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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협동조합의 민주주의: 진부화와 급진화의 교차로에서
2017-01-10 09:58:00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협동조합의 민주주의 :

진부화와 급진화의 교차로에서

 

김신양 (모심과 살림 편집위원장)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이 질문에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갤릿은 “제도가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고,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1)라고 답하였다. 어찌 보면 참 소박하고 어찌 보면 너무 초라하기까지 한 답이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적인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오랫동안 갈등과 고초를 겪었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겨우 그 정도를 하려고 우리가 민주주의 했나’ 자괴감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국민 다수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이 자괴감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이며, 이 작은 나라에서 이미 15세기 때 고유의 글을 만들어 어린 백성들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일제의 압제에 맞서 민족자결과 독립을 외치며 기어이 해방을 맞이했고,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농사를 짓고 산업을 일으켜 전 세계인들이 놀랄 정도로 회생하였으며, 그 와중에 기생한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비로소 민주주의를 세운 자긍심이 무너지는 시기이다. 그만큼 우리의 민주주의는 농단에 쉽게 허물어지는 취약한 성城이었으며, 목숨보다 이윤이 우선되는 반생명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우리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국민의 대표이자 대리인이라는 국가원수와 국정의 컨트롤타워라는 청와대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동굴처럼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룩한 부를 빼앗아 금은보화로 가득 채운 도둑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누군가는 ‘열려라 참깨’만 외치면 쉽게 들락날락거릴 수 있었고, 필요한 보물을 챙겨 호사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 때, 그 비밀스런 주문을 찾아내어 동굴에 있는 금은보화만 빼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하게 될 것인가? 40인의 도적만 찾아내면 잃어버린 우리의 자긍심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시대가 주는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촛불은 든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소수에 의해 농단당하기 좋은 제도가 된 민주주의를 다수의 것으로 돌려놓기 위하여 무엇부터 살펴야 할까? 그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일부 정치경영자에게 위탁했던 제도를 우리 손으로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탁경영자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었던 권한을 되찾고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운영자가 될 때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답게 자리 잡을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처한 이 상황을 성찰하고 시대가 주는 이 과제에 답하는 것은 협동조합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째, 사회의 민주주의의 후퇴는 그 사회 속에서 운영되는 협동조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둘째, 협동조합은 민주적 운영을 본질적인 가치로 삼고 있기에 협동조합의 시선으로 사회의 민주주의를 성찰함으로써 이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의 성찰이 사회의 성찰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 성찰 : 민주주의에 대한 허상

 

한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불만이 나온 지 오래되었고, 그 정도는 날로 심해지는 실정이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제도라고 믿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그 현실과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만연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제도는 발전하고, 그에 따라 각자 누리는 자유도 확대되며, 그 안에서 개인이 누리는 권리는 확대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집단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마치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자가발전하고, 시민의 참여가 없어도 국가와 시장의 장치에 의하여 적정한 절차에 따라 시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 마치 민주주의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정점은 근대에 시작되어 뿌리내린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폐단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대의제뿐인 양 절대시되거나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논리가 다수와 소수의 게임인 양 여겨져 소수를 배제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민주주의가 갈등을 해결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공존할 수 있는 제도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아가 되며 때로는 폭력과 전쟁의 변명이 되기도 한다. 일례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최근 미국 대선에서 총득표에 뒤지고도 대의원 확보에 앞선 트럼프가 승리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되짚어 보게 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은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민주주의이다. 모든 시민은 그들이 참여한 총회에서 직접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사람들 또한 직접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참여와 결정인 셈이다. 반면 오늘날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이 직접민주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의제로서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 및 미국과 같은 서구 사회에서 혁명기를 거치며 탄생된 근대적인 제도이다2). 혁명기 국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대의기구가 대의정부가 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대의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운영 원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두 번째 성찰 : 대의제민주주의의 왜곡된 형태

 

대의제민주주의는 상당히 이상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된다. 즉 권력의 원천이자 토대가 되는 국민이 동시에 피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위계의 가장 아래 부분이 동시에 가장 윗부분이 된다는 뜻이다. 다수의 국민이 어떻게 지배자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이러다보니 대의제의 두 가지 왜곡된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는 피지배자인 국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없으니 국가에 고용된 관리(공무원)들이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되며 관료제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소위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국민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으면서 국사國事를 담당하기에 어떤 측면에서 대의제는 민주적 운영에 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합리성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의 공적 서비스를 축소할 수 있으며, 숫자와 통계에 기초한 정책의 입안과 실행으로 사회통합과 공동체의 결속과 같은 문제는 논외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왜곡된 형태는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관계가 단순한 ‘되먹임관계(피드백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실 대의제민주주의의 운영 원리는 선출된 자들이 선출권자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보고(report)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 관료사회가 되면서 대표자와 국민 사이에 관료들이 위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국민에 대한 책임이 아닌 과학과 이성으로 행정을 처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순히 ‘위’에서 정한 결정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면 국민은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권력의 말단에 위치할 뿐이다. 이 순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국민은 단순 피지배자의 지위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성찰 : 협동조합의 민주주의는 괜찮은가?

 

대의제민주주의 제도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협동조합. 하지만 협동조합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시기 탄압을 받으며 노동계층의 결사권을 획득해 나간 저항의 역사를 가진다. 동시에 영국 ‘로치데일공정개척자협동조합’은 ‘1인1표의 원칙’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앞선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협동조합의 탄생과 맥을 같이하며,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1주1표의 원칙’을 가지는 일반 영리기업과 구분되는 요소로 인정되며, 생산공동체운동과 경제민주화의 토대로 여겨진다.

 

그런데 1인1표로 표현되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협동조합다운 운영을 보장하고 있는가? 그 1인의 한 표는 협동조합의 주인으로서 전체를 고려한 한 표인가, 아니면 ‘나’만을 위한 한 표인가? 규모가 커진 협동조합에서 대의원제도로 운영되는 민주주의는 전체 조합원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대의원과 임원은 조합원에게 충실히 보고하며 통제를 받고 있는가?

 

이렇듯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고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오작동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걸 감당하려는 노력은 부족하지 않은지 점검할 필요성이 있다. ‘협동조합이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신화를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지만 사업의 효율성을 중심에 두다 보니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1인1표’라는 투표방식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 1인1표가 대의제와 결합하면서 민주주의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제도가 되어 버린다.

 

첫 번째는 심리적 부담이다. 생각의 협동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업의 압박에 더하여 갈등상황을 직면해야 하기에 여유가 없어진다. 협동조합이기에 협동을 당위로 생각하지만 협동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생각의 차이를 옳음과 그름으로 구분해버리는 오류도 범하고, 나의 필요와 너의 필요 혹은 나의 열망과 너의 열망이 상충되면 각자의 한 표는 생각을 모으는 한 표가 되기보다는 편을 가르는 한 표가 될 뿐이다.

 

두 번째는 대의원으로 운영되는 대의제도의 정당성 상실이다. 대의제도는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될 때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의 운영에 무관심한 조합원이 많은 경우, 협동조합이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잘 모르는 경우, 자신이 속한 협동조합의 목적과 운영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 대의제를 운영하다 보면 대의원은 실제 대표자로서 인정받기 어렵다. 특히 대의원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조합원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우려가 크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어 일어나면 민주주의는 어려운 것, 힘든 것, 돈 안 되는 것이라 여겨지고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직면하기보다는 외주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외부의 워크숍 전문가를 부르거나, 최근에는 퍼실리테이터를 초청하여 회의를 하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전문가에게 교육을 의뢰하며 생각을 뜯어고치게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듯이.

 

심지어 협동조합도 사업체이니 사업적 안정이 우선이고 재정이 충분하면 교육이든 민주주의든 실천할 수 있다는 경제우선주의 경향도 보인다. 이 자리에서 사업체와 결사체 혹은 사업과 운동이라는 묵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증거는 바로 민주주의를 사업이나 경제적 목적의 대척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보니 협동조합 운영에서 재정 적자는 중요한 경영의 과실로 여기면서 민주주의의 결핍은 용서되고 묵인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에서 민주주의 또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조합원’이 ‘돈을 내고 소비하는 사람’만을 의미한다면 협동조합이라는 것은 거대한 기계가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조합원은 일정 금액을 출자하는 대신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경제적 인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며, 내가 행사하는 한 표는 1/n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1인1표의 함정이며 협동조합이 형식화되고 진부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네 번째 성찰 : 나의 성찰에서 출발하는 협동조합 민주주의의 진화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시스템이지만 영원불변할 수 없다. 제도는 삶에서 나오듯 민주주의 제도 또한 삶의 변화로부터 만들어지고 성숙되는 것이다. 달리는 자전거의 페달에서 발을 떼는 그 순간 굴러 떨어지듯 민주주의 또한 제도만으로 굴러가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 안의 사람이 그러한 이상을 가지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적인 사회를 바란다면 나부터 민주시민이 되어야 할 것이며, 내가 속한 협동조합이 민주적이길 원한다면 나부터 민주적인 운영을 실천하는 조합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의 수준은 바로 조합원의 수준이므로.

 

그런 측면에서 우선 협동조합에서 민주주의는 ‘주어진 것’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며, ‘1인1표’의 원칙 또한 민주주의의 여러 측면 중 하나로 사고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규범과 원칙의 차원을 넘어 현장에서 생생하게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체득해가는 삶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협동조합의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1인1표를 출발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실현하는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과 진화, 그리고 자기실현을 향해야 할 것이다.”3) 이러한 까닭에 협동조합의 민주주의는 사람의 발전을 위한 것이지 기업의 경영을 위한 의사결정 수단으로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 주목하고 그의 필요와 열망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풀뿌리민주주의에 더하여 최근 과학기술제도의 발전에 따른 다양한 소통수단에 기반한 디지털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을 대의제와 더불어 적절하게 배치하는 운용의 묘를 발휘하는 전략이다. 이 중 특히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는 “실감 없이 겉도는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만들”4)고 어느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느슨해진 협동조합 조합원의 관계성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하승우는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이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서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라고 설명한다.5) 이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사람의 살림살이와 결합된 민주주의로서 살림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살림이 기반이 되어 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지향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살림을 협동의 방식으로 재조직하고자 하는 협동조합의 이상과 조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살림의 재조직을 통하여 자치를 실현함으로써 비민주적인 정부하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억압에 맞설 수 있는 공동체의 보호장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총회에서는 토론도 없이 결정사항을 채택하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지도자들을 뽑는 관행이 만연한 상황에서 1인1표는 형식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총회에서 사업과 회계 보고를 승인한다는 것은 그것이 함께 정한 공통의 필요와 열망에 부응하는지 살펴보는 과정이며, 협동조합의 운영 원리와 가치에 적합한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또한 사회적 목적을 가지는 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을 둘러싼 세상의 변화를 성찰하고 그러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레이들로박사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모스크바 총회에 앞서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 보고서를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적인 운동으로서 협동조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와 변화를 인식하고 그에 따른 협동조합의 대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연구에 기초한 토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민주주의(digital democracy)’ 영역도 협동조합의 민주주의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물리적인 공간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양한 온라인 소통 채널이 만들어지고, 정보의 소비를 넘어서 생산과 유통으로 개인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는 상황은 협동조합의 민주주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조합원 규모가 늘어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틀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조차도 버거워지는 협동조합들의 경우, 유연하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정보 소통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민주주의는 조합원과 협동조합이 다면적으로 활력 있게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6)

 

다섯 번째 성찰 :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확장된다면?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 국민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공약은 경제민주화였다. 때마침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었던 시기였기에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와 경제민주화의 관계에 대한 관심도 컸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경제민주화 프로그램은 ‘창조경제’라는 정책으로 둔갑하며 창조경제타운 건설이라는 사업으로 변질되었고, 협동조합은 ‘국민행복시대’를 열기 위한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폄하되었다. 이후 협동조합 설립 붐이 일어났지만 그 많은 협동조합의 설립이 한국 경제를 보다 민주화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관심 밖이 되었고 오로지 일자리 창출이나 창업의 수단으로 여겨지며 그 의미가 퇴색되어왔다.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 보면 ‘협동조합공화국’의 실현을 주장한 지드Gide는 “‘임금노동 철폐’라는 문구가 그 진정한 의미, 즉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가, 기업주, 소유주를 살찌우는 데 사용되지 않고 그 노동의 성과를 온전히 노동자 자신이 가지게 되거나, 아니면 일부는 전체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을 노동자가 알게 되는 경제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가 고용된 기업에서 그는 그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 새로운 기업이 구축하는 공화국에서 그는 더 이상 신하가 아닌 시민이 될 것이다”7)라며 협동조합이 노동자가 예속된 삶을 살아가지 않고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또한 영국의 ‘로치데일공정개척자조합’은 모든 상업이 기생충 같은 중간상인에 의해 공급이 좌우되어 생필품을 적정한 가격에 구매하지 못하는 문제에 개입하고자 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언Owen이 주장하였듯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각자의 노동에 따라’라는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공정한 가격에 대한 욕구가 노동자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든 것이다. 공정가격의 구현은 기존 시장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의 시장은 소비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하고 공급되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이 소비를 주도하는 방식이다. ‘로치데일공정개척자조합’이 가게를 낸 것은 가게에서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그 가게는 생산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노동력을 공정하게 보상하고 소비노동자들에게는 적정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거래의 거점이었다. 협동조합의 민주주의에는 단지 조직 내 운영에서만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고려하여 가격을 결정하는 것, 즉 시장거래 관계에서의 민주주의라는 보다 큰 사회적 이상이 담겨 있다.8)

 

김현우9)는 장훈교 등의 ‘급진민주주의 프로젝트’를 인용하며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시장 동기가 아니라 시장을 활용하되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과 유통, 민주적인 집합적 자기결정을 위한 의사결정 방식, 이를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일상생활 영역의 구축이야말로 협동조합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협동조합의 1인1표 원칙, 다수결보다 토론과 설득의 관행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이미 급진민주주의 또는 국가의 민주화 및 시장의 사회화를 위한 중요한 자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민주적 변형의 모델로 작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 (중략) 민주주의 발전의 첨병으로서 의미를 갖는 협동조합의 내부 민주주의의 갱신은 그 역시도 사회 전체 민주주의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즉 협동조합 스스로의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와 경제도 바꿀 수 있고, 협동조합이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더욱 크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맺으며

 

2016년 겨울, 한국 사회는 다른 사회를 위한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 국정농단, 정경유착, 비선실세, 문고리 삼인방 등 익히 듣는 표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살림이 정치와 경제와 행정을 장악한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뜻이다.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이 참여하며 주인되는 민주주의,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기를 염원하는 촛불이 뜨거운 광장을 가득 메우는 때, 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협동조합인들에게도 남다른 결의가 필요한 듯 보인다. 어둠 속에서 한 명이 촛불을 들면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하듯 협동조합인들이 나부터 성찰하여 민주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며, 어느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빛나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우리 안에서 굳어져 가는 진부함을 깨고 급진화한다면 협동조합의 촛불은 사회의 촛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Avishai Margalit, The decent society, 1996. (국내에 『품위 있는 사회』로 번역됨.)

2) 쟈끄 고드부Jacques Godbout, “Pas de representativite sans representation?(대표성 없는 대의제 없다?)”, in Revue du Mauss N°25. 2005.

3) 주요섭, ‘협동조합 민주주의와 사람의 발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모심과 살림』 편집위원회 토론 자료, 2016.

4) 하승우,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이매진, 2014, 9쪽.

5) 위의 책, 16쪽.

6) 정규호, ‘협동조합에서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과제’, 『모심과 살림』 편집위원회 토론 자료, 2016. 인용 및 재구성.

7) C. Gide, L’ecole de imes, 1947, reedit. du cours de 1925-1926, p.57.

8) 김신양, ‘다시 협동조합을 생각한다’, 제25차 지역리더포럼 발표문, 2013.

9) ‘협동조합 민주주의의 사회적 의미’, 『모심과 살림』 편집위원회 토론 자료, 2016. 인용 및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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