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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새로운 모험의 시작: 포스트-메갈 주체의 탄생과 페미니즘
2017-04-04 14:20:00

새로운 모험의 시작

: 포스트-메갈 주체의 탄생과 페미니즘

 

글 손희정

 

 

2015년 대한민국. 페미니즘이 새로운 이슈로 급부상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며 IS에 가담하기 위해 터키로 떠난 김군이나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와 같은 칼럼1) 등이 촉발의 계기가 되었지만, 기실 그런 단편적인 사건들이 페미니즘을 다시 불러온 것은 아니다. 정말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여성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어려움을 만들어 내는 구조와 싸우기 위한 언어와 무기가 필요해졌을 때, 페미니즘이 다시 불려온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일어난 페미니즘은 ‘메갈리안 미러링’을 지나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물결, 그리고 지금 ‘#00_내_성폭력’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활발한 움직임이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용하던 자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그 목소리는 더 크게, 그리고 더 시끄럽게 들리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이 여성들의 목소리도 매우 염려스럽고 또 불편한 것이었다. 그랬을 때 ‘메갈리안 미러링’의 위악적인 태도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에 적당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러링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혐오에 주목하기보다, 그 원본을 제거하고 미러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러링은 원본을 제거하고서는 의미화될 수 없다. 원본이라는 맥락을 지우고 복사본을 비판하는 것은 논점 이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미러링의 정치적 의미를 분석하거나 메갈리아의 페미니즘 전략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논의조차 이제 담론의 장에서는 조금 철 지난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염려하는 ‘메갈리아’의 ‘이후’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2016년 11월 현재, 남초에 모여서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유희로 즐겼던 이들이 머물러 있는 자리와, 여초에 모여 그 혐오발화를 미러링 했던 이들이 도달한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일베는 여전히 일베이고, 오유조차 일베가 되고 있는 이 시점에, 메갈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기실 메갈은 페미니즘의 또 다른 이름으로 프로-페미니스트 대중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제 ‘포스트-메갈’ 시대를 열고 있다. 일베가 그 퇴행의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 메갈은 자신들의 여행과 모험을 시작했다는 말이다.

 

 

혐오, 주체화와 타자화의 동학

 

우선 우리는 ‘포스트-메갈’ 주체의 탄생에 대해서 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메갈리아가 세계를 망친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혐오’라는 정서다. 우리는 혐오를 단 하나의 국면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혐오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감정’이기 전에, 한 인간이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감정이다. 깨끗하고 단정한 신체적 경계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감정인 것이다. 우리는 건강과 안녕 등을 위협하는 어떤 대상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몸에서 나온 분비물이나 썩은 냄새 등에 대한 혐오 등이 한 예다. 이때 혐오의 감정은 본능적으로 ‘불쾌’를 감지한 생명체가 그 불쾌로부터 비롯되는 위험을 피하라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다.

 

또 한편으로 혐오는,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회화되고, 그렇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감정이다. 예컨대 우리는 육체적으로 완전히 합일되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극복하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의 언어를 학습하여 사회화되어야 한다. 이때 ‘어머니’는 최초로 혐오의 대상으로 구성되며, ’사회화’는 사회가 요청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렇게 개인의 신체적 안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감정인 혐오는 집단의 안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감정으로도 확대된다. 그런 상황 안에서 관습적인 정체성을 견고하게 지킴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들 및 그 사람들에게 복무함으로써 ’낙수효과’를 누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집단적 정체성을 교란하는 소수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배제한다. 타자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성별이원제에 기반한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구성되고 ’사회적 타자’가 되는 것이 적절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혐오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강력한 주체화의 동학이자 타자화의 감정이다. ‘나와 다른 것’을 타자로 구성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동하는 정서인 것이다.

 

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 주류인 자, 즉 이미 사회적 주체로 선 자가 내면화하고 실천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사회를 조절/조정하는 감정으로서 혐오는 ‘타자화’에 집중된다. ‘여성혐오’가 타자화를 통한 여성젠더의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는 것은 이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증가시키고, 제도적 차별을 자연화하며, 그렇게 여성 젠더를 실존적 위기로 내몬다.

 

반면, 메갈리아 등에서 인터넷 언어를 경유해서 ’남성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강력한 주체화의 동학에 가깝다. 이는 지금까지 온/오프라인의 공간에서 제대로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여성들은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주체’가 되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으로서의 ‘남성혐오’는 인정하지만,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남성혐오’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남성에 대한 어떤 혐오의 감정은 남성을 폭력이나 제도적 차별로 내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갈리안 미러링 등에서 드러나는 남성에 대한 혐오의 효과는 타자화에 집중된 것이라기보다는 주체화에 집중된 것인 셈이다.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

 

물론 여성혐오와 싸우는 감정이 또다시 혐오임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4) 그러나 이 염려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동등한 주체라는 가정하에서만 유효하다. 여성이 남성에 대한 혐오를 통해 남성을 사회적 장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다는 평가는 성급하다. 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주체가 아니고, 이제 여성들은 이 주체화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체화의 과정으로부터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메갈의 미러링이 열어준 장을 통해서 주체가 되기 시작한 여성들은 정체성의 정치에 집중했다. 그 정치가 놀라운 파급력을 가지고 가시화되었던 것이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추모의 장이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구호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여성들은 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여성 자신의 문제로 동일시=정체화했다. 물론 이런 추모와 저항의 물결을 보고도 수심 가득한 이들은 염려의 목소리를 지우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중산층-원주민-비장애인-이성애자-시스젠더 여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인 ‘피해자주의’가 아닌가라며.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주여성’의 죽음이었다면, 여성 대중의 움직임이 그처럼 폭발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 Revi / , via Wikimedia Commons

 

그러나 더불어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계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또 다른 액티비즘의 흐름들이다. 해소된 것이나 다름없는 메갈리아를 붙들고 여전히 징징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은, 포스트-메갈의 주체들이 다양한 계기들을 경험하면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이며, 그들 중 일부가 어떤 활동들을 조직하고 그 운동의 의제들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있는가다.

 

나는 지난 9월 ‘2016 여성회의’에 참여해서 포스트-메갈 액티비스트들을 만났다. 이들은 ‘강남역 10번 출구’, ‘부산페미네트워크’, ‘불꽃페미액션’, ‘리벤지포르노아웃’, ‘페미당당’, ‘페미디아’ 등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조직의 성격도 자율적인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당 창당을 목표로 하는 그룹(페미당당), 협동조합의 형태로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룹(페미디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활동의 중요한 추동력이었지만,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등 노동문제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었고, 각종 세미나를 통해 문제의식을 확장하려는 노력 역시 함께 하고 있었다.

 

최근 이 단체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낙태죄 폐지 운동을 조직하고 여성의 몸에 행해지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의 주요 구호가 “나의 자궁, 나의 것”이라는 사실이 또다시 비판의 장에 올려졌다.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유주의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운동이며 결과적으로는 여성들의 이기적인 목소리의 반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높이 사는 ‘시민권’이야말로 자율적인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의 보장으로부터 가능해진다는 것을 사유하지 않는다. 때로 그들은 페미니즘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지성을 포기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실 이 운동의 핵심은 여성들의 몸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라기보다는,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몸을 자궁으로 치환하여 국민 재생산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리하여 여성들의 투쟁은 국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폭력을 향한다. 이때 여성들이 문제 삼는 것 중에 하나는 “태아의 생명권 vs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사회적으로 짜인 틀이 어떻게 임신중지를 둘러싼 담론을 왜곡하는가다. 기실 태아와 여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생명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를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신체를 ‘여성’과 ‘자궁’으로 분리하는 사고방식에 바탕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운동이 낙태를 범죄화하는 국가에 대항했던 폴란드 여성들의 ‘검은 시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검은 시위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이제 아일랜드의 낙태죄 폐지 운동과 느슨한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다. 한편으로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은 트랜스내셔널한 여성연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메갈 주체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방대한 스펙트럼을 포괄하고 있다. 생활세계에서의 작은 폭력에서부터 국민의 존엄을 위해하는 국가폭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렇게 방대한 스펙트럼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싸워온 의제들의 다양함과 그 깊이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걱정하는 그 ‘혐오세력’, 즉 메갈리아가 얼마나 다양하게 분화되어 확장되고 있는지, 그런 이들이 도달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시선을 돌린다면, 넷상을 떠돌고 있는 워마드식 혐오 발화의 예 몇 가지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질문하게 될 것이다. ‘피해자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오히려 일베류와, 그들의 혐오에 ‘남성불안’이라는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이들이다.

 

 

감응의 공동체와 사이버 공유지: #00_내_성폭력

 

물론 포스트-메갈 주체들이 모두 ‘운동권’이 되어서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보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결을 달리하는 여성들까지 포괄했을 때, 그렇다면 ‘포스트-메갈’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때 살펴볼만한 것이 2016년 11월 현재 가장 뜨거운 사건 중 하나인 ‘#00_내_성폭력’ 운동이다. 웹툰계와 문단에서의 성폭력 폭로로 시작된 ‘#00_내_성폭력’은 교육계, 영화계, 미술계, 스포츠계를 넘어서 군대 내 성폭력의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까지 번져나갔다. 이에 출판노조에서 출판계 성폭력 사례를 모집하거나 『씨네21』에서 영화계 성폭력 문제를 기사로 다루고, 각종 문예지에서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특집을 기획하는 등의 움직임이 함께 펼쳐지고 있다.

 

이 용광로와도 같은 흐름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녀사냥’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그렇지, 이야말로 페미나치의 마녀사냥이지”라고 반가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마녀사냥을 떠올린 것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나는 ‘여성들의 마녀사냥’이 아니라 ‘여성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어떤 이유에서 등장해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16-17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마녀사냥’은 중세의 암흑을 먹고 자란 광기가 아니었다. 마녀사냥은 오히려 자본주의 태동기, 계몽의 광명 아래에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길들이는 방편 중 하나였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라는 책을 간단히 인용해 보자.

 

15세기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 다수가 높은 임금과 낮은 물가라는 호의적인 환경을 발판으로 전례 없는 힘을 가졌던 시대였다. 이에 정치당국은 젊고 반항적인 남성 노동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한다. 예컨대 하층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범죄로 다루지 않았고,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이 일상적인 일이 된다. 이런 거래를 통해 계급적대는 여성에 대한 적대로 전환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남성들은 계급적 불만을 귀족 남성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 남성의 소유물인 ‘여자 하녀’를 강간하는 것으로 풀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계급 내 연대의 토대는 무너져 내렸고, 사회 전반에 강렬한 여성혐오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녀사냥의 토대를 닦았다. 두 세기에 걸쳐 수십만 명의 여성들을 살해했던 페미사이드의 시작. 그것은 여성을 짓밟아도 되는 존재로 만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녀사냥은 여성을 사적 영역에 가둠과 동시에 여성의 노동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과정으로 이어진다.

 

내가 이런 과정을 떠올린 이유는 사회의 한 층위에서 마녀사냥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다른 한 층위에서는 인클로저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인클로저 과정에서 여성들은 공유지를 박탈당한다. 공유지의 박탈은 남성들에게도 치명적이었지만, 여성들에게는 더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토지 소유권이나 권력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은 “생존, 독립, 사회성 유지”를 위해 공유지의 공적 자원과 사회적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그렇게 의지했던 안전망이 파괴되자 여성들은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든 여성은 더욱 취약했고, 이들은 곧 마녀사냥의 표적이기도 했다. 이때 여성들과 함께 ‘사냥당한 것’은 할머니들에게서 어머니들로, 그리고 딸들에게로 전수되던 여성들의 지식과 지혜였다.

 

이 인클로저가 21세기 버전으로 사이버 공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이야기를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의 대한민국으로 끌어와 보자. 나는 1997년 경제위기를 전후해서 한국 사회에 펼쳐졌던 것 역시, 근대 초기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혐오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성 노동력 ‘후려치기’였다고 생각한다. IMF가 닥쳐왔을 때 가장 먼저 해고되어 유연한 일자리로 쫓겨났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들이었다. 이는 신자유주의로의 형질전환에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이때 신자유주의란 모든 것을 사유화하여 공유지를 박탈하고, 그렇게 공동체와 그 내부의 사회적 관계를 박살내서 강도 높은 노동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각자도생, 무한경쟁, 먹고사니즘의 등장은 이런 공유지 박탈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1980-1990년대 새로운 영토로 등장해 사이버 공유지로 상상되었던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점증하기 시작한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떨어진 섬이 되어 버리는 단절의 공간. 이는 사이버 인클로저라 할 만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온라인 지옥’은 이런 인클로저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16년 10월.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다양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00_내_성폭력’ 운동을 진행하면서 여성들은 서로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감하고, 각자가 경험했던 폭력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싸우고, 고통스럽지만 천천히 걸어갈 거야. 함께 서로의 용기가 되어줄 거야. 우리는 용기가 될 거야”라는 한 트위터리안의 말처럼, 여성들은 경제난과 각종 사회적 재난,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오프라인 세계에서 찾지 못했던 일종의 공유지를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감응의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이버 공유지의 등장.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에 저항하고, 그렇게 IMF 이후 펼쳐졌던 마녀사냥의 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희망을 섣부르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낱같은 한 줄기 빛은, 전무의 암흑보다는 낫지 않은가.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

 

이제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논의할 때가 온 것 같다. 잘 보이지 않는 ‘다음’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정의당 사태에서처럼 역공의 바람이 하도 거세어서 승리는 고사하고 생존조차 불투명해 보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포스트-메갈 지형은 단순하지 않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지반 역시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 이제 여성들은 메갈리아를 경유해 하나의 주체로 서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를 묻는다면, 나는 여성 세력화와 소수자 연대를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둘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면서 종합하는 인식의 전환과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여성학자 니라 유발-데이비스는 이를 ‘횡단의 정치’라고 말한다.

 

여성들의 싸움은 대중문화라는 비교적 ‘약한 고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중문화에서의 투쟁은 가부장제의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구조인 여성혐오와 대결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넥슨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생존’을 걸고 싸우고 있다. 소비자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성혐오 문화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정치적·경제적 주권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안전할 수 없으며, 우리의 싸움은 언제든 뒤로 되돌려질 수 있다. 성평등이라는 정의를 향해 가는 사회의 꾸준한 변화를 보증하는 것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행동뿐이다. 이와 같은 집단행동과 그 행동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나는 세력화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세력화는 개별 여성 간의 차이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여성 내부의 연대로부터 가능해진다.

 

여기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강남역 사건이 준 또 하나의 교훈은 한 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하나의 층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대중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라고 주장했을 때, 공권력과 전문가들은 이것이 정신장애인의 돌출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여성혐오를 부정하기 위해 이 사회에서 관습이 된 장애혐오에 기댔던 셈이다. 놀랍게도 이 전략은 상당히 잘 먹혔다.

 

이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장애인권운동은 여성운동에 연대를 제안했다. 비장애인 남성이 ‘보편 인간’으로 상정되어 있고, 장애와 여성이 그 ‘남성’을 위협하는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두 운동은 함께 손잡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가부장제 사회의 ‘비장애인-남성-중심성’과 대결하는 목표를 공유하는 연대가 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대는 한편으로 견고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유연한 정체성에 대한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정체성의 정치로부터 주체화, 세력화를 이루되 단일화에 대한 강요로 흐르지 않는 횡단의 정치다. 횡단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하이픈(-)은 계속해서 확장될 수 있다. ‘비장애인-이성애-원주민-부르주아-남성-중심성’ 등등으로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운동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겁먹고 염려하기 쉽다. 그러나 이 뜨거운 에너지는 사회 전반의 형질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시끄럽다, 듣기 싫다가 아니라 “당신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그 지점을 이해하고 싶다, 그리하여 당신들이 꿈꾸는 사회는 무엇인가”라며 귀 기울이는 태도는 중요하다. 메갈리아로부터 등장한 새로운 주체들이 다양한 운동과 연대를 꿈꾸며 나아가는 것처럼,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상상력에 기대어 새로운 연대를 그려볼 수 있다면 좋겠다. 횡단의 정치를 말할 수 있는 페미니즘은 새로운 미래다. 그리고 이 새로운 미래는 이제 ‘우리의 오늘’이 되고 있다.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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