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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소농, 미래로 돌아가다
2017-05-25 17:23:00

 

소농, 미래로 돌아가다

 

글 신승철

생태철학자. 문래동예술촌에서 <철학공방 별난>을 운영하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 , 『눈물 닦고 스피노자』, 『식탁 위의 철학』 등을 저술했다. 

 

『소농, 문명의 뿌리』

웬델 베리 씀, 이승렬 옮김, 한티재, 2016

 

 

오래된 미래, 소농

 

2016년 나는 영등포구 도시텃밭 사업에 당첨되어 조그만 땅을 1년간 불하받았다. 처음으로 씨앗과 거름, 김매기를 알게 되었고, 연구실에서 글을 쓰다가 가끔 마실 나가듯 텃밭으로 향했다. 생명은 놀랍고 경이로웠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며칠 후 가보니 빼꼼히 싹이 나와 있었고 또 며칠 후 가보니 파란 이파리를 창연하게 펼치고 있었다. 자연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했던가? 마치 누군가의 선물과도 같이 느껴졌지만, 또한 내가 돌보지 않으면 메말라 버리는 예민한 아이와도 같았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식물아이’라고 불렀는데, 그 아이들은 나에게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물음표로 가득 찬 존재였다. 아내는 오줌액비 생산을 독려하면서 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손에 페트병을 쥐어주었다. 땅과 몸은 하나라고 했던가? 나의 몸에서 나온 물질은 땅의 비옥함이 되고 땅은 다시 식물의 몸을 만든다. 놀라운 것은 거친 땅을 비집고 나온 엄청난 생명력과 작은 씨앗이 커다란 열매가 되는 생명에너지였다. 그 후 밥상은 작은 씨앗들이 만든 혁명으로 인해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졌다. 계속해서 먹어도 줄지 않는 상추, 따면 딸수록 열매가 열리는 가지, 다음번에 추수해도 또 나오는 토마토, 그것은 혁명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지라는 비밀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철학은 결국 사변적인 개념 놀이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을 이끌 주체성은 바로 소농이다.

 

그러나 소농만큼 현존 문명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기계적으로 공격당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점차 제거되고 사라진 이웃 중 하나가 바로 소농이었다. 거름더미를 짊어지고 가던 소농, 땅을 일구며 구성지게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농, 땅과 몸이 하나였던 소농.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농은 농촌이 근대화되면서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던 주체성이다. 그러나 다시 소농이 문명의 대안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농이 있다는 건 땅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소농이 있다는 건 마을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소농이 있다는 건 노동과 놀이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다. 소농이 있다는 건 품위 있고 전인적인 도덕적인 삶의 기반이 있다는 증거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 소농을 이 시대가 호출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2016 EIDF(EBS국제다큐영화제) 다큐멘터리 <100억의 식탁>은 소농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30년 이후에 폭발적으로 늘게 될 인구 100억 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시시각각 잠식해 오는 기후변화의 상황이 초래할 농지의 감소와 생물종 대량멸종의 위기 등이 결국 식량위기로 나타날 것이라는 등 불안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의 문이 열린다. 백화점 식으로 늘어놓자면, 각각의 모든 것이 식량위기의 대비책이라고 주장된다. 식물공장, 인조고기공장, 질소비료 공장, 관행농, 다국적 농업기업, 유전자조작 종자기업 등도 식량위기를 준비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세균이나 박테리아가 들어올 수 없는 일본의 식물공장에서 생산은 수경재배를 통해 이루어지며, 흙을 세균에 오염된 것으로 규정한다. 문제는 이 경우 식량이 굉장히 비싸질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격리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점이다. 결국 대안이 될 수 없는 허깨비 놀음일 뿐이다. 이와 교차적으로 흙의 풍요로움에 기반한 농업이 있다. 바로 소농이다. 소농은 식량위기의 상황에서 전통종자의 유전자 다양성, 혼작과 윤작으로 인한 탄력성, 기후변화에 대한 임기응변성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100억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구를 소농이 해결할 수 있을까? 대규모 기업농이나 다국적 농업기업만이 이 거대한 문제의 해결책이지 않을까? 현재의 통계로 보면 전 세계 농지의 1/4이 소농에 의해 경작되며, 여기서 나오는 농산물이 전 세계 인구 70%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농은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을 심원하게 다룬 책이 바로 웬델 베리의 『소농, 문명의 뿌리』(2016, 한티재)이다. 이 책 초입에 스코틀랜드 시인 에드윈 뮤어의 시가 등장한다. “/인간 생명 안에 다른 생명 들어 있네./고기도, 술도, 생기도, 곡식도/인간 생명 안에 들어 있네./때로 이들은 인간의 질환/때로 이들은 갱생의 원천/우리의 길을 휘감아 도는/이들의 자연스런 생명 주기/미로에 갇혀 불안에 사로잡힌 마음/토착예술과 단순한 주문을 부른다./두렵지 않고/장미는 다시 꽃피고/우리의 야생은 살아난다./”라고 소농이 술과 노래와 더불어 읊었음직한 시 한 구절을 화두로 던진다. 고향을 잃고 장소의 기억과 역사를 잃어버린 도시민, 직업인이나 기능인으로서 하나밖에 모르도록 훈련된 도시민, 몸과 마음의 분열을 겪는 도시민, 화석연료에 기반한 소비주의를 통해서만 개인주의가 보장되는 도시민, 기계사용을 통해서 풍요로워진 것이 아니라 무능해져 버린 도시민에게 소농은 다소 생소하고 촌스럽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통속적인 삶에 익숙해 있는 문명인들은 오랜 기억 뒤로 사라졌던 소농이 문명의 희망이자 인류 재건의 주체성이라고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래된 과거를 뒤져 소농을 발견한 것은 미래를 약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발견한 소농은 오래된 미래다.

 

소농은 다가올 식량위기의 배수의 진이다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 종자기업, 기업농, 수많은 농업기업들은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와 식량위기를 대비할 수 없다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예컨대 생태다양성과 유전자다양성에 기반한 소농들이 갖고 있는 토종 종자에 비해서 하나의 벌레와 질병에만 효과적인 유전자조작 종자는 예측불가능한 기후변화의 상황에 맞설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 또한 과도한 화석연료에 기반하여 농약, 비료, 기계, 난방 등으로 해결하는 기업농은 도리어 기후변화를 초래할 뿐이며, 단일작물만이 상업성이 있다는 시장의 논리로 인해 소농의 혼작과 윤작이 갖는 탄력성을 가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농과 관행농은 기후변화에 취약하며 작황이 부진할 수밖에 없고, 어쩌면 대량절멸의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존 문명은 산업화 시기부터 소농이라는 전통적인 주체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소농은 우직하고 무식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전문가나 직능인보다 현명한 생태적 지혜로 가득하다. 소농은 대지를 돌보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며, 직관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금세 눈치 챈다. 그에 비해 문명은 돈 이외에는 어떤 목표도 갖지 않고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는 무능력한 평균적 도시민을 만들어왔다. 문명은 자신의 ‘어머니=자연=대지=여신’이었던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하고 도구화하였다. 웬델 베리에 따르면 대지에 대한 부드러운 사용을 통해서 돌보고 살리는 농업이 아니라, 대지를 약탈하고 갈취하는 농업이 일상화된 것이 관행농이었다. 이렇게 되면 대지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인간성조차도 파괴된다. 대지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 소비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대지와 분리된 위생적인 공간에 사는 사람 등 이러한 통속적인 도시민들은 소외, 분열, 빈곤, 무위, 양극화, 도착 등의 상황에 빠져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지상에는 각종 무역협상과 농업기업의 육성정책, 기계농과 관행농의 일반화, 종자에 대한 탐욕 등 자본과 문명이 소농을 공격하는 기사로 가득하다. 현재 각국의 소농들은 이러한 다국적 자본과 국제무역, 세계화의 희생자가 되어 최극단 빈곤층으로 추락하거나 파산과 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대지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어떤 것일까? 여기서 대지를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가 나누어질 수 있다. 제작(poien)과 기술(techne)이 그것이다. ‘제작’이 대지를 부드럽게 사용하고 돌보는 데 반해, 기술은 대지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고 약탈한다. 제작은 세계를 재창조하는 ‘지혜’의 방법이라면, 기술은 세계를 도구화하는 ‘지식’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웬델 베리는 대지를 부드럽게 사용하는 소농의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웬델 베리는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기술의 방법론이 아니라, 대지의 생명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소농의 지혜에 주목한다. 그는 “과학이 있기 수천 년 앞서 ‘원시적’인 농민들과 부족들이 우리의 과학전문가들보다 에너지 순환 양상에 더 숙달해 있었다. 분석적인 지식인들에게 이런 에너지의 순환 양상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우주의 질서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오감으로 인지하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그 질서를 흉내 내려는 사람들이 그것을 더 잘 상상한다.”(178쪽)라고 말한다. 소농은 생태계의 순환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쓰레기나 폐기물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되살리고 재생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엔트로피가 거의 발생되지 않는 생명순환(=탄소순환)의 유기농법을 창안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소농은 자연 속에서 점차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대지와 함께 순환하는 불사(不死)의 존재, 흐름(flux)의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소농이라는 특이점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공동체와 생태계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한다. 다시 말해 소농은 혁명이다.

 

왜 소농이 기후변화의 상황에서 중요한가?

 

기후변화와 식량위기는 어떤 상황을 초래할까? 2002년에 사망한 5,700만 명 중에 1,000만 명이 어린이였고, 그중 400만 명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들이었다.1) 현재 13억 명이 하루 한 끼의 열량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매년 600만 명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따른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곡물의 1/3이 공장식 축사의 동물 사료가 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인구통계가 100억 명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아의 상황은 극단화될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의 상황으로 인해 평균 기온이 5도 오른다면, 현존 문명의 혜택인 수도, 가스, 전기, 하수도 등을 사용하는 인구는 전 세계 인구 중 10%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현실에서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는 굉장히 왜소하고 초라하다.

 

우리 인류는 지금 당장 예측 불가능한 기후변화의 상황, 생존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인류가 위기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생존을 위해서 생태다양성이 갖고 있는 유연성, 탄력성, 임기응변성, 복잡성 등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기업농이나 다국적 농업기업은 기후변화의 급박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특이점과 복잡한 경로로 이루어진 생태다양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어 소농이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생태적 지혜의 경우에는 100명의 소농이 있다면 100개 이상의 방법이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특히 소농들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의 노하우와 상황인식, 대응방법을 교류하고 있다면 시너지효과는 클 것이다. 예를 들어 막대한 기후변화의 상황에 대해서 소농이 구사하는 혼작과 윤작의 방법은 몇 가지 작물이 흉작이라 할지라도 다른 작물로 충당하고 대체함으로써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맞설 수 있다. 시장에서 돈이 되는 단품종이나 단일작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기업농의 경우에는 탄력성과 유연성, 임기응변성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물 부족의 상황에서도, 대규모 관행농이 요구하는 대규모 댐이 아니라 소규모 저수지와 둠벙, 빗물취수장 등을 이용하는 소농이 더 유리할 것이다.

 

소농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농의 혼작이나 윤작이 벌레, 미생물, 물질 등의 교환과 되먹임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농약과 비료의 투입/산출의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생명 간의 상호작용을 ‘강한 되먹임’으로 북돋고 촉매하는 것이 소농의 살림이라면, 그를 ‘약한 되먹임’으로 만들거나 아예 제거함으로써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관행농이다. 소농의 농법은 땅과 미생물, 부엽토, 지렁이 등의 유기물과 생명에 기반해 있고, 이러한 생명을 살리고 북돋는 집약적 농법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트랙터나 농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비탈진 곳, 돌이 많은 곳, 경사진 곳에서도 흙을 일구고 살려냄으로써 농사를 짓는다. 기후변화는 매순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에, 흙과 대지, 종자, 물 관리, 공동체적 연결망에 대한 소농의 생태적 지혜는 절실히 요구될 것이다.

 

다이앤 듀마노프스키는 『긴 여름의 끝』(2011, 아카이브)에서, 자동차를 타고 텔레비전을 보며 육식을 하는 등의 동질적이고 통속적인 문명은 얼마 가지 않아 도미노처럼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50~100명의 모듈단위라는 로컬한 자급자족의 단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모듈단위는 소농들의 어소시에이션인 협동조합과 마을 단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실천의 가장 기초단위는 사실상 현재 작동 중인 소농들의 연합체인 마을단위, 공동체단위, 협동조합단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2007년 세계 식량위기 상황에서 대부분의 관행농이나 다국적 농업기업들이 기능정지되거나 무기력했던 것을 목도했다. 소농은 땅 면적에 비해 화석연료에 기반하지 않고도 가장 집약적으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농사 형태다. 특히 제3세계 민중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바로 소농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미래를 응시한다. 그리고 인류가 재건되고 생존하는 데 있어 준비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되었던 것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오랜 검증의 시험대를 통과한 것이 바로 소농이다.

 

소농, 미래로 돌아가다

 

농부철학자인 전희식은 『소농은 혁명이다』(2016, 모시는 사람들)에서 “우리나라 곡물 자립도가 겨우 23% 안팎인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인민들이 굶주린다는 북한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2012년 기준으로 남한의 곡물 생산량은 456만 톤인 데 반해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467만 톤이다. 남한보다 11만 톤을 더 생산했다. 작년의 경우 그 격차가 더 벌어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식량기구와 유엔세계식량계획에서 밝힌 통계 수치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가올 기후변화와 식량위기 상황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비와 준비가 이토록 허술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의 제안처럼 농민 기본소득이나 농업공무원제도, 농업 대체복무제도 등을 통해서 농민의 수를 늘릴 뿐만 아니라, 소농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칠 필요가 절실하다. 이것은 식량자원의 무기화라는 수식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식량주권에 비상등이 켜졌다. 그리고 이 비상등은 소농이라는 색다른 주체성 생산을 요구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상황을 심상치 않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생태위기가 문명 전체의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다. 그러나 무너져 가는 바벨탑에서 사분오열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를 짓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필요하다. 이미 도시의 곳곳에서 소농을 지지하거나 직접 소농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귀농귀촌은 대세가 되었고, 생활협동조합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안은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도 “혁명가도 혁명운동도 없지만, 도처에 혁명이 있기 때문에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일갈하지 않았는가? 바로 소농운동은 도처에서 발흥하고 있는 혁명이다. 오늘날의 인류 재건과 세계 재창조의 과제 앞에 가장 문화적이고 덕성과 대지의 윤리에 기반한 소농운동이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소농운동을 통해 생존의 갈급함과 절규만이 아니라, 보다 부드럽고 덕성스럽게, 그리고 생명에너지와 활력에 기반하여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

 

오늘 나는 텃밭에서 나온 배추로 만든 겉절이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도시텃밭이라는 작은 땅뙈기에서도 엄청난 생태적 지혜와 상상력과 영감이 발동한다. ‘소농은 혁명’이며 ‘문명의 뿌리’라는 점은 나의 식욕과 미각에서도 느껴진다. 그 혁명의 가능성은 나를 배부르게 한다. 지혜의 대식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땅과 흙과 소농은 수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생활협동조합은 소농의 아이디어와 지혜를 연결시키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며, 문명 전환의 마중물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농의 전 지구적인 결사체인 <비아캄페시나>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단결하는 이유는 휴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헌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보다 공정한 세상을,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진정한 평등과 사회정의가 존재하는 세상을 꿈꾼다.” (비아 캄페시나의 사무총장 라파엘 알레그리아 (1996-2004))2)

 

 

1) 로이크 쇼보, 『지속가능한 발전』, 윤인숙 역, 현실문화연구, 2011, 124쪽.

2)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 『비아캄페시나』, 허남혁 외 역, 한티재, 2011, 26쪽.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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