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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마을모임에서 마을촛불로
2016-08-01 14:18:00

* 『모심과 살림』 4호(2014년 겨울)에 실린 글입니다.

 

마을모임에서 마을촛불로

 

글 심미경 (한살림경기남부 이사)


 

 

칠보산 마을공동체

 

 

수원의 서남쪽 끝 칠보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자락에 3천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와 넓게 펼쳐진 논과 밭, 하천, 낮은 집들 속에서 칠보산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그 논밭과 낮은 집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높은 아파트단지와 대규모 상가건물들이 들어섰다. 이전의 환경이 좋아 모인 사람들에게는 몹시 서운한 일이었다.

 

초기에 만들어진 사이좋은 방과후학교와 사이좋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초등대안 칠보산자유학교, 특수중등학교 배움터마당과 올해 개교한 중등칠보산자유학교, 그리고 진통을 겪고 분화한 칠보산 어린이집, 숲에 노닐다 어린이집 등이 교육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환경센터인 도토리교실이 오랜 시간 숲속학교와 생태교육을 통해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으며, 이후 칠보산마을신문, 만남과 인문학의 희망공간 칠보문화놀이터, 생태교통 꿈꾸는 자전거 등이 마을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자리 잡았고, 최근에는 친환경 식당과 반찬가게 등 조금 다르게 살고자 하는 다양한 거점과 문화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풍물패, 밴드, 연극단과 학습모임 등의 동아리와 모임들도 스스로 생겨났다.

 

마을 전체가 함께하는 행사로 두꺼비논농사와 한가위 강강술래가 있다. 두꺼비논농사는 농약으로 죽어가는 두꺼비 알을 살리기 위해 도토리교실에서 주민들의 펀드를 모아 논농사를 시작했다. 5만원씩 펀드에 참여하는 사람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모내기, 김매기, 벼베기 그리고 떡잔치로 이어진다. 한가위 강강술래는 사이좋은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사이좋은 방과후학교가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오랫동안 진행해오다 지금은 마을의 여러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낮에는 전시와 장터를 펼치고 저녁에는 동네 주민 천여 명이 참여하는 강강술래를 진행하며 주민 모두가 기다리는 마을문화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강강술래 떡을 주민들의 쌀을 십시일반 모으고 자발적인 후원을 받아 준비하면서 더 의미가 있었다. 

 

아직은 마을공동체로서 한계가 있다. 마을공동체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뜻이 맞는 특정 부류들의 네트워크라는 한계를 넘어 전체 주민들의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벽 없이 어우러지는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한살림 마을모임과 우리동네 초록장터

 

칠보산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던 초창기, 10년 전쯤 마을에 이사 온 한 조합원이 공급실무자로부터 명단을 받아 전화를 돌리면서 첫 모임이 꾸려졌다. 두어 번 집에서도 만나고 생산지도 다녀온 뒤 도무지 모임을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몰라 할 때 조직활동가가 매달 지원을 해주어 모임이 안정될 수 있었다. 여느 마을모임이 그러하듯 한살림 물품 시식과 요리도 하고 면생리대나 재활용비누를 만들고, 에너지와 환경 이야기를 나누고 생산지를 방문하는 등 생활 속의 실천을 부엌에서 가정, 이웃과의 관계 속으로 확산해 나갔다.

 

마을모임이 계속 꾸준히 이어진 커다란 동력 중 하나는 소모임이다. 한 달에 한 번 공식적인 마을모임 외에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소모임으로 충족해 나갔다. 어린 아이들과 엄마들이 같이 칠보산에서 노는 도토리데굴데굴이 그 첫 모임이었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초등 저학년 아이들의 나들이 모임 두발자전거와 그보다 어린 아이들의 품앗이 모임 네발자전거로 분화했다. 아이들과 함께 부모도 성장해 갔다. 엄마들의 부모학습모임은 심리상담모임과 독서모임으로 이어져 갔고 장독대라는 요리 모임과 바느질 모임으로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모임 이름을 바꾸고 구성원을 바꾸어 진행되었다. 이후에 두레생협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텃밭모임, 녹색평론 읽기모임,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함께 노는 전래놀이, 공동체 놀이를 하는 다함께놀자 등으로 점차 다양해져 갔다.

 

모임이 안정되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마을모임의 내부 고민이 찾아 왔다. 오랫동안 모임을 함께해 온 사람과 새로 들어오는 신입 조합원과의 차이가 모임을 힘들게 했다. 긴 시간 생활을 나누어 온 기존 조합원들의 친분은 이사를 오거나 새로 가입해서 들어오는 새로운 조합원들을 위한 배려 속에 감추어지지 않았다. 새로 온 분들에게 관심을 돌리자고 아무리 약속하고 시작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인원도 많아 마을모임을 나누는 방법도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은 첫 기수들이 마을모임을 졸업하기로 하고 새로운 분들에게 모임을 내어주어 그분들이 중심이 되는 마을모임을 시작하게 됐다. 졸업한 분들은 느티나무라는 독서모임으로 오랫동안 남았다가 흩어졌고, 2기 마을모임은 몇 달 안 있어 새 지기를 선출하여 지역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좀 다른 색깔의 모임이 되었다.

 

마을모임이 분화하니 구심점을 가진 모임 두 개가 되면서 생기는 시너지가 있었다.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주체가 많아진 것이다. 그 힘으로 계획된 것이 우리동네 초록장터이다. 아파트 단지 안 느티나무 아래에서 재활용품을 가지고 나온 아이들과 어른들이 장을 펼쳤다. 손으로 만든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만들고 나오기도 한다. 5천 원 이상은 고가 상품으로 등록을 해야 한다. 장터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나눠 쓰는 재활용 장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경제 교육의 장이 되었으며 수익금과 기부금은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어 청소년 가장 물품지원, 장학금, 교복 지원, 진로를 위한 준비지원금으로 쓰였다.

 

장터 때문에 아파트 주민과 관리실 사이 분쟁이 생기기도 했다. 소음이 불편해서 주민이 제기한 문제를 대변하는 경비원에게 좋은 아파트 문화를 살리고 싶은 다른 주민들이 우리를 대변해 주었다. 이후에 우리 일부가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에 동 대표로 참석하여 정식으로 협조를 얻게 되었고 관리실로부터 천막과 의자를 지원받아 중앙분수대로 장소를 옮겨 진행할 수 있었다. 작년과 올해는 연 2회씩 꿈꾸는 자전거와 함께 3,4단지 차 없는 도로 행사를 큰 규모로 진행하기도 했고 한가위 행사와 함께하기도 했다.

 

마을모임은 구성원의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은 낮 모임과 저녁 달빛모임으로 자리 잡고, 칠보올레 산행모임, 손사랑 수지침 건강모임, 근현대사 자주공부모임 세월에서 다시 만난다. 구성원들은 마을공동체의 여러 단체에 소속되기도 하고 직접 꾸리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있다.

 

세월호와 촛불모임

 

연 4회씩 열리는 초록장터가 마을문화로 자리 잡은 지 8년차로 접어든 올봄, 첫 장터를 앞두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상황과 가눌 수 없는 슬픔 앞에 장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내 일은 아니었으나 남의 일이 아닌’ 사건을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지켜보면서 5월에 계획되어 있던 차 없는 도로 행사를 앞두고 고민했다. 결국 꿈꾸는 자전거와 우리동네 초록장터가 함께하는 주민행사를 추모의 마음으로 소박하게 진행하자고 결정하고 추모 현수막을 걸었다. 장터와 자전거 체험행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고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행사가 있던 그 토요일은 광화문에서 추모촛불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준비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곳에 있었지만 참여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자식을 가진 엄마들의 마음은 다들 같아서 행사 뒷정리를 팽개치고라도 그 자리에 가서 앉아 있고 싶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 먹먹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때였다.

 

‘우리끼리라도 촛불을 들자’ 한 사람이 먼저 뱉은 말에 너도 나도 동의했다. 그날 행사와 평가를 끝낸 저녁, 노란 리본과 현수막이 걸린 작은 공간에서 첫 번째 촛불을 들었다. 열 명이었다. 한 번이 아닌 지속적인 모임으로 가보자는 데 동의했다. 지역을 벗어난 사회활동에 경험이 없었던 우리 모두 어떤 과정을 걸어갈지, 얼마나 긴 걸음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갈 때까지 가보자며 주위의 이웃과 손잡고 오자 하고 헤어졌는데 두 번째 모임에 스무 명이 왔다. 처음 만나는 이웃과 인사를 하며 세월호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처음엔 준비랄 것도 없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준비해오는 가족대책위와 세월호 관련 소식, 음악과 시를 나누고 누군가 배워오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도 하고 술 한잔 걸친 아빠들의 발언을 듣기도 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이웃마을에서 다녀가거나 먼 곳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오래 가는 모임이 되기 위해 한 시간을 넘기지 않기로 하고 의미 있게 진행하기 위해 준비모임을 시작했다. 진행에 대한 고민과 함께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도 미리 의논해서 제안했다. 촛불모임에서는 슬픈 마음을 함께 나누고 팽목항과 광화문, 가족대책위 소식과 더불어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의 현황도 나누었다.

 

촛불모임과 함께 처음 시작한 일은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이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열리는 수요장터에서 이웃마을 장터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찾아가 서명을 부탁했다. 거리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다들 처음인지라 쑥스럽고 망설여지기도 했다. 언니가 하고 친구가 하니 점점 용감해졌다. 서명은 그 자체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명해내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잘 전하기 위해 특별법의 쟁점 내용이 바뀔 때마다 함께 공부도 했다. 서명운동과 거의 동시에 아파트 베란다 현수막 달기를 했다.

 

잊지 않고 꼭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자기 의지도 다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인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기도 하고 떠다밀기도 하고, 찾아와서 사가는 분들 덕분에 힘나기도 하고 또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백일까지 2,300여 명의 서명을 받고 250여 장의 현수막을 달았다. 목표했던 3,000명과 300장에는 못 미쳤지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기도 했다.

 

긴 호흡으로 연대하며

 

참사 백일이 지나면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되어 8월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중앙분수대로 장소를 바꾸었다. 지나가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큰 화면을 준비해서 영상을 보았다. 지나가는 주민들이 서서 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함께 영상을 보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벌써 잊힌 것일까.

 

추석이 지나면서 날이 쌀쌀해졌다. 산 아래라 유독 더 추운 동네여서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와야 했다. 계절이 지나 4월에 껴입었던, 그때 매달았던 노란 리본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겉옷을 다시 입고 나오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촛불모임을 하자고 했을 때 이렇게 먼 길이 될 줄을 아무도 몰랐다. 숱한 아이들이 어이없이 죽어간 일인데 왜곡된 정치 이슈로 변질될 줄도 몰랐다. 이토록 막막하고 바위에 계란을 치는 일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이제 전력투구가 아닌 일상 속의 운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준비모임을 없애고 소통 창구인 밴드에서 간략히 준비하거나 촛불모임 자체를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20회 촛불모임은 여기까지 함께 온 서로를 격려하고 다시 용기를 북돋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긴 시간 흩어지지 않고 오는 데는 모두가 내 일로 여기며 시간과 마음을 내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알아서 해온 ‘서로 주체’가 된 힘이 가장 컸다. 그런 중에도 세월호 참사 이후 미친 듯이 세상 속으로 뛰어든 한 친구가 있었다. 해본 적이 없는 촛불모임을 진행하고, 외부와 소통창구가 되며, 수원역으로 광화문으로 뛰어다니는 동력이 되었다. 영상 편집이며 자료 준비며 보이지 않는 일까지 담당하며 세월호 활동가가 된 그 친구에게 감사를 보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네촛불이 알려지면서 연대 제안이나 요청도 들어왔다. 국민촛불집회를 위한 인터뷰 영상과 무대 발언 제안, 인터넷언론 취재 요청이 먼저 들어왔다. 우리가 하고 있는 소소한 행동에 비해 외부의 관심과 요청이 부담스러웠다. 취재도 사양하고 발언 나설 사람도 없어 거절했더니 뒤에 찾아온 미안함이 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닌지, 작은 힘이라도 된다면 더 용기를 내었어야 한 게 아닌지 자책도 되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왜 촛불모임을 하고 있나 스스로에게 답하기 위해 고민도 하게 됐다. 그래도 수원역으로 유가족이 오신다면 시간이 되는 사람 한둘이라도 달려가서 서명운동을 돕고 수원역 집회에도 참석하고 거리행진도 함께했다. 안산 추모집회에서 서울광장과 광화문으로 더 큰 집회에 참석하고 힘을 모으기도 하고 힘을 받고 오기도 했다.

 

촛불모임 첫 시작일은 참사일로부터 한 달 조금 더 지난 때였다. 우리가 마을공동체를 한다면서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자성의 목소리가 있을 때였다. 누군가 먼저 시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을’의 촛불모임으로서 준비나 고민 없이 일단 시작하고 나서야 다른 단체에 정식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아는 대표들과 단체들에게 연락하며 촛불모임 참여와 서명운동, 현수막달기도 같이 제안했다. 각 단체들은 현수막을 팔아주거나 개별적으로 촛불모임에 다녀가거나 한참 지나 마을신문에 실어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 시작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함께하자는 제안과 의논을 통해 일정과 방식을 합의해서 시작했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대안운동을 하는 각 단체들은 일상적으로 자기 활동과 사업으로도 너무 바쁘다. 이번 사태가 그 모든 것들을 뚫고 함께하기에 어려운 것이었을까. 알 만한 사람이 외면할 때는 더 서운한 법이다. 단체 사람이 서명을 외면하거나 도무지 응답이 없을 때 그랬다. 어쩌면 우리가 가보지 않은 일들을 해내느라 공유하는 데 노력이 미흡했을지도 모른다. 연대를 할 때는 더 꾸준한 접촉과 시도가 있어야 함을 느꼈다.

 

아쉬움과 미흡함은 있었지만 꾸준히 다른 단체에 알렸다. 마을공동체가 함께 진행하는 한가위 행사 때는 다른 단체들의 동의를 얻어 주민들에게 세월호 영상 상영과 노란리본 만들어 나눠주기를 진행했다. 9월 중순에는 수원시민대책위에서 추진하는 거리 현수막달기에 동참하면서 단체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직접, 그리고 최대한 알렸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칠보산마을 일대 도로 곳곳에 거리현수막을 걸 수 있었다. 10월에 있었던 유가족 간담회에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세월호 촛불모임이 칠보산마을공동체가 다 같이 주최하는 큰 힘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마을에 꺼지지 않고 일깨워주는 거점이 되어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키워가는 역할은 했을 것이다.

 

주민 속으로

 

촛불모임을 하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가장 많은 고민을 한 것은 아마도, ‘주민들 속으로 어떻게 확산해 나갈 것인가’일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 슬픔과 분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확인하는 건 우리가 특별한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촛불모임 속에서 우리의 공감과 의지는 더 커졌지만 그만큼 다수의 주민과는 거리는 멀어졌는지 모른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참여를 호소하고 현수막을 권유하면서 확산해 나갔지만 그것은 확산이라기보다 확인의 과정인 셈이다. 첫 촛불모임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시각과 생각도 나눌 수 있는 모임이 되기를 바랐었다, 그것이 마을에서 모임을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보았다. 베란다현수막도, 이전에 한 번도 세월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이웃에게 권하고 받아들여질 때 그 한 장의 의미가 컸다.

 

세월호가 정치 이슈로 변하고 장기화되면서 촛불모임을 불편해하는 주민들이 생겨났다. 촛불모임 안내 현수막을 떼라는 주민의 전화가 관리실로 갔고 입주자대표단이 우리 촛불모임을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왔다.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며 앞으로 협조를 구할 일이 많을 터라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촛불모임은 지속해 가는 현명한 대처가 필요했다. 안내 현수막은 자발적으로 철수하고 촛불모임과 장소는 지키기로 했다.

 

거리현수막을 달았을 때는 더 심한 반대 표현이 있었다. 거리에 현수막을 게시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훼손되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훼손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급기야 완전히 갈기갈기 난도질까지 당했다. 그 칼자국을 따라 우리 가슴에도 금이 갔다. 훼손된 현수막을 다시 매는 과정에서 ‘지겹다, 이제 좀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동네 사람들을 직접 대면했다. 그날 밤 우리도 현수막을 훼손한 사람을 찾기 위해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며칠 뒤 구청의 요청으로 거리현수막 전체를 자진 철거해야 했다. 반대하는 주민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주민이지만 극단으로 분열된 의식을 만나고 확인했다. 그것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결속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주민들 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단단함이 아니라 말랑한 관계이다. 우리 일상에서 소소하게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총체적인 인격체로서 나, 그런 내가 정서적으로 그들과 이어질 때 그들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다가올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긴 여정의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세상을 배우다

 

촛불모임을 하면서 우리는 세상을 배웠다. 유족의 뜻을 담지도 못한 채 200일이 지나서야 특별법이 통과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국가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었다. 제도는 무능하고 부패했다. 사람 목숨보다 돈이 중요했다.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지가 없었다. 오로지 국가 그 자체의 권력 수호, 기득권들의 자기 수호만이 관심사였다. 언론이 밝혀내고 지키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권력의 비겁한 하수인이었다. 

 

가장 큰 절망은 산성보다 더 높아져버린 거대한 벽을 만져질 것처럼 분명한 실체로 느낀 것이다. 자식을 허망하게 잃어야 했던 부모들이 그토록 긴 시간 길바닥에서 잠을 자도록, 비를 맞고 십자가를 지며 걸어가도록, 목숨 내어놓고 40여 일을 단식하도록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는가. 국가가 국민들로부터 단절되어버린 것보다 더 가슴 아픈 단절은 국민들 사이의 분열일 것이다. 국토분단이 주는 불안과 전쟁이 주었던 공포 때문일까, 일자리와 밥그릇에 대한 두려움일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마저 정치적인 미끼로 쓰였고 그것은 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넘치도록 풍요로운 문명, 화려하고 자극적인 문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첨단정보와 통신…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잃은 것은 ‘관계’가 아닐까. 너와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서로 상관없이 따로 살아간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 모르는 남이다. 친구들이 만나도 각자 핸드폰으로 논다. 가족끼리도 점점 무관심해져 간다.

 

관계가 없으면 상대방에게 잔인해질 수 있다. 단식하는 유족 옆에서 냄새 풍기며 치킨과 피자를 게걸스럽게 먹어댈 수도 있다. 관계가 없으면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기 어렵다. 그래서 유족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 원래 사람은 관계를 가진 사회적인 동물인데 그 본성을 잃은 불편함이 오히려 짜증과 화로 표출되는 건 아닐까.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 이 말이 참 좋다. 의식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혼자 깨어 있어서는 안 된다. 조직화되어야 한다. 조직화는 살아있는 유기적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마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내 집에서 대문을 열고 한 발 나서면 만나게 되는 이웃들의 세상이 마을이다. 여러 다리를 거치지 않아도 직접, 또는 한 다리만 건너도 아는 사이가 되는 이웃, 관계는 거기서부터 살아나야 한다. 얼굴을 몰라도 같은 슈퍼마켓과 빵집, 세탁소를 이용한다. 서로 마찰이 생겨 싸우다가 둘 사이 아는 사람이 끼면 누그러질 수 있다. 관계가 이어져 마을이 공동체로 살아나고 그런 마을들이 만나 연대하여 더 큰 힘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연대의 힘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은 연대하는 대표자만 있고 그를 뒷받침해줄 단위 조직이 비어 있기 때문 아니던가.

 

동지가 되어

 

8월 한살림 달빛마을모임에서 느티나무통신(괴산 지역 언론협동조합)을 초대했다. 세월호 활동과 취재 내용을 나누는 자리였다. 소감을 나누다가 세월호가 주는 슬픔에, 촛불을 들어야 하는 현실에 또 눈물을 쏟았다. 그날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 것은 우리가 마음 맞는 좋은 이웃에서 이제는 ‘동지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마을촛불 없이 수원역이나 광화문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났다 해도 지금 우리가 느끼는 힘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을촛불은 바로 우리들의 ‘관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동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200일이 넘는 비통함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은 동지가 된 서로에게서 나왔다. 그 힘으로 우리는 또 추운 겨울을 지나갈 것이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남의 일이 아니었던 그 일은 바로 ‘우리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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