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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2017-09-13 17:43:00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으로 시간의 문화/정치를 연구한다. 『정상 인간』, 『과로 사회』, 『잃어버린 10일』을 썼고 지금은 과로사/과로자살과 시간에 대한 권리를 살펴보고 있다. culmin@hanmail.nett

 

  

일하지 않을 권리 -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데이비드 프레인 씀, 장상미 옮김, 동녘, 2017

 

 

 

그럼 언제 행복하게 살아?

 

“이거 너무 각박하지 않니?”,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삶이 너무 척박하다”, “이대로면 디지겠다 정말”, “나도 집에 가서 일하는 게 싫지, 근데 어쩌겠어”, “지금 쉬는 날도 눈치 보여서 제대로 못 쉬는 마당에”, “있는 휴가도 눈치 보며 써야 하는 판국이다”,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아무 이유 없이 순전히 충성심 확인 때문에 야근시키는 데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만 그런 게 아냐, 어디들 안 그렇겠어”, “다 그렇게 살아”, “그래도 참아야지”, “다른 대안 있냐?”,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우리의 일상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이렇듯 어디에나 자조와 냉소, 감내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어제 밤새서 체력이 바닥나 빨리 나오는 길이야”라며 걸려온 친구와의 통화나 “아빠,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 늦게 퇴근할 것 같아”라는 문자메시지나 저녁 11시 반 지하철에서 “나름 칼퇴예요”라는 농담으로 시작해 ‘내가 왜 노예인지, 노예가 되어가는지’를 구구절절이 풀어놓는 이야기 모두 한숨 섞인 푸념이다. 얼마 전 방영한 드라마 <김과장>에서 회사 선배가 후배에게 진심을 다해 건네는 위안의 한 대목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목표 1번은 ‘버티기’, 2번은 ‘더 버티기’, 3번은 ‘죽어도 버티기’”라는 자조 섞인 위안을 들으며 도대체 얼마나 버텨야, 도대체 얼마나 강한 멘탈을 발휘해야, 도대체 감내의 한계치를 얼마나 올려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지낸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행복 없이 산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자조와 냉소로 휩싸인 채 메마를 대로 메마른 삶,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모습을 낯선 시선으로 담은 장면이 있다. 또 다른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인어공주의 시선을 통해 우리네 행복관을 꼬집는다. 인어공주 역의 전지현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왕자 역의 이민호를 찾으러 서울로 향한다. 시내를 헤매다 한참 배가 고팠던 전지현은 지나가는 초등학생에게 삥(돈)을 뜯으려 한다. 이에 초등학생은 안쓰러운 마음에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준다. 이어지는 대화 내용이 재미있다.

 

“돈은 힘들게 버는 거예요. 우리 엄마도 돈 버느라 얼마나 힘든데! 내 얼굴 볼 시간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돈만 번다구요!” 초등학생은 이렇게 엄마의 고충을 털어놓고는 다음부터 삥 뜯지 말라고 충고한다. 인어공주는 궁금해 한다. “근데 너희 엄만 왜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초등학생은 그것도 모르냐며 대꾸한다. “언니 진짜 노답! 돈은 왜 벌겠어요! 나랑 엄마랑 행복하게 살려고 벌지!” 인어공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묻는다. “근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돈만 벌면, 언제 행복하게 살아?” 초등학생은 말문이 막힌다. 곰곰이 생각하던 초등학생은 “나중에, 나중에요!”라며 얼굴을 수그린다.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지낸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처럼, 드라마는 행복하기 위해 행복 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꼬집고 있다.

 

 

시간 없음의 상태와 그로 인한 문제를 나타내는 지표는 널려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언급한다면, ‘과로자살’을 들 수 있다. 생경한 어휘다. 또한 과로와 자살, 딱히 납득될 만한 조합은 아니어 보인다. 시간 없음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과로자살을 사례로 드는 건 꽤 불편하다. 그런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과로 때문에 자살하는 사례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얼마 전 34세 사회복지 공무원이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그는 자살 전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할 만큼 격무에 시달려 오다 “나에게 휴식은 없구나. 사람 대하는 게 너무 힘들다. 일이 자꾸 쌓여만 가고, 삶이 두렵고 재미가 없다. 아침이 오는 게 두렵다”는 심경을 일기에 남기고 열차에 투신했다. 언뜻 드문 일이고 예외적인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다. 또한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한데 과로만으로 설명하는 건 억지라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그해에만 4명의 사회복지 공무원이 연이어 자살한 사실에서 보듯1), 이는 단지 억지스럽고 예외적인 사례만은 아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반복된 죽음 속에서 과로사회의 구조적 위험을 읽을 수 있다. 게임 개발자, 드라마 PD, 대기업 연구원, 로펌 변호사, 지하철 기관사, 우편 집배원, 현장실습생, 은행원, 증권맨, 제약회사 영업사원, 대학교 교직원, 지자체 공무원, 서비스센터 기사, 항공사 승무원, 대기업 협력업체 직원 등 노동자들의 잇따른 과로자살은 우리네 메마른 삶의 또 다른 얼굴임을!

 

 

시간 구조는 우리 삶을 모양 짓는다. 시간 구조는 개인 건강은 물론 가족관계, 사회관계, 여가 활동, 소비 양식, 문화생활, 감정 구조, 세계관, 나아가 한 사회의 질적 특성까지 틀 지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장시간 노동은 폭력적인 시간 구조다. 이러한 ‘시간 없음’의 상태에서 여유로운 삶, 관계할 가능성, 보듬을 여유를 싹 틔우기는 어렵다. 빈번한 야근과 바닥난 체력, 빈약한 자유시간과 만연한 냉소, 쳇바퀴 일상과 허무함, 친구 만날 시간 없음 또는 아이들 볼 시간 없음, 과로사와 과로자살까지 우리네 시간 없음의 삶은 폭력적인 시간 구조의 단면인 것이다.

 

 

쉼 없음은 권력 관계의 산물이다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는 시간 투쟁의 결과와 직결돼 있다.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갈 것인가의 문제에 시간 구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시간을 둘러싼 투쟁은 치열하다.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영업시간은 어떻게 정할지, 휴식시간은 얼마로 할지, 등하교 시간은 어떻게 할지, 대중교통 첫차와 막차 시간은 언제로 할지, 대체휴일은 언제로 정할지, 근로시간 특례·제외는 어떤 업종으로 제한할지까지! 시간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작금의 장시간 노동은 발전주의적 노동 통제의 유물이자 신자유주의적 시간 통치의 산물이다. 시간 구조가 권력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과로가 일상인 우리네 삶은 시간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힘관계가 불평등하게 흘러왔음을 말해준다. 시간 권리의 박탈은 그러한 힘관계의 결과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시간 없음’의 상태에서 여유로운 삶, 관계할 가능성, 보듬을 여유를 싹 틔우기는 어렵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노동시간의 추이를 그려보면, 노동시간의 총량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총량 차원에서 노동시간이 예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해서 장시간 노동의 폭력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국가 간 비교나 ‘과로 버스’ 같은 일련의 사건사고들, 또는 시간 권리의 관점에서 보아도 작금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시간 권리를 유예시키는, 다시 말해 장시간 노동을 재생산하는 여러 요인들이 있을 텐데, 그 가운데 하나로 근면 규범을 들 수 있다. 오래 일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근면 규범! 이것이 상정하는 이상적 노동자상은 발전국가 시기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잘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산업 전사’, ‘수출 역군’, ‘모범근로자’, ‘새마을 아가씨’로 불렸고 ‘국가’ 발전을 위해 개인적인 것 모두의 희생을 요구받았다. 장시간 노동은 ‘감내’해야 할 것으로 당연시됐다. 그런데 이는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범근로자상은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모습을 달리하면서 감내의 한계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근면 규범의 노력 서사는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도 ‘근면=성공’을 미화하면서 장시간 노동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근면 서사는 일상에서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어 생산-유통-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 권리는 언제나 주변화되고, 여유로운 삶의 가능성은 유예될 수밖에 없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상식은 자연 질서처럼 굳어져 지금도 일상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근면 규범은 시간 권리에 대한 선택을 주저주저하게 만든다. 근면 규범은 이전처럼 강력한 동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 권리의 선택에 있어 두려움을 유발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들이 앞에 놓여 있어도 오래 일하는 것을 이상화하는 근면 규범이 작동하는 환경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제도 선택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만연한 곳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시간 권리를 ‘알아서’ 포기하는 것이다. ‘눈치 야근’이 그런 사례다. 시간 권리를 선택하는 것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보다 야근을 ‘감내’하는 게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제도에 대한 낮은 신뢰, 노동과 자본의 불평등한 힘관계, 경쟁적인 성과 장치 또한 두려움을 유발하는 기제들이다.

 

 

근면 규범은 자유시간의 가능성을 포박하는 언어들로 변신해 우리를 옥죈다. “이기적이네”, “아줌마 다 됐네”, “유별나게 왜 그래”, “나약해 빠져가지고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야박하게 말야” 같이 시간 권리 선택자者를 낙인찍는 언어들이 그 증거다. 이러한 언어들은 제도 선택을 두렵게 하고 시간 권리를 무화시킨다. 

 

최근 근면 규범의 논리에는 ‘멘탈’을 강조하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뭐든지 난 할 수 있다”는 표현들이다. ‘자기주도적 시간 관리법’, ‘성공한 리더의 시간관리법’, ‘독일 사람들의 시간관리법’에서 자주 발견된다. 또한 ‘누구는 어떻다’라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의 미담에도 반복된다. 멘탈을 강화하고 자기 시간을 끝도 없이 갈아 넣도록 주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관리법은 자기 착취, 자기혐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시간 권리는 언제나 묵살되어 버린다.

 

 

‘시간마름병’ 대 ‘시간에 대한 권리’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시간 없음은 박탈의 상태를 나타낸다. 시간없음은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없음’, 시간량의 문제로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시간 없음은 ‘예속’ 상태로 이어진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에 따르면, 영혼까지 종속당한 삶을 가리킨다.2) 노예의 구속된 삶은 아니더라도 ‘노예라는 자각이 없는’ 상태의 예속된 삶을 표시한다.

 

그런데 시간 없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모든 시간을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간 통치는 성과 장치들을 촘촘하게 배치해 한 톨의 자유시간까지 전유하고 있다. 자기분석-자기평가-자기실천-자기책임의 사이클을 알아서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자기계발형 인간, 기업가적 주체에게 자유시간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사전적으로 기근은 가뭄이나 홍수, 병충해 등으로 먹을 것이 모자라 굶주림, 영양실조, 아사 등의 집단적 피해를 유발하는 자연 재해로 일컬어진다. 통상 자연 재해 자체가 기근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자연 재해만이 원인은 아니다. 기근은 구조적인 착취·방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일례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감자마름병으로 빚어진 재해라고 이야기된다. 감자마름병은 잎이 검게 변하고 씨알이 썩는 병이다. 이로 인해 1845년부터 1852년까지 110만여 명이 굶어 죽고 200만여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기근으로 인한 피해는 구조적인 착취로 더욱 심화됐다. 영국 대지주들이 밀, 귀리 등의 곡물을 모조리 반출해 갔던 터라 아일랜드인들은 수탈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감자를 길러 끼니를 때웠다. 얼마 안 되는 땅 뙈기에 빼곡히 감자만 재배했던 결과, 질병 취약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감자마름병이 퍼졌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마당에도 부재 지주들은 곡물을 반출하는 데 급급했다. 식민 당국은 지원책을 마련하는 데 소홀했다. 심지어는 기근을 종교나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열등 민족의 불행은 당연한 귀결, 인구 억제를 위해 빈민가에 전염병이 돌도록 해야 한다던 멜서스식 사고)하고 방치할 뿐이었다.

 

과로가 유발하는 신체적, 사회적, 관계적, 정신적 질병들을 ‘시간마름병’이란 이름으로 묶어보면, 여기에는 건강 문제를 비롯해 관계 단절, 소외 경험, 우울증, 사망사고 등을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또한 구조적 착취의 결과라고 진단할 수 있다. 발전주의 시기 억압적 시간 통제에서부터 지금까지 특히 신자유주의적 시간 통치는 시간마름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간마름병의 위험은 계층, 성별, 나이, 직업, 지위, 업종을 불문하고 관통한다. 물론 위험의 가능성은 하층에 더욱 직접적이다. 그럼에도 시간마름병이라는 구조적 폭력/위험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시간을 생산시간화하는 자본의 시간 기획 아래에서 쉼은 불가능한 꿈처럼 돼버렸다. 대안은 개인의 의지, 의식 전환, 시간절약형 상품 구매를 통해서는 도출되지 않는다. 기이할 정도의 폭력적인 노동시간 그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 시간마름병의 치료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시간을 생산시간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간 통치를 바꿔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라는 자각 없는’ 상태의 예속적 삶은 계속된다.

 

연일 과로로 인한 돌연사, 대형사고, 자살이 이어지는 비극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분명한 점은 ‘사회적’ 치료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차원의 자조와 냉소, 감내의 언어를 사회적 차원의 시간에 대한 권리의 언어로 정치화할 필요가 있다.

 

시간 권리의 정치화는 노동시간 단축만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인식 전환이나 제도 개선류의 대안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시간마름병으로 곪을 대로 곪은 일상의 모든 부문을 바꿔내야 함을 강조한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의 말처럼, 권리, 자유, 사회 규범, 보장 체계, 사회관계, 세계관 등 모두에 있어 대안적인 내용을 갖춰야 한다.3) 과잉 노동 근절, 근면 규범 해체를 비롯해 ‘무엇보다 (일-소비 중심적인 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감각’을 길러내는 사회문화 프로젝트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 이후의 삶이 소비주의나 또 다시 노동으로 빨려 들어갈 위험을 최소화하고 자율성을 최대화하기 위함이다.

 

 

 

1) “사회복지 공무원 또 … 올 들어 4번째”, <한겨레신문> 2013. 5. 15.

2) 프랑코 베라르디, 『노동하는 영혼』, 서창현 역, 갈무리, 2012, 35쪽.

3) 데이비드 프레인, 『일하지 않을 권리』, 장상미 역, 동녘, 2017, 293쪽.

 

 

  

모심과 살림 9호(2017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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