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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놓아버린 이름, 붙들지 못한 이름 - 여성생산자
2017-07-10 17:34:00

 

놓아버린 이름, 붙들지 못한 이름 - 여성생산자

 

글 정봉연

전 한살림 실무자. 농사·요리·세상살이에 관심이 많다. beanstory@naver.com

 

 

‘한살림’이라는 터를 닦고 하나둘 모여들어가며 한 걸음씩 내딛어온 세월이 서른 해가 쌓였다. 나는 그 서른 해 가운데 끝자락 여섯 해를 생산자연합회에서, 연수원에서, 식생활교육센터에서 일하다가 서울살이와 조직살이에 지쳐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반년 후 한살림 생산(자)조직의 역사를 정리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고, 서른 해 중에서 23년여를 일했던 선배와 그 작업을 진행했다. 올해(2017년) 초까지 반년 정도에 걸친 작업의 결과는 『한살림농부 30년 – 밥, 농부 그리고 한살림』, 『생산자부인도 사모님도 아닌 한살림생산자이야기』라는 두 권의 자료집으로 묶였다.

 

 

‘한살림’, ‘생산자’, ‘역사’, ‘여성’.

한살림이나 생산자(농민)에 대해서는 실무자 시절에 충분히 훈련받고 고민하며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리됐었다. 하지만 ‘여성’이나 ‘역사’는 낯설었다. 지금까지 그냥 ‘여자사람’으로 살아왔지, 딱히 ‘여성’을 따로 구분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아니라 지나간 일들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지는 새롭게 안겨진 과제였다. 이 글은 자료집을 정리하며 고민하고, 보고, 듣고, 나눈 생각들이다.

 

 

생산자의 역사, 여성생산자의 역사

 

지나간 자료를 정리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지금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살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한살림운동 30년 돌아보기, 그리고 여성생산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 두 가지 과제를 받아들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왜 여성생산자의 역사를 별도로 정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소비자조합원과 마찬가지로 생산자조직을 이루는 생산자 또한 개개인이 아니라 농가, 세대를 기본 단위로 한다. 그리고 2009년부터는 개별 세대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5세대 이상이 모여 생산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2016년 12월말 기준으로 생산자조직은 가공생산지 90여 곳을 포함해 2,150세대, 113개 생산공동체로 구성되어있다. 17개 지역별 조직 외에 가공생산협의회가 있고 청년위원회, 여성위원회, 생산기술연구회(농산물위원회), 정책위원회, 교육홍보연구회 등이 같이 전국조직을 운영한다.

 

<그림>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조직도

 

생산자연합회의 이사회는 17개 지역조직의 대표와 가공생산협회의회 대표, 각 위원회 위원장이 참여한다. 여성위원회는 이 구조와 마찬가지로 지역조직의 여성대표, 가공생산협의회의 여성대표가 위원으로 참여한다. 운영구조에서 보듯이 남성생산자조직과 여성생산자조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내부의 특정 위원회이다. 그러므로 생산자조직의 역사는 여성생산자가 같이 걸어왔고, 이뤄온 성과이다. 그런데 왜 여성생산자 역사가 따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여성생산자의 역사를 별도로 정리하면 좋겠다는 제안은 2015년도 여성생산자위원회에서 제안된 사업계획이었다.

 

여성위원회는 단순한 생물학적 성별로 구분되는 한편,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이후에 조직을 이끌어갈 사람을 키우는 성격을 갖는 청년위원회는 남성청년들의 모임으로 인식된다. 한살림생산자로 가입하려면 신규생산자 가입교육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 부부가 같이 참석하거나 여성생산자가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여성생산자에게는 한살림생산자나 조직운영을 고민하고 이끌어갈 사람으로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생산자부인이 아닌 ‘여성생산자’

 

2,150세대(곳)가 등록된 회원DB에 부부(농사를 같이 짓는 다른 관계를 포함)가 같이 파악되어 있는 경우는 1,607세대이다. 그중 1,536세대(95.5%)는 남성이 그 농가를 대표하고 있고, 여성이 대표자인 경우는 71세대(4.4%)이다. 대표생산자의 연령 분포를 보면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비율이 제법 높아 전체 구성원의 약 30%를 차지한다.

 

여성생산자는 ‘한살림생산자부인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996년 1월에 첫 공식적인 만남을 갖는다. ‘한살림생산자’라는 이름을 같이 쓴 지 10년이 지난 해였다. 이 만남에 대해 “왜 이렇게 늦게서야”와 “왜 여성모임을 별도로”라는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질문 모두에는 “왜 그때에”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1996년 무렵에는 생산자조직이 별도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힘든 한살림농사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고 서로 응원하는 생산자연수가 매해 열리고 있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열린 연수는 생산자들이 직접 유기농사 기술을 나누는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의 대다수는 남성생산자들이었다. 때문에 교육이나 연수, 만남의 기회에서 소외된 여성생산자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비혼 여성이었던 서순악 생산자가 1994년 무렵에 한살림 생산자로 결합하면서 여성농민의 소외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활동하던 소비자조합원들과 연대해 여성생산자들의 첫 만남을 마련했다. 그 행사를 지원했던 실무자들은 칠판에 “96 한살림생산자부인모임”이라는 종이현수막을 붙였다. 당시 참석자들이 “우리도 당당한 여성생산자”라며 “생산자부인이 아닌 여성생산자”라고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무자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난 30년의 자료들을 들춰봤을 때 아직까지도 여성생산자들이 보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조직의 정책이나 제도가 뒷받침하는 내용도 거의 없다.

 

<사진> 여성 생산자들의 첫 만남, 1996년 한살림생산자부인모임

 

2000년대 중반까지는 교육연수에서 소외된 여성생산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일 년에 한 차례 나들이 성격의 전국 단위 연수를 진행하는 것이 여성생산자모임의 역할이었다. 여성생산자가 동등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대한 요구나 정책적인 노력보다는 “남성생산자를 뒷받침하느라 고생하는 OOO생산자의 부인” 정도의 인식이 강했고, 따라서 연수 또한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위로’하려는 성격으로 진행되었다.

 

2003년에 생산자조직이 별도의 틀을 갖추면서 여성생산자모임은 여성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여성위원장은 여성생산자를 대표하는 의미로 당연직 부회장이 된다. 이후에 생산공동체나 지역별로 조직이 다듬어지면서 여성생산자들도 공동체·시군연합회·행정도별로 모임을 별도로 꾸려간다. 여성생산자모임은 대체로 일 년에 한두 번 연수를 하거나 크고 작은 도농교류 행사가 있을 때 뒷수발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조직의 접근이 살짝 달라진다. 조합원이 늘어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는 멀어졌고, 물품에 대한 기준은 높아지고, 도농교류가 더 중요해졌다. 몇몇의 생산자와 조합원이 만나서 이심전심으로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규모의 수준을 넘어섰다. 수확이나 선별을 여성생산자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엄격해진 생산출하기준을 직접 전달할 필요가 생겼고, 생산지로 찾아가는 도농교류나 생산지와 소비지의 자매결연이 늘어나면서 여성생산자들이 직접 조합원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생산자도 같이 늘어나던 때라 전국 단위가 아닌 지역별 여성대표자들이 모이는 연수로 진행했고, 연수 내용 또한 회의진행, 의사소통, 갈등해결프로그램 등 여성 대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초보적인 리더십 훈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기존에 노고를 위로하던 것에서 ‘여성’생산자로서 별도의 역할을 고민하고 활동을 계획하게 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달리 보면 가족을 돌보고 집안살림을 챙겨가며 농사를 같이 짓는 여성농민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해 조직을 같이 꾸려나가기보다는 ‘여성’생산자로서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을 더하는 내용이었다. 조직운영이나 교육연수에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참여하는 제도나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왜 여성모임을 따로 꾸렸을까. 당시 업무를 했던 선배는 조직이 남성생산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여성생산자의 조직화 방식에는 별다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었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후에 여성생산자들을 만나면서 들었던 이야기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보다는 세대에 따른 생각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다.

 

 

놓아버린 이름, 붙들지 않은 이름

 

‘한살림농부 30년’을 조직구조나 정책, 사건 중심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으니 그 역사를 같이 채워온 농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기로 했다. 현재 남아있는 회원뿐 아니라 가입한 이력이 있는 모든 생산자를, 농가 대표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같이 농사짓는 배우자의 이름도 함께 넣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다. 2003년에 생산자조직을 재창립할 당시 회원이 588세대라는 기록이 있으나 명단은 별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 후 운영회의에서 회원가입 보고나 승인을 하게 되면서 명단이 정리되어 갔다. 때문에 1986년부터 매해 가입연도별로 명단을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재창립한 2003년을 기준으로 앞 시기는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해서 뭉뚱그려 이름을 적고 이후는 연도별로 가입자 명단을 정리했다. 2003년 이전에 가입했던 생산자 회원은 당시의 소식지, 생산계획 자료, 이런저런 회의자료를 퍼즐조각처럼 짜 맞췄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세대의 대표생산자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이름을 같이 파악하고 자료로 정리한 것은 2011년에 생산자수첩을 만들면서부터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 배우자의 이름이 같이 정리된 자료는 350여 세대가 적힌 2001년도 생산자수첩이 전부였다. 때문에 가입했다가 2011년 이전에 탈퇴한 세대는 농가대표자 외의 생산자, 대체적으로 여성생산자의 이름을 파악할 근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2011년 이전에 가입해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세대의 경우 가입연도에 부부의 이름을 같이 넣기 위해서는 현재 정리되어 있는 자료와 일일이 대조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한살림농부의 역사를 써왔던 3700여 세대를 기록했고, 그중 약 45%인 1700여 생산자의 옆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품에 붙어있는 친환경농산물 인증 스티커에서도 여전히 여성생산자의 이름은 찾기 힘들고, 대부분의 문건에서는 농가를 대표하는 남성의 이름만이 등장한다. 많은 자료가 2,000명의 생산자와 2,000세대의 생산자 사이를 오간다. 여성위원장(부회장) 외에 여성이 지역대표로 이사회에 참여하게 된 것도 10여 년 만에 올해(2017년) 처음 있는 일이다. 땅을 가꾸고 먹을거리를 나누어 생명세상을 열어가는 길에서 여성생산자들은 스스로의 자리를 어디에 두었던 걸까. 같이 걸어왔던 길동무들은 여성생산자의 자리를 어디쯤에 마련해 두었던 걸까.

 

생산자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선배는 여성생산자를 “OOO생산자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지금 일하는 어떤 실무자는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남성생산자가 조직에서 직책(역할)을 맡았는데 여성생산자를 직책에 맞춰 호칭하지 않으면 섭섭해 한다는 것이다. 남성이 그 농가를 대표해 소통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남성생산자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여성생산자는 그 보조자쯤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생산자 또한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바깥양반’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일부러 여성생산자를 보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대체적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기 십상이다.

 

여성생산자가 직접 쓰거나 인터뷰를 한 글에도 자신을 이야기하거나 여성생산자에 대해 묻기보다는 남편의 생각을 말한다거나, 그 남편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경우가 많다. 올해 새롭게 여성생산자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영숙 생산자는 직접 쓴 글에 ‘한살림농부의 마누라’라는 이름 외에 ‘한살림 여성생산자 대표’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고 적었다.

 

 

가족제도에 묻힌 할매들, 엄마들

 

여성생산자의 역사를 조직의 틀이나 집단적인 활동으로 정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는 여성생산자의 애환과 희생을 드러내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를 원했다. 하지만 여성생산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을지라도 한살림농사를 짓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사소한, 소소한 일상들이, 세상이 돌아가고 한살림을 만들어가는 바탕이 됐다. 때문에 지난 자료에서 여성생산자의 생각이나 삶이 드러나는 글들을 찾고, 현재의 활동을 소개하는 글들을 새로 써서 묶는 방식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1986년 한살림의 시작 또한 느닷없는 빅뱅이 아니라 농약을 칠지언정 땅을 지키고 있던 평범한 농사꾼들이 바탕이 되었음을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안전한 먹을거리나 유기농업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경계 밖으로 밀어놨던 그저 그런 삶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농사 규모가 작고, 지역에서 나서 자랐으며, 많이 배우지 않고 평생 농사를 지어온 여성 어르신농부를 수소문했다. 거창 웅양면에서 할머니 몇 분이 가공용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살림운동이나 조직이 아닌 그 할머니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지금 사는 마을에서 차로 10여 분이면 움직일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 시집을 오고, 평생을 살아온 삶. 고단한 시집살이에 들과 산을 누벼가며 아이를 키우고, 왜정시대, 6·25, 월남전쟁, 새마을운동, FTA까지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나온 이야기. 그러는 동안 ‘이화옥’이라는 이름은 ‘영산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든이 된 지금도 퇴직하고 내려올지도 모르는 자식을 위해 포도과수원을 가꾸고 지키고 있다. 어찌 그렇게 살아왔는지를 여쭸다. 어른들 시키는 대로 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이 ‘고추장도 먹으면 안 되는 쓸데없는 가시내’가 배운 것의 전부라고 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묻자 너덧 살 시절의 기억을 꺼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이야기도 같이 따라나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엌살림을 책임지고 있으니 시집가서도 그 음식들은 해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냥 그 집 음식하게 되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좋은지 싫은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 본적이 없고 그림자처럼 살아온 보통의 할머니들의 삶. 그런 삶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바탕이 되었다. 이화옥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워가며 영농일지를 쓰고, 내 것이라고는 처음인 네 발 오토바이를 타고 마실을 다닌다.

 

전국 단위의 여성위원회는 조직의 모양새를 갖추고 최소한 한 자리쯤 내어주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면, 근거리에 살고 있는 생산공동체에서는 왜 굳이 여성생산자모임을 따로 했을까. 그 의문은 한살림 출발부터 지금까지 같이하고 있는 공근공동체 여성생산자들을 만나면서 풀렸다. 권선분 생산자는 20대 후반에 남편 고 김근호 생산자와 한살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던 김근호 생산자는 행사나 교육에 가느라 집을 비운 적도 많고,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권선분 생산자의 집에는 교육을 하러 온 사람도,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도 숱했지만 같이 앉아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손님들에게 따순 밥을 지어내느라 부엌에서 종종거리기도 바빴다. 도농교류로 마을에 찾아온 소비자조합원들을 만나며 한살림생산자의 자부심을 채워나갔다. 조합원을 맞이하는 날도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었지만 두부를 하는 날은 “비지까지 싸서 보내야” 손님을 제대로 치른 것 같았다. “이 동네 여자들 서너 명만 있으면 이백 명이 와도 눈도 깜빡 안 한다”는 것은 생산공동체가 3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오는 동안 여성생산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가늠케 한다.

 

생산공동체에서는 매월 월례회의를 한다. 부부가 같이 참석하는 공동체도 있지만 둘 중 하나가 그 세대를 대표해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참석하더라도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의에 여성이 나서서 이야기를 꺼내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 마을이 일가친척으로 이뤄졌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공근공동체가 열댓 가구였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여성생산자모임을 따로 열었다. ‘여성’생산자모임이라는 이름이 붙으니 그 집에서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여성생산자를 콕 집어 불러내고,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되었다. ‘나’를 내밀어본 적이 없이 주위를 돌보는 사람으로 길러진 그 세대의 여성들에게 유일하게 편안한 ‘내’ 자리. 그게 여성생산자모임이었을 것이다.

 

“어두컴컴할 때까지 같이 농사일을 하고 들어와 밥을 짓는데 아저씨가 자기 앉을 자리만 딱 밀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땐 미워서 아저씨 숟갈을 안 내줄 때도 있다”는 어느 여성생산자의 이야기. 겨우 숟가락을 내주지 않는 것이 우리네 엄마세대가 생각하는 최대의 응징이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가족을 이루는 결혼. 가족은 매번 그렇게 재탄생되어야 하지만 여성은 ‘시집’을 가고, 그곳의 거름이 되었다. 살림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었고, 자잘한 손길이 가는 들일과 뒤치다꺼리 또한 그랬다. 여성과 여성의 이름은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그림자로 그렇게 같이 사라져갔다.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간다

 

청주의 이대경 생산자는 소비자조합원으로 활동하다 귀농해 어린잎채소를 키운다. 지난 4년여 동안 청주연합회 여성위원회 총무 역할을 맡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며 도농교류 행사를 챙기고 교육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여성생산자 간의 친목이나 교류뿐만 아니라 지역 안에 환갑이 넘은 생산자를 모시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생산자 가족이나 소비자 조합원들과 같이 모여 영화를 보기도 했다. 일일채소를 생산하는 곳이라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적 특성을 살려, 낯설어하는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태국어강좌, 한국어교실, 바자회를 열었다. 지역 내 미혼모가정에 채소꾸러미를 보내는 일을 제안해 이웃을 돌보기도 한다. 농촌에 ‘굴러들어온’ 젊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내 생각을 드러내고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어가고 있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청주연합회 언니, 동생들과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온 이야기이다.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던 여성생산자는 스스로 똑똑하지 못하다며 자신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겸손함이야말로 가장 귀한 자산”이라고 이대경 생산자는 말한다.

 

부여의 여성농민들은 토종씨앗으로 지역 내 소비자조합원들과 어르신농부들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씨앗을 갈무리하고 고르고 보관하는 일이 손은 많이 가고 돈은 안 되지만 그렇게 살아왔던 할머니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지역 안에서 나고 자라는 ‘엄니’들의 씨앗과 그 씨앗의 역사를 모으고, 사람들에게 퍼트린다. 할머니들이 나눠준 씨앗 속에는 그 할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누군가 인정해주지 않았어도, 스스로도 미처 몰랐을지라도 씨앗을 뿌리고, 가꿔오고, 갈무리해온 당당한 농부였음을 후배농부들이 기록하고 이어가는 활동이다. 농사를 짓고, 밥상을 차리는 소소한 삶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뿌리였음을 일깨우며 씨앗들은 다른 농부에게로 퍼져가는 중이다.

 

<사진> 씨앗을 잇고 사랑을 잇는 여성농민들의 토종씨앗 실태조사

 

이삼십대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살며 같이 밥을 해먹고 농사를 짓는 해남 미세마을에는 2016년 말 현재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미세마을에 관심을 갖고 물어오거나 함께 사는 이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높아졌고 현재 지내는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여성이다. 시골살이를 꿈꾸는 여성들에게는 실제 여성들이 시골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보고 듣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때문에 ‘언니집 프로젝트’나 ‘시골에서 언니랑 놀자’ 같은 프로그램으로 시골에 먼저 와서 살고 있는 선배 언니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재주를 배우기도 했다. 여성 ‘선생님’을 찾기가 힘들었지만 그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잘 나서보지 않았기 때문이 크다고 본다. 귀농 4년차인 정혜성 생산자는 농촌에서의 삶에 대해 “쓰러져가는 농촌을 지키겠다거나 살리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저 도시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숨쉴 만한 공간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이곳에서 이런저런 해볼 만한 꺼리들이 보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곳에 있다”고 말한다. 미세마을의 미혼 혹은 비혼 여성들은 동네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타박과 걱정을 듣지만 희생과 헌신의 상징인 며느리나 어머니의 존재가 필수인 전형적인 가족제도와는 조금은 다른 꿈을 꿔보기도 한다.

 

<사진> 해남 미세마을의 젊은농부들

 

 

부르고 붙들어야 할 이름들

 

작업을 시작하며 가졌던 “왜”라는 많은 질문들은 “그때는 그랬구나”라는 단순한 답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니라 “그렇구나”가 된 것은 그게 옳아서라기보다는 그때의 상황들이 그렇고, 그들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생산자부인도 사모님도 아닌 한살림생산자이야기』를 묶어내고 가장 먼저 들었던 반응은 제목이 왜 ‘한살림여성생산자이야기’가 아니고 ‘한살림생산자이야기’냐는 것이었다. 여성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처음 과제를 받았을 때 한살림생산자의 역사에서 ‘여성’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는 것은 “남성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여성에게 별도의 시선을 두지 않는다면 가림막 뒤에 숨고 숨기는 현실을 감안해 이 시점에서 부득이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제목을 ‘한살림여성생산자이야기’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부제에서 ‘생산자부인도 사모님도 아닌’이라고 여성임을 드러내고 있었고, 여성생산자이기 전에 ‘한살림생산자’임을 스스로가, 모두가 인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아 제목을 바꿨다.

 

진보적인 농민단체·소비자생협·시민단체 등이 19대 대선후보들에게 제안한 농정과제의 총괄기조는 ‘농민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이다. 그 문장을 한국사회 전체가 아니라 농촌이라는 지역으로 옮겨와 바꿔본다면 ‘여성이 행복해야 농민이 행복하다’쯤 될 듯싶다. 한국에서 농민, 그것도 여성농민, 거기에다 젊은여성농민, 더군다나 젊은비혼여성농민이라면 얼마만큼의 구석에 가 있을까. 제도로 만들고 정책으로 뒷받침해야 할 내용도 분명 존재하지만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를 바꾸어야 할 부분도 있다. 뒤늦게 2011년부터라도 여성생산자의 이름이 등록된 것은 매해 만들어지는 생산자수첩에 같이 농사짓는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음을 지적한 몇몇 여성생산자의 생각에서 시작됐다. 이렇듯 내가 바뀌고 네가 바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사진> 2016 한살림여성생산자한마당

 

누구나 상대적으로는 약자이다. 농촌에서 여성이 그렇고, 청년이 그렇고, 이주노동자가 더욱 그러하다. 이름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슬그머니 자신을 놓을 때 옆에서 누군가 목놓아 그 이름을 불러가며 꼭 붙들어주어야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

 

“뿔시금치, 맷돌호박, 부여재래종콩, 흰메수수, 다면, 자주감자, 사과참외, 붉은밤콩, 검정땅콩….” 씨앗들은 제각각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도 제각각의 색깔이 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해도 되는 것은 없다. 이 글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언니들께, 선배들께 누가 되지 않기를.

 

 

 

* 『모심과 살림』 8.5호(2017 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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