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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마트문명 넘어서기
2016-11-22 17:59:00

 

마트문명 넘어서기

 

신승철 (동국대 강사, 철학공방 별난 공동대표)

 

 

마트문명으로부터 벗어나서

 

언제부터인가 나도 마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주차하기도 편하고 터치하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도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조리된 음식이 많았다. 마트에 가면 묶어서 1+1로 판매되는 것도 많아 한 짐을 싣고 집으로 가서 냉장고에 물건을 쟁여 두었다. 너무 많이 산 식품은 1년에 한두 번씩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이렇게 편리하지만 소비만능주의에 빠지게 했던 마트에서의 소비생활이 졸저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위즈덤하우스, 2016)의 소재가 되었다 . 처음 책을 쓸 때는 마트의 정체를 잘 몰랐기 때문에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자료조사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빨리 마트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책을 거의 탈고할 즈음에 아내와 가족회의를 했다. 이제 마트를 끊고 생활협동조합(생협)과 동네슈퍼, 시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식료품을 한꺼번에 사지 않기 때문에 2~3 일에 한 번씩 생협이나 슈퍼에서 장을 보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변화는 조금씩 느껴졌다. 점점 마트와 자동차, 냉장고 중심의 소비생활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JaeHun Lee
 

 

마트는 현재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라는 통속적 문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트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은 대형 냉장고와 자동차, 아파트, 육식, 해외농산물 등과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관계를 맺게 된다. 과거의 나의 삶을 살펴보면 마트에서 소비를 하면서 냉장고를 한 대 더 구입하였고, 자가용 중심의 삶이 되었다. 또한 아파트에서 고독, 소외, 외로움, 무위를 소비만능주의로 달래는 일상을 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판매되는 육류와 주류를 소비하면서 제3세계 민중들이 매년 기아와 영양실조 등으로 600만 명이 사망하는 현실과 분리되어 이러한 엄혹한 현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고, 해외농산물과 해외과일을 먹으면서도 운송에 드는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었다. 달콤하며 안락하고 풍요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무심코 소비했는지 이유도 잘 모르겠다.

 

혹자는 물건을 사는 것이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적어도 투표를 할라치면 찍어야 할 사람이 누군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깨알같이 쓰여 있는 성분과 식품첨가물 등을 꼼꼼히 읽어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이 ‘호갱(호구 고객)’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호갱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공정한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잘못된 생산과정이나 불합리한 착취가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화학물질이나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들어가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단지 브랜 드나 ‘싸다’는 점이나 화려한 광고이미지에 현혹되어 물건을 샀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트문명의 일상을 여전히 무심결에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러다 최근에야 결사소비, 연대소비, 참여소비,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소비는 단지 물건을 산다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를 사고, 정성을 사고, 인격을 사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소비는 돈을 쓴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 그리고 골목에 화폐와 자원, 부가 순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는 그저 유통대기업의 배를 불리는 것에 멈추어 있을 수도 있지만, 공동체에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의 서민들과 시장 상인, 생산자들이 풍요로워져야 그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자신도 결국 풍요로워질 수 있기에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일도 결코 아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이제는 아이들이 뛰어놀지 않고 오직 마트로 향하기 위한 주차장이 되어 버린 골목이, 사실은 공동체의 오래된 꿈을 발효시켜 왔던 역사적 장소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때 골목상권은 단지 물건만을 파는 곳이 아니라 관계를 성숙시키고 발효시키면서 정을 유통시켰던 공동체경제의 주역이었다. 자신의 거주지 근방에 있는 동네슈퍼에 슬리퍼와 추리닝 차림으로 들러 보았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골목은 자가용을 타고 지나치는 장소가 아니라, 천천히 걸으면서 혹은 머무르면서 동네의 온갖 이야기며 뒷담화, 놀이가 오갔던 곳이다. 또한 마을의 한판 난장이었던 전통시장은 어떠했는가?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고 어중이떠중이, 동네바보, 이방인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였던 경험이 아련한 기억 저편에 남아 있다. 마을시장에는 소수자를 돌보고 이방인을 환대하던 공동체경제의 면면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자. 골목과 전통시장이라는 오래된 미래는 폐허가 되고 화석화되어 버렸다. 골목상권은 기능정지 상태에 빠져 있으며, 전통시장은 수도 없이 폐업하고 있다. 그 옛날 공동체경제의 주역들의 역할과 기능은 이미 사회적경제로 이행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공동체경제를 과거 기억 저편의 일로만 치부할 수도 없고, 미래에만 가능한 불가사의한 일로 간주할 수도 없다. 이제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의 장점을 현대화하여 탈성장 시대에 맞는 색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골목에서 뛰어놀던 그 많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전통시장에서 이리저리 떠돌던 어중이떠중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통속적인 마트문명을 넘어서 미래진행형적인 과정을 만드는 것이 생활협동조합의 실천적 과제인 셈이다.

 

생협의 매장에는 물건에 정을 담아 유통시키던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생협에서의 동아리와 커뮤니티 활동 등이 그것이다. 생협의 증여의 경제에서는 마트처럼 물건이 사랑, 정성, 인격으로부터 분리된 상품이 아니라, 사랑, 정성, 인격이 담긴 선물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소통과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도농직거래를 활성화하고, 윤리적 소비를 통해 생명살림의 가치를 알아 갈 수 있다. 생협에서의 동아리 활동은 단지 매장이라는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소비생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생산 ·유통 과정에 대해서 고민하고 알아가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공동체의 오래된 꿈이 깃들어 있는 생협 매장은 공동체의 복원과 생명평화세상의 미래구성적인 전망을 동시에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탈성장 시대의 대안 경제

 

마트문명은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의 기계부품 중 하나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세계 곳곳의 삶의 방식을 똑같게 만들며 통속화된 삶을 이식한다. 세계 어딜 가나 마트, 백화점, 편의점, 호텔, 모텔, 게스트하우스, TV, 문화생활 등이 확산되어 있으며, 비슷비슷한 삶을 주조해내고 있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문명하에서 사람들은 문명의 외부로 향하지 않고 달콤한 졸음이 오는 TV의 메시지 앞에서 머물도록 유도된다. 사람들은 환상과 꿈에 물들어 있고, 안락한 문명 내부의 삶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우리의 소비는 마트가 책임질 것이며, 우리의 심리상태는 정신분석, 심리치료, TV가 책임질 것이며, 우리의 생존은 유연화되어 불안정해진 일자리가 책임질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의 일부가 된 마트는 특별할 것도 없지만 불편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명 외부로 향하면 문제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제3세계 민중들이나 난민의 상황은 절박하고 배고프고 열악하다. 통속화된 문명의 외부는 죽든 살든 내버려두는 게토화된 영역이며,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영토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 세계가 급속히 통합됨으로써 문명의 외부는 소멸하였다. 우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개척, 탐험, 모험, 약탈 등을 통해 성장하고 개발할 외부의 영토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상황이 등장하는 것이다. 17세기 홉스라는 철학자가 외부소멸가설을 주장했을 때 당대의 아카데미에서는 엄청난 논란과 스캔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지구는 유한하며, 자원-부-에너지도 유한하다. 이제 경제적 쟁점은 어떻게 유한한 자원을 순환시키고 분배하느냐의 문제가 핵심적인 사안이 되었다.

 

마트로 대표되는 유통대기업은 지역과 커뮤니티 , 공동체에서 순환하고 유통되어야 할 자원과 부, 에너지, 화폐 등을 빨아들여 독식한다. 그래서 공동체경제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파괴적이며 암적이다. 탈성장 시대는 사실상 외부가 없어진 통합된 세계자본주의가 직면한 현재의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외부가 없다면 대기업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우주로? 그러한 황당한 기획 대신 유통대기업들은 SSM(Super Supermarket, 기업형 슈퍼마켓)이나 드러그스토어(drugstore) 등을 통해서 골목 구석구석에 직접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본은 공동체를 직접적인 먹잇감으로 삼는다. 골목에서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활성화되면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이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de code)’1)라는 다소 난해한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동체경제가 유통대기업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자연사적인 과정인 것만은 아니다. 규제와 제도는 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으며, 현실에서의 실천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공동체경제는 공동체를 재생하고 자기생산하기 위해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주변인, 이방인들을 향해서 사랑과 욕망 , 정동의 흐름이 향하도록 하고 그러한 활동에 대부분의 자원-부-화폐를 소모한다. 예를 들어 마을이 한 명의 아이를 기른다는 말은 그저 옛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의 시너지가 만든 ‘흐름의 잉여가치(surplus de flux)’2)가 코드의 잉여가치와 오버랩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코드의 잉여가치가 자본이 공동체를 착취하는 방향성이라면, 흐름의 잉여가치는 공동체가 자본을 착취하거나 자본을 형성하는 방향성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의 자본화’는 우리의 삶 어느 지점에서 수없이 많이 조우하고 오버랩된다. 사회적경제와 생활협동조합 등은 사실상 성장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흐름의 잉여가치의 하나의 구체적인 양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외부로부터의 자원-부-에너지의 유입이 한정되어 버린 탈성장 시대의 현실적 과제에 대한 부분이다. 어떤 활동과 실천이 유한한 자원과 부, 화폐의 순환과 재생을 어떻게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일찍이 충남발전연구원 등을 통해서 ‘내포적 발전’이라는 개념으로도 표현되었다. 외연적으로 같은 ‘100’의 경제지표라 하더라도 경제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와 효과, 가치는 완전히 상이하다. 예를 들어 100원의 돈이 관계망을 통하지 않고 독식하는 대기업의 입장과, 관계망을 성숙시키고 순환하는 골목상권과 사회적경제의 입장에 따라 완전히 상이한 가치질서를 의미한다. 공동체경제는 ‘외연=1, 내포=무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시계장치는 하나지만 그 내부의 부품은 굉장히 다양하고 작동방식이 갖는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 공동체경제에서는 유한한 자원이 다양한 경제주체에 순환하면서 시너지효과를 갖는다. 예를 들어 음식점 주인 A가 슈퍼에서 물건을 산다, 이어서 슈퍼주인 B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한다, 이어서 미장원 주인 C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 먹는다, 이런 등등이 무한히 순환계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한한 자원이나 부, 화폐가 경우의 수를 달리하면서 무한한 시너지효과를 갖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내포적 발전이나 지역순환경제, 공동체경제의 핵심적인 작동방식이다. 문제는 폐허가 된 골목상권의 순환적인 생태계를 복원해내야 하는 과제를 생활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가 짊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경우의 수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연결접속과 접촉의 방식을 달리하며 경우의 수를 늘려나갈 것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 문제는 품목과 상품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 경우의 수를 늘리는 방향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품목이 적다는 것은 불필요한 소비생활을 축소시킴으로써 탈성장 시대에 적합한 삶의 방식으로 이끈다. 문제의 핵심은 지역과 골목상권, 전통시장, 사회적경제 등이 어 떻게 연결되어 지역경제생태계를 조성할 것인가이다. 생협 매장은 이제 오래된 공동체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색다른 전략적 거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생협이 갖고 있던 가치와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망을 만들고, 판을 짜고, 경제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새로운 과제를 떠맡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당면 과제 역시도 어떻게 색다른 삶의 방식과 색다른 관계망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를 의미한다. 탈성장 시대에 내포적인 관계망을 성숙시키는 대안경제가 새롭게 요청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된 미래와 색다른 미래의 마주침일 수 있다. 골목상권, 전통시장, 사회적경제, 프리마켓 등이 만나는 과정은 색다른 순환과 재생의 연결망을 짜는 것이며, 공동체경제 내부에서의 색다른 흐름의 시너지에 대한 탐색이다. 물론 소비만능주의가 아닌 관계 중심의 색다른 판을 짜는 것이 시작점이자 토대일 것이다. 생활협동조합 매장이 어떻게 지역순환경제와 내포적 발전의 판을 짜는 거점이 될 것인가? 아직까지 답은 확실히 나와 있지 않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과제는 상상력이 빈곤한 이 시대에 색다른 사유의 경로가 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생활협동조합과 도시의 지속가능성

 

도시는 인류의 집합적 발명품으로서 시설, 가게, 병원, 관공서, 시장 등이 서로 교직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만들었던 역사적 장소였다. 물론 농촌공동체로부터의 자원을 약탈하거나 유통하였던 것이 도시이지만, 낯설고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망은 색다른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잠재력을 드러냈다.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축적해온 도시의 시너지효과를 마트가 완전히 파괴한다는 점이다. 그 원리는 도시생태계가 조성한 탄력성, 유연성, 복잡성, 다양성의 특징을 보이는 경제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끊고 부를 독점하려는 마트의 영리행위에 있었다. 도시의 장점을 화석화하고 의미화한 것이 바로 마트로 드러난 자본주의적인 상업행위라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는 도시의 복잡계를 ‘A는 A다’라는 방식으로 의미화한다. 그래서 상품은 그저 상품이고, 노동자는 그저 노동자고, 소비자는 그저 소비자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시의 복잡계는 단조로워지고 살균되고 위생적인 거래관계만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마트의 위생적인 소비생활은 공동체와 도시생태계 둘 다에게 해롭다.

 

생협 매장에는 ‘낯선 익명의 도시’의 특징과 ‘친밀하고 유대적인 농촌공동체’의 특징 사이에서 무수한 교차선과 흐름이 교차한다. 여기서 관계망을 성숙시키고 발효시키는 것은 ‘너와 나, 혹은 우리’ 사이에서 생성되는 사이주체성3)에 있다. 너와 나, 우리를 책임주체로만 한정시키고 직분, 역할, 기능에 따라 딱딱하게 개체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에서의 에너지와 정동, 사랑의 흐름은 색다른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사이주체성은 완전히 색다른 관계 맺기 방식의 창조이기도 하다. 문제는 관계가 성숙하여 고도로 조직된 관계의 도식(schema)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정성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성장 의 혜택을 구가하던 기성집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성숙이 만든 경제 패러다임을 비효율적인 과정으로 보고 제거하려고 하지만, 돌봄과 살림의 경제에서는 핵심적인 것이다.

 

                            <표> 도시-자본주의사회-제3섹터의 관계망 특징

 

탈성장 사회에서 본격화된 ‘내포적 발전’, ‘지역순환경제’의 핵심적인 모습은 외부에서의 에너지-자원-부의 유입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재생과 순환의 작동을 기반으로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이행해 있다. 물론 외부의 자원이 없다면 내부는 소진되거나 폐색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외부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공동체 내부의 활동이 대부분 자원분배의 절차적 과정으로 전락하게 되며 자율성이 사라질 것이다. 지구의 한계, 성장의 한계가 가시화되면서 외부가 사라진 상황에서 유일한 외부의 생산은 내부에 있는 특이한 존재들인 소수자(minority)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소수자는 ‘양적 소수’나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망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특이점(singularity)이다. 이제까지의 공동체 활동의 대부분은 모심, 섬김, 돌봄, 보살핌, 살림 등의 정동의 흐름 4)이었다. 그러나 성장주의 시대의 극한이 경쟁과 양극화라는 분리의 공식을 사회에 확산시킴으로써 사회는 분열되었고, 인륜적 공동체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탈근대자본주의하에서의 사랑은 혁명과 동의어가 되었다.

 

생협 매장은 도시생태계의 탄력성, 유연성, 복잡성, 다양성에 기반했던 기존의 골목상권이나 전통시장이 직면했던 문제에 동시에 직면해 있다.

 

자원-부-화폐는 마트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지역에서 순환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관계망의 발효와 성숙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나긴 숙제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생협 또한 매장을 늘리고 품목을 늘리는 등의 영업 과정에서 성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커뮤니티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의 원형이었던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도시생태계를 단조롭게 만들고 있으며, 생협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대기업의 성장 일변도 상업행위가 곧바로 사회분열과 동의어가 된 현실의 상황에서, 사랑과 돌봄, 정동의 흐름으로 내부 관계망을 성숙시킴으로써 공동체경제를 구성하려는 협동조합의 ‘소수자 되기’의 실천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탈성장 시대에 생협이 기반으로 하는 증여의 경제는 생활방식의 변화, 문명의 변화, 생태적 전환을 촉구한다. 만약 생협이 속도와 효율성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마트문명이라는 성장주의는 우리 내부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생협이 느림과 여백, 빈틈, 곁에서 싹트는 정동의 흐름에 주목한다면, 탈성장과 문명의 전환 역시도 현재 진행형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민적인 합리적 의식이 아니라 사물의 곁에서 서식하는 무의식에 주목하는 공동체적인 정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왜냐하면 시민적 합리주의가 근대 시기의 민주주의의 기본 인식이면서도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라는 성장주의에 기반한 부르주아적인 인식기반으로 돌변할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체’와 ‘시민’이라는 투 트랙(Two track) 은 협동조합에서 구사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이다. 생협이 생명살림이나 문명의 전환을 추구한다면, 시민적 책임주체와 공동체적 사이주체성 둘 다를 필요로 할 것이다. 여기서 시민적 책임주체는 ‘나는 고로 ~이다’라는 방식의 정체와 역할이 분명한 소비자들이다. 반면 공동체적 사이주체성은 ‘너와 나 사이에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생협의 양적 성장에 치중한다면 시민적 책임주체인 소비의 윤리는 강화되겠지만, 관계망에 기반한 발전전략이나 탈성장 전략은 지체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비자라는 시민적 책임주체와 공동체의 사이주체성 간의 교차지점이 생협의 딜레마이자 내부 역동성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생협 매장에서 판매되는 물건을 실체가 분명한 것으로 고정시켰을 때 소비자가 윤리와 가치를 꼼꼼히 따지고 살피는 행위가 뒤따르게 된다. 즉,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반면 생협 매장의 물건을 생태계의 재생과 순환이라는 생명살림의 흐름의 일부이고,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의 일부이며, 강렬한 생명에너지의 흐름의 일부라고 보았을 때,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이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이 둘 다는 물론 모두 필요하지만, 원형공동체의 사물영혼론5)처럼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해서 바라본다면 후자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이 더 중시될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윤리적 소비와 생명살림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적 책임주체와 공동체적 사이주체성 간의 역동적인 차이와 교직, 횡단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살림

 

마트문명은 통속화된 자본주의 문명 일반에 대한 대명사이다. 문명의 전환과 생활방식의 변화, 녹색전환의 대명사로 생협 매장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역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하고, 지역사회와 골목상권 등과 긴밀히 관계를 맺으면서 공생과 상생의 전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생협 매장은 도시생태계를 조성하고, 그것의 시너지효과를 복원할 수 있는 유력한 거점이 될 수 있다. 탈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자원-부-에너지-화폐의 순환과 재생의 판을 다시 짬으로써, 더불어 지역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관계 맺기와 연결방식, 배치의 경우의 수를 무한히 늘려나감으로써 비로소 도시생태계는 다시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협이 경쟁이 아닌 상생을 요구하는 도도한 역사적 요청에 부응한다면, 대안적인 공동체경제의 판을 짜는 주체성으로 거듭날 것이다. 탈성장 시대에 마트를 넘어서서 생협 매장이 지역사회와 공동체경제의 지역 거점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한 톨의 도토리가 만든 떡갈나무 혁명을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 ‘코드의 잉여가치 (surplus de code) ’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창안한 개념이며, 1세계와 3세계의 분리차별, 공동체적 관계망의 시너지효과에 대한 자본의 전유,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에 대한 자본의 약탈로 인한 기계적 잉여가치, 국가의 반생산의 도입, 골목상권에 대한 대기업의 진출,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등 자본이 공동체를 탐내면서 벌어지는 색다른 착취 양상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문화예술, 마을만들기, 사회적기업 등에서의 질적 착취 양상에서도 나타난다.

2) ‘흐름의 잉여가치 (surplus de flux) ’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창안한 개념이다. 이는 공동체의 외부에서 들어온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이 단순한 자원배분의 측면만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에 따라 순환되고 재생되어야 시너지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경제 등의 공동체경제의 영역에서 사랑, 욕망, 정동, 돌봄의 흐름을 순환시켜 관계를 성숙시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방식이며, 공동체가 자본을 형성하거나 자본을 착취하는 양상을 일컫는다. 흐름의 잉여가치의 사례는 흐름의 시너지효과에 따라 1)공유경제 모델의 형성, 2)식생, 발효, 약초, 저장 등과 관련된 생태적 지혜의 형성, 3)네트워크에서의 집단지성의 형성, 4)선물을 주고받는 형태의 증여의 경제의 발생, 5)정동노동, 돌봄노동 등의 가시화, 6)협동조합 등의 협동과 살림의 경제의 등장, 7) 공정무역 형태의 국제무역 직조형태의 변형 등이 그것이다.

3) (사이)주체성 (subjectivity)은 하버마스나 가다머의 이론에서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 혹은 간주관성으로도 지칭되지만, 인간-생명-무생명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으로는 주체성이라는 지칭이 더 적합하다. 주체성은 ‘나, 너, 그’로 특정하고 책임역분, 역할, 기능, 직분을 부여할 수 있는 근대적인 책임주체 (subject)와 구별되는 관계망과 배치가 창안하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라는 비인칭적인 주체성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뜻과 지혜와 아이디어, 실천성을 가진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생산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사이)주체성 생산의 전략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이주체성은 공유자산,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를 형성하는 공통성 (common)의 형성에 기여하며, 정동, 돌봄, 사랑, 욕망의 흐름에 의해서 생산된다.

4) 정동 (affection)은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정동=변용=흐름=되기 (becoming)=사랑=욕망=돌봄’ 등의 동의어를 갖는다. 정동의 흐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는 유아기 동안의 흐름의 사유에서이다. 부모님의 돌봄과 정동의 흐름은 아이에게 젖의 흐름, 손길의 흐름, 이미지의 흐름, 목욕물의 흐름 등으로 사유된다. 흐름의 사유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으며, ‘A=A’라고 고정관념으로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A일수도, B일수도, C일수도’라고 횡단하는 사유이다. 즉, 공동체에서의 사물은 자연의 재생과 순환의 흐름과 사랑과 정동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자본주의의 고정관념에 기반한 상품과는 구분된다.

5) 사물영혼론 혹은 애니미즘 (animism)은 요정, 도깨비, 정령, 기암괴석과 오래된 나무에 대한 샤먼 등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고대 원형공동체의 무의식에 기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걷어내면, 애니미즘은 사실상 생명권을 넘어선 생태권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자본주의는 생명과 사물의 잠재력과 변화가능성을 응시하지 못하고 ‘~는 ~이다’라는 의미화를 통해 뻔하게 보면서 사물뿐만 아니라 종국에서는 생명조차도 딱딱하고 텅 빈 물체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향한다. 반면 역으로 공동체는 생명에너지와 사랑, 정동의 흐름을 사물에게까지 확장하여 재생하고 순환되며 살아 있는 생태계로 바라본다. 이런 두 가지 방향은 모스나 신이치 등의 지적처럼 사랑과 정동으로부터 분리된 ‘상품’과 사랑, 정성, 인격, 정동이 들어가 있는 ‘선물’ 간의 차이점에서도 드러난다.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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