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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북한의 협동농장과 유기농업의 동향
2017-05-18 14:07:00

 

북한의 협동농장과 유기농업의 동향

 

정은미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10년간 근무하다 최근 자율의지에 따라 독립 연구자(independet researcher)로 전환했다. 남북통합지수, 통일의식조사, 북한사회변동조사 등 계량적 연구를 주로 하고 있으나, 북한의 농업과 남북한 농업교류협력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국가 지배구조의 협동농장체제, 변화의 모색

 

기아와 빈곤 탈출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일을 거쳐 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식량자급이라는 농업 목표는 철회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은 쌀로부터 권력(권력에 대한 인민의 동의와 지지)이 나온다고 믿었다. 2014년 3월 5일 북한은 토지개혁법령 발표 68주년을 맞아 ‘쌀은 국력이고 사회주의다’라고 했다. 더욱이 제재 강화와 안보 위기 상황에서 식량자급은 체제수호의 보루처럼 기능한다. 매년 주요 국가정책에서 농업이 ‘주공전선’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8월에 완성된 북한의 협동농장은 조합원의 의사결정권이 박탈된 국가지배 구조의 집단 소유 농장체제였다. 이후 협동적 소유를 전인민적 소유로 점진적으로 전환시킨다는 목표하에 협동농장에서 국유 부문의 비중을 끊임없이 높이는 전략을 추구했고, 농업부문의 모든 조직과 기구를 중앙집권화했으며, 영농자재에 대한 국가의 독점공급체제를 구축했다. 심지어 협동농장 기본 생산단위의 작업반장까지도 당에서 결정되었다.

 

국가 지배 구조의 협동농장체계는 주체농법 도입에 따른 집약화와 기술혁신, 경작지의 외연 확대, 대규모 사회노동력 동원, 농민 사경제의 적절한 활용 등으로 증산을 상당 기간 성취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농업생산체계의 운영은 사회주의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농업을 공업처럼 만들겠다는 농업의 발전전략은 결과적으로 공업의 붕괴와 함께 농업도 동반 붕괴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공업의 지원을 받지 못한 주체농업은 일순간 생산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했으며, 수십만의 인민들을 굶어 죽게 한 대참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고난의 행군’이 휩쓸고 간 지 20년이 지난 오늘 북한 농촌의 들녘은 여전히 국가의 지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생과 도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모내기와 가을걷이를 돕는 풍경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협동농장이 20년 전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농업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있다. 시장에 눈뜬 농민들을 계속해서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고 농장의 생산물이 농장 밖으로 빼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국가는 끊임없이 시장의 유혹을 차단하고 유인제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되었다. 농장원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김정일 정권 이후 협동농장 운영체계를 개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대표적인 개선 조치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를 소규모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분조관리제’로 불린다.

 

북한의 협동농장은 작업반과 분조의 생산단위들로 운영된다. 일반적으로 농산·남새(채소)·과수·축산·기계화·관개 등 작업 분야에 따라 작업반이 구성되고, 각 작업반 아래 보통 3~4개 분조(큰 농장의 경우 5~6개의 분조)가 배치되어 있다. 분조는 생산 및 노동력의 조직, 노동 평가의 단위로서 생산을 직접 진행하는 기층단위이자 농장원들의 집단생활을 위한 기본 조직이다. 한 분조의 규모는 대개 평야지대의 경우 15~20명, 중간지대의 경우 12~18명, 산간지대의 경우는 8~12명 정도로 구성되지만,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 사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경될 수 있다.

 

분조관리제의 역사는 1965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분조도급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강원도 회양군 포천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던 김일성은 농장관리 운영에 있어 중요한 문제점을 간파하게 된다. 기본 생산단위가 작업반이다 보니 노동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농장원들도 집단농업에 대한 주인의식이 약했다. 한마디로 무임승차자가 많았던 것이다. 이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1965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협동농장의 기본 생산단위를 종래의 작업반에서 분조로 낮추는 분조도급제 도입 방침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분조 단위로 경지와 노동력을 고착시키고 생산물은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1)의 원칙에 따라 분조 단위에서 분배하는 것으로, 생산과 분배의 단위를 소규모화해 물질적 보상을 구체화함으로써 생산의욕을 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북한의 공식문헌을 보면 분조도급제가 도입된 이후 그동안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였던 곡물생산량이 1966년 이후부터 증가하게 되며, 당시 농업근로자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농업근로자』에서는 분조도급제 성과로서 구체적인 모범 협동농장들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분조도급제라는 용어는 1968년 2월에 열린 전국농업일군대회의 전후 시점에 분조관리제로 바뀌게 된다.

 

 

1990년대 중반 대규모 식량부족과 기근 사태가 발발하자 북한당국은 농업증산을 위해 기존 분조관리제의 운영방식을 대폭 수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분조관리제 도입 30주년이 되는 1996년 10월에 시행된 조치는 첫째, 분조의 규모를 종래의 10~25명에서 7~8명으로 축소하고 우대제를 적용하며, 둘째, 분조의 생산계획 목표를 현실에 맞게 농민들이 스스로 정하게 하며, 셋째, 초과 생산물은 분조 성원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때부터 이 조치는 ‘새로운 분조관리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학자 문면호는 『경제연구』(1996년 1호)에서 분조관리제의 강화를 통한 농업증산을 주장하며 “일부 근로자들이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대면서 출근하지 않는” 무단결근 현상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내용은 당시 북한 농촌의 노동력 이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와 북한 당국이 서둘러 ‘새로운 분조관리제’를 도입한 배경에 대해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정일 시대에 도입한 ‘새로운 분조관리제’는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이는 생산계획이 비현실적으로 높았고 전력 및 영농자재의 원활한 조달이 근본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실패 요인은 시장에 있었다. 농장에서 일해 분배받는 수입보다 시장을 통한 부업활동을 통해 얻는 수입이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농장일에 대한 농장원들의 열의가 높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2002년 경제개혁 조치인 ‘7.1조치’를 계기로 농업생산물의 수매가격은 시장가격에 준하여 현실화되고, 개인의 소토지 농사가 합법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4년에 이르러 분조관리제는 다시 수정되는데, 분조에 일정한 경지와 노동력만 고정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농기구와 소 등 생산도구들도 고정시키고, 농업경영의 내부 단위가 기존의 작업반에서 분조로 변경되었다. 또 이 시기 가족단위 영농방식인 ‘포전담당제’가 시범 도입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2012년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6.28방침’이라고 불리는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가 발표되었다. 김정은표 첫 경제개혁 조치인 것이다. 이 ‘6.28방침’ 내용 가운데는 농업부문의 개혁 조치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기존에 운영되었던 ‘새로운 분조관리제’의 2.0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협동농장 분조 규모를 10~25명에서 4~6명으로 축소하고, 계획 생산물을 국가 대 농장원이 7:3의 비율로 분배하며, 초과 생산량은 농장원에게 분배되어 자율 처분할 수 있게 하며, 협동농장이 서비스와 무역 분야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분조관리제 안에서 포전담당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하여 운영하였다. ‘6.28방침’의 시범 운영 결과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자 북한당국은 2014년 5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확립’에 대한 김정은의 ‘5.30노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5.30노작’에서 농업부문의 주요 내용은 자율 경영권 부여(생산권, 분배권(판매권), 무역권 등을 생산단위에 부여함), 분조관리제 강화, 포전담당책임제 도입, 시장가격으로의 수매, 분배 식량의 자율 처분권 부여 등을 포함하고 있다.

 

북한에서 쌀은 민심의 바로미터barometer라 할 수 있다. 쌀 가격이 임금은 물론 물가와 달러 환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은 북한에서 쌀이 갖는 경제사회적 상징성을 잘 드러낸다. 더욱이 장기간의 경제제재 속에서 식량자급은 체제수호의 필수적 요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농업은 국가 지배 구조의 협동농장체제라는 하드웨어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분조관리제’와 ‘포전담당제’라는 소프트웨어의 탄력적 운영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하에서 김정은 정권의 농업정책은 1960년대 중반 국방-경제 병진노선하의 김일성 정권의 농업정책과 데자뷰deja vu를 이룬다. 농업정책이 안보정책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농업정책의 단골 메뉴, 적지적작의 역사와 의미

 

19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개최한 이후 36년 만인 2016년 조선노동당의 7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정은의 시대를 공식 선포한 것이다. 당시 채택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결정서 중 농업부문의 내용은 향후 김정은 정권에서 추진될 농업정책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사업총화결정서에서는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2016년~2020년) 기간에 달성되어야 할 세 가지 당면 과제들-전기 및 에너지 문제 해결, 경제 선행부문 및 기초공업부문의 정상화, 농업과 경공업의 증산-이 제시되었다. 구체적으로 농업부문에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우선 경제발전 5개년 전략 수행 기간에 식량공급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럼 어떻게 식량공급을 정상화할 것인가. 많은 내용들이 언급되었는데 주목되는 부분들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주체농법을 토대로, 과학농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특히 농산작업의 기계화 비중을 60~70%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되었는데, 이는 농기계로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동시에 오랫동안 농업부문에서 고질적인 문제였던 노동자 및 학생들의 농촌 지원 규모를 축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농업정책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량품종을 더 많이 개종하여 적지적작適地適作하는 것, 유기농법을 장려하고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를 정착시키는 것이 강조되었다.

 

‘적지적작’은 김일성 정권부터 김정일 정권과 김정은 정권에까지 역사적으로 북한의 농업정책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용어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원칙이 왜 항상 강조되는 것일까. 이는 실제로 북한 농업에서 적지적작의 원칙이 잘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접근해보면 시대별 ‘적지적작’의 맥락적 의미는 조금씩 달랐고, 그 의미 변화의 기저에는 정치경제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1946년 토지개혁 이후부터 농업협동화가 추진되기 이전 시기까지 ‘적지적작’이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알맞은 땅에 알맞은 작물을 골라 심는다’는 뜻이었다. 개인적 소유관계가 지배적이던 시기에 경작지에 어떤 작물을 심는가는 전적으로 농민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적지적작의 원칙은 주로 국영농목장을 중심으로 강조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1958년 8월 농업협동화가 완료된 이후에 국가는 작물 선택권을 장악하게 된다. 토지에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농민이 아니라 국가였으며, 이 시기부터 ‘적지적작의 원칙’은 본래적 의미에서 벗어나 ‘밭에서 다수확에 적합한 작물 배치’를 뜻하는 것으로 변했고, 점차 강냉이로 단일화되어 갔다. 그런데 농업협동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자연지리적 특성이 무시된 채 수확률에만 집착하여 무리하게 실행된 강냉이 재배의 확대방침은 오히려 생산력을 하락시켰다. 게다가 알곡 작물 중심의 작부체계는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농민 소득 격차를 더욱 벌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농촌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산간지대에 사는 농민들의 빈곤 문제가 도시와 농촌의 생활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1960년대에 적지적작의 원칙은 다작 영농을 추구하였다.

 

한편 1960년대 후반 중소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북한이 자주외교 노선을 표방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이 크게 감소되었고 이에 자립경제 발전전략이 더욱 강조되었다. 무엇보다 당장 식량자급이 시급했다. 북한 당국은 증산 방법의 하나로 1970년대 중반부터 주체농법을 전면 도입하였다. 주체농법이 도입된 이후의 적지적작 원칙 역시 지대적 특성에 적합한 작물이 아니라 지대와 기후의 조건을 극복하기에 알맞은 품종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이에 농업 생산구조는 논에는 벼, 밭에는 강냉이 위주의 단작체계로 변해갔으며, 특정한 몇 가지 품종들이 전국 범위에서 지대별·도별로 배치되어 생산단위에 하달되었다. 비록 1970년대 중반에 식량자급이라는 주체농법의 신화가 창조되었을지라도 1980년대 말부터 강냉이 중심의 단작 영농구조가 오히려 전체적으로 농업생산력을 떨어뜨려 결과적으로 식량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이 이미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표면화된 식량부족은 더 이상 외인론外因論만으로 정당화되지 않았으며 잘못된 농업정책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농업방침은 농업 생산구조의 변화를 요구했다. 새 농업방침은 주체농법에 의해 왜곡된 농업 생산구조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자 수정이다. 표면적으로는 주체농법의 계승을 강조하고 있지만 적지적작의 원칙을 무시한 획일적인 작부체계와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농업 생산구조를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새 농업방침은 강냉이농사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며, 대신 감자, 콩, 공예작물, 축산, 양어, 잠업 등 농장의 지대적 특성에 적합하고 ‘실리’를 낼 수 있는 다각적 영농을 추구한다.

 

2000년대 들어 북한 당국이 강조하고 있는 새 농업방침과 ‘적지적작의 원칙’은 농업협동화 이전 시기 및 1960년대 초반 시기와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두 시기 모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식량안보가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적지적작의 원칙에 입각한 영농의 다각화는 농민에게 작물 선택의 자율성을 좀 더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농민에게 농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고취시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3)

 

유기농업과 순환적 생산체계

 

앞서 언급한 7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결정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문헌에서 유기농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마다 쌍둥이처럼 등장하는 또 다른 용어가 있다. 그것은 ‘고리형’ 순환생산체계이다. 왜 이 두 용어는 항상 같이 언급되는 것일까. 유기농업과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는 동일어나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 사회의 맥락에서 유기농업은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를 통해 실현되며, 고리형 순환생산방식이 곧 유기농업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지속가능한 농업과 안전한 먹거리 생산이라는 두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유기농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시작되었다면, 북한에서는 장기화된 경제봉쇄 속에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농업 증산의 자구책의 하나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다. 7차 당대회의 사업총화결정서에서도 식량공급의 정상화 방안으로 유기농업이 제시되었다. 북한은 왜 유기농업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김일성은 “비료에서 쌀이 나온다”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 즉, 농업증산을 위해 비료 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시기 북한의 농업은 극심한 토양의 산성화와 화학비료의 부족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했다. 기존의 주체농법에 따른 밀식 재배와 화학비료의 소비가 심한 강냉이 중심의 단작 체제가 토양의 산성화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화학비료의 부족으로 기존처럼 강냉이 단작 체제를 지속할 수 없었다. 화학비료의 부족과 토양 산성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식량자원을 증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감자 농사의 확대가 모색되었다. 기근 현상은 지역적 편차를 보였는데 특히 농업의 입지조건이 열악한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 등에서 심각했다. 특히 이 지역들은 기후와 토지 조건상 쌀과 강냉이의 생산력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 반면에 감자는 내한성과 내병성이 강하고 비료 소비량이 적고 단위당 소출량이 많아 이 지역들에서도 많은 양의 생산이 가능했다. 이로써 감자의 증산이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나아가 감자 농사는 축산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축산부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사료의 확보였다. 농장 안에 돼지공장을 건설하여 감자를 가공한 뒤 나오는 찌꺼기를 활용해 돼지를 사육하고, 돼지를 기르면서 나온 물거름을 다시 감자농사에 쓰는 ‘순환적’ 생산방식이 고안되었고, 북한당국은 이것을 대홍단식 감자농법이라고 크게 선전했다.

 

이후 순환적 생산체계는 축산업과 양어가 연계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2000년 5월 김정일은 “양어를 과학화, 집약화할데 대하여”라는 담화를 통해 “풀과 고기를 바꿀 뿐 아니라 강냉이와 물고기를 바꾸어야 합니다”4)라고 강조하였다. 양어에서 ‘동물성 먹이’의 확보는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북한당국은 양어의 동물성 먹이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바로 축산업에서 찾았다. 즉, 가축배설물이 양어의 먹이가 되는 미생물을 번식시키는 데 중요한 원료였던 것이다. 이로써 2000년대 중반 경에 북한 농업은 감자+축산+양어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순환적 생산구조를 완성했다.

 

순환적 농업생산구조의 강조는 증산 차원을 넘어 식생활 구조의 전환과 연계되면서 정책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오랫동안 다각적 영농이 제한되면서 주민들의 식생활 구조는 주식 위주로 고착되었다. 경지 대부분이 벼와 강냉이 재배에 돌려졌기 때문에 부식물 생산과 공급이 충분치 않아 불균형한 식생활 구조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식 소비를 줄이고 부식물 소비를 늘리는 식생활구조의 개선이 필요했다. 김일성 시대에 이상적인 식생활로서 ‘흰쌀밥에 고깃국’이 지향되었다면, 김정일 시대에는 식생활의 이상이 ‘고깃국에 흰쌀밥’으로 바뀌었다.

 

북한 당국이 농업정책에서 유기농업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2010년 신년공동사설에서이다. 이 사설에서는 2010년을 “경공업과 농업은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투쟁의 주공전선”으로 설정하고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한 실천 방법의 하나로 유기농법의 도입이 제시되었다. 유기농법 도입에 대한 북한 당국의 관심은 2011년과 2012년 신년사설공동사설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특히 2012년 공동사설에서는 “농산과 축산을 결합하는 고리형 순환생산체계와 우리 식의 유기농법들을 적극 받아들이며 농업생산목표수행에 필요한 영농물자와 설비들을 수요대로 제때에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는 “서로 련관되는 생산공정, 부문들의 생산물이나 부산물, 지어 폐설물까지도 원료, 자재로 리용할수 있게 하는 생산체계”로 폭넓게 정의되고 있는데, 농업부문에서는 “농산과 축산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으로 “축산부문은 조성되는 유기질원천으로 농산부문에 필요한 유기질비료생산을 최대한으로 늘일수 있게 하며 농산부문은 축산부문에 필요한 사료를 보다 눅게 넉넉히 생산보장할 수 있게 하여 농산과 축산을 다같이 빨리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5)고 설명되고 있다. 나아가 “자원위기, 환경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의 지속적발전과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다같이 보장한다는 데 고리형 순환생산체계의 확립이 가지는 거대한 사회경제적 의의가 있다”고 의미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세계 인류사회가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지구의 지속가능성과 생태 문제를 북한 역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의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은 농업증산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출발하지만 나아가 유기산업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진화했다. 처음에는 화학비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쌀과 강냉이의 부족을 메워줄 감자의 증산을 강조하는 가운데 유기농법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고, 다음에는 화학비료를 대체하는 유기질비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순환적 생산방식이 고안되었고, 마지막에는 농업 증산과 생태환경 보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논리로 진화한 것이다.

 

북한 유기농업의 동향

 

북한정권이 유기농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기에는 화학비료를 대체할 유기농비료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유기산업법이 제정되고 농업이 ‘주공전선’으로 선언되었던 2005년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과학원에서 미량원소 복합비료를 연구·완성했다”며 “이 비료는 붕소·아연·구리 등 필수 미량원소를 보충해줌으로써 식물의 활성을 높여주고, 광합성과 영양물질합성 등 물질대사 과정에 원만히 진행되게 한다”고 소개하며, 이와 함께 함경북도를 비롯한 각지 주민들이 농사에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 이탄 캐기에 주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탄은 늪지 등에 서식하던 갈대류나 이끼류의 식물이 죽은 뒤 땅 속에서 미생물에 분해되고 남은 부분으로 형성된 것으로, 비료로 사용된다. 통신은 비료뿐 아니라 화학공법이 아닌 친환경적 방법으로 만들어진 농약도 자체 개발하였다고 전했다. 과학원 함흥분원 유기화학연구소가 개발한 이 새 농약은 특히 콩과 과수에 효과가 있다고 방송은 소개하고 있으며, 또 생물분원 과학자들이 개발한 식물성 농약은 화학농약을 사용하지 않고도 병충해의 피해를 입지 않게 했으며 소출도 18~20% 증가하게 했다고 말했다.

 

유기농법에 대한 북한의 초기적 관심은 산성화된 토양을 개선하고 부족한 화학비료를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적 유기비료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려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북한은 외부세계의 유기농업 기술에 대해서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갔다. 2002~2003년에 북한 농업과학원 및 평양 농과대학 대표 일행 네 명은 UBC대학 초청으로 캐나다의 유기농법을 연수했다. 연수에 참가한 북한 농학자와 농업부문 관료들은 화학비료와 농약의 조달이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북한농업을 친환경 농법으로 전환하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6)

 

하지만 외부세계로부터 유기농법 관련 기술을 배우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은 2011년에 들어서다. 특히 유럽연합의 지원이 적극적이었다. 2011년 4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유럽연합 유럽원조협력청(EuroAid)의 기금을 받아 유기농업기술 도입으로 식량안보에 기여하는 협력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북한유기농업지원센터(KCCOA) 설립이었다. 시범농장으로 평양 근교에 있는 미림농장이 선정되었고, 이곳에서 비화학 원료와 익충益蟲을 이용한 해충 방제기술, 퇴비나 미생물비료 제조법과 같은 다양한 유기농업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북한유기농업프로젝트 연구 담당자인 루카스 바움가르트Lukas Baumgart가 쓴 한 기고문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의 최우선 과제는 적절한 윤작과 녹비, 최적화된 퇴비기술, 그리고 축산업을 포함한 순환농법을 통해 토양 비옥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토양 비옥도 향상은 북한의 식량안보 개선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다.7)

 

그 밖에도 독일의 민간단체 한스 자이델 재단(Hanns Seidel Foundation) 또한 북한 내 유기농업 지원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 재단의 웹 소식지에 따르면, 2011년 5월, 한스-자이델 재단의 대표단은 북한 나선시에 있는 동물 육종농장(나선시 청계농장)과 곡식농장(선봉시 운성농장) 두 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농장 대표자들에게 농업전문학교를 통해 유기농 농업훈련을 수행하는 데 동의했다. 이 재단의 소식지는 북한에서 화학비료와 해충제의 부족으로 유기농업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재단이 유기농업에 관련된 과학 교과서 업무를 평양에서 수행했다고 전했다.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후에도 유기농업 도입을 위한 외부 선진국가들과의 협력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2012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유기농업의 적극적인 도입이 언급된 직후 북한 과학원은 ‘유기농법 안내서’ 수천 권을 제작해 평양 인민학습당과 김일성대학 등의 농업 관련 학과와 각 도의 협동농장에 비치했다. 이 최초의 유기농법 안내서는 유럽의 한 민간단체로부터 도움을 받아 제작 인쇄된 것이다.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에서 국제유기농업 관련 토론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 토론회는 평양국제새기술경제정보교류사와 국제유기농업운동연맹(IFOAM)이 공동 주최한 것으로 국내외 유기농업 전문가들이 모여 유기농업의 세계적 추세와 원칙, 그리고 북한 유기농업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적 문제 등이 논의됐다. IFOAM은 1972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어 세계 116개 국 750여 개 가입단체로 구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유기농업운동단체로, 3년에 한 번씩 국제유기농대회를 개최한다. IFOAM은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자립적인 유기농업체계의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유기농법 기술 전수, 그리고 목초지관리와 농축산 통합 사업 등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평안남도에 위치한 쌍운농장을 주요 사업 대상지로 선정하고, 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유기농업연구와 실험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2018년까지 진행될 계획이며, 지금까지 유럽연합은 이 사업에 45만 유로(미화 51만 달러)를 지원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소식에 따르면 유럽연합이 2011년부터 지원해오던 북한 유기농업지원프로젝트는 2016년 10월로 종료된다고 한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과 경제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연합이 북한 유기농업 지원 사업을 지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유기농업을 포기하거나 중단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 제약은 유기농업에 대한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과제와 도전

 

김정은 정권이 핵고도화를 계속해서 추진하는 상황에서 유기농업에 대한 정책적 중요성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5차 핵실험 이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비용·고투입의 관행농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유기농업은 농업증산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공급이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유기농업은 천연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과 저투입 전략에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유기농업 선진국들의 지원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증산에 기여하는 유기농업’의 발전을 북한 스스로 이뤄내야 하는 것은 당면한 과제이자 도전이다.

 

하나의 실현가능한 탈출구로서 북한은 오랜 경제봉쇄를 겪으면서 식량문제를 해결했던 쿠바의 유기농업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쿠바는 세계적인 유기농업의 메카로 떠오르기 이전에 대규모의 기계화와 대량의 화학비료에 기반한 관행농업으로 사탕수수 중심의 단작재배를 추진했다. 대부분의 농업자재는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 수입했다. 하지만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사라지자 심각한 농업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경제봉쇄를 더욱 강화했다. 식량위기가 나라 전체를 흔들었고 아사자가 속출할 위기의 순간에 쿠바 시민들은 유기농법에 기반한 도시농업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대규모 국영농장은 개별 가족농과 협동 경영이 가능하도록 구조 개편이 이루어졌고, 지역 자원의 재활용과 순환농법 그리고 자연생태계 및 현대 과학기술과의 연계에 바탕을 둔 21세기형 유기농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농업개혁을 통해 결국 쿠바는 식량자급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쿠바의 유기농업은 단순히 ‘무농약·무비료’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자원의 지역 내 순환과 생산 생활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생태계와 농업생산성의 지속성, 그리고 생활양식의 전환을 동시에 이룬 ‘늘 푸른 농업혁명’으로 자연과 사회 환경의 지속적 순환을 가능케 하는 현대적 생태문제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인류문명 발달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8) 쿠바의 경험은 생태학적 농업 기술에 바탕을 둔 중·소형 농장들로도 전체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보다 자급적인 먹거리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9) 이러한 대안 농업이 쿠바의 경험에서도 입증되었듯이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강화된 경제제재에 직면해 있는 북한에서도 유기농업이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북한은 수십 년 동안 협동농장 밖에서 거의 모든 인민들이 사실상(de facto) 유기농법으로 개인농사를 병행해 오지 않았는가. 어쩌면 북한주민들에게 유기농업은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오래전 스스로 개척해온 생산과 생활양식의 한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1) 흥미롭게도 김정일 정권 출범 이후 첫 경제개혁이라 할 수 있는 ‘7.1조치’에서는 기존의 평균주의적 분배 관행을 비판하면서 ‘일한 것만큼, 번 것만큼’에 의한 새로운 분배 원칙의 이행을 강조하였다.

2) 청산협동농장의 조직도(월간 『민족21』, 2006년 5월)

3) 북한의 적지적작과 관련된 기술은 정은미, “북한의 시대별 농업 생산구조 분석: ‘적지적작의 원칙’의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10권 3호, 2007, 45~96쪽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4) 김정일, “양어를 과학화, 집약화할데 대하여”, 『김정일 선집』 제15권, 조선로동당출판사, 2005, 53쪽.

5) 리민재, “고리형순환생산체계와 그의 사회경제적의의”, 『사회과학원학보』 2호(2012), 44쪽.

6) 김성훈, “식량난 북한, 환경난 남한, 쿠바 유기농업 벤치마킹 하라”, 『신동아』 통권 542호, 2004년 11월호, 474-482쪽. 

7) 루카스 바움가르트, “식량안보에 기여하는 유기농업-북한 유기농업지원센터(KCCOA)”, 『모심과 살림』 4호, 2014년 겨울.

8)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작은 나라 쿠바의 커다란 도전, ‘늘 푸른 혁명’』, 안철환 역, 들녘, 2004, 6-7쪽.

9) 프레드 맥도프, 존 포스터, 프레드릭 버텔 엮음, 『이윤에 굶주린 자들』, 윤병선 외 역. 울력, 2006, 320쪽.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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