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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에너지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
2017-05-12 10:09:00

 

에너지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에너지 시민’의 탄생

 

인민이 주인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그 주인됨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방법이 갖추어져야 한다. 여기서 조건과 방법이란 흔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라 표현되는 것인데, 결국은 정보와 행동의 문제다. 무언가를 알고 토론하고 비판하며, 그것에 바탕하여 직접 의사결정과 집행에 나서거나 대의자와 대의 기구를 통해 실현하는 여러 방식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 민주주의의 일반적 조건이 갖추어지는 원형적 형태를 ‘공론장(public sphere)’이라 불렀다. 공론장의 원형은 고대 폴리스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는 커피하우스와 살롱을 가까운 예로 들었다. 17~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왕과 귀족의 권위에 맞서며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드나들며 신문을 읽고 당파를 형성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의 상공업을 주도하고 때로는 시위에 나서며 ‘시민’의 칭호를 얻었다. 이렇게 부르주아의 공론장이 결국 시민혁명과 민주주의의 기본 형태가 되었고, 커피하우스의 논객들은 구체제를 허무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되었다.

 

물론 이 근대 민주주의는 이후 여러 나라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로 정형화되면서 실제로는 자산 계급의 과두정으로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반발과 대안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을 위시하여 20세기 말까지 여러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정치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1960년대 서구의 반란들과 뒤이은 직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요구들로 이어지기도 했다. 21세기 들어 미국의 양당제하에서 ‘티파티’와 ‘커피파티’라는 흐름이 나타난 것도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는 선거법상으로 금지되어 있는 ‘사랑방 좌담회’가 실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보와 결정에 대한 접근의 폭과 수준이 민주주의의 수준을 재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에너지’에 대한 정보와 결정이라면? 생각해보면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여러 문제들 가운데 에너지에 대한 정보와 결정만큼 시민들과 거리가 먼 것도 드물 것 같다. 에너지에 대한 정보는 시민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거나 알려주어선 안 될 것이고, 에너지에 대한 결정도 시민들은 참여할 필요가 없거나 참여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 또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너지 권력이고 에너지 독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폭력,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들어선 핵발전소들, 미세먼지와 화력발전소, 선택권이 없는 전기요금 제도, 다양한 모델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택권을 갖기 어려운 가전제품들을 생각해보자. 석탄과 석유, 그리고 핵발전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우리가 접하는 에너지의 규모와 종류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래서 정치와 사회에서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었음에도 에너지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그다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몇 해 전부터 에너지 민주주의와 에너지 시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꼽고 전기를 쓰는 것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plug in and forget) 수동적 에너지 소비자에서 벗어나서,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의 결정에 관심을 갖고, 밀양과 고리의 송전탑과 핵발전소 현장을 찾고 지원하며, 때로는 직접 협동조합을 만들어 태양광 전기를 스스로 생산하고 판매도 하는 적극적인 시민상이 ‘에너지 시민’의 정체다.

 

그런데 커피하우스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민주주의가 귀족 계급과 뒤이은 독점 자본, 선출되지 않는 파워 엘리트 집단과 싸우면서 얻어진 것이라면, 에너지 민주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석탄과 석유 그리고 핵에너지를 주도해 온 개인 또는 집단이 있고, 석유와 철강, 자동차 재벌의 이름들이 있으며, 이들을 엄호해 온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와서도 에너지 전환을 거부하고, 핵심적인 문제들을 유엔과 각국 국회의 연단에서 제외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결합된 에너지 권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공공성, 다원성, 전환성

 

그런데 민주주의 자체도 한 가지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형식 민주주의 또는 일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및 급진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심화, 직접/참여 민주주의 등의 개념과 의미를 거치면서 경합하고 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에너지 민주주의 역시 에너지 공론장과 에너지의 물적 자원에 대한 권리와 권력을 둘러싸고 경합이 전개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도 에너지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소비자 선택권 보장이나 에너지 산업의 시장 개방과 경쟁 논리 적용, 국가독점 부문의 민영화 같은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반면에 환경정의 또는 기후정의 운동 진영에서는 에너지 생산과 소비 방식으로 인한 소외와 피해 방지, 에너지 정책 결정의 개방과 참여 확대 부분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우애의 긴장 관계가 에너지의 장에서도 예외가 아닌 셈인데, 그만큼 에너지 민주주의의 내포와 외연도 열려 있는 문제다.

 

 사진1. 원자력안전위원위 앞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허가 반대 발언을 하고 있는 밀양, 청도의 주민들 (출처: 환경운동연합)

 

그렇다고 에너지 민주주의의 의미를 마냥 느슨하게 허용한다고 이 긴장이 해결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에너지 민주주의 본연의 맥락을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너지 민주주의의 주요 구성 요소를 꼽아 보고 연역법으로 논의를 진전시켜 보면 어떨까? 지금 생각나는 것은 무엇보다 ‘공공성’, ‘다원성’, ‘전환성’이다. 이 세 구성 요소들은 상호 불가분한 관계일 뿐 아니라 에너지 민주주의와 보다 넓은 범위의(정치, 경제, 사회) 민주주의와의 관계까지 함축하며, 이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결여되어서도 안 된다.

 

첫째, 에너지 민주주의는 사익을 우선 추구하는 시장 논리가 에너지의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생산과 분배를 가로막고 민주적인 결정을 저해하며 공동으로 활용할 중요한 정책 수단을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에너지가 공공성의 원칙과 공적인 생산-분배-소비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으로 말해서 공공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에너지 민주주의의 조건은 갖추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에너지 민주주의는 에너지의 규모와 구성 방식과도 관련된다. 일원적으로 생산되고 일방적으로 분배되는 중앙집중형의 ‘대문자’ 에너지는 시민과 지역공동체의 의사와 참여를 봉쇄하며, 경성화된 성장 경로를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에너지 생산의 지역분산과 에너지원의 다원화, 생산과 소비 방식의 다양화가 실질적 에너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지반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규모의 문제는 지역공동체 수준의 재생가능에너지 협동조합이나 지방정부에 의한 에너지 서비스의 재지역화 또는 재공영화를 통해 현실성을 키워가고 있다.

 

셋째, 에너지 민주주의는 생태문화 사회 또는 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방향 속에서 자원과 의사를 동원 및 조정하는 수단이자 이를 포함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일부 부분적 성취에 안주하며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체제적 요구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고 해결하는 경제 체제 및 정치 체제와 함께하지 않은 채 에너지 민주주의만 따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이것’!

 

나아가서 에너지 민주주의는 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전례 없는 도전과 함께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에 따르면, 기후변화 자체에 각인된 세계적 민주주의 위기가 지구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분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항도 블로카디아Blockadia와 ‘전환마을’ 운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지역 경제를 재건하고 재창조하며, 민주주의에 족쇄를 채우는 기업의 영향력을 분쇄하며 공공성 요구를 강화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적극적 전환을 추동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기존 체제를 벗어나면 대안이 없다는 겁박으로 엘리트 정치를 강화하는 ‘쇼크 독트린’이 아니라, 권력을 다수 대중에게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충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라인이 책 제목을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This Changes Everything!)”라고 붙인 것도, 이것(이러한 인식 또는 이를 돌파하는 행동)이 체제의 변화를 문제 삼는 엄청난 질문이나 차별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전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클라인은 화석연료와 대문자 에너지에 반대하는 기후정의, 분산형 에너지, 채굴주의의 중단은 과두 지배 자본주의 시대의 종식과 결부되는 중요한 대결이며,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민의 민주적 권리를 둘러싼 사상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탄소배출 과세나 탄소 상한제 설정이라는 최소한의 정책만 실시할 것이 아니라, 경제의 근본적 토대를 바꾸기 위해 민주주의의 무기고에 들어 있는 정책 도구들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양한 스케일에서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 형성과 제도적/비제도적 실천이 상호작용해야 하며,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공유재에 대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형태의 설계를 대안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국가, 지방정부, 공기업, 사기업, 사회적경제, 시민사회의 새로운 방향 잡기라는 양성의 피드백(positive feedback)이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성, 다원성, 전환성으로 제시했던 에너지 민주주의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클라인의 블로카디아와 한국의 밀양 송전탑 투쟁, 에너지 권리와 민주주의의 문제, 기후변화와 체제 전환의 문제가 기성의 해법을 추구하며 수렁에 빠질 수도 있는 반면, 더 넓은 대안 프로젝트를 통해 민주주의와 경제 체제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사진2. 2013년 미국 유타주 절벽에서 타르샌드 프로젝트를 위한 도로 건설을 막고 있는 활동가들 (출처: PeacefulUprising.org)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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