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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촛불광장에서 발견한 유대와 네트워크를 향한 열망
2017-06-01 09:45:00

 

촛불광장에서 발견한 유대와 네트워크를 향한 열망

 

글 류하

(사)한알마을 대표. 원주 지역에서 공동체운동과 ‘무위당만인회’ 일을 돕고 있다.

syukim333@hanmail.net

 

 

광장은 빛났다. 한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의사표현 방식으로도 빛났고, 거대권력과 오류에 대한 비판과 자기 성찰로 빛났다. 그 결과 현직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광장과 촛불에 대한 수많은 예찬들이 쏟아지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정치집단이 촛불과 광장의 승계자인 듯 행동한다. 광장이 제기하는 바는 민주주의요, 권력교체라고 말한다. 모든 언론과 지식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갑자기 다가온 제도적 권력교체장치인 선거에서의 행동에 따라 세상이 변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광장이 제기하는 바가 민주주의 문제요,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요, 권력교체가 이루어지면 문제가 풀리는가? 과연 광장과 촛불의 의미는 그렇게 한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사회운동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권력의 민주적 통제와 제도의 개선을 통해 근대적 대의민주주의로 향하는 벡터1)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소小공동체운동의 확장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자율·자립·자치로 향하는 벡터이다. 전통적 사회운동의 경우 한국사회가 권력과 자본의 견제로 인해 근대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전자에 초점을 둔다. 반면에 생명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 및 평화운동은 후자를 지향한다. 이 둘은 단순히 벡터만이 아니라 철학적 관점과 운동 방법, 실천에서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2016년 10월 27일에 시작된 ‘촛불혁명’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1단계 행로를 마감했다. 현재 정국은 대통령선거로 요동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광장과 촛불’의 의미가 대의민주주의로 수렴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면 거기에서 새로운 대안사회운동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결사와 유대의 광장

 

일반적으로 근대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주체들의 결합인 결사체(association)의 조직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에 벌어진 광장의 집회와 행진은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필자가 주목해서 본 것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첫째로, 주도하는 결사체가 없는 광장이었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있었고, 그 둘을 포함해 다양한 조직association이 연대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이 있었지만 광장은 이들의 계획으로 열린 것도 아니고 이들의 주도로 진행된 것도 아니다. 이들은 어찌 보면 ‘판’만 깔았다고 할 수 있다. 광장의 진행 과정에서도 평범한 청소년을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의 발언이 주를 이루었으며 ‘국민행동’에 속한 조직원들의 수는 적었다고 할 수 있다.2) 오히려 ‘국민행동’이나 활동가들의 의도가 촛불시민들에 의해 저지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광장은 질서 있게 진행되고 정리되었다.

 

두 번째로, 자유로운 개인들도 있었지만 또한 수많은 유대3)들의 참여가 돋보였다는 점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양한 경로로 만날 수 있었다. 일 관계로 광주와 부산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의 촛불집회에도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주변 사람들이나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반창회, 계모임, 옛 친구들, 프로스포츠 팬 모임, 스포츠 동우회, 사업장 동료, 교회나 성당모임, 인문학공부모임,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회적 유대를 통해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촛불은 특정한 계급집단이나 이념집단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생각과 삶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의 유대와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세 번째는 SNS라는 가상공간에서 유대의 대화방이 위력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밴드band’는 대체로 특정한 기억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유대의 공간으로 보인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했다든가 하는 공동의 공간과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일상의 삶에서 유사한 정서를 가지고 소통하는 그룹이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는데, 이 유대의 공간을 통해서 수많은 소식과 감정, 그리고 의견이 오가면서 광장의 참여가 늘었다고 본다.

 

넷째는 ‘웃픈’이라 표현되는 풍자와 애도이다. ‘웃고 있는데 슬픈’이라는 이 표현은 외형적인 기쁨과 환희가 가슴 밑바닥에 깔린 슬픔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슬픔은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도 있을 것이고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아픔과 굴절로부터도 기인할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자신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도 정서상으로 결코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이런 아이러니irony한 정서로 인해 광장은 분노가 아니라 다양한 풍자와 해학이 넘쳤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감정은 슬픔이었다고 생각된다. 광장에 등장한 절묘한 풍자의 깃발은 물론이고 발언자들의 기발한 언어구사를 보면서, 87년 6월 항쟁이 광주항쟁의 슬픔을 깔고 있듯이 2016~17년의 촛불광장은 2014년 세월호의 슬픔을 저 깊이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광장은 단순히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내면에서 삭이고 삭여서 건강한 삶의 문화로 다시 꽃피워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탄핵 이후 광장은 조용해졌지만 필자가 접한 많은 수의 유대들 사이에서는 일상의 삶에서 온·오프라인을 통한 소통과 공감을 통해 광장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장에 참여했던 필자 주변의 유대들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다시 유대 활동을 통해 그 공간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마도 대부분의 유대들이 그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유대들이 만든 광장은 말 그대로 공동체적 잔치판이었다. 서로의 유대를 넘어 ‘새로운 나라’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며, 먹을 것이 나누어지고, 웃음과 연대가 흐르고, 감정의 공유가 일어났다. 그런데 광장은 계속될 수 없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의 에너지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에너지 축적의 결과물로 광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저항의 뒷 공간은 늘상 공동체로 메워진다. 80년 광주항쟁에서 보여준 광주시민들의 공동체가 그러하고 87년 6월 항쟁의 뒷 공간을 버텨준 공동체적 모습이 그러하다.4) 그것은 거대권력에 저항하는 약자들의 필연적 자기 보호본능이자, 자립과 자치의 의지이다. 그것은 그 거대함에 맞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순간에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지고지순한 신뢰에 기초한 자율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의 에너지가 하나의 큰 문제, 예컨대 민주주의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면 바로 광장 이후 일상적 삶의 과제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늘상 광장이나 저항을 바라볼 때 민주주의만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장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다시 돌아가 일상의 공간에서 이웃과 꾸려야 할 삶의 문제가 보다 장기적이고 삶의 질에 더욱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또 다른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 반복되어온 역사의 일부인 ‘광장에서 이기고 생활에서 지는’ 한반도 역사와 ‘일상의 우울과 광장의 조증5)’의 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일상생활로 살려 와야 하는 광장의 에너지는 무엇이고, 또한 현재를 넘어서서 자신의 성숙과 진화를 위해 일상생활에서 이웃과 함께 행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근대문명이 강요해 온 ‘자유로운 개인의 고독한 삶’과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나’라는 에고ego의 주체성인가? 아니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자율적 존재로서, 주인공主人共6)으로서의 각성인가? 전자가 고독한 개인을 넘어서는 길이 결사結社의 사회적 삶이라면 후자의 경우 우주적 존재로서의 각성을 통해 공생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다. 이것은 결국 일상의 행복과 평화가 제도와 정책의 문제인가. 아니면 각성과 수행 그리고 인간성숙의 길인가의 문제이다.

 

 

‘이게 나라냐?’에 대한 성찰과 공동체

 

세월호 침몰과 304인의 희생자, 그리고 권력의 무능력함은 사람들 내면에 분노와 슬픔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행복한 사회적 삶이 보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 근대국가의 기능 중 하나는 폭력의 배타적 독점을 통해 자연재해와 인재人災로부터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이 보여준 것은 국가의 무능력과 부패,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근대국가가 시민사회의 공동체를 보장하고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동체 붕괴에 따른 ‘돌봄의 위기’이다. 근대문명은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마을공동체는 물론이고 가족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해체해 왔다. 이것은 또한 전통적인 공동체적 돌봄 문화의 해체이며 이로부터 파생된 돌봄 수요를 국가의 사회보장정책에 의존하게 만든다.

 

그런데 근대국가의 사회보장체계 수준과 서비스의 질은 단순히 그 사회가 쌓아놓은 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민주적 역량 및 시민사회의 내적 성숙도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사회에서 국가권력의 부패와 작동 오류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시민사회 내 공동체성의 빈곤과 돌봄 문화의 위기이다. 이는 세월호 사건 발생 시부터 다양하게 제기된 구조대원들이나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웃과의 협동, 자연과의 공생과 겸손, 타인과 약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 등 일상적 삶에서 공동체 가치의 내재화가 빈곤해졌다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지속적으로 제기된 것이 영유아와 아동, 노인에 대한 돌봄 문제이다. 우리 사회 돌봄문화의 취약성과 시장의존성은 공동체로서의 나라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공동체성의 부족에 따른 불안감이다. 특히 핵가족화되어 있는 가족공동체의 경우, 부모는 경제생활을 위해 밤낮으로 일터를 전전하고 아이들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성공의 꿈에 매달려 무한경쟁의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는 모습은 가족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의문케 한다. 이러한 상황은 청년들에게는 결혼을 기피하거나 미루는 요인이 되고. 결혼한 젊은 부부에게는 아이 낳기를 두렵게 만들며, 장년의 퇴직 예비자들에게는 노후와 죽음맞이를 두렵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복지는 복지서비스 제공 기관을 기업화함으로써 나라와 개인이 복지의 일부를 부담하는 체계로, 복지시장 전체를 기업이 주도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곧 평범한 사람들의 노후를 불안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더군다나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된 채 각기 상이한 근대화 과정을 진행해온 남과 북의 권력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갈등하고 대결함으로써 불안을 지속시키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한반도를 둘러싼 정정불안과 주변국들의 위협에 대한 국가권력의 무능한 대처7)는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총체적 불안감 속에서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과 선장이 탑승자들에게 했던 ‘가만 있으라’라는 말은 시민들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언어가 되었다. 이 말에는 생명의 위기 속에서 시민을 위기 개척의 주인공으로 보지 않고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능력은 없고 권력만 있는 국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듯 침몰하는 세월호 속의 생명들은 위기 개척에 누구보다도 공동체적이었고 이것이 광장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시키는 대로만 따른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살아 나가기 위해 주어진 조건에서 온 힘을 다했다. 다른 승객들도 그랬다. 구명조끼를 찾아주고 서로 입혀주고 끈을 묶어 주었다. 부모와 헤어져 우는 아이를 달래며 밖으로 밀어 올렸다.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내 발을 잡으라며 서로를 지켰고 친구를 찾으러 배 안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잘못된 지시를 그냥 따르다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아니다. 함께 살려던 사람들을 제각각 살아남도록 강요해 죽인 사건이다.” 8)

 

 

촛불과 태극기-시민과 국민을 넘어

 

촛불광장에 이어 보수 우파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의 태극기 집회가 대비적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촛불 대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었다. 그들의 주장에는 ‘탄핵 기각’도 있었지만 ‘계엄령’ 요구처럼 촛불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사를 주장하는 구호도 있었다. 이들이 일당을 받고 동원되었다는 보도도 있었고 아니라는 증언도 있다.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약칭 탄기국’라는 조직이 주도한 이 집회는 종편채널에서 촛불과 짝을 이뤄 지속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집회가 사용하는 언어의 공격성과 행위의 과격성은 촛불에 참여한 시민들에게는 심리적 위협감을 주기도 했다. 이들이 ‘국민’이라고 자신들을 호칭한 반면 촛불광장에서는 참가자들을 ‘시민’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국기는 근대국가의 상징이자 국경을 전제한다. 촛불은 아주 오래된 어둠을 밝히는 빛의 상징이며 거기에는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다. 또한 국민은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인 부국강병과 획일적 충성논리에 충실하다면, 시민은 근대 시민혁명의 가치인 자유·평등·우애의 사회적 실현에 충실하다. 그런데 지난겨울 한반도 남단에서는 압도적 다수인 촛불의 힘으로 혁명에 가까운 일을 해냈지만 반면 태극기를 든 사람들 또한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일상의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혹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거리두기로 넘어가기에는 그들이 우리 주위에 아버지 어머니로, 삼촌으로 아주머니로, 지역사회와 유대의 공간에서 어른으로 혹은 선생으로 존재하기에 곤란함이 있다. 이 불편한 진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양극단의 국가로 분단되고 전쟁을 치러온 한반도의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떻게 근대문명을 넘어서느냐에 못지않게 여하히 근대국가를 넘어 평화와 통합의 한반도를 만들 것인가의 과제이다. 대선 국면에 접어든 4월 현재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핵실험가능성이 높아지고, 미국의 대규모 군사력이 한반도 주변으로 이동함으로써 또 다시 전쟁의 위험이 전파되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에 배치된 사드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여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한 제제조치에 동참할 것을 중국에 요구하고 있다. 결국 한반도의 구성원들은 주변의 강대국가들 틈에서 여하히 ‘평화의 공동체 나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진행되어온 남북의 근대화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성숙된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난 30여 년의 탈근대적 생명운동의 비판적 성찰은 적어도 태극기와 인공기로 대변되는 남북의 근대체제를 중심으로 해서는 희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근대적 주체로 상징되는 시민이나 근대국가의 구성원인 국민, 근대사회주의 혁명의 도구가 되어버린 인민을 넘어서 촛불이 상징하는 ‘더불어 사는 자율적 공민共民9)’을 표현하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맡겨야 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우리 사회가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 중에는 근대화 과정에서의 ‘잘못의 누적(적폐)’도 있고, 근대문명 자체의 문제도 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 또는 하도록 강제해야 할 일도 있고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문명을 일구기 위해 삶의 문화로 구현해 나가야 할 일도 있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일상의 삶은 다양한 형태의 유대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직장의 모임이나 사업관계 등 이해관계에 얽힌 불합리한 유대관계도 있을 것이고 반창회나 친목계모임 같은 순수한(?) 모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그것은 공동체적 돌봄의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들은 애경사愛敬事의 상호부조 기능도 하고 종종 구성원들 간의 화합과 친목에 기여하지만, 한편 선거나 민감한 이슈 앞에서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 및 반대,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거나 사회적 판단을 확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붕괴 후 한국인들이 기대고 있는 유대의 틀이 국가가 해야 할 복지와 공동체성을 대신할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어쩌면 새로운 문명의 맹아로서 기능할 것인지는 아직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촛불광장에서 목도한 다양한 형태의 유대들은 일상적 삶의 유대에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조직화된 단체의 참여보다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국사회를 비롯한 세계는 지금 반복되는 경제위기-그 주기와 규모는 점점 짧아지고 커지고 있다-와 생태계 파괴 같은 근대문명의 폐해, 그리고 근대국가가 벌이는 패권적 전쟁과 핵발전소, 핵무기 개발 같은 인간 행위에 고통스런 몸살을 앓고 있다. 이것은 근대문명의 붕괴 조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문명은 사회체제의 전환과 다양한 사회운동을 필요로 하지만 또한 인간의 성숙과 진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하다. 결국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동적 국민됨과 개별적 시민에서 벗어난 능동적이고 공동체적인 주인공主人共의 발견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의 제도와 정책에 규정되고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개혁하는 한편, 우리 사회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문화를 만들고 함께하는 사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근대국가를 넘어선 나라’는 수많은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지역공동체들의 자립과 자치에 근거한 새로운 문명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 vector, 방향과 크기를 가지는 수학 용어.

2) 2017년 2월17일 서울혁신파크+50에서 열린 ‘사회운동 활동가포럼’ 발제 자료 참조.

3) 紐帶; community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일상생활에서 맺고 있는 다양한 정서적 관계망들

4) 이‌ 항쟁기간 중에 많은 시민들이 솔선수범해서 부상자와 사망자를 돌보고, 시위참가들과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모습이라든지, 명동성당 농성시 여학생들의 도시락과 인근 상인들의 지원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5) ‌“링해볼까요” 5화 중 2화 , 정연주 외, <한겨레신문> 2017년 2월 2일과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에서 각각 인용.

6) ‌필 근대 주체철학의 ‘주체’에 대하여 그것이 후천적으로 형성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되고, 관계에 의해 의식이 규정되는 바 ‘허구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생명존재의 우주적 각성과 연기적 존재로 본다면 공공성의 주인(公) 공동체의 주인(共), 자기(허구적 자아와 EGO)를 비우는 수행의 주인(空)으로서 ‘주인공’이 미래지향의 공공(公共)성에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7) ‌개, 한·일 간 위안부 협상 과정에서의 굴욕과 비민주성, 사드 배치 과정의 비민주성과 중국의 보복에 대한 안이한 대처 등, 국가 권력의 대외 문제에 대한 무능은 촛불 광장의 또 다른 동인이었다.

8) 미류, “두 번째 봄에 띄우는 질문”,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 539쪽.

9)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근대체제가 자유와 평등의 개인(personality + individuality)으로 대변되는 주체의 결사와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그리고 그 개인을 노동으로 이용하는 시장과 자본으로 구성된다면, 탈근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개체로서의 생명은 우주성을 담지하고 있고(divinely)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공동체적으로 진화해 왔기에 각성을 통해 공공성과 공동체, 그리고 인간성숙(spirituality)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담아내는 것으로 공민(共民)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 『모심과 살림』 8.5호(2017 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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