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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동학여신들, 매의 눈으로 역사를 보다
2017-02-01 11:32:00

 

동학여신들, 매의 눈으로 역사를 보다

 

 

사회 및 정리

이나미(이나) - 방송통신대 전임연구원

 

필 진

고은광순(고은) - 한의사, 청산편 집필

김정미서(김정) - 치유사, 명상지도사

리산은숙(리산) - 인권운동가, 총무

박석흥선(박석) - 교사, 북한편 집필

변김경혜(변김) - 시민활동가, 천안편 집필

임최소현(임최) - 개벽신문 편집장, 서울ㆍ경기편 집필

한박준혜(한박) - 시민활동가, 대둔산편 집필

 

토 론

이영재(이영)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그녀들은 ‘동학언니’라 불렸다. 그러나 ‘언니’라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용어는, 그녀들을 표현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하다. 그녀들은, 일상을 뛰어넘는 ‘비상한’ 사고를 쳤다. 나는 그녀들을 여신이라 부르고 싶다. 요즘 흔히 말하는 깡마르고 예쁘다는 의미의 여신이 아니라 위풍당당함과 신령함이 훅 끼치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같은 여인들. 그녀들은 마침 ‘Women Cross DMZ’ 행사에 참여하고 오느라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막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들의 포스가 느껴졌다.

 

이들은 총 13권으로 구성된 ‘여성동학다큐소설’의 필자 및 참여자들이다. 이들을 만나 소설과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모심과살림연구소의 동학공부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영재 님도 함께 자리했다.

 

 

이나 > 안녕하세요. 오늘 WCD 행사 마치고 오시느라 다들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여성동학다큐소설’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고은 > 제가 충북 청산으로 이사 온 후 해월의 외손자인 정순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 첫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소설은 해월의 딸인 용담 할미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버지 해월, 해월의 딸, 그 아들 정순철 이렇게 이어져요. 정순철은 동요 <짝짜꿍>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의 작곡가예요. 방정환과는 바늘과 실 같은 사이로 어린이운동에 전념했던 분인데, 월북하는 바람에 잘 안 알려졌죠. 그래서 그에 대해 세상에 알려야겠다 생각하고 박맹수 교수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북한 지역 등 전 지역의 동학 얘기를 써보라고 해서 작가를 구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인연 닿는 대로 모으게 된 것이 15명이고 그중 12명이 글을 쓰게 되어 총 13권이 나오게 되었어요. 여기에 오지 못한 분으로는, 필자인 김미경, 김현옥, 명금혜정, 박이용운, 유이혜경, 이장상미, 정이춘자 님과 자문을 해주신 조임정미 님이 있어요.

 

박석 > 저의 경우는 고은 선생님이 저의 명상 선생님이라 참여하게 되었어요. 어느 날 고은 선생님이 제게 혹시 동학에 관심 있냐고, “도를 아십니까” 이렇게…(모두 웃음). 근데 제가 외람되게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전 북한 지역을 맡았는데 그 이유는 북한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역사 선생님이 선물한 『백범일지』 때문이에요. 그렇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북한 편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무거운 마음이 되었죠.(모두 웃음)

 

변김 > 저의 경우는, 어느 날 고은 선생님이 김산의 『아리랑』이라는 책을 보고 계셨는데 그 책을 보니 나의 20대 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르면서 울컥했어요. 제가 그 책을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저는 천안편을 썼는데, 윤웅렬이 300명의 민보단을 만들어 옥천과 천안의 주민을 없애는 내용이 나와요. 그리고 당시의 신분제에 대한 내용, 지식인의 고민에 대한 것들을 다뤘어요.

 

리산 > 저는 청주에서 9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9인회’라는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고은 선생님 댁에 놀러가자고 해서 갔다가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전부터 보은취회 행사에 해마다 갔었고 동학에서 여성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인연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1년 동안 동학공부 같이 하고 소설은 2장까지 썼는데 공부를 더 해야겠다 싶어서 소설은 포기하고 총무 일을 맡게 되었어요. 리산이란 이름은 지리산에서 따온 거예요. 저는 본래 실천여성학을 공부했는데 너무 서구중심적이어서 불만이 많았어요. 그래서 동학에서 한국페미니즘의 기원을 찾고 싶었어요.

 

고은 > 리산은 어릴 적부터 남들이 못 보는 귀신을 봐요.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그래서 본인은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죠. 같이 수련을 갔을 때, 갑자기 빙의가 되어서 펑펑 울고 그랬던 적도 있어요. 그리고 나서 그 영이 한을 풀고 떠나갔죠.

 

김정 > 저는 박석 선생님과 같이 명상을 하다가 고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이 동학에 관심 있냐고 하셔서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저는 현재 치유사로 소설 팀과 함께하고 있어요.

 

고은 > 김정 선생도 집필을 중간에 포기했지만 동학에 대한 애정이 깊고 또 유난히 영이 맑아요. 그래서 작품은 안 쓰더라도 우리와 같이해요.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어디 아플 때, 인도말로 ‘딕샤’라고 하는데, 딕샤를 보내줘요. 그러면 기운이 나는 것 같고. 한의사보다 나아요.(모두 웃음)

 

변김 > 수련을 처음 같이 할 때, 명상하고 있는데 김정 선생에게 갑자기 ‘그분’이 오셔가지고(모두 웃음) 진동하고, 그게 커져서 막 뛰어다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저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했어요.(모두 웃음) 그러나 나중에 이해하게 됐죠. 저희는 매달 일정 분량을 쓰고 난 다음 다 같이 모여서 워크숍을 했는데, 그때 김정 선생님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줬어요. 저 같은 경우는 애를 키워야 하니까 밤 시간밖에 소설 쓸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게 매일 밤낮으로 일하니까 몸이 매우 힘들었죠. 그때 몸에 딕샤를 보내줘요. 그러면 정말 치유가 돼요.

 

한박 > 저는 공주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신문에서 고은광순 선생님이 공주 계룡면에 한의원을 열었다는 글을 봤어요. 저한테 고은 선생님은 ‘로망’이었어요. 제가 학생 때 여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당시 고은 선생님은 호주제 폐지운동으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그런 대단한 분이 공주에 오셨기 때문에 제가 잘 아는 아줌마들하고 ‘거길 가자’ 했죠. 그렇게 불시에 찾아갔는데 선생님이 환대해주셨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청산으로 이사 가신 후 또 찾아뵈었어요. 그때 신기하게도 선생님이 제 남편 책을 보여주시며 동학소설 얘기를 꺼내시는 거예요. 그래도 처음에는 아무 말 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 책이 남편 책이라고 했고 그래서 글쓰기를 권유받았죠. 그런데 제가 글 솜씨가 없어서 저는 안 쓰고 다른 분을 소개하겠다고 했는데 그분들이 저도 참여하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해서 저도 결국 같이 쓰게 됐어요. 저는 대둔산, 연산의 동학 이야기를 썼어요. 남편이 구전조사를 했을 때 따라갔었고 그때 들은 이야기가 책의 내용 일부로 들어가요.

 

임최 > 저는 고은 선생님 대학후배인데 제 동창이 저를 추천해서 같이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하고 다른 분을 추천했어요. 그분은 탈북민이었는데 결국 안 하게 되고 제가 하게 됐어요. 그 결정적 계기는, 제가 명리학을 하는데 당시 갑오년 운수를 봤더니 제가 소설을 쓴다고 나오는 거예요. 또 제가 꿈 분석도 하거든요. 꿈은 가슴속 진면목을 많이 드러내요. 어느 날 꿈에 전봉준처럼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저에게 뭔가를 붙였는데 거기서 나비가 막 날아가는 거예요. 그 꿈을 분석해보니 제가 창작욕에 불타는 사람이 된 거였어요. 결국 그 꿈에 나타난 나비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돼요. 제 소설에, 우금치 전투 때 손병희가 어떤 아이한테 나비 노리개를 주는 내용이 나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죽고 그 넋이 손병희의 셋째 부인인 주옥경에게 가요. 전 서울, 경기 지역 그리고 손병희와 주옥경 여사에 대해 썼어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뀌어서 3.1운동까지 가는 내용을 다뤄요. 그리고 페미니즘 시각에서 쓰다 보니 위안부 얘기도 나와요. 나비 모티브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비 기금’으로까지 이어지죠.

 

이나 > 다들 전문 소설가는 아니신데, 글 쓰시는 데 애로사항은 없었나요?

 

참석자 모두 > 엄청 많았죠.

 

고은 > 제가 소설 쓰자고 권할 때, 다큐소설이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꼬드겼어요. 박맹수 선생님이 마침 일본 자료를 많이 갖고 계시고 그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거니까 그런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소설의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약간의 창작만 더하면 어렵지 않다, 그렇게 유혹했죠.

 

이나 > 저나 여기 계신 이영재 선생님과 같은 연구자들은 역사소설, 예컨대 『녹두장군』 같은 것을 읽으면 인용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이 동학다큐소설도 그런 면에서 연구자들이 읽으면 인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것 같아요. ‘주’가 달려 있으면 더 좋겠는데요.

 

고은 > 저는 주를 많이 달았어요.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저도 이 소설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예를 들면 연구자들이 심상훈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심상훈은 조병갑이 고부에서 유임할 때 도움을 주고, 또 해월을 잡아들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손병희가 “나를 한번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말한 대상도 심상훈이에요. 스토리텔링을 하다 보면 이렇게 쭉 이어지는 것이 보여요. 그리고 경상도 이야기가 동학 연구에서 그동안 너무 다루어지지 않았어요. 기포령이 9월에 나오는데 경상도는 8월에 벌써 다 초토화돼요. 일본이 해저를 통해 끌고 온 전선줄 때문에요. 부산에서부터 전선줄을 끌고 올라와서 낙동강 따라서 세워가면서 동학도하고 부딪히고 죽이고 생매장하고 그러면서 다 초토화돼요. 경상도 동학도들도 엄청 싸웠어요.

 

이영 > 동학에서 페미니즘 뿌리 찾기를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성과가 나왔는지요. 사실 동학의 여성관과 어린이관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한 것들이죠.

 

고은 > 저는 개인적으로 향아설위(벽이 아닌 나를 향해 제사를 지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제가 호주제 폐지운동을 열심히 했을 당시 제일 벽에 부딪혔던 게 부계혈통제에 대한 집착이었거든요. 호주제 폐지운동은 시스템을 고친 운동이었다면, 그 후 문화적인 것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중에 제일 뿌리 깊은 것이 제사예요. 제사는 남성중심의 세리머니고 여성을 도구로 수단화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호주제는 제도로서 공적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지만 제사는 각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개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내 제사 거부운동’을 하면서 내 조상이란 것은 남자 쪽만 아니라 남녀 양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양쪽으로 조상이 한없이 많아지니까 결국 나 자신을 소중히 하자, 그것이 바로 조상을 위하는 길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향아설위가 그것과 똑같은 얘기인 거예요. 이미 120년 전에 해월이 그 얘기를 했던 거예요. 죽은 조상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해 위패를 세워라, 나 자신을 존중해라, 그것이 해월의 마지막 설법이었다고 해요. 해월의 고갱이가 녹아있는 마지막 말인 거죠. 그래서, 동학이라는 게 정말 여성들이 찾는 진화한 사상을 갖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천도교 결혼식에서는 신랑신부가 동시에 입장하잖아요. 이것이 천도교 시작부터 행해졌어요. 그러니 얼마나 앞서간 거예요. 지금도 드센 남녀들이나 하는 행동으로 생각하는데. 그런데 20세기 초에 벌써 천도교는 그렇게 한 거죠.

 

이영 > 리산 선생님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잖아요. 동학에서 한국적 페미니즘의 가치를 발견하셨나요?

 

리산 > 저는 페미니즘을 소수자 관점주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해월 선생은 페미니즘을 넘어서 에코페미니즘을 주장하셨더라고요. 저는, 해월선생이 ‘땅에 침 뱉지 마라, 뜨거운 물 붓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는 그 감수성이 굉장히 놀라워요. 그런데 대학에서 실천여성학 가르치면서 동학 얘기를 하는 곳이 없어요. 늘 서구 얘기만 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없었겠냐구요. 평등사상이. 저는 한국 페미니즘의 기원이 동학사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밝혀내는 논문을 쓰는 게 올해 목표예요.

 

이영 > 동학이 삼대 교주로 넘어오면서 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단발령 때도 먼저 나서서 머리를 자르고, 일진회와도 결합이 되잖아요.

 

임최 > 그래서 친일파란 소리도 많이 듣죠. 친일적 요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 분들 중에 애국계몽운동 했던 분들이 많고 따라서 그건 결국 애국계몽운동이 갖는 한계이기도 해요. 교육을 많이 시키고 인재양성을 해서 일본을 앞질러 가야 한다, 일본에게 진 것은 우리 역량이 부족해서이고 따라서 역량을 길러야 한다 등. 그런데 어떤 천도교인 분은 친일을 가장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해요. ‘나는 친일파로 가장하고 내 일을 하겠다’라고요.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큰돈을 군관학교나 임정 건설에 희사해요. 결국 3.1운동 일으킨 것은 천도교 세력이었잖아요. 그때 쓰인 돈이 모두 천도교에서 나왔어요. 기독교도들도 돈 달라고 했어요. 그때 당시 5천원. 그 돈 안 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결국 그 돈을 다 주고 3.1운동 했죠. 사실 3.1운동 전부터 천도교 측은 거족적인 시위 계획을 계속 세웠어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친일적인 요소를 가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 항일운동을 한 거죠.

 

 

이영 > 동학과 관련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우셨을 것 같아요. 조사하다 발굴되는 것을 찾아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학에서 천도교로 넘어오는 과정, 친일 행위, 이런 것들과, 또 걸리는 것이 황해도 지역의 경우 동학에 적대적인 안중근을 다룰 수밖에 없으셨을 텐데, 안중근이 우리나라에서 갖고 있는 절대적 지위가 있잖아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셨는지.

 

박석 > 안중근은 양반이고 동학과 대척하죠. 포수들을 데리고 동학군과 싸워요. 그런데 제 고민은 안중근보다 김구였어요. 김구가 생각보다 동학과의 관련성이 별로 없어요. 기독교로 교육사업을 하다 상해로 넘어가죠. 저는 있는 사실 외에 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사실에 충실하게 썼어요. 제가 북한 편을 쓰면서 다뤄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관심을 더 깊게 갖지 않았어요. 이것도 또 파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었던 거죠. 저는 시기를 통시적으로 길게 잡고 대신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안중근과 동학군이 싸우는 장면도 나와요. 실제 기록을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 썼어요. 일본 기록과 안중근 전기와 기타 다른 자료를 가지고. 당시 안중근이 17살인가 그랬어요. 실제 상황을 그냥 있는 그대로 썼어요.

 

고은 > 그런데 동학접주 중에도 양반이 많아요. 경상도 동학접주가 쓴 일기를 보면, 접주의 70퍼센트가 양반이에요. 이것을 보면 당시 양반들 중에서도 유교 가지고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하리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거죠. 재산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동학에 경도된 경우가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그동안 외면되어 왔죠.

 

박석 > 동학농민혁명은 지금으로 치면 반체제 지식인과 농민ㆍ노동자와의 결합으로 일어난 거예요. 그런 게 현대사에서처럼 예전에도 있었던 거죠. 양반들이 참여하지 않았으면 혁명이 조직적으로 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임최 > 전봉준도 훈장 출신이잖아요.

 

변김 > 목천의 대접주는 이희인이란 사람인데 세종대왕의 후손이에요. 대단히 뼈대 있는, 진골 중의 진골 집안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동학을 한 거죠. 거기다 재산도 많아요. 소위 ‘끈 떨어진’ 양반이나, 아니면 서얼처럼 능력은 출중한데 신분적 한계 때문에 권력 진출을 못한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도 우리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지식인들의 고민을 똑같이 한 거죠. 반면 윤영렬, 윤웅렬 형제 같은 사람들도 있어요. 윤웅렬의 아들이 바로 윤치호예요. 윤웅렬이 윤치호에게 일본에 가서 학문하고 오라고 하잖아요. 당시는 인사 적체가 심각했고, 그래서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죠. 윤영렬은 학식이 출중하지는 않았으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커서 그 방도를 찾은 게 동학도들을 제거하고 공을 세우는 거였죠. 이것이 변혁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지식인 계급의 모습인 것 같아요.

 

이영 > 소설에는 인물들이 다 실명으로 등장하죠?

 

변김 > 전 실은 그것이 고민이에요. 말씀드린 윤씨 집안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반대로, 김해 김씨 집안처럼 삼대가 같이 동학을 하다가 나중에 한날한시에 몰락한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그 집의 경우에는 관련 사료가 하나도 없어요. 향토사학자나 지역 주민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그 집안에서 굉장히 쉬쉬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너무 많아요.

 

고은 > 동학 사건에 대해 사사절 시와 노래로 후대에 남기고 싶어 한 흔적들이 있어요. “개남아 개남아 왜 죽었니” 등. 경상도에도 “하배가 이하배가 왜왔니 조동아 홍조동아 왜 죽였니” 이런 노래가 있다는 거예요. 한 노인의 증언인데, 자기 어렸을 때 동네 골목에서 꼬마들이 그 노래를 불렀대요. 이건 틀림없이 그 사람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여성들이 그렇게 노래로 만들어서 아이들한테 가르친 거죠. 그 사실이 잊혀질까봐.

 

변김 > 강창일 의원에 의하면 이런 노래를 구술로 정리해 책을 낸 분이 있는데, 그분은 일제 때 부친이 친일을 해서 본인이 그것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했다고 해요. 그리고 저는 또 하나 고민되는 것이,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예요. 강창일 의원과 박맹수 교수님도 해주신 얘기인데, 전봉준이 붙잡혔을 때 일본 막부 세력이 와서 ‘당신을 꺼내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막부 세력과 메이지 세력이 다르고, 그 세력 내에서도 여러 다양한 부류가 있어요. 그래서 일제가 조선을 강점했을 당시 주요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 따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행정체계로 봤을 때 당시 국방부장관, 문화부장관이 다 다른 계열인 거예요. 이런 것들을 분석해내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이나 > 일본인들이 왜 전봉준을 찾아왔다고 생각하세요?

 

변김 > 당시 막부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메이지 세력에 의한 일본의 근대화는 결국 동아시아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이것은 또 아시아의 본래 전통을 다 무시하는 거예요. 강창일 의원에 의하면 그런 이유로 그들은 전봉준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대요.

 

이영 > 한박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남편 분이 동학 구전들을 수집할 때 같이 다녔다고 하셨잖아요. 구술을 해주는 분들은 동학도의 손자녀뻘이 되나요?

 

한박 > 그런 셈이죠. 마을에 가면 가장 나이 드신 분들이 그 동네에서 전해들은 얘기를 해주세요. 그런데 2000년대 초반에만 하더라도 동학에 대해서는 좀처럼 얘기를 안 하셨대요. 동학혁명 때 너무 많이 피를 봤고 또 한국전쟁 때에도 좌우대립하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얘기를 안 하려는 거죠.

저는 대둔산 얘기를 주로 썼는데, 특히 전쟁의 후방에서 활동한 여성들 얘기를 썼어요. 후방에서 사람들이 먹고 자고 하는 얘기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기록에 남기지 않아요. 그러나 구전되는 얘기들은 결국 후방에 있는 마을의 얘기라서 그런 일상의 얘기들이 남아 전해져요.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 날랐다거나 소를 잡았던 얘기 등. 예를 들어 ‘시루떡 마을’이라고 있는데 이 마을은 동학혁명 때 시루떡을 만들어 날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어요.

그리고 연산 전투가 3년 전에 일본 교수에 의해 재조명됐어요. 기존의 틀에 박힌 사고는 우금치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군이 패배했다는 것인데 연산·대둔산 전투를 보면 그 다음 해에도 전투가 계속 이어져요. 동학군은 도망간 게 아니라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대둔산으로 간 거예요. 대둔산에 있으면서도 고위관리 목을 치거나 하면서 계속 투쟁을 해요. 저는 ‘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실패란 없다고 봐요. 이때 동학의 힘이 이후 3.1운동을 일으키고 임정을 세우게 하고 해방을 맞이한 후 우리 힘으로 인민위원회를 만들게 하고 또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거죠.

 

이나 > 동학도의 후손이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면서요.

 

고은 > 예를 들면, 성두환의 손자 성민헌이 서북청년단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빨치산이 돼요. 동학도의 자식과 손자들이 아버지, 할아버지 죽음을 보고 당연히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겠어요?

 

이나 > 그럼 동학혁명이 실패해서 사라진 게 아니라 그 평등정신을 이은 다른 저항사상으로 계속 이어진 거네요. 또 그것이 반드시 애국계몽운동 계통으로만 간 게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화된 거고요.

 

고은 > 여운형의 할아버지도 동학도이고, 또 한용운이 스님이 된 이유가 자기 아버지가 관군으로 동학도를 토벌하는 것을 보고 그 충격으로 속죄를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또 하고 싶은 얘기가, 일부 학자들은 동학도들 때문에 일본군이 들어왔고 그래서 우리가 식민지가 되었다고 하면서 동학 핑계를 대는데, 알고 보면 일본은 1888년, 1889년에 이미 무라다 연발총을 다 만들었고 20만분의 1 지도를 만드는 등 엄청난 전쟁 준비를 했어요. 그런 신식 무기와 기술을 제일 먼저 동학군을 상대로 실험한 거죠. 그것이 이어져 1945년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아시아에서 2천만 명을 죽인 결과를 낳은 거예요. 저는 동학 소설을 쓰면서 전쟁의 중심에는 무기가 있다고 결론지었어요. 현 시대의 전쟁의 핵심도 무기예요. 무기를 중심으로 한 산업이 전쟁의 원인인 거죠. 그것 때문에 한국이 아직 분단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동학군의 개벽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거죠.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렇게 동학소설을 쓰고, 또 오늘 해외 여성들이 북에서 내려오고 우리가 남에서 올라가 통일의 발자취를 새로 연 것처럼, 우리 여성들이 개벽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합니다.

 

이나 > 고은 선생님의 마무리 발언이 너무 감동적입니다.

 

이영 > 중요한 질문이 남았어요. 책은 언제 출판되나요?

 

고은 > 현재 소셜 펀딩 사이트 오마이컴퍼니를 통해 펀딩을 진행하고 있어요. 7월 정도에 목표액이 채워지면 그때까지 30% 정도 소설 내용 공개하는 것도 끝내고 가을에 출판을 시작할 예정이에요. 올 겨울 안에 13권이 다 나옵니다. ‘여성동학다큐소설’ 웹페이지(www.donghakstory.net)에 소설 내용과 후원 방법이 나와 있어요. 우리 책에는 그동안 감춰졌던 한국근현대사의 뿌리가 다 나올 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도 담겨 있어요. 따라서 관심 갖는 독자들이 많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나 > 아무쪼록 이렇게 좋은 책이 널리 읽히길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모심과 살림』 5호(2015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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