나가는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활기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새로운 노선은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져야 가능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활기를 띠기 어려울 것 같다.

 

살림운동 측면에서, 멀리 손을 가리키건 아니건, 운동이 지속적으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운동을 이끌 사람이다. 그 정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사람, 핵심집단이 있어야 하는데 80, 90년대까지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주체가 있었다. 지역 한살림의 경우도 학습모임을 중심으로 설립되어왔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 사람들의 모임으로서의 운동 주체가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운동노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집단을 어떻게 만드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허남혁 > 일본 생협운동이 더 그렇다. 68세대들이 그대로 올라가면서 보충이 안 되고 그대로 늙어간다. 지금 말씀하신 관점에서, 마찬가지로 우리는 갱신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새로운 주체를 육성하고 있는가. 지역재단이 10~12년 됐는데 그동안 지역리더를 얘기하면서 청년 리더, 대학생그룹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치를 전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노력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조금씩 시작하고 있다. ‘농판’의 특성이다. 젊은이들은 농업과 상관없는 그룹이라는 인식이 있다.

 

김현우 > ‘농판’만은 아닌 것 같고 이른바 사회운동판이 다 그렇다. 노조나 정당도. 노조는 신생노조가 계속 생기고 깨지면서 100명 중 10명이 남아서 힘들게나마 신규 역량으로 충원되는 방식이 있는데, 정당은 특정 학교조직에 인맥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재생산 구조가 없다. 청년세대와 접속을 못하고 있는 것인데, 이번 총선에서도 민중연합당과 녹색당 경우가 청년세대와 어느 정도 접속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불을 당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기성 정치권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청년담론 소비 정도일 뿐이다.

 

작년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불온함’이다. 온순·온건하지 않다는 것인데, 한살림이 80년대 말에 가졌던 불온함이 있었던 것 같고, 90년대에 다른 노조운동, 정당운동, 환경운동이 제도화되면서 한살림은 꾸준히 길을 걸어갔지만 상대적으로 불온함이 잊히거나 희석된 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80년대 중후반에 가졌던 불온함의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가능케 했던 구조와 특성도 있고 또 그것에서 기인한 한계도 있었을 것 같다. 그것으로 다시 전환하자고 하면 당위론밖에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지금 원리나 구조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 요소와 가능성이 있을까, 거기에서 내부적으로 축적되어 온 경험, 인적자원 등을 한살림(생협)을 넘어서는 범위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접속할 수 있는 외부 충격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까지도.

 

‘한살림운동을 다시 불온하게 하면서도 한살림에 제한되지 않는 살림운동의 재편’이라는 점에서 ‘좌표를 묻는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물었으면 지금 제시할 수 있는 좌표가 무엇이라는 게 나와야 할 것 같다.

 

김용우 > ‘불온不穩’이라는 말을 써서 생각난 것은, 당시 불온한 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체제저항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한살림운동이 체제에 저항하는 거였느냐? 나는 문명에 저항한 것이라 본다. 차가운 문명을 따뜻한 문명으로 바꾸자, ‘불온 不溫’한 게 아니라 따뜻한 운동인데, 이것이 오히려 청년을 끌어안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 따뜻한 운동이 청년을 끌어안을 수 있는 공생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 측면에서 봤을 때 비적대적인 공생운동을 청년과의 공생운동으로 끌고 가는 비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즉 청년들에게 ‘자본과 국가 또는 국가정책이 문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각성을 통해 협동과 공생의,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 가치와 연결해서 얘기하면, ‘우애’라는 측면이 자본과 국가에 대적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연대로 시작됐지만 노농연대로 확장된 것은 1900년대, 그리고 근대문명을 뛰어넘기 위한 범시민연대로 발전한 것은 100년이 넘게 걸렸다. 적대적 연대에서 비적대적 연대로 넘어가는 담론이 쏟아지기 시작한 게 1970년대, 지구가 하나다, 환경과 생명문제를 얘기하면서 시작된 운동이다. 누가 있어서 혹은 누굴 넘어뜨리기 위해 연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연대한다는 것. 이 측면에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비적대적 연대로의 전환 지점을 생명운동의 시작으로 본다. 비적대적 연대라는 것은 상대방을 비판함으로써, 또는 상대방의 잘못에 근거해서 자기의 정당성이나 존재 의의를 찾는 운동이 아니고, 자기가 속한 현실문명의 과제를 성찰하고 자기문제화 하여 자기를 끊임없이 재창조, 확장해나가는 연대의 길이다. 인류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살림에서, 살림운동에서 비적대적 연대로서 재창조, 확장에 대한 담론과 이론은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가.

 

정규호 > 지금 20~30대 청년세대가 당면한 문제는 그들의 부모세대, 즉 기성세대가 살아온 환경과 조건, 그리고 이들의 삶의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기성세대도 청년의 시절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는 젊을 때 학생운동 열심히 하던 사람들도 많은데, 80년대 말 민주주의가 확장되고 제도화되면서 오히려 불온함은 거세되고 선거와 같은 제도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들이 자리 잡았다. 일반 시민들로서는 90년대 말 IMF의 충격이 상당히 컸는데, 어느 순간 일자리를 잃고 가족의 생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당면하는 삶에 대한 불안감은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전달되고, 청년들의 삶과 대학생들의 학교문화까지 바꿔 놓았다. 오늘날 청년과 함께 공생의 길을 찾아가려면 이런 시대적 흐름들을 같이 살필 필요가 있다.

 

“성장이 아니라 확장의 시선으로 보자”

 

김신양 > 좌담의 주제를 탈성장과 살림운동이라고 잡았는데, 말씀하신 80년대 원주보고서나 한살림선언에서 제기되었던 것이 생명의 관점으로 사회운동을 전환하자는 거였다. 그 구체적 실현으로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위해 생협을 만들고 공동체적 삶을 이뤄나갈 수 있는 실천방안을 만들어서 해왔는데, 그걸 평가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할 것인지. 그 진단부터 시작하면 어렵지 않을까?

 

김용우 > 생명운동, 살림운동은 성장경제 시대, 근대경제에서 발아되고 시작되었다. 30년 전 이 문명이 끝나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 전환하자는 게 한살림선언의 핵심이고 생명운동의 핵심이다. 그리고 지금, 성장이 종언을 고하는 국면에 와 있다.

 

경쟁과 성장 시대에 살림운동이 지향했던 것은 도농상생, 일원론적 철학, (경쟁과 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조화, 공동체, 유기농 담론 등이었다. 그 사이 생명운동은 생명평화운동, 생명교육운동, 대안에너지운동, 지역공동체운동 등으로 확장되어왔다. 그렇지만 아직 위력적으로 문명재창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과거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면에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운동의 문명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이다. 보다 능동적인 전망과 비전 수립이 요구된다.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생명운동 확장을 위한 길은 무엇인가? 또 질적 비약을 위한, 문명 전환을 위한 길은 무엇인가?

 

환경운동이 반공해운동으로 시작해 상당히 많은 영역으로 확장 분화해 온 것처럼 생명평화운동도 확장돼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협동운동에서는 협동조합법 영향도 있지만 생협운동이 확장해온 측면이 있고 지역공동체운동도 90년대에 비해 확장돼왔다. 일반화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확장’이다. 또한 다양한 문명전환의 모색도 이루어지고 있다. 대안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고, 각 분야에서 근대문명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이라는 것이 과연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로부터 그것을 넘어서면서 인간과 사회가 진화하는 대안인지, 일시적인 문제의식에 대응한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문명의 질적 비약에 필수적인 인간의 영적 진화를 위한 통합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허남혁 > 농업이나 농산물유통 관점에서도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논지를 풀어볼 수 있다. 운동과 사상으로서 시작했던 유기농업이 시장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면서 경쟁 상황에 놓이게 됐다. 생협들 사이의 경쟁, 마트와의 경쟁 등 생협이라는 사업체가 직면한 압박이 커져가는 속에서 1990~200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농업 역시 과거에 시작했던 유기농업운동이 지금은 얼마나 변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자문할 때가 되었다. 인증을 위한 인증, 그 안에 생명적 가치를 정말 가지고 있는가, 또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자고 해서 나온 새로운 담론인 저투입농업이나 로컬푸드운동 등과의 관계성 속에서 한살림은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지도 봐야 할 것이다.

 

농업, 먹거리 유통, 사업적 관점까지 포함해서 두루 살펴보고, 이 한계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할 것인지에 대한 본격적 이야기를 다룰 수 있겠다. 실제로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겠다.

 

하만조 > 조합원의 변화도 눈여겨봐야 한다. 조합원 숫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1990년대 연평균 2천여 명이, 2000년대에는 연평균 2만여 명이 새로 들어온다. 2011년 이후로는 한 해에만 5~6만 명씩 가입하고 있다. 2015년의 조합원 수는 2011년 대비 2배 수준이다.

 

늘어난 조합원만큼 사회와 한살림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조합원의 라이프스타일이나 기대사항은 30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가족 구성이나 연령, 소득 수준에서도 한살림과 사회 간의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 한살림 내부에서 소수였던 문화, 필요, 욕구 등이 커져가며 다양성이 높아지고 있다. 조합원의 변화된 요구와 기대에 대응하다보면 초창기에 수립한 정책과 방향, 원칙과 스타일만을 고수할 수 없게 된다. 변화된 상황에 따라서 방법적으로는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대중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재 다수를 차지하는, 비교적 최근에 가입한 조합원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조합원이 될 일반 시민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한살림의 조합원 정책은, 물품을 예로 들면 30~40대 기혼 육아세대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20대, 비혼 또는 미혼, 아이가 없는 조합원의 가입 문턱을 높이고 있다. 조합원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것은 그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비중이 높은 조합원을 우선시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가능성의 장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 가입하는 조합원에 대한 탐구와 함께 아직 가입하지 않은 조합원과의 접점을 높이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 옆에서 장을 보는 다수의 조합원들과 함께 잠재적 조합원을 환영하는 장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동안의 사업활동 성과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때다. 한살림이 사회 안에 있고 한국이라는 조건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열망과 필요에 한살림만의 방식을 찾아서 부응하지 않으면 존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살림선언에서 대중운동을 표방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성장의 시선으로는 현실의 정해진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애초에 세운 목표를 향한 확장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또 다르게 보인다. 처음에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들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농업살림, 밥상살림, 자급자치공동체 등은 현재까지 어떤 성과를 거두었고 어떤 과제를 남겼는지, 변화된 현실에서 기존 방향을 재검토할 필요는 없는지를 살펴보자. 우리가 가야 할 목표는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단지 성과만 나열해서는 그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다. 현재와 목표 사이에 현실적인 중간 목표를 설정하고 어디까지 왔는지를 평가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30년 전 문명전환을 모색하며 새로운 길을 열었던 선배들의 미션을 공유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규호 > 한살림운동은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다. 자본주의든 현대산업 사회든 죽임의 문명이든 한살림은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 그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합원을 비롯해 한살림운동 하는 사람들 모두 사회 현실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한살림운동은 이런 현실에서 출발해서 창조적이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자는 것이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 연꽃을 피워낸다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대중운동의 노선은 중요한데, 그렇다고 대중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극하고 만들어내는 대중의 욕망을 잘 읽어내되 그것을 지혜롭게 넘어서자는 데 한살림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물론 현실에서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일을 잘 해내기란 쉽지는 않다. 한살림 내부에도 인식체계의 변화들이 존재한다. 조합원의식조사를 해보면 2000년대 이전에는 생산자와 함께하는 가치에 공감해서 한살림에 가입하는 조합원들이 많았는데, 2000년대 중반부터는 각종 먹거리 오염 및 사고들 속에서 먹거리의 안전처로서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을 선택하는 분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새롭게 한살림을 찾는 조합원들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바쁘게 달려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중요한 것은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소비자로서 마음을 잘 읽어내되, 수입유기농산물을 소비하지 않고 우리의 땅과 물, 생태계가 건강하고 농민들의 생계가 유지 가능해서 농업이 살아나는 길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대중운동으로서 한살림이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한다.

 

“외적 필요와 함께 꿈틀거리는 내적 열망을 응시하자”

“살림운동은 계몽이 아닌 상상력으로 접근해야”

 

주요섭 > 대중노선에 대해서는 전략 ·개념으로서 ‘한 사람’ 노선을 토론하고 싶다. 목표점은 같을 수 있다. 또한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하는 것도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는 게 부정적인 의미의 욕망일까, 아니면 욕구라고 봐야 될까.

 

협동조합의 사명은 필요와 열망의 충족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요에 대해서는 서베이 (survey) 하고 있고 물건 가짓수도 늘려왔지만 열망에는 얼마나 주목했는가? 심층인터뷰를 해왔나? 문제는 초기에 몇몇 사람이 만든 원칙과 대중적 요구의 충돌이 아니라 ‘외적 필요와 내적 열망의 실현을 어떻게 함께 잘 바라볼 것인가’이다.

 

한살림운동 초기 선배들이 제시한 열망의 언어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오늘 활동하는 각자의 내면에서는 어떤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응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공동체나 순수증여, 절대자유 등에 대한 열망이 희미하지만 아련한 그리움처럼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데, 그 그리움을 자극한 게 무위당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계산 없는 협동’을 얘기하고, 그러나 계산 있는 협동이 나쁜 것은 아니다. 계산 없는 협동을 잊지 마라. 그런 것들이 에너지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시대적 흐름에 따라 열망도 휩쓸린다. 내 욕망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그런 시대적 한계 때문에 휩쓸리는 욕망을 수용할 수 있으나, 열망이 없는 필요의 충족만이라면 마트로 가야 한다. 그게 조합원들 가슴속에 숨 쉬고 있게 할 수 없다면. 적더라도 발견하고 일어나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신양 > 탈성장과 살림운동 측면에 좀 더 집중해본다면, 한살림운동의 처음 시작은 탈성장운동이었다. 분명히. 그렇기 때문에 불온했었다. 80년대 당시 저항운동이 한쪽으로는 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그 개발독재가 성장주의의 시작이었고 그로 인해 죽임의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개발을 계속 하기 위해서 노동력을 싸게 써야 했고, 대량생산을 해야 했고, 농약을 치게 하면서 죽임의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한살림운동이 농약을 거부하고 유기농업, 생명농업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그 자체가 탈성장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때는 탈성장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반개발독재운동이라는 것이 거리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유기농 등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저항운동의 형태가 살림운동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큰 두 가지 운동이 개발독재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은 같지만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림운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살림운동이라고 해서 경제주의나 조합주의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면서.

 

김현우 > 지난해 연구소에서 가진 콜로키움에서도 ‘한살림 문화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엔디 메리필드는 그의 책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똑똑한 얘기들은 많이 하는데 왜 인기가 없어졌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마르께스의 ‘100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책에 드러나는 판타지의 측면, 이런 마술적 상징운동을 놓쳤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운동에서 그런 여지가 전혀 없진 않았는데 공식 마르크스주의가 이걸 억눌렀고, 다르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예컨대 살림운동도 살림의 논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계몽을 해야 되고, 이렇게만 접근해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한살림을 잘 상징해주던 밥 한 그릇의 그림, 이철수 화백의 판화 같은 것들, 마술적인 것, 그런 것들이 지금 무얼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용우 > (한살림운동에서도) 필요라는 것이 물질적으로는 충분히 확장돼 왔다. 그러나 열망의 재조직화는 없었거나 적었다고 본다. 그런데 한살림운동은 한편으로 열망의 새로운 측면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열망의 두 측면 중 하나가 영성적 측면으로서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있어온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합리적으로 어떤 사회로 가고자 한다는 ‘사회적 대안’으로서의 열망이다. 이 열망의 두 측면을 어떻게 재창조, 혹은 확대·재조직할 것인가를 보면, 한살림운동이나 한국 생명운동에 있어서 필요는 지나치게 농산물 직거래라는 지점으로 협소화되었으면서도 그 지점이 확장돼버렸다. 반면 열망의 재조직화 측면은 사회적 대안이라는 데 너무 매몰되어 인류의 근원 속에서 존재해온 공동체적 열망, 영성에 대한 자극이 지나치게 부족했다고 평가해볼 수 있다.

 

주요섭 > 열망은 물질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현재 한살림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인데, 사이좋은 관계, 행복한 조직문화, 살아있는 조직시스템 등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접근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초기 협동촌 등 실험이 있긴 했지만 어떻게 서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로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프로세스, 규칙, 워크숍을 통한 자기 변화 같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보니 거룩한 구호가 있지만 실제로 현실화, 물질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 프로그램이 없는 괴리가 생겨났다. 그 점이 안타깝다.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생명의 보편성을 고려해 가톨릭이나 불교 등 보편 종교의 프로그램을 참고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생명운동의 연대 개념은 계급투쟁론에서 이야기하는 연대와는 다르지만 가톨릭의 형제자매애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과는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생명운동의 독특함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생명’을 화두로 하는 보편적 사유와 경험, 노하우에도 주목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김신양 >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생명운동이든 생명협동운동이든 핵심은 생명이 빛나는 것이고 생존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모여서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인데, 만약 생계 문제가 있으면 생명이 영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한살림에서 동학을 많이 얘기하는데 사실 기독교사회주의 경향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일본 생협 영향도 받았지만 초기에 이념적으로 이끌었던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사회주의가 많이 있었다. 유토피안 사회주의도 있긴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모든 이를 형제로 본다. 우리는 같은 형제니까 평등하다고 한다. 따라서 거기엔 근대의 산물이라는 계층, 계급 같은 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게 반생명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만드는 조직 안에서 임원과 실무자와 활동가가 각각 있는데, 모든 사람의 권한이 평등하지 않고 급여나 결정권에도 차이가 있다. 모신다고 하지만 실무노동자를 두면서 실제로 이들에게 어떤 권한을 주고 어떤 노동 조건에서 일하게 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 모시고 다 형제니까! 이런 생각이 있으면서 굳이 한살림 안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아야 된다고 했던 것이 실제로는 노동문제나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간과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나타난 측면이 있다. 예컨대 교회에서 모든 형제는 평등하다고 하면서 목사를 떠받들고 교주화 하는 데가 많은 것처럼. 그런 것들이 생존을 유지하고 생명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 권위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운동이라고 얘기했던 데 대해서 좀 더 냉철히 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하고 있는가?

 

김용우 > 다른 시선으로 얘기하면, 근대사회라는 것은 소공동체 (community)의 네트워크(그물)로서 사회와 코뮤니티 해체와 개인중심의 연결, 개인들의 결사(association)로서의 사회인데, 둘은 다른 거다. 한살림도 초기에는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소공동체들의 네트워크로 시작했다. 그런데 2000 년대 들어, 그전에는 없었던 노동 문제가 생겼다. 공동체 자기고용 노동 (Community Self-employee)과 활동에서 개별화되고 사회화됨으로써 비교되는 노동으로 변화한 것이다 . 말 그대로 형제 , 공동체였는데 , 커뮤니티들의 네트워크시대가 아니라 성장 중심의 물류연합이 되면서 공동체를 전면 해체하고 매장과 개별배송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 한살림 공동체가 해체되고 한살림 사회가 된다. 그러면서 노동 문제에 대한 정리가 안 되어서, 의식은 공동체 네트워크 시대에 계속 있고 현실에서는 사회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모순이 문제가 된 거다. 실제로 한살림이 앞으로 다시 재구축하는 방향에 있어 이 지점에서 쟁점이 생긴다. 계속 현대사회의 개인에 기초한 체제로 갈 건가, 다양한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로 재편해 갈 건가. 전혀 다른 과제다.

 

주요섭 > 현재의 한살림생협시스템과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는 매우 다르다. 필요의 충족이든 열망의 실현이든 그 실현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모양의 실현태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야 할 것이다.

 

한살림의 경우 규모, 범위, 시스템 등에 대한 선택의 시기가 있었다고 본다. 생 -소 직거래는 폐쇄적 호혜시스템인데, 그것을 공급하는 방식은 매매 시스템이고 이것이 중첩된 게 현재의 한살림의 생산-소비 사업시스템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최선인가, 최적인가 하는 것은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향후에도 이런 시스템으로 갈 수 있는지, 가야 하는지…

 

김용우 > 코뮤니티시대에는 비적대적 노동, 상생적 노동인데 소사이어티 시대로 넘어오면 내부적 적대화가 진행된다. 동일노동에 대한 혜택을 누리는 범주가 달라진 것이다. 조합원노동이라고 이름 짓는 활동가노동과 실무자노동 간의 갈등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탈성장시대를 얘기하면서 커뮤니티 운동으로 방향을 새로 잡는다고 하면 노동은 커뮤니티에 맞는 공동체적 노동으로 가야 한다. 공동체의 자기고용 (self-employment)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사이어티 상황에서 부딪히는 노동의 균질성, 평균화, 형평성 문제가 정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어느 방향을 택할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신양 > 남미의 민중경제도 주요한 특징은 고용-피고용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에 대한 인식 이전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관계 자체가 사회적 관계로 처음부터 시작되어서 그 안에 고용-피고용 관계를 상정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거다. 그렇지만 근로계약을 체결하며 노동법을 준수한다. 사회성, 공동체성을 유지한다는 것과 사회제도로서 노동법을 따르는 문제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과 분배는 충분히 공동체적인가?”

 

김용우 > 농업과 관련해서, 농업살림운동이 왜곡된 측면으로 눈에 안 보이는 점이 가공의 비대화이다. 농업살림은 공동체적인데 가공은 사적私的이다. 농업생산의 공동체성에 비해서 가공이 사적으로 가면서 부가가치가 중간에 증발해버린다. 한살림 내에서 상당한 모순을 발생시키고 있다. 유기농업 생산량과 면적은 크게 늘지 않는데 한살림 매출이 늘어나는 것은 사적소유에 의한 가공이 늘어나면서 부가가치가 붙는 것이다. 이게 한살림의 성장으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 메커니즘에 입각한 전형적 사례라고 본다. 앞으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소사이어티 내에서 모순을 회복하려면 한살림운동에 맞는 가공 정책을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 사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부분을 어떻게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미 몇몇 가공업체들은 거대화돼서 중소기업 수준이 되었다. 한살림운동에서 상당한 위험요인으로 등장할 것이다.

 

김신양 > 이와미 다카시가 ‘제3세대 협동운동’의 주요 특성이자 과제로 첫째 직접 참여, 둘째 생산과 생활의 결합(크래프트craft), 세 번째로 적정한 기술을 활용한 생명농업을 들고 있다. 유기농을 하면서 그것에 적합한 기술을 사용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규모로 가는 것을 용인한 것이다.

 

김용우 > 농업 분야에서의 모순은 크래프트를 같이 가져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생산물은 유기농인데 생산방법은 자본주의적 영농방식이라는 점이다. 소비자는 소비자공동체로, 농민은 1차농산물을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공동체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저투입농업이어야 하는데 고투입농업이 되었고, 대농에게 많은 부를 주는 등 내부적 모순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여전히 살림운동의 지향이 어디인가가 분명해야 한다. 공동체라고 한다면 일정한 균형, 평등논리를 넘어 ‘형평’으로 가야 한다. 어떻게 그 가치와 논리를 살림운동 내에 정리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한살림 초기에는 코뮤니티들 간의 활동이었다, 자본도 조합원들이 만든 것이고 착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산된 부를 동일하게 나눴다. 균형 있게. 지금은 불만이 생겨나고 있다. 농촌에서는 대농 대 소농, 가공 대 농민, 노동에서는 실무자-활동가 등 분화들이 생겨버렸다.

 

주요섭 > 한살림선언에서도 생명의 본질은 정신이라고 한다. 그것이 한살림을 가장 불온하게 만든 거다. 그런데 문제는 고도의 정신성이 한살림선언에서는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선포된 것이다. 내 나름의 영혼의 결핍이나 열망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부족했거나 없었다.

 

좌표를 새롭게 제시한다면 정신성을 얘기하더라도 ‘나’로부터 출발하는 정신성이어야 한다. 정신성의 구현을 한살림선언에서는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수양활동으로써 자기발견, 자기성장, 자기실현, 나아가 자기초월로 표현되는 활동, 둘째 생활문화활동으로서 공동체문화, 인간관계, 생활협동 등으로 구현되는 활동, 그리고 셋째로 사회의 전환을 위한 사회실천활동이 그것이다.

 

지나온 30 년 동안 공동체도 약화됐지만 ‘나’도 별로 없었다. 나의 성장, 나의 삶이 부족했다. 공동체가 약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공동체로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 생산자공동체와 소비자협동조합이라는 두 체계, 중심축이 있었고, 그걸 사회화시키는 데도 부족함이 많았다. 예를 들어 생산소비약정 시스템을 어떻게 사회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지역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우리 안의 폐쇄적 구조 안에서의 생 -소 약정시스템은 잘 지켜왔다.

 

그런데 초기에는 시장시스템이나 계획시스템과 구별되는 제3의 시스템으로써 협의경제 개념 등을 중심으로 매우 급진적인 비자본주의 길을 실천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 생 -소 공동체를 실현하고 그것을 사회화하는 전략이라고나 할까. 그것의 한국적 형태가 매장의 시장경제와 생-소 약정의 협의경제와의 결합이었던 것 같다. 한살림의 폭발적인 성장 배경에는 공급소를 매장으로 전환한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런 시도와 더불어 이론적 작업이 병행되고 다른 사회적경제 영역 등과 함께 연대하고 확산하는 전략이 필요했는데, 처음에 한살림을 시작하면서 하고자 했던 꿈, 자본주의적 관계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확장시키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방향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본다. 표현은 바뀌었지만. 부족했던 것들을 채우고 중심을 잘 가져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제는 무게중심을 한 사람에게 맞춰야 할 시점이 아닌가.

 

지금 가공 영역에서는 일탈이 벌어지고 있다. 과도하게 부가 집중되면서 내부 생산자 안에서의 양극화가 벌어지고, 그 부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이게 공동체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적 관계로 이루어진 게 초기에 많이 생성됐고 그것이 협동적 규율로 통제 관리가 안 된 것이다.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필요에 의해서 사적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들이 고생한 거다, 물품을 대느라. 일정 정도 크고 나니 사유화시켜버린 것이다. 공동체, 한살림 전체의 것인데. 그런 것들은 심각한 문제다.

 

김용우 > 열망(aspiration)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인스퍼레이션inspiration(영적감성 또는 신성)이다. 생명운동이 성장하기 위해서 내부 제어력을 가지려면 열망이 내 안에서 영감과 창조적 열정으로 샘솟아야 하는데, 영적감성이 없는 열망은 순간적이다. 영적감성이 형성되기 위해 필요한 게 통합성이다. 동학에 머물러서는 통합이 안 된다.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는 영적감성의 통합적인 새로운 무언가를 얘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ICA의 협동조합 원칙과 개념에 동의하지만 또한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열망에 대한 것이다.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샘솟게 할 것인가를 얘기하지 않는 게 문제다. 영적감성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내재화되는가의 문제로 관점이 전환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열망을 오히려 고갈시켜버렸다. 없는 열망, 고갈된 열망을 조직하려고 애쓰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은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들을 통합하고 공유해야 한다. 일례로 ‘생명평화결사’는 어떻든 탁발순례운동의 결과로 자신들의 ‘생명평화경’을 만들었다. 다양한 종교성의 통합으로서. 한살림은 새롭게 뭔가 정리해야 한다. 내부에 흐르는 그것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제2의 한살림선언을 하든 사회적 영성을 통합(integration)하는 그 무엇을 만드는 게 의미 있다고 본다.

 

정규호 > 지난 30년 동안의 무게만큼 한살림이 일궈낸 성과와 함께 과제들도 많이 있을 텐데, 중요한 것은 한살림이 표방하고 실천해 온 어떤 기조나 정신에 대한 것이다. 한살림운동은 시대를 내다본 통찰력과 선도적인 실천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과연 그런 기백과 담대함,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불온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시선이 눈앞의 현실 과제에 맞춰져 있고 , 시스템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시류에 편승하고 현실에 안주해서는 앞으로의 미래를 열어가기 어렵지 않을까 . 더구나 지금은 기존에 경험해보지 못한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고 있는 만큼, 그동안 잘 해왔던 부분도 지속가능할 수 있을지 되짚어봐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운동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탈성장이 담고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어떻게 살림운동을 계속 해 나갈 것인지 지혜를 모아나갈 필요가 있다.

 

김용우 > 최근 읽은 진화론에서, 다섯 명의 공동체가 서로 돌보고 그루밍grooming하고 소통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이게 세 배수로 늘어나서 15명, 50명, 150명으로, 이게 최근 인류진화를 연구한 책들에 나온 내용이다. 군대도 150명 중대까지는 구성원들이 서로 다 안다고 한다. 유대관계가 있고. 마을공동체도 전 세계를 조사했는데 150명을 넘는 경우가 드물고, 대체로 500명을 넘는 마을공동체가 드물었다고 한다. 그것의 기본단위가 가족공동체였다고 하는데, 이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하나는, 공동체로서의 네트워크로서 새로운 나라라는 것이 (의사소통과 그루밍, 돌봄의 수준이 가능한 범위가 150~500명이라고 할 때) 그것들의 네트워크일 것이라는 점이다. 저성장이라는 것은 근대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고 볼 때, 탈근대적 가족공동체, 최소공동체운동으로서의 가족공동체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진화와 장기지속성, 확산성에 영향을 줄 거라고 본다.

 

“0 과 1 사이 무수한 선택지를 만드는 운동”

 

김신양 > 모멘텀momentum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얘기했으면 한다. 여러 과제가 나왔지만, 모멘텀이 있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해 나가는 게 필요한데 그 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김용우 > 한살림의 활동가 또는 임원이 되는 데 어떤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정리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한살림의 공동체문화와 공동체민주주의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살림 논의수준이 보편화되고 성숙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어설픈 직접민주주의로는 어렵다. 목적의식적 운동, 가치지향이 있는 한살림운동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어느 지역에 가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운동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주요섭 > 좌표가 눈에 보여야 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예전과 다른 방향이. 30년 전에는 몇 가지 얘기가 있었다. 생협, 유기농산물, 직거래 등. 한살림선언 하면서 수양 얘기도 나왔다. 지금 얘기 흐름으로 보자면 ‘다시 공동체로’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혹은 ‘인간이 되자’, 또는 사회적 영성, 더 깊어진 영성을 키워드로 제시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 꼭 합의하자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서 뭔가를 찾았으면 좋겠다. 서로 동의하고 공감되는 키워드가 무엇일까?

 

정규호 > 관련해서 생명운동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생명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인데, 추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생명운동이라면 그만 내려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생명의 세계관을 갖고 협동적 방식으로 실천하는 살림운동이 우리가 가져가야 할 정체성이 아닌가. 그 점에서 그동안 먹거리에 제한되어 있던 살림운동의 영역을 더 확장시켜서 조합원들의 삶, 생산자들의 삶,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 돌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저성장시대엔 국가나 시장 어느 곳에도 우리의 삶을 믿고 맡길 수 없다. 결국 당사자 스스로 생존의 힘을 길러내야 하는데, 혼자선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협동적인 방식을 통해 교육, 먹거리, 돌봄, 에너지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영역들을 민 民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살림운동이 필요하고, 한살림도 다양한 살림운동을 통해 ‘스스로의 시대’를 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용우 > 근대적 주체는 허구다. 주체는 태어나서 형성된 에고 ego의 일부이다. 이 용어를 살림운동에서는 뭘로 표현하면 좋을까? 개인적으로 ‘주인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공변될 공公’을 ‘함께 공共’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의도적으로 공동체적 주인공主人共, 개인적 주체를 넘어서는, 서로 의지해 존재하고, 자기비움의 능동성을 발휘하는 주인공主人空, 영적감성에 입각한 열망을 발현하는 그런 존재가 한살림운동을 끌고 가는 사람일 것이다.

 

김현우 > 대중운동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좌표도 공허할 것 같고 설득력도 낮을 것 같다. 이게 허공에서 나오는 건 아닐 것이다. 소사이어티를 커뮤니티로 복원하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전환마을처럼 전환의 커뮤니티 같은 얘기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살림운동이라는 것은 전환의 커뮤니티를 재건 또는 구축하는 운동이고 그것을 위해서 한살림생협에서 할 수 있는 얘기,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 한살림의 자원을 가용할 수 있는 것도 있을뿐더러 한살림 조합원이나 자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러이러한 전환의 커뮤니티를 할 수 있고 해야 될 거다. “이런 저성장시대에. 한살림은 이러저러한 영역을 제시할 테니, - 대안적 가족공동체 복원까지 포함해서 - 그 외에도 여러 궁리를 해보자” 이런 얘기를 조합원만이 아니라 그 밖의 사람까지 포함해,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지 열어놓고 얘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하만조 > 계속 고민되는 문제인데, ‘알파고 시대’에 기술을 거부할 수 있을까? 자본은 기술혁신을 통해서 나아가겠다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쉼이나 천천히 가기, 자급을 말하고, 또 다른 쪽은 적응해야 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 같다. 한살림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기술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충분한 토론이 필요하다. 적응과 자급(자생) 사이 스펙트럼에 있을 것 같은데 다양성이 공존해야 하지 않을까. 물류, 생산방식 등에 있어서도.

 

김용우 > 생명운동이 발전된 기술을 버리자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을 제어해야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개발한 고자산, 고가치가 농축된 기술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국가와 자본 수중에서 민초들의 수중으로 어떻게 끌어올 것인가는 고민이다. 기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핵 같은 경우는 그렇지만 그게 우리 통제 밖에, (그 기술을 통제할 수 없는) 국가와 자본의 수중에 있는 게 문제다. 퇴행적으로 살자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면 1가구 2차량, 한 집에 컴퓨터 몇 대 있는 이런 생활구조와 기술문명의 사용체계가 맞는 것일까?

 

김현우 > 저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출시된 지 2년 정도 지난 것을 사서 쓰는데, 성능에 부족함이 없을뿐더러 당연히 가격도 저렴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런 소비양식을 취하면 아마 기업들이 난리가 날 것이다. 경제성장에 협조하지 않는 국민이라고 비난받게 될지도 모른다. 성장 아니면 멸망, 그렇게 1과 0 사이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 주류의 경제학이고 주류의 언론이다. 하지만 그런 중간의 선택지들이 많아질 때 사회에 숨통이 트이고 전환의 여러 아이디어와 시도들이 자연스레 분출할 것이다. 한살림이 해야 할 역할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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