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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반정치의 정치학
2017-05-26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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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치의 정치학

 

황규관

시인, 『삶이 보이는 창』 편집인. 전태일문학상에 시 ‘지리산에서’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시집 『정오가 온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공저) 등이 있다. 

 

『정치를 말하다』

가라타니 고진 씀,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0

 

 

어소시에이션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소설가 고아라시 구하치로가 짧은 질문을 던지고 가라타니 고진이 긴 답을 하는 형식으로 짜인 전작 대담집이다. 짧은 대담의 모음집이 아니고 기획된 대담집이라 그런지 흐름이 자연스럽고 내용도 연속적이다. 대담자인 고아라시의 후기에 의하면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투쟁을 축으로 역사검증을” 하는 데 이 책의 기획 의도가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역사”와 “투쟁”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경우가 큰 축을 이룬다. 숨어 있는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철학이나 이론은 역사적 조건과 떼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경우를 통해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근현대사와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탓에 이 부분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지만, 순전히 참고사항으로 역자의 말을 빌려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의 흐름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치를 전달할까 한다. “첫째 인간 가라타니와 그의 사상 사이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흥미로우며-인용자), 둘째 1960년대 대학생부터 가장 최근까지의 사상적 역정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책의 제목이 ‘정치를 말하다’이지만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좁은 의미로서의 정치에 대한 텍스트는 아니다. 저자가 참여했던 과거의 운동을 재평가하면서 저자의 사상적 변화를 고백하고, 또 변화되어 가는 관점으로 지난 역사를 해석하는 형식을 가진 책이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에 대한 통찰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정치에 대한 다른 관점을 얻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사유에 기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추가할 수 있다.

 

특히 칸트에 기대 말하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도 현재 걸음마 단계를 지나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철학적 관점을 제공한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부득이하게 우리는 타인을 ‘수단’으로서 다룰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상대를 목적(자유로운 존재)으로서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칸트는 상인자본이 배제된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루동보다 50년 앞선 기획이기도 하다. 고진은 “프루동도 마르크스도 칸트 윤리학의 연장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윤리학이 없는 “사회주의는 국가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한다.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실 이 책 곳곳에서 고진은 사회주의를 윤리나 종교의 층위로 놓고, 다시 말하면 칸트식의 ‘규제적 이념’으로 놓고, 구체적 투쟁과 운동에 관계해서는 ‘구성적 이념’으로 설정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게 얼핏 보면 낡은 이분법적 태도로 보이지만,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언제나 구성적 이념과 상호작용하는 것이기에 규제적 이념이 이데아 또는 도그마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구체적 실천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즉 가라타니 고진이 사회주의를 윤리나 종교로 격상(?)시키는 것은 사회주의를 초월적 위치로 이동시키려는 것이라기보다 구체적 실천에 필요한 변함없는 동력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구체적 실천에서 부단히 이념을 제거하려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맥락 위에서 이 논리가 제기된 것을 우리는 깊이 유념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강조하는 ‘어소시에이션’은 1990년대 일본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다시 한 번 강조되는데,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사회구성체에 대항하는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 워커즈 콜렉티브workers’ collective와 같은 기업, 그리고 지역통화와 금융업” 등이다.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고진의 이러한 강조는 다음과 같은 종래의 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 위에서 이루어진다. “종래의 혁명운동은 ‘생산’ 과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총파업을 대망합니다. 혹은 총파업이 일어나도록 노동자의 ‘의식’을 높이는 운동이 중요시됩니다. 또 노동자를 조직하는 지식인의 당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유통’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력 상품이 만든 상품을 노동자 자신이 사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 노동자는 그들이 가장 약한 장소인 생산 지점만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의 입장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소시에이션의 기능과 역할을 아무리 강조한대도 고진이 진단한 일본 현실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사회’가 강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데, 지금 일본은 1990년대 이르러 “다양한 공동체, 중간단체와 같은 것이 일제히 해체되거나 이빨이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곳곳에서 소멸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소멸과 함께 공동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개인도 사라”지고 “완전히 사적私的이거나 아톰(원자)화한 개인만이 남았”다. 결국 “공동체의 소멸”은 “타인과 연대가 가능한” 때로는 “공동체에 대항가능한” 자유인으로서의 “단독자”가 사라지게 하는 결과까지 가져온 것이다. 왜냐면 자유인으로서의 단독자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에 대항하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개인

 

저자의 일본 현실에 대한 이런 진단은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그리 눈에 띄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극단적인 사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연합에 무관심한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라고 하면 무조건 개인의 생활에 개입하는 억압체제를 떠올리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고진을 살짝 비틀어 말하면, 자유는 공동체 안에서 사적 영역에 대한 공동체의 개입과 동일화 압박1)에 반작용하면서 발생하는 활기 같은 것이지 공동체 밖에서 곰팡이처럼 번식하는 방임은 아니다. 더불어 사회적 연합에 무관심한 공동체는 대체적으로 시장친화적인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유인으로서의 단독자는 어떤 공동체가 밖에서 작용하는 외압에 맞서 투쟁할 때 역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평소에는 구성원들 간의 소소한 생활의 교류 속에서 공동체의 동일화 압박을 받지만 개발이라든가 국책 사업이 그 공동체를 침입했을 때 그것과의 투쟁 속에서 자유로운 단독자로 탄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공동체적 삶이 망실된 상태에서 ’단독자의 탄생은 가능한가?’ 이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분명하게 단독자란 “공동체에 등을 돌리고 내부에 틀어박힌 개인”이 아니라고 말하며, 어떤 공동체냐에 따라 탄생하는 개인도 다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성) 자체가 공동체가 가진 특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공동체의 소멸은 단독자도 연대도 그리고 사회주의도 불가능하게 한다.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지리멸렬은 노동조합이 이미 공동체적 성격을 잃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파로 나뉘었던 시절은 그나마 정파 간 갈등이 노동조합 내의 활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외주하청, 인턴 등으로 나뉜 노동 현실 속에서 생명의 기본 활력은 개별자의 이해관계 속으로 빠르게 편입되어 버리고 만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규제적 이념(목적)은 모두 폐기되고 구성적 이념(수단)만 남은 것이다. 그 위에서 펄럭이는 것은 당위와 도덕의 깃발뿐이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끊임없는 정규직으로의 전환 요구뿐이다.

 

사회가 없는 사회는 따라서 삶의 모든 문제를 국가 정치의 차원으로 부단히 집결시킨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국가법정으로 또는 ‘정치적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공동체적 장은 사라지고 국가 정치만 남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일본에서 벌어진 이런 현상의 계기를 고이즈미 정권으로 잡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중간세력의 잔당을 ‘수구세력’이라고 부르고 일소했던 것입니다. 앞서 몽테스키외가 중간세력이 없는 사회는 전제국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전제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전제적 사회는 특별히 전제군주나 군사적인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전체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전제국가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의제를 넘어 공동체의 연합으로

 

대의제는 확실히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 국가의 표상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도 대의제를 민주주의 제도로 인식하지 않은 것 역시 알려진 사실이지만, 저자에 의하면 “몽테스키외는 대의제란 귀족정이나 과두정이라 말했”다. “그에 반해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비뽑기에 있다고 했”으며 “실제상 권리에서 평등인 것이 민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제라는 틀에 갇힌 “전제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강조-인용자)”이며 실질적으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

 

저자가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라고 “데모크라시”의 구체적 예를 콕 집어 말했다고 해서 우리가 통상 인식하고 있는 집회 및 시위로만 “데모”에 대한 상상력을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데모demo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추상적인 ‘민중’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잠재적이든 현실적이든) 자유로운 단독자를 구성하는 마을, 즉 공동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가 강조했듯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단독자)”이 탄생하는 것이 오늘날 모든 사회를 압도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원자화시킨 “자본=네이션=국가”에 대항하는 기본토대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는 일테면 일군의 전통 좌파들이 주장하듯 노동자 계급의 사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사회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말하는 “자유로운 개인”은 추상적인 또는 원자화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하여 존재하는 ‘단독자=개인’을 말한다. 따라서 문제는 협동조합이든, 소비자조합이든, 참외 작목반이든, 여성글쓰기 모임이든, 노동조합이든 제대로 된 어소시에이션, 즉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가 그런 어소시에이션으로 연결될 때, 그 사회는 “자본=네이션=국가”를 극복할 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소시에이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운동 자체가, 즉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 자체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아닐까? ‘규제적 이념’은 언제나 현실에서 그 몸을 얻어 운동하는 원리를 가지기 때문에 말이다.

 

1) 사회가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고 계몽하려는 현상

 

 

* 『모심과 살림』 8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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